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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그 너머에는-101화 (101/140)

101화. 천덕꾸러기 (4)

마당에 도착하자 진혁이 희나의 손을 꼭 잡아 끈다.

들어가서 바보 아저씨나 놀려 먹어야지- 하고 생각하며 희나가 즐겁게 그를 따라 들어가려는데 뒤에서 희원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울렸다.

“야, 어디 가?”

“……뭐?”

“같이 가. 내가 어린이집이 어딘지 어떻게 알아?”

자신만만하게 데려다준다고 해놓고 당당하게 말한다.

진혁이 마루에서 다시 내려오려고 하자 희원이 만류했다.

“형은 걱정 말고 기다려주세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니가 알아서 한다며 나는 왜 끌고 가.”

“시끄러워. 빨리 오기나 해.”

말하고 희원은 미래를 안은 채 먼저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어처구니없어진 희나가 잠시 뒷모습을 바라보았지만 방법이 없어 결국 희원의 뒤를 따라갔다.

툴툴거리며 따라간 희나는 희원이 문을 열고 있는 차를 보고 깜짝 놀랐다. 시골 과수원 마당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새하얀 아우디 컨버터블이 떡하니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너 곱창집 알바 주제에 무슨 이런 차를 모냐? 쓸데없이 차 같은 데 돈 쓰니까 남한테 빌붙기나 하지!”

“아, 잔소리하지 마-. 내가 뭔 돈이 있다고 이런 차를 몰아.”

“그럼 이 차는 뭐야?”

“현상이 형이 심부름 시키려고 리스해준 거야. 뭐 일이 이렇게 됐으니 좀 있으면 회수해 가겠지.”

그러면서 희원이 차에 올라탔다. 스포츠카에 올라탄 미래의 눈이 기쁜 듯 반짝반짝 빛난다. 눈이 완전히 하트로 변한 걸 보니 미래에게 희원은 백마 탄 왕자님급의 멋진 남자일 것이다.

“미래는 지금이 제일 좋아. 기분 최강, 최강!”

“이러다 얼굴밝힘증에 된장녀로 자라면 어쩌지?”

“그 형 밑에서? 힘들지 않을까?”

희나가 화려한 걸 좋아하는 미래의 미래가 우려스러워 한마디 하자 희원이 픽 웃었다.

말하는 걸 들으면 들을수록 이상할 정도로 진혁에 대한 평가가 후하다.

희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수상한 표정으로 물었다.

“너 선생님 완전 싫어하더니 왜 이제 와서 친한 척이야?”

“그땐 어떤 사람인지 몰랐으니까 그러지.”

“본 지 며칠이나 됐다고. 이젠 아냐?”

“그러는 넌 며칠 사귀었다고 그렇게 죽고 못 살았냐?”

정곡을 찔리자 할 말이 없어진 희나가 입술을 비죽거리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어쨌든 선생님이랑 둘이 있을 때 방해하지 마, 바보야!”

“방해한 적 없거든? 너야말로 형 일하는 데 방해하지 마.”

“니가 무슨 상관이야? 열 받아, 진짜!”

희나가 언성을 높이자 품에 안겨 있던 미래가 소매를 잡아당기면서 애절하게 말한다.

“언니이- 화내지 마-. 응?”

“미래한테 화내는 거 아냐-. 미래 예뻐.”

“아니, 언니. 미래한테 화내고 오빠한테는 화내지 마.”

완전히 희원에게 푹 빠져버린 미래의 제안에 어처구니없어진 희나는 입이 벌어졌고 희원은 흐뭇하게 웃었다.

“대체 애를 뭘로 이렇게 구워삶았냐?”

“타고난 남성의 매력이지.”

브이를 그리고 있는 희원에게 미래가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오빠, 오빠, 주말에 한 거 또 해줘! 응?”

“그래그래.”

“주말에 한 게 뭔데?”

묻는 도중 질문에 대한 답을 깨달은 희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희원이 감속하는 것과 동시에 컨버터블의 탑이 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래는 탄성을 지르며 눈을 반짝반짝 빛냈지만 희나는 조금도 신나지 않았다. 충남 시골길에서 오픈카를 타고 어린이집에 가다니, 언밸런스가 이만저만이 아닌 것이다.

다시 닫으라고 한마디 날릴 새도 없이 벌써 어린이집 건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언제나처럼 놀이터에 나와서 아이들과 놀아주고 있는 이 마을 먹이 사슬 최강자들이 새하얀 스포츠카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이 보인다.

안 그래도 꽃뱀이니 뭐니 말이 많은데 거창한 등장이 민망해서 희나가 고개를 숙이는데 희원의 중얼거림이 귀에 들어왔다.

