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단, 그 너머에는-100화 (100/140)

100화. 천덕꾸러기 (3)

“너 닮았잖아.”

안경 너머의 눈이 부드럽게 휘면서 가까이에서 다정하게 웃는다.

희나는 얼굴이 발그레해졌으면서도 고개를 픽 돌리며 까칠하게 말했다.

“닮긴 뭐가 닮아요.”

“하는 거도 너 닮았어. 막무가내로 찾아와서 재워달라고 하는 것까지.”

“이…… 내가 언제 그랬어요!”

“그랬잖아.”

뭐라고 부정하고 싶었지만 고등학교 때 자기가 했던 짓이다.

할 말이 없어진 희나는 입만 뻐끔거리다가 몸을 툭 부딪치며 새침하게 물었다.

“그래서 싫었어요?”

“싫진 않았는데…… 힘들었지.”

“힘들어요? 뭐가요?”

“……몰라도 돼, 바보야.”

진혁은 카운터 위에 놓인 희나의 손을 잡고 살짝 깨물었다. 그리고 캐어물으려는 희나에게 단정한 얼굴을 살짝 기울이면서 화제를 전환했다.

“그나저나 무슨 일 있어? 어제 목소리가 안 좋던데.”

“아, 그냥요. 아르바이트 자리가 너무 없어서요.”

말이 나오자 희나는 바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훈과 일을 못 하게 되었으니 아르바이트라도 해야겠는데 예상은 했지만 역시 마땅한 곳이 전혀 없었다. 당장 돈이 부족할 일은 없었지만 성격상 아무것도 안 하고 손 놓고 있을 수가 없다.

“일하려고? 그럼 우리 집에서 일할래?”

“……시에서 돈 받고 실업 청년 구제 사업이라도 하는 거예요?”

바로 권해오는 말에 희나가 눈을 가늘게 뜨고 반문하자 진혁이 다시 웃는다. 희나는 고개를 저으며 진혁의 어깨에 머리를 톡 기댔다.

“선생님한테 폐 끼치는 건 싫어요. 나 솔직히 과수원에서 큰 도움 안 되잖아요.”

“충분히 도움 돼. 거기다 미래도 봐주니까…….”

“미래는 내가 좋아서 봐주는 거예요. 미래 봐주는 걸로 돈 안 받을 거예요.”

희나는 일부러 딱 잘라 말했다.

진혁은 그런 그녀를 보고 잠시 뭔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볼펜으로 카운터를 살짝 치며 말했다.

“그럼 여기 약국 아르바이트 하면 어때?”

“약국요?”

“그래. 매번 자리 비우고 왔다 갔다 한다고 말도 많고. 상주할 아르바이트 뽑을까 생각 중이었어.”

“그거 좋긴 하지만…….”

희나는 기대고 있던 머리를 들고 진혁을 쳐다보며 여태까지 아주 궁금했던 사실을 물었다.

“이 약국이 사람 쓸 정도로 돈이 되긴 해요?”

진지하게 묻자 진혁이 다시 쿡쿡 웃었다.

“음, 아마도. 해보면 생각보단 훨씬 할 일 많을 거야.”

그렇게 말해도 희나는 의심스러웠다. 전에 뻔질나게 드나들 때 관찰한 바로는 진혁을 보러 오는 여자들이나 좀 되지 그 외에는 손님이 거의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손님이라 봐야 선생님 보러 오는 몇 명 빼면 하루에 열 명 정도 아니에요?”

“알고 나면 좀 놀랄걸?”

픽 웃으면서 하는 의미심장한 말투에 희나는 의아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 뭔가 있어서 하는 말일까, 그냥 도움을 주려고 허세를 부리는 걸까. 속을 모르겠어서 눈을 깜빡거리며 살펴보았지만 진혁은 그런 희나를 귀엽다는 듯 쳐다보며 빙그레 웃을 뿐이다.

“어쨌든 해볼래?”

“뭐…… 정말 도움이 된다면 나야 좋지만요.”

돈 안 받아도 진혁의 집에 계속 와 있을 핑계가 생기는 것만으로 충분히 좋기에 희나도 구미가 당겼다.

진혁은 “좋아, 그럼 채용.” 하고 바로 결정하더니 물었다.

