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축제의 밤 (1)
여러 가지 감정을 뒤로한 채 희나는 빠르게 교정으로 돌아왔다.
동아리 주점은 다행히 전부 수습되어 영업을 재개한 참이었다. 가운데 자리에 아까는 보이지 않던 거북이와 경부도 앉아 있었다.
미안해서 모두를 볼 면목이 없었으나 무책임하게 도망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희나가 주점으로 다가가자 보혜가 그녀를 발견하고는 후다닥 뛰어나왔다.
“언니! 어떻게 됐어요? 괜찮아요?”
“어…… 난 괜찮아. 이쪽은? 미안해서 어쩌지, 정말.”
“신경 쓰지 마요-. 언니가 그런 것도 아닌데. 그리고 장사 잘되는 중이니까 걱정 마요.”
희나가 미안한 표정으로 안쪽을 살피자 다들 괜찮다고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려 보이거나 밥 사라는 입 모양을 만들며 웃고 있었다.
조금 마음이 놓여서 안색이 풀린 희나에게 보혜가 물었다.
“그보다 잘 해결된 거예요?”
“그냥, 뭐. 그보다 선생님은?”
지훈을 생각하면 차마 잘되었다는 말이 나오지 않아 희나는 그렇게 얼버무렸다. 희나의 질문에 도리어 보혜가 되물었다.
“같이 있던 거 아니었어요?”
“중간에 먼저 갔는데 못 봤어?”
“이쪽으로는 안 왔어요.”
희나의 시선이 다른 알 만한 사람을 찾았다. 테이블에 앉아 있던 경부와 거북이도 마침 이쪽을 보고 있었다.
“선생님 어디 갔는지 알아요?”
“먼저 들어간다고 연락 왔어.”
“집으로요?”
“아마, 그렇겠지.”
희나는 집으로 가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들은 여기 더 있다 갈 거예요?”
“그래. 장사 망친 사람 일행이니까 좀 팔아줘야지-.”
이미 아까부터 엄청나게 팔아줬는데 생각해주는 게 고마웠다. 희나가 고마운 표정을 짓자 거북이가 쑥스러운 듯 손가락으로 턱을 긁으며 말했다.
“그보다 갈 거면 빨리 가봐. 이미 상당히 취한 목소리던데, 그 녀석 주량 넘으면 금방 뻗어버리잖아.”
“네, 고마워요.”
서둘러 가야 할 것 같아서 희나는 염치없음을 무릅쓰고 보혜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미안. 나 일이 있어서 먼저 가봐야 될 거 같아.”
“걱정 말고 잘하고 와요, 언니.”
“야, 주희나-. 담 주에 쏘는 거 잊지 마-!”
“누나, 3차까지 기대할게요!”
“다들 진짜 미안해. 정말, 꼭 어떻게든 갚을게!”
다행히 다들 흔쾌히 허락해주었다. 히죽히죽 웃는 얼굴들을 보니 아마 한동안 술값 털림에 더해 질문 공세에 시달리게 될 것 같지만.
바로 가방을 들고 주점을 벗어나려던 희나는 문득 생각이 나서 돌아와 거북이에게 다시 물었다.
“아, 그런데 미래는요?”
“미래는 승수가 기숙사로 데리러 간다고 하던데.”
“아, 정말요?”
“그래. 방금 갔으니까 연락해봐.”
희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모두에게 몇 번이고 고맙다며 허리를 숙인 뒤 황급히 주점을 벗어났다.
빠른 속도로 걸으며 승수에게 전화를 걸자 신호가 두 번도 가기 전에 통화가 연결되었다.
[잠깐 기다려. 같이 내려가.]
희나가 사정을 설명하자 승수가 대뜸 말했다. 마음이 급한 희나는 1분 1초가 아쉬운지라 먼저 가고 싶었지만 승수의 말이 느긋하게 이어졌다.
[너 혼자 밤길 오게 둔 거 알면 또 난리 부릴라. 기다렸다가 같이 가.]
그렇게 말하는데 가버릴 수도 없어 희나는 알겠다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교문 앞에서 5분쯤 기다리자 승수가 미래를 업은 채 도착했다. 두 사람은 함께 어둑어둑한 시골 도로를 따라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오빠, 바로 집으로 갈 거예요?”
