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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그 너머에는-97화 (97/140)

97화. 축제의 밤 (2)

진혁이 느릿한 목소리로 물었다.

“……갔어?”

“네. 현상이가 데려갔어요.”

진혁은 잠시 입을 살짝 벌린 채 멈춰 있다가 다물었다. 뭔가 말하려다 삼키는 것 같았다. “그래.” 하고는 그냥 희나를 유심히 바라보기만 한다.

희나는 눈을 깜빡이며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지만 진혁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선생님, 내가 쭉 지훈이랑 사귀고 있다고 생각했죠?”

희나의 물음에 진혁은 잠깐 생각하는 듯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희나의 예쁜 눈이 살짝 찡그려졌다.

“그래도 선생님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게…… 너한테 좋으니까.”

언제나와 똑같은 말. 생각해주는 말이지만 밀려나는 기분이 들어 가슴이 턱 답답해진다.

희나가 인상을 찌푸리며 뭔가를 말하려는데 진혁의 말이 이어졌다.

“나랑 있으면 네가 힘드니까 다행이라고 생각하려 했어. 물러서는 게, 그게 너를 위한 거라고 생각했어. 그러니까 내가 참아야 된다고.”

“…….”

“너랑 있으면 내 일은 아무래도 좋아져. 내 기분이 어떻든, 포기하고, 물러서고…….”

술에 취해서인지 평소보다 진혁은 말이 많았다.

그는 혼자 말하는 건지 희나에게 말하는 건지 분간이 안 가는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

희나는 묵묵히, 그리고 처연한 심정으로 진혁의 말을 들었다.

“그렇게 너무 멀리 와버렸어. 너무…… 오래 그렇게 한 것 같다.”

다시 또 물러서겠다는 말일까?

희나는 불안한 시선을 돌려 살짝 진혁의 작업실을 보았다.

잘 정돈되어 있는 방은 누가 봐도 하루 이틀 만에 꾸며진 것이 아니다. 긴 시간 동안 단장되고 차곡차곡 쌓여온 방이다. 그는 그녀가 모르는 사이, 모르는 곳에서, 모르는 삶을 착실히 꾸려온 것이다.

희나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여기서 또 밀려나고 싶지 않다. 무섭고 겁이 나고 싫다.

선생님의 일부가 되고 싶다. 선생님에겐 미래도 승수 오빠도 어머니도 있지만 이제 나에겐 아무도 없다.

“……그게 선생님이 하려고 했던 말이에요?”

“모르겠어, 원래 하려던 말이 뭐였는지.”

진혁이 살짝 머리를 짚더니 휘청거렸다. 취하긴 많이 취한 모양이다. 하긴 바닥에 놓여 있는 술병만 봐도 주량을 훨씬 오버한 걸 알 수 있었다.

그 와중에도 술병들을 줄 맞춰 단정히 세워놓은 걸 보고 축 처져 있던 희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참 한결같은 사람.

희나는 그렇게 잠시 웃다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진혁을 올려보았다.

“할 말 다 했으면 나도 내 할 말 할게요.”

“희나야.”

“아니, 우선 들어요, 그냥.”

뭔가 말하려는 진혁을 저지하고 희나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긴장한 마음을 가다듬었다.

얼굴이 뜨겁고 심장이 미칠 것같이 고동친다. 말하고 난 후가 두려워서 가슴이 떨리고 손에서는 식은땀이 난다.

하지만 지금 말하지 못하고 또다시 멀리 돌아가게 되어버리는 것이 훨씬 두렵다. 그냥 이대로 굳어버리기 전에 확실히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좋아해요.”

그에게 고백하는 건 두 번째. 넌지시 마음을 내비친 것은 셀 수도 없다. 하지만 먼저 다가와 주지 않는 점이 미우면서도 먼저 다가갈 수 있어서 기뻤다.

희나는 놀라서 커진 나른한 눈을 보며 말을 이어갔다.

“까칠하게 굴었지만, 아마 처음부터 선생님이 좋았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선생님이 생각보다 훨씬 좋은 사람이라서…… 더, 더 좋았어요.”

“…….”

“그리고 아직까지 내가 좋아한 그대로의 사람이라서 너무 기뻐요.”