“컴퓨터는 좀 다룰 줄 알아? 엑셀이라든가.”

희나는 곧장 고개를 저었다. 집에 컴퓨터도 없었고 PC방에는 잠자러 가는 거 외에는 간 적 없다. 학교 과제도 친구에게 도움을 받지 않으면 못 할 정도로 컴맹이라 이 시대의 보기 드문 독수리 타법을 사용하는 마당에 엑셀을 사용할 수 있을 리가.

“그럼 좀 가르쳐줘야겠네.”

그러면서 진혁은 가볍게 설명하려는 듯 엑셀을 구동시켰다. 돈 버는 일에는 몹시 철저한 희나는 곧장 옆에 앉아 입을 헤 벌린 채 진혁의 마우스 커서에 집중했다.

열심히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있는데 갑자기 볼이 따끈따끈하다. 쳐다보고서야 진혁이 볼에 뽀뽀를 했다는 것을 깨달은 희나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뭐예요, 갑자기!”

“그냥, 귀여워서.”

희나는 빨개졌는데 진혁은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그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태도는 5년 전에도 본 적이 있다. 경험의 차이가 이런 데서 드러나는 것 같아 희나는 뺨을 문지르며 새침하게 말했다.

“선생님, 사귀면 성격이 변하네요.”

“너도 사귀기 전이랑 다른데.”

“나 달라요?”

아무래도 애교를 좀 부리긴 한 거 같아서 흐뭇하게 물어보던 희나는 이어진 진혁의 말에 풀이 확 죽었다.

“달려들질 않네? 그렇게 달라붙더니.”

“내가 언제 달려들었어요!”

“하던 대로 해봐-. 어떻게 되나.”

딴사람 같은 느물느물한 말투에 희나는 입을 떡 벌렸다. 진혁이 빼고 피할 때는 달려드는 것에 부담이 없었는데, 정말 하던 대로 하면 어떻게 될지 불안해서 할 수가 없었다.

완전히 홍당무가 된 채로 입만 뻐끔거리던 희나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선생님 연애 많이 했죠?”

“글쎄?”

회피하는 대답에 발끈한 희나가 뭐라 한마디 하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진혁이 그녀의 몸을 당겨 입을 맞춰왔기 때문이다.

금요일에도 그렇게 몇 번이나 했고, 토요일에도 했는데, 질리지도 않고 너무 좋다.

미운 말을 하려던 희나의 입이 달콤하게 열려 진혁을 받아들였다. 혀가 얽히고 호흡이 깊게 교환되는 농염한 키스에 점점 빠져들던 희나가 진혁의 목을 꼭 안았다.

그리고 진혁이 안겨 오는 희나의 허리를 감으며 살짝 카운터로 기대게 몰아붙였을 때였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약국 전화가 울렸다. 이성이 날아가기 직전이었던 두 사람은 현실로 돌아와 화들짝 놀랐다.

입술을 살짝 떼어낸 진혁이 희나를 안은 채 어색한 손놀림으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침부터 뜨거운 건 부럽다만, 더 깊이 돌입하기 전에 여기서 다 보인다는 걸 알려줘야 될 거 같아서.]

승수의 목소리를 들은 희나의 얼굴이 그야말로 홍당무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이 약국에 설치된 CCTV는 하우스로 연결되어 있었다.

[하우스 사람들이 니들 때문에 다들 불끈불끈하고 있다. 수위 올릴 거면 19금 마크라도 붙여줘라.]

“그, 그냥 뽀뽀 좀 한 거예요!”

희나가 빽 소리를 질렀다.

진혁은 혀를 살짝 내밀며 “깜빡했네.” 하고 중얼거렸다.

놀려대는 승수의 전화를 끊고 두 사람이 옷매무새를 가다듬자마자 마침 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들어온 희원과 미래를 보며 희나는 또 하나 잊고 있었던 존재들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아이스크림 사러 바로 옆 편의점 갔는데 엄청 오래 걸렸다.

“아빠, 아빠.”

미래가 진혁을 부르며 후다닥 뛰어오더니 카운터 앞의 의자로 기어 올라가서 안아달라는 듯 팔을 내밀었다. 그러고는 진혁이 안아 올리자 입술을 쭉 내밀면서 말했다.