“응. 난 미래 내려주고 집으로 가야지.”
승수가 있으면 안 되기에 간다는 말을 들은 희나가 저도 모르게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승수가 그런 희나를 내려다보더니 픽 웃으며 물었다.
“지금 가서 진혁이한테 고백이라도 할 거냐?”
희나는 살짝 빨개진 얼굴로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녀가 진혁을 좋아하는 거야 주변에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그래도 희나는 이제 진혁과 관련된 일은 누구에게도 숨기고 싶지 않았다.
“그렇군.”
뭔가 놀리는 말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승수는 단지 그렇게만 말했다. 그답지 않은 반응이 의아해서 희나가 그를 올려다보니 어째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역시 나 잘 안 될까요?”
“어?”
“안 그래도 일관되게 밀어내려고 하는 마당에 그런 꼴까지 보게 만들었고…….”
진혁이 자신을 싫어한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래도 불안한 마음에 희나의 가슴이 쿵쿵거렸다.
시무룩해져 있는 희나를 본 승수가 굳어 있던 표정을 풀고 안심시켜주듯 말했다.
“잘될 거야.”
“그런데 오빠 표정이 왜 그래요?”
잠시 ‘내가 뭐?’ 하는 얼굴을 했으나 스스로도 표정 관리가 잘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승수가 픽 웃었다.
“둘이 잘되는 게 나한테 꼭 좋은 일은 아니지.”
“뭐예요, 놀부 심보? 질투?”
승수는 그냥 입꼬리를 한번 올린 후 별말이 없었다. 어딘지 아련해 보이는 분위기가 묘하다.
왜 그러나 싶어 희나는 미간을 모으고 커다란 눈을 굴리며 생각하다가 뭔가를 떠올려 냈다.
“혹시 고백?”
이런 쪽 일은 마음에 담아두지 못하는 희나는 곧장 직구를 던졌다. 꼭 다물려 있던 승수의 입이 잠시 벌어지는가 싶더니 곧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넌 좀 눈치 없을 거면 끝까지 없으면 안 되냐?”
가벼운 어조였으나 긍정의 말이었기에 놀라서 희나의 입이 헤- 벌어졌다. 그녀는 토끼눈을 뜨고 승수에게 큰 소리로 물었다.
“오빠, 선생님 좋아해요?”
말이 끝나자마자 희나는 승수로부터 딱밤을 맞았다.
“이게 누구를 호모로 만들어! 안 그래도 막막한 혼삿길 막히게시리!”
얻어맞자마자 그쪽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희나의 얼굴이 뜨거워졌다.
선생님에게 콩깍지가 단단히 씐 탓에 너무 그 위주로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 정도로 자신에게 호감이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 맨날 앞에서 여자, 여자 노래를 불러댄 데다가 자신도 진혁, 진혁 노래를 부르지 않았나. 한 번도 그것이 불편한 기색이 없었기에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민망해진 희나는 입술을 깨물고 흘깃 승수의 눈치를 보았다. 둥글고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이 조금 벌겋게 보인다.
승수랑 이런 분위기가 조성되는 건 너무 어색해서 희나는 일부러 툴툴거렸다.
“뭐야……. 꽃뱀이라고 그렇게 놀리더니.”
“좋은 건 좋은 거고, 사실은 또 사실이고.”
어색해진 희나가 놀리는 승수를 걷어찼다가 업혀 있던 미래가 뒤척이는 바람에 둘 다 질겁했다. 미래가 깨어나면 오늘 밤 고백은 물 건너가 버린다.
미래가 잠들 때까지 조용히 걷다 보니 희나는 승수의 감정을 눈치채지 못한 게 미안해졌다. 그동안 티 안 내고 이것저것 도와줬던 것이 고맙기도 하고 또 둔했던 자신이 미안하기도 했다.
그런 표정을 지으며 계속 눈치를 보는 희나의 모습에 승수가 픽 웃었다.
“뭐냐, 그 요상한 얼굴은. 됐어. 뭐 잘될 거라고 생각한 적도 없고.”
“……미안해요.”
“니가 뭐가 미안해. 처음부터 진혁이 좋아하는 거 알면서 내 멋대로 좋아한 건데.”
좋아한다는 말이 정확히 그의 입에서 나오자 더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희나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이자 승수가 꾸며 낸 듯한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 마, 차이는 거 한두 번도 아니고. 내가 좋다고 생각한 여자들과 잘되어본 적이 없거든.”