희나는 심판을 기다리는 기분으로 진혁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술이 뭔가를 말하고 싶은 듯 보였지만 쉽사리 꺼내지 못하고 있다.

바보 아저씨. 속으로 생각하며 희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데 그거 알아요? 우린 그때 서로 좋아하면 안 됐어요. 난 그때 그거 때문에 부서졌어요.”

그러자 진혁의 눈빛이 슬퍼 보였다. 자신을 원망한다고 느끼는 걸까.

희나는 제 얼굴을 만지고 있는 손을 두 손으로 잡고 얼굴 앞으로 끌었다. 그리고 섬세한 손에 이마를 대고 기댄 채 조용히 말했다.

“그래서 선생님 말고 아무도 사랑할 수 없어요.”

“…….”

“그러니까 밀어내면서 나를 위한 거라고 말하지 마세요.”

느린 숨소리가 들려온다. 모양 좋은 붉은 입술이 살짝 떨린다. 잡고 있는 손은 흔들림 없이 따뜻했지만 희나는 진혁의 감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원한다면 깨끗이 포기할 테니까…… 선생님이 어떤지 말해줘요. 다른 건 아무래도 좋으니까 그냥…….”

“…….”

“그냥 정말로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깨끗이 포기할 수 있을 리 없다. 아마 거절당한다면, 혼자서 죽을 듯이 울며불며 슬퍼할 거다.

하지만 희나는 기력을 모아 용감하게 손에서 얼굴을 떼고 진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줄곧 흔들리던 진혁의 눈동자가 어느 순간 초점을 찾은 것 같았다. 곧 진혁의 잘생긴 입술이 열리고 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처음 만난 날부터…….”

아주 나직했지만 희나의 귀에는 또렷이 들렸다.

희나가 잡고 있는 손이 더 뻗어와 그녀의 몸을 끌어당겼다. 이끌리듯 진혁의 품에 파묻힌 희나의 귓가에 진혁의 진심이 울렸다.

“단 하루도 사랑하지 않은 날이 없었어.”

귓가에 나지막이 울리는 속삭임에 희나의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또로록 흘렀다.

너무 먼 길을 돌아왔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가치가 있었다.

평생 기다리며 견디다, 죽기 직전에 이 말을 들었다 해도 행복했을 것 같다.

긴장해서 늘어져 있던 희나의 팔이 진혁의 몸을 감았다.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아 덜덜 떨면서도 있는 힘껏 그를 붙잡았다.

“그러면서 왜 밀어내요, 바보 아저씨가…….”

긴장이 풀려 안도가 되자 기쁨과 원망, 서러움, 그리고 다시 기쁨이 몰려와서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용기와 어른스러움은 고백하는 데 모두 써 버린 희나는 진혁의 흰 목덜미에 매달린 채 아이처럼 울며 투정 부렸다.

“맨날 밀어내서 힘들었잖아요. 무서웠단 말이에요.”

“미안.”

“나 이제 보내지 마요.”

“그래.”

짧게 대답하는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진혁도 목이 멘 듯 말을 길게 할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녀의 등을 쓸어주는 손길이 다정했다. 술을 마셨어도 파묻힌 목덜미에서는 진혁의 향기가 났다.

드디어 잡았어. 다시는 놓지 않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서 희나는 넓은 품에서 마음껏 울었다.

한참이 지나 좀 진정된 희나는 그의 품에서 살짝 떨어져 나왔다. 곧 진혁의 단정한 얼굴이 다시 시야에 들어왔다.

고백의 열기에 취기가 살짝 가신 듯 아까보다는 괜찮아 보였다. 안경을 걸치지 않은 눈동자가 다정하게 희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이미 알겠지만…… 정말 괜찮겠어?”

“나 선생님이랑 같이 있는 거 너무 좋아요.”

고개를 크게 끄덕이는 희나를 보고 진혁은 기뻐하는 듯했지만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점점 힘들어질지도 몰라.”

“아무리 힘들어도 선생님이 나를 행복하게 하려고 최선을 다했을 거란 걸 믿어요.”

말해놓고 나니 부끄러워서 손발이 오글오글하다. 스스로의 말에 머쓱한 표정을 짓는 희나를 보고 진혁은 쿡쿡 웃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정말 다 컸네, 꼬맹이가.”