“미래도, 미래도- 츄!”

“……어?”

“언니만 뽀뽀해주고! 미래도 할래!”

봤구나! 희나는 순식간에 얼굴이 새빨개져서 희원을 휙 돌아보았다. 그러자 희원이 민망해하는 표정으로 딴 데를 보면서 말했다.

“난 분명히 눈 가렸는데 이미 봤더라고.”

“…….”

“그래도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때맞춰 들어온 것이 아니라 키스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들어온 모양이었다. 키스로 부끄러워할 생각은 없었지만 남동생이 다 봤다고 생각하니 괜스레 민망하다.

난감해하는 희나와 달리 진혁은 태연한 얼굴로 미래의 뺨에 뽀뽀를 해 주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입술에 뽀뽀는 미래 커서, 미래가 좋아하는 사람이랑 해야지.”

“좋아하는 사람이랑 해?”

“응, 그런 거야.”

“아빠, 언니 좋아해?”

“응, 좋아해.”

미래는 헤- 하고 입을 벌리더니 동그란 눈으로 발그레해진 희나를 보았다.

또 ‘아빠는 어린이집 선생님 거야!’라고 화낼까 봐 희나가 긴장하는데 미래가 곧 배시시 웃었다. 그리고 진혁의 품에서 내려와 희나의 몸에 폭삭 안기더니 귀엽게 말했다.

“언니, 아빠 좋아하는데 잘됐네! 아빠도 언니 좋아한대!”

“응. 고마워, 미래야.”

그러고는 미래가 헤헤 웃으면서 고개를 돌려 희원을 바라보더니 진혁에게 했던 것처럼 안아달라는 듯 팔을 내밀었다. 희원이 미래를 안아 올려 주자 곧 약국에 쪼오오옥- 하는 찰진 접촉 음이 울렸다.

희원의 입술에 아주 찐-한 뽀뽀를 날린 미래가 반짝반짝 웃으며 눈이 휘둥그레진 세 사람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미래는 오빠가 좋아-. 크면 오빠랑 결혼할 거야.”

미래의 낭랑한 목소리에 두 사람이 입을 헤 벌린 채 멍하니 말을 잃은 가운데 희원의 느물느물한 목소리만이 약국에 울렸다.

“육탄 돌격으로 결혼 신청을 하다니. 적극적인 점은 맘에 드네.”

희원은 별것 아닌 듯 히죽히죽 웃으며 농담을 던졌으나 진혁은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미래가 벌써 남자를…….”

“여섯 살짜리 애랑 스물두 살짜리 애랑 진지하게 고민하지 말아줄래요?”

희나가 진혁을 쿡 찌르면서 말했다. 하지만 미래는 충격 받은 진혁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밝은 목소리로 커다랗게 물었다.

“오빠, 그러면 나랑 결혼할 거야?”

“그치만 난 연하는 별론데.”

고개를 휘휘 저으며 희원이 거절하자 뒤쪽에서 진혁이 재차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미래가 벌써 첫 실연을…….”이라고 중얼거렸다. 딸도 아직 없는데 중증 딸 바보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그때 미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희원에게 물었다.

“연하가 뭔데?”

“나이 어린 거 말야. 오빤 누나 취향이라 연상이 좋아.”

“아니, 네 그 취향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거든? 애한테 진지하게 말하지 말라고!”

알고 싶지 않던 남동생의 연상 취향을 알아버린 희나가 희원의 등짝을 후려쳤다.

차였어도 의지가 강한 미래는 굴하지 않은 채 희원의 옷자락을 잡고 졸랐다.

“미래 지금은 어리지만 커서 연상 할게. 나랑 결혼하자.”

“넌 연상이 될 수 없어.”

너무 이른 나이에 불가능이란 단어를 사전에 추가할 필요는 없다. 희나가 희원의 팔에서 미래를 빼앗아 안으며 쏘아붙였다.

“시끄러워-! 애한테 쓸데없는 말 좀 그만해! 연상처럼 크면 되지.”

“언니, 연상이 뭐야?”

“음, 나이가 더 많은 사람을 연상이라고 해-. 그러니까 오빠보다 더 나이 많은 거.”