“뭐야, 젊은 여자도 많네?”

그 말을 듣는 순간 여태까지 잊고 있던 뭔가가 떠오른 희나가 불쑥 고개를 들고 얄상하게 생긴 희원의 예쁘장한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 녀석 꼴 같지 않게 서울에 살 때도 인기가 꽤 많았었지?

희나는 희원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조그마한 소리로 물었다.

“야, 저 중에 누가 제일 예쁜 거 같냐?”

“음, 글쎄. 저 여자?”

희원이 가볍게 가리킨 곳에는 당연하게도 희나의 최대 라이벌인 단정한 여선생이 서 있었다.

서로 마음을 확인한 이상 진혁이 바람을 피우거나 할 사람이 아니란 건 희나도 충분히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다른 여자가 진혁한테 잘해주면서 살살거리는 거 자체가 열 받던 참이었다.

침을 꿀꺽 삼키며 희나는 바깥의 동정을 살폈다. 차가 멈추고 희원이 내려서 미래를 받아 든 채 희나보다 한 발 앞서서 어린이집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온몸으로 도시에서 온 남자라고 외치는 모습을 한 희원이 들어서자 자연히 폭발적인 시선이 쏠렸다. 슬쩍 보아도 표정들이 진혁을 볼 때랑 비슷하게 발그레해 보인다.

완전히 의기양양한 걸음걸이의 미래를 들여보내고 여선생들의 질문 공세를 받고 있는 희원을 보며 이거다- 하고 희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천덕꾸러기 녀석도 잘 생각해 적재적소에 배치하면 쓸데가 있기 마련이다.

희나가 흐뭇하게 희원을 쳐다보고 있을 때 주머니에 넣어 둔 휴대폰이 울렸다.

「빨리 와, 희나야.」

진혁에게서 온 메시지를 본 희나는 입가를 올리며 헤헤 웃었다. 어린 조카의 마음을 뺏은 남자의 등장에 마음이 허해진 모양이다.

희원이 미래랑 놀아주고 여선생들의 시선도 끌어주고, 쓸쓸해진 진혁이 다정하게 군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아닌가.

빨리 진혁이 보고 싶어진 희나는 헤실헤실 웃으며 희원의 옆으로 다가가 팔을 끌었다.

“왜?”

“나 다리 아파. 가자, 얼른.”

별생각 없이 핑계를 대던 희나는 말하자마자 아차 했다. 예전의 데자뷔가 느껴진 것이다.

또다시 반복된 상황을 보고 어린이집 여선생들이 또 심기가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땐 분명히 의도적으로 여우 짓한 게 맞지만 이번은 다른데.

남동생이라는 걸 알려야 하나, 희나가 허둥허둥하고 있는데 희원이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뭐해? 다리 아프다며. 빨리 가자.”

“어? 어, 그러니까 그게…….”

“빨리 와. 그리고 가면 형 따라가지 말고 내 옆에 붙어 있어.”

희원은 진혁이랑 둘이서만 사이좋은 걸 질투해서 한 말이겠지만 더 안 좋아지는 표정들을 보아하니 오해가 격화된 것 같다. 그러나 오해를 풀 새도 없이 희나는 희원에게 끌려서 차로 돌아와야 했다.

잠시 난감했지만 뭐 시간 지나면 자연스레 알게 되겠거니 하고 희나는 속 편히 잊어버렸다.

안전벨트를 매면서 희나는 희원에게 물었다.

“너 한동안 여기 있을 거냐?”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참견하지 말라니까?”

“시끄러. 가라고 하려는 거 아니야. 그냥 여기 있는 동안 네가 나랑 같이 미래 어린이집에 데려다주자고.”

“빨랑 서울 올라가라고 난리 부리더니 왜 생각이 바뀌었냐?”

“시끄러. 하자면 해.”

희원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으나 별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이 나쁜 남매는 그대로 입을 다문 채 희원은 노래를 흥얼거렸고 희나는 진혁과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과수원으로 돌아왔다.

“잘 데려다주고 왔어?”

희나가 약국으로 돌아가자 뭔가를 정리하고 있던 진혁이 미소를 지었다.

희나는 진혁의 옆으로 간이 의자를 끌고 가 앉으며 발랄하게 물었다.

“아직 시무룩해요?”

“아니. 그치만 언젠가 미래가 다 크면 정말 떠나겠지?”

키우는 사이 진짜 딸 같은 기분이 드는 모양이다. 씁쓸해 보이는 진혁의 어깨에 얼굴을 비비면서 희나는 애교를 부렸다.

