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천덕꾸러기 (3)
“넌 뭐라고 여기 와서 앉아 있어! 대체 언제 온 거야!”
“어제 와서 잤는데.”
“아니, 언제 봤다고 남의 집에 와서 잠을 자고 밥 타령이야! 넌 왜 맨날 내가 아는 사람들 집에 자꾸 빌붙는데! 당장 서울 가!”
희나가 잡아먹을 듯 화를 내고 있는데 뒤에서 누가 팔을 끌어당겼다.
“희나야, 그러지 말고 괜찮으니까 같이 식사해.”
“이런 애 밥 먹여줄 필요 없어요! 이런 식충 민폐 녀석을!”
“그러지 마. 음, 희나 동생이었던가?”
“네. 안녕하세요, 어…….”
희원이 눈을 끔뻑거리며 단정한 진혁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5년 전에는 선생님이었지만 희원은 학교 수업에 들어오질 않았고 이제 선생도 아니니 호칭에 대한 고민을 하는 것 같았다.
“형.”
그러더니 그렇게 결론을 내려버렸다.
여덟 살이나 연상에 초면이나 다름없는 남자에게 형님도 아니고 형이라니. 그 두꺼운 얼굴에 희나가 쏘아붙이며 진혁의 팔을 붙잡았다.
“누가 네 형이야! 내보내 버려요, 저런 놈!”
“형이라고 불러도 됩니까?”
“어, 어……. 편한 대로 해.”
진혁도 조금 난감한 듯했지만 다정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뒤에서 재밌다는 듯 지켜보고 있던 승수와 경부, 거북이가 분노를 날렸다.
“야, 우리는 형님이더니 왜 쟤만 형이야!”
“나보고는 아저씨라고 했잖아, 인마!”
“형님들이랑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나잖습니까.”
“쟤 우리랑 동갑이거든?”
“잉? 그래요? 그런데 형님들은 얼굴이 왜 그래요?”
“뭐얏! 이놈이! 기생오라비같이 생겨 가지고! 너 인마, 집에 가!”
셋이서 달려들어 희원에게 헤드록을 먹이고 난리를 부렸다. 입으로는 구박을 하는데 대체 어제 하루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묘하게 사이가 좋아 보인다.
희나가 황망하게 난리법석을 보고 있는데 뒤에서 누가 머리카락을 살짝 잡아당겼다. 돌아보니 미래가 헤헤 웃으면서 올려다보고 있었다.
“미래, 일어났어?”
“미래 일찍 일어났어. 아빠 늦잠꾸러기야.”
그러면서 미래는 진혁의 무릎에 앉아 어리광을 피웠다.
귀여운 애교를 보며 진혁이 아빠 미소를 짓고 있는 사이 희나는 아직까지 뒤엉켜 있는 네 사람을 분리시켰다. 그리고 희원에게 삿대질을 하면서 말했다.
“뭔지 모르겠지만 밥 먹고 바로 서울 올라가. 알았어?”
“왜-. 며칠만 자고 갈래. 지훈이 형 보기 껄끄럽단 말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여기가 내 집도 아닌데! 누가 널 반긴다고 뻔뻔스러운 소리를 해!”
“쟤가 나 반기던데?”
“뭐?”
희나가 희원이 가리킨 손가락을 따라가 보니 진혁이 있었다.
“어디서 쟤래! 그리고 선생님이 널 언제 봤다고……. 헉!”
쏘아붙이던 도중에 희나는 깨달았다. 희원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은 진혁이 아니라 그의 품에 안겨 있는 미래라는 것을.
그 깨달음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미래가 다다다 달려와서 희원의 품에 폭삭 안겼다.
희나는 황급히 미래를 떼어내며 달랬다.
“미래야, 언니가 놀아줄게. 이 오빠는 가야 돼.”
그 말을 하자마자 여태껏 웃고 있던 미래의 얼굴이 딱 굳었다. 그러더니 바닥에 벌러덩 누워 몸부림을 치면서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듯한 울음소리를 냈다.
“싫어! 오빠 가면 싫어!”
“미래야, 잠깐만.”
“으아아아아아앙! 가지 마, 오빠!”
격렬한 거부 반응. 이것은 예전에 진혁이 희나를 집에 보내려 할 때 본 적 있는 그것이었다. 아니, 그때보다 더 격렬해 보이기도 했다.