“이제 알았어요? 어……?”

희나의 눈이 크게 뜨였다. 웃고 있는 진혁의 얼굴이 다가온다 싶더니 입을 맞춰왔기 때문이다.

그 눈은 부드러운 감촉에 스르르 감겼다. 5년 만의 키스는 눈물과 알코올의 맛이 났다.

그리고 키스는 짧게 그녀의 입술을 한 번 머금은 뒤 곧 끝났다. 다시 그와 키스하는 걸 계속 기다려왔지만 하고 나니 부끄러워서 얼굴을 볼 수가 없다.

빨개진 얼굴로 입술을 비죽이며 희나는 괜히 투정을 부렸다.

“바보 아저씨, 술 냄새 나요.”

“너도 한잔할래? 그럼 안 나는데.”

희나의 투정을 진혁은 웃으며 받아넘겼다. 그러니까 키스는 계속하겠단 말이군. 사실 술 냄새 같은 거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다시 입술을 겹쳐 오는 진혁을 희나는 깊이 받아들였다.

이번의 키스는 길었다. 희나의 입술을 가르고 진혁이 혀를 섞어왔다.

애타는 한 손이 허리를 감고 한 손은 머리카락 속으로 파고들어 와 희나를 감쌌다. 희나도 진혁을 꼭 감싸 안고 그간의 안타까움을 날려버릴 듯 키스에 몰두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떨어진 두 사람은 이마를 맞댄 채 마주 보고 숨을 몰아쉬며 웃었다.

술기운이 옮아 왔는지 아니면 머리가 뜨거워진 탓인지 어질어질해져 희나는 진혁의 어깨에 폭 기댔다. 그리고 옆에 보이는 흰 목덜미에 코를 묻고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진혁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져 웃음이 나온다.

희나는 고양이처럼 얼굴을 비비면서 심술궂게 중얼거렸다.

“아저씨 냄새.”

그러자 진혁이 웃고 있는 희나의 코를 꼬집었다.

“두고 봐, 너…… 이제 2년 남았어.”

2년? 무슨 말인가 곰곰이 생각하던 희나는 진혁이 예전에 자기 나이 되면 하루에 세 번씩 아줌마라고 부르겠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때 그가 스물다섯이었으니 2년 남은 건 맞다. 같은 나이가 되면 아줌마로 불려도 어찌 보면 공평(?)한 셈이지만 아무래도 불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꽃띠 여고생이 아저씨라고 부르는 거랑 30대 남자가 아줌마라고 부르는 건 다르지!

희나는 기대고 있던 얼굴을 들고 입술을 주욱 내밀었다.

“누가 그때까지 만나준대요?”

옛날 생각이 난 김에 희나는 코를 꼬집는 진혁의 손을 깨물면서 그때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진혁이 쿡쿡 웃으면서 허리를 꼭 감싸 안아온다.

“안 만나면 어딜 가려고.”

“갈 데 많거든요-? 바보 아저씨.”

희나가 끌어안는 팔을 꼬집으면서 정말 갈 것처럼 바동거리자 진혁이 다른 팔까지 뻗어서 몸을 감아 왔다. “놔요- 갈 거야!” 하면서 앙탈을 부리니 진혁이 웃으면서 부드럽게 속삭였다.

“가지 마, 희나야.”

그리고 진혁이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자 둘의 장난스런 움직임이 동시에 멎었다.

희나의 색이 옅은 커다란 눈동자가 진혁을 바라보았다. 다정한 눈은 희나를 보며 웃고 있었지만 어딘지 불안해 보인다.

눈물이 멈춘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 눈빛을 보자 희나는 다시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어 버렸다.

희나는 진혁의 커다란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았다. 그리고 5년간 줄곧 후회하며 담아온, 그때의 모든 걸 잃어버린 눈동자 앞에서 했어야 했던 말을 했다.

“네. 계속 같이 있어요, 선생님.”

까맣고 부드러운 눈동자가 잠시 흔들리더니 이내 젖어드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을 감추듯 다시 진혁의 입술이 희나를 덮었다.

뺨에 촉촉한 것이 닿았지만 희나는 모르는 척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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