“미래 가도 내가 있잖아요.”

희나의 애교에 축 처져 있던 진혁의 입꼬리가 올라가며 픽 웃음소리를 냈다. 진혁이 희나를 끌어당겨 품에 폭 끌어안았다.

“헤헤, 내가 옆에 있으니까 좋죠?”

진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가만히 희나를 내려다보다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렇게 좋은데 왜 진작 이러지 못했을까 싶네.”

“다 선생님 때문이죠.”

“나 때문이야?”

진혁이 희나의 볼을 꼬집으며 되물었다.

다시 다정한 눈빛으로 희나를 보다가 키스를 하려는 듯 다가오던 진혁이 입술이 닿기 직전에 멈추며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약국에 들어와 있으면 CCTV 꺼지도록 설정을 바꿔야겠어.”

“되도록 빨리 만들어요.”

기분 좋게 달아오르던 분위기가 아쉬워서 희나는 볼이 발그레해진 채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팔로 몸을 꼭 끌어안고 늘 하던 대로 진혁의 향기를 흡- 하고 깊이 들이마셨다.

“안 되겠다. 잠깐 나갔다 오자.”

잠시 움찔한 진혁이 그녀의 팔을 끌자 희나는 헤헤 웃으며 못 이긴 척 따라 나갔다. 그리고 5분쯤 후 두 사람은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사이좋게 손을 맞잡은 채 어기적어기적 약국으로 들어왔다.

발그레해진 뺨을 손으로 꾹꾹 누르며 희나는 어색하게 평범한 화제를 입에 올렸다.

“그러고 보니 아르바이트는 언제부터 해도 돼요?”

“언제 언제 할 생각이야? 학기 중이라 평일은 아무래도 힘들겠지?”

“괜찮으면 틈틈이라도 매일 하고 싶은데요.”

돈은 그렇게 급하진 않지만 매일 진혁을 보러 오고 싶은 욕심에 희나는 의욕적으로 말했다. 진혁도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조용히 물었다.

“주말에도 일할 수 있어?”

“이제 주말에 서울 안 가니까 완전 한가해요.”

“그러면 이번 주말에 여기로 와줄래? 주말에 전체적으로 설명하고 나서 바로 시작하는 걸로 하자.”

희나는 신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 텅 빈 약국을 흘끔흘끔 쳐다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정말 아르바이트해도 괜찮은 거 맞아요? 지금도 전혀 손님 안 오는데.”

“막상 시작하면 굉장히 바쁠걸. 한동안 블루베리 수확이랑 학회 때문에 꽤 쉬어서.”

“쉬어요? 약국 문 맨날 열려 있던데.”

그때 딸랑- 하는 벨 소리와 함께 약국 문이 열렸다. 손님인가 하고 밝은 얼굴로 돌아보던 희나는 들어선 얼굴을 보고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뭐예요. 왜 앞문으로 들어와요?”

들어선 것은 승수였다. 카운터 뒤편의 문을 통해 과수원으로 바로 들어가려는 모양이었다.

까칠하게 쏘아붙인 희나를 보면서 평소처럼 맞받아치는 대신 그는 느물느물하게 웃었다.

“잠깐 요 앞에 나갔다 오느라고.”

히죽거리는 모양새가 어째 찜찜해서 희나는 커다란 눈으로 승수를 빤히 쳐다보았다.

문을 나가기 직전에 그가 희나를 돌아보며 약을 올렸다.

“야- 꽃뱀, 이제는 영계 제비까지 데려다 진혁이네 집 안에 들어앉혔다고 동네에 소문이 자자하더라?”

“아, 진짜! 누가 자꾸 그딴 소문 내는 거야!”

희나가 소문의 시발점은 알 수 없으나 소문을 퍼뜨리는 주범인 승수를 향해 종이 뭉치를 던졌지만 승수는 낄낄거리면서 뒷문을 통해 과수원 쪽으로 사라졌다.

희나는 볼을 잔뜩 부풀린 채 의자에 주저앉아 씩씩거렸다.

“이이익! 자꾸 이런 소문 돌고 짜증 나요! 동네에 꽃뱀 아니라고 현수막이라도 붙이든가 해야지!”

“너무 그렇게 신경 쓸 필요 없어.”

“어떻게 신경 안 써요-! 선생님 어머니도 들으실 거고, 그리고 또…… 힝. 어쨌든!”

“걱정 마. 아마도 주말이 되면 다 사그라들 거야.”

“주말에요? 주말에 뭐 하는데요?”

그러자 진혁이 대답 대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희나가 의미를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그는 “그때 되면 알아.” 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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