놀란 진혁의 어머니가 주방에서 뛰쳐나오고, 거의 경기를 일으키려고 하는 미래를 보다 못한 희나의 입에서 결국 “그래, 오빠 안 갈 거니까 울지 마, 미래야!”라는 말이 나오고 말았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미래는 그때와 똑같이 헤실헤실 웃으면서 희원의 무릎에 앉았다.
희나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으려니 미래를 안아 올린 희원은 희나를 닮은 해사한 얼굴로 넉살 좋게 웃으면서 진혁에게 고개를 까딱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슴다.”
진혁이 조금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미래는 즐거운 얼굴로 예쁘장한 희원의 볼에다가 뽀뽀를 하고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아, 진짜 이 외모지상주의 얼굴밝힘증 꼬마를 어찌해야 하나!
***
상쾌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기분 좋게 과수원을 가로질러 걸어온 희나의 밝은 얼굴이 앞쪽의 인영을 발견하고 잔뜩 찌푸려졌다.
진혁의 집 마당에 진혁의 옷을 입고 서 있는 키가 큰 남자. 호리호리한 체격은 진혁이 살짝 더 큰 정도로 엇비슷했지만 희나는 그가 진혁이 아니라 희원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희원 쪽은 밝게 염색한 갈색머리였기 때문이다.
희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동생 희원이 여전히 진혁의 집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 짜증 났다.
금요일부터 진혁의 집에 머무르기 시작한 희원은 월요일이 되어도 가지 않았다.
잔뜩 취한 거북이와 경부를 데려다주러 왔다가 잠에서 깬 미래의 눈에 띄어 붙들린 후 지금 현재 미래의 관심 대상 1호다.
미래는 얼굴을 밝히는 것에 더해 이성에도 빠르게 눈을 뜬 모양이었다. 희나를 여전히 잘 따르긴 하지만 희원을 볼 때의 표정은 그야말로 헤실헤실이다.
희나가 무거워진 발걸음으로 마당에 접근하니 인기척을 느낀 희원이 돌아보았다. 시골에 내려와 겨우 2~3일인데 뭘 하고 다녔는지 피부가 햇볕에 살짝 그을려 있었다.
“너 아직도 안 갔냐?”
“갈 때까지 맨날 물어볼 거야?”
“그럴 거거든?”
희나가 까칠하게 말했지만 희원은 별로 신경 쓰는 기색도 없었다.
뭐 하느라 아침부터 나와 있나 했더니 손가락 사이에 담배가 끼워져 있다. 이 맑고 신선한 시골 공기에 하얗게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가 희나는 자신의 일상에 드리워진 희원처럼 느껴졌다.
담배를 다 피운 희원이 꽁초를 마당 구석에 놓인 깡통에 집어넣는 모습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던 희나가 잇속으로 으르렁거렸다.
“남의 집에 빌붙지 말고 당장 서울로 돌아가!”
“너도 매일 공짜 밥 먹잖아.”
“나는 여기서 일 돕거든?!”
“일은 내가 훨씬 많이 하지. 형이 나 잘한다고 일당도 준댔어.”
사실 희나도 진혁이 희원을 칭찬하는 말을 들었다. 주말 내내 과수원에서 수확을 도왔는데 제법 쓸 만하게 일한 모양이었다.
희원도 희나처럼 중학교 때부터 별의별 아르바이트를 다 했다.
특히 남자이고 나이가 어려 써줄 데가 없는지라 대부분 중노동에 가까운 일들을 하며 스스로 생계를 꾸려왔으니 힘쓰는 일에는 익숙할 수밖에 없었다. 공부를 어마어마하게 싫어하긴 하지만 일 못해서 잘리는 모습은 희나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여기서 계속 눌러 앉아서 일꾼 노릇하겠다고? 네가 시골에서 살 수 있을 것 같아?”
“왜 못 살아? 나 여기 있는 거 좋은데.”
희원의 대답에 희나의 입이 벌어졌다. 화려하고 노는 것도 여자도 좋아하는 성격을 보면 얼마 못 버티고 금세 가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밥도 맛있고 여기서 일하는 거 재미있어. 곱창집 알바 하는 것보다. 꼬맹이가 좀 귀찮게 굴긴 하지만 아줌마랑 형도 잘해주고.”