“오빠, 그 정도로 차이기만 했어요?”
“어. 너무 어린 여자들만 좋아해서 그런가?”
“……알면 그러지 마요.”
희나는 신경 쓰지 않게 계속 농담을 해오는 승수에게 맞춰 평소처럼 떠들었다. 둘 다 웃고 있었지만 사실 둘 다 별로 웃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덧 진혁의 집 앞에 도착했다.
마당에 들어서니 본채는 불이 꺼져 있었지만 진혁의 작업실에는 흐리게 불이 들어와 있었다.
승수가 희나의 등을 툭 밀며 말했다.
“들어가 봐.”
“그치만 미래가…….”
“내가 방에 데려다 놓을 테니 걱정 마.”
“……고마워요.”
승수는 웃으며 눈을 한번 찡긋한 뒤 돌아섰다. 가장한 미소와 다르게 솔직한 뒷모습은 쓸쓸해 보였다.
희나는 마음이 좋지 않았지만 그냥 모르는 척하는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서 벌써 기진맥진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가장 큰 고비는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
희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깊이 심호흡을 한 뒤 진혁의 작업실로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선생님, 안에 있어요?”
불이 켜져 있는데도 반응이 없었다. 다시 몇 번 더 두드린 후 좀 더 큰 목소리로 불러도 마찬가지였다.
희나는 좀 기다리다가 문고리를 잡고 말했다.
“나 들어갈게요.”
다행히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문고리를 당기자 손잡이가 부드럽게 돌아갔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술 냄새가 났다. 희나는 빠르게 방 안을 둘러보았다.
침대 근처에 다 마신 듯한 술병들이 가지런히 세워져 있고, 그 뒤로 진혁이 침대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안경을 쓰지 않은 맨 얼굴이었기에 잠든 것처럼도 보였는데 희나가 들어서자 느릿느릿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흰 얼굴의 눈과 볼 근처가 살짝 상기되어 있고, 반쯤만 나른하게 뜨인 눈에는 취기가 가득했다. 눈이 마주쳐도 진혁은 아무 말이 없었다.
뭐라고 말문을 열어야 할까. 희나는 진혁의 앞으로 걸어가는 짧은 시간 동안 생각해내려 애썼지만 심장이 쿵쿵 뛰어서 도무지 머리가 돌아가질 않았다.
그녀가 앞에 가서 서자 잔뜩 술에 젖은 눈이 희나를 올려보았다. 언제나 단정하고 부드러운 얼굴이 다소 흐트러져 있는 것이 묘한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그것이 희나를 더욱 긴장하게 만들었다.
“나 서울 안 가도 될 거 같아요.”
잔뜩 고른 끝에 나온 말치고는 시작이 빈곤하다.
희나는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면서 진혁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다녀오면 연락하라고 한 거…… 왜 그런 거예요?”
“…….”
“뭐 할 말 없어요?”
묵묵부답. 이쯤 되니 생각에 잠긴 건지 그냥 술에 완전히 취해버린 건지 구분이 안 간다.
희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한숨을 푹 내쉬고 침대로 기어 올라가 진혁의 옆에 걸터앉았다.
“뭐야, 할 말 있는 거처럼 굴더니. 주정뱅이 바보 아저…….”
희나의 투덜거림이 도중에 끊겼다. 진혁의 흰 손이 뻗어와 그녀의 뺨을 아주 살짝 쓸었기 때문이다.
희나가 놀라서 옆을 바라보니 진혁이 지그시 보고 있었다.
희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안경을 벗은 데다 취해서 눈을 내리뜬 진혁의 모습이 남자처럼 보였다.
다시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얼굴이 뜨거워질 무렵, 그가 진지하게 희나를 바라보던 시선을 떨구었다.
긴 속눈썹을 드리운 흰 얼굴이 취기 어린 숨을 길게 내쉬더니 한탄처럼 말했다.
“너랑 있으면 왜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어.”
술에 취해 갈라진 목소리. 하지만 진혁의 얼굴은 어딘지 허탈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는 슬쩍 입구 쪽을 보다가 희나를 다시 보고 물었다.
“……지훈이는…….”
지훈의 이름이 나오자 희나는 움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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