“그럼 어떻게 하면 연상으로 커?”

연상처럼 크려면 그냥 겉늙는 거밖에 생각이 안 난다.

아이의 질문에 뭐라고 설명할지 대답이 궁색해진 희나가 어물어물거리고 있자 미래가 입술을 쭉 내밀더니 다시 희원의 팔을 붙잡고 졸라댔다.

“오빠아, 나랑 결혼하자. 키도 완전 크고 예뻐질게.”

“흠. 이뻐진다고 장담할 수 있어?”

“응. 아빠랑 희나 언니랑 오빠랑 있으니까 미래도 예뻐져.”

예쁜 사람이랑 있으면 예뻐진다는 평소의 지론에 입각한 장담이었다. 그러나 미래의 신념을 모르는 희원은 의미를 모르겠단 표정을 짓다가 희나를 힐끔 보고는 말했다.

“뭔지 모르겠지만 저런 불여시 같은 얼굴로는 크지 마라.”

“뭐? 나도 니 얼굴 완전 밥맛이거든?”

괜히 가만히 있다가 불똥이 튀자 희나가 까칠하게 쏘아붙었다. 서로 눈이 쭉 찢어졌다느니 콧대가 보잘것없다느니 하며 투닥대기 시작한 쏙 빼닮은 남매는 진혁의 “그만해.”란 말 한마디에 바로 멈췄다.

“미래야, 결혼은 나중에 생각하고 이제 슬슬 어린이집 갈 준비 하자.”

그리고 이어진 진혁의 말은 상황 정리보다 미래의 머리에서 결혼 생각을 지워내려는 헛된 노력처럼 보였다.

미래는 진혁의 말을 듣고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으나 곧 희원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오빠도 같이 가. 응?”

“같이? 어린이집?”

“응, 같이 가. 오빠 같이 가.”

희원은 별로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으나 미래는 연신 졸라댔다. 희원이 난처해하지 않도록 진혁이 미래를 받아 들며 달랬다.

“미래야, 오빠는 바빠. 내가 데려다줄게.”

“싫어. 오빠랑 갈 거야!”

“……아빠랑 가기 싫어?”

“아빠는 맨날맨날 같이 있으니까 괜찮아. 여기 남아서 희나 언니랑 뽀뽀해.”

미래가 고개를 휘휘 저으며 희나를 진혁 쪽으로 잡아당겼다. 앞 말에 충격을 받은 진혁은 뒷말이 들리지 않는 듯 굳어버렸다.

“오빠가 나 데려다줘, 아빠는 일하게.”

“그래. 그럼 형은 일 보세요. 내가 데려다줄게요.”

희원이 진혁에게서 다시 미래를 받아 들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헤헤 웃는 얼굴이 진혁에게 잘 보이려고 그러는 것 같은데 아무리 봐도 역효과밖에 나지 않을 것 같다.

희나가 한쪽 눈썹을 치켜들고 물었다.

“어떻게 데려다주게. 너 차 있어?”

“일단은 있어.”

차도 없는 녀석이 나서냐고 비웃으려고 했는데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희나가 놀란 표정을 짓자 희원이 대체 동생에게 얼마나 관심이 없는 거냐며 핀잔을 주었다.

어쨌든 오픈을 마친 약국은 언제나처럼 비워둔 채 세 사람 모두 집으로 돌아왔다. 미래는 돌아오는 내내 희원의 품에 폭 안겨서 재잘재잘 신나게 수다를 떨었다.

“오빠, 미래 백 밤 자고 나서 크면 결혼해?”

“감옥에 신혼집 차리고 싶진 않은데.”

“감옥?”

“어쨌든 안 돼. 더 커야 돼, 훨씬 더.”

“미래는 결혼 빨리 하고 싶은데.”

“빠르게 하면 열여섯 살 정도려나. 부모님 허락만 받으면…….”

“절대 허락 안 해.”

대충대충 대답하고 있는 희원과의 대화를 듣던 진혁이 중간에 나직하게 끼어들었다. 다정한 얼굴이 평소보다 훨씬 딱딱하고 보기 드물게 얼음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있는 흰 얼굴이 좀 삐진 것처럼 보이는 것이 너무 재미있어서 희나가 실실 웃으며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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