태연자약하게 쭈그리고 앉아서 마당 수도에 담배 냄새가 밴 손가락을 씻고 있다.
이러다 정말 눌러앉는 거 아냐? 희나의 마음속에 불안감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네가 좋으면 다야? 어떻게 그렇게 얼굴이 두꺼워? 빌붙으려면 네 친구한테 붙어! 내 지인들한테 폐 끼치지 말고!”
“왜 그렇게 까칠하게 굴어? 너한테 빌붙은 것도 아닌데.”
희나는 적반하장으로 당당한 희원의 행동이 어이없었다. 남이 쌓아 놓은 인간관계에 기생하는 주제에. 아니, 사실 그것도 그렇지만 그녀는 자신도 아직 침투하지 못한 집에 제멋대로 먼저 들어앉아 있는 것이 아주 매우 몹시 못마땅했다.
희나가 뭐라고 한마디 더 하려고 하려는 그때, 쭈그리고 앉아 있던 희원이 눈을 빛내면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희나를 바라보던 것과 전혀 다른 표정으로 살갑게 말을 건다.
“안녕하세요, 형. 일어났어요?”
희나가 희원이 쳐다보는 곳을 돌아보니 작업실 쪽에서 나오고 있는 진혁이 보였다. 막 잠에서 깬 듯 나른하게 걸어 나오는 진혁을 보며 희원이 실실 웃는다.
지훈이랑 같이 있을 땐 그 사람 저 사람 하더니 대체 뭔 일이 있었던 걸까.
남매의 취향은 닮는 것인지 희원은 기묘할 정도로 진혁을 잘 따랐다. 아니, 지훈도 무지 잘 따랐으니 딱히 희나의 취향과는 상관없는 것 같다.
“어, 잘 잤어?”
부드러운 목소리로 희원에게 인사하던 진혁이 희나를 발견했다. 그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와 희나를 반겼다.
“희나 왔네. 미래 데려다주려고?”
“네, 헤헤. 밥도 얻어먹을 겸.”
잔뜩 찌푸려져 있던 희나의 얼굴도 확 바뀌어서 진혁을 보고 헤실헤실 웃었다. 진혁은 마주 웃으며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난 좀 씻고 올게. 먼저 들어가 있어.”
“네.”
웃으면서 대답하고 진혁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희나는 희원을 보고 다시 원래의 까칠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희원 역시 희나에게 자상하게 말하고 샤워하러 가는 진혁을 보더니 희나를 향해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다.
“헤헤. 밥도 얻어먹을 겸? 뭐냐, 그건? 애교냐?”
“신경 끄시지. 너야말로 뭐냐, 그 반응은. 질투냐?”
“너 같은 게 뭐가 예쁘다고 괜찮은 남자가 꼬이는지 모르겠다.”
“시끄러워. 부러우면 너도 연애하든가.”
“너 같은 거보다 훨씬 인기 많거든?”
이죽거리는 희원에게 희나가 로킥을 날리자 희원이 희나의 머리카락을 슬쩍 잡아당겼다. 그렇게 남매는 투닥거리면서 마루로 올라섰다.
거실로 통하는 유리문을 열자마자 안쪽에서 문을 열고 나오는 미래가 보였다.
“오빠아아아아! 언니이이이이!”
눈을 비비며 졸린 표정으로 나오던 미래가 바로 반색을 하며 후다다닥 달려왔다.
언제나처럼 안아주려고 살짝 몸을 굽히던 희나의 입이 쩍 벌어졌다. 미래가 희원의 다리로 가서 턱 달라붙었기 때문이다.
“언니, 언니. 오빠가 나랑 계속 놀아줬어!”
“미래, 너 언니한테 안 오구…….”
“헤헤. 미래는 언니도 좋아.”
희원의 다리에 매달린 채로 그렇게 말하면서 미래가 희나에게도 손을 뻗어 잡았다. 벌써부터 적절한 어장 관리 기술을 보니 커서 남자 여럿 울릴 것 같다.
희나가 희원과 함께 미래의 손을 잡은 채 거실로 들어가니 진혁의 어머니가 웃으며 반겨주었다.
희나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친절하긴 했지만 굉장히 왜소하고 기력이 없어 보였는데 지금은 혈색도 아주 좋고 매일 웃는 얼굴이다.
“아줌마, 난 밥 많이 퍼줘요!”
“야, 너 버릇없이!”
“그래그래, 얼마든지 많이 먹어.”
희나는 당황했지만 진혁의 어머니는 희나 남매의 등을 반갑게 두드리며 거실에 앉히고는 주방으로 돌아갔다. 싫어하는 기색이 없으니 다행이지만 정말 이래도 괜찮은가 싶다.
인원이 늘어난 탓에 식탁 대신 거실에 커다란 교자상을 펼치자 미래가 희나와 희원 사이에 떡하니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헤헤 웃으면서 둘을 번갈아 보더니 뿌듯하게 말한다.
“언니, 언니, 미래는 말이야. 지금 너무 좋아.”
“응? 뭐가?”
“언니랑 오빠랑 맨날 오니까 좋아. 할머니도 안 울고 아빠도 미래 예뻐해. 어저께는 오빠랑 차 타고 놀러도 갔어!”
처음 만났을 때 유령처럼 야위어 있던 얼굴이 활짝 웃으니까 조금 혈색이 도는 것 같다.
어쩜 말 한마디 한마디 이렇게 예쁘게 할까. 희나는 괜히 시큰해서 미래를 와락 끌어안고 뺨을 비볐고 희원은 상에 턱을 괸 채 머쓱한 표정으로 입을 비죽거렸다.
곧 아침 정기 행사인 목욕을 마친 진혁이 와서 다 같이 도란도란 식사를 했다. 희나는 이미 도착해서야 병원 쪽 사정으로 투석이 하루 미루어지고 미래는 오후에 어린이집에 가기로 했다는 말을 들었다.
희나의 수업도 휴강이었기 때문에 희나는 미래가 어린이집에 갈 때까지 진혁의 집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희나가 약국 문을 열러 나가는 진혁을 도우러 따라나서자 밉살스런 희원도 졸졸 따라온다.
“넌 왜 나와? 집에나 있어!”
“아깐 공짜 밥 먹는다고 난리더니, 도와도 난리야.”
도울 거면 어디 안 보이는 데 가서 고사리라도 뜯을 것이지 왜 약국으로 오는 거냐. 희나는 속으로 툴툴거렸다. 둘이서 있고 싶은데 눈치도 없는 자식.
희원이 따라나선 덕에 미래까지 부록으로 딸려와 결국 네 명이 되었다. 희나는 안 그래도 속이 부글부글 끓는데 희원이 뒤에서 셔츠를 팔락거리더니 진혁에게 말했다.
“아, 이제 슬슬 덥다. 아이스크림 사주세요, 형.”
“하하, 그래. 나랑 희나 것도 사다 줄래?”
“네. 형, 뭐 먹을래요?”
희원은 진혁에게만 묻고 희나는 무시한 채 약국에 도착하자마자 미래 손을 잡고 앞문으로 쌩 나가 버렸다.
희나가 부아가 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진혁이 퉁퉁 부은 볼을 잡아당겼다. 진혁을 쳐다보자 그가 약국 카운터에 턱을 괴고 희나를 보며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선생님, 어떻게 좀 해봐요.”
“뭐를?”
“쟤 좀 내쫓아버려요, 정신 좀 차리게.”
조르듯 팔에 매달리는 희나를 보고 진혁은 쿡쿡 웃었다.
“글쎄, 있고 싶은 만큼 있게 해주지그래?”
“나이가 몇 살인데! 자립해야죠! 거기다 민폐잖아요!”
“하지만 미래도 좋아하고, 어머니도 좋아하시고…… 사람 구하기도 힘든데 일도 도와주고, 우리야 참 괜찮은데.”
진혁의 말을 듣고 희나가 다시 입을 죽 내밀었다.
“뭐가 이쁘다고 재워주는 거예요. 사람 좋은 것도 정도가 있지.”
“희원이 이쁘지.”
“네?”
카운터에 놓인 컴퓨터를 부팅시키며 진혁이 지나가듯 한 말에 희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얼굴이 이쁘장하기는 하지만 키가 180cm를 훌쩍 넘는 데다 건들거리는 녀석이 이쁘다고?
진혁이 희나의 코를 잡아 흔들면서 말했다.
“너 닮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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