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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그 너머에는-95화 (95/140)

95화. 충돌 (2)

“5년이나 계속 옆에 있었단 말이야! 이렇게 사랑하는데 한 번도 돌아봐 주지 않았어. 바로 곁에서 손도 대지 못하고 바라만 봐야 되는 심정을 당신이 알아?!”

한마디 한마디에 지훈의 진심이 묻어 나오는 듯해서 보고 있기가 괴로웠다.

미안함이 몰려와 희나가 시선을 내리뜨는데 다시 낮은 목소리가 또렷이 들려왔다.

“그래도 나라면 바람 같은 거 안 피워. 그렇게 해줬을 거야.”

“하, 말이야 쉽지.”

어이없는 듯 지훈은 비꼬았으나 말을 하고 있는 진혁의 눈은 진지했다.

희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선생님이라면 바라는 대로 해줬을 거다. 그걸로 괴로워도 내색조차 하지 않고 바라는 만큼 옆에 있어줬을 거다. 그런 사람이니까.

진혁의 차분한 얼굴을 보고 지훈은 입술을 달싹거렸으나 뭐라 말은 하지 못했다. 그도 진혁이 진심이라는 것을 감지한 것 같았다.

진혁의 조용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런데도 나를 떠나서 너에게 갔어. 놓친 건 너야. 나와는 관계없어.”

“…….”

“5년간 희나의 옆에 있었던 걸 무슨 억지로 대단한 선심이라도 썼던 것처럼 말하지 마. 네가 그러고 싶어서 그랬던 거잖아.”

“그래…….”

잠시 조용하던 지훈의 입이 다시 열렸다. 그는 아까처럼 격하게 고함치는 대신 으르렁거리듯 이빨을 드러내며 한 음절 한 음절 힘주어 말했다.

“그래, 내가 원해서 옆에 있었어. 그리고 나는 당신이랑 달라서 희나가 떠나는 걸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어! 이렇게 찾아올 만큼 내가 희나를 훨씬 사랑해. 내가 훨씬 좋아한다고! 그렇게 훌쩍 돌아설 수 있고 아무렇지 않다면 이번에도 돌아서 버리면 되잖아! 희나에게서 손 떼.”

“아무렇지 않았다고 한 적 없어.”

두근, 하고 희나의 심장이 뛰었다. 저기서 지훈이 저렇게 힘들어하고 있고, 옆에서 지켜보기가 이렇게나 힘든데, 전혀 그럴 상황이 아닌데도 진혁의 짧은 한마디에 심장이 반응한다.

“어쨌든 절박하지도 않았겠지. 뒤도 안 돌아보고 사라져서 희나를 다시 찾지도 않았잖아! 희나가 얼마나 비참하게 지냈는지 알아? 희나를 그렇게 만들어놓고 잘 산 모양인데 당신이 이제 와서 다시 만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우리가 만나지 않은 건 희나의 결정이었고, 희나가 그렇게 하길 원했기 때문에 그걸 존중했을 뿐이야.”

“존중? 존중 같은 소리 하네!”

지훈의 위협적인 몸짓과 말투에도 진혁은 그저 가만히 대답했다.

희고 단정한 옆얼굴이 질책을 당하면서도 묘하게 여유 있어 보인다. 어떤 말에도 큰 표정의 변화 없이 말을 하고 있는 입가 외에는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그 모습이 지훈을 더 초조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지훈은 마치 반응을 이끌어내고 싶기라도 한 것처럼 도발하듯 진혁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대고 삐딱하게 물었다.

“좀 솔직해지지 그래? 당신도 내가 싫지? 나보고 희나에게서 손을 떼라고 하고 싶지?”

“…….”

“나 때문에 희나랑 만나지 못할까 봐 두려워? 다시 예전처럼 나한테 빼앗길까 봐?”

그러나 나온 진혁의 반응은 아마 지훈의 기대와 달랐을 것이다. 진혁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또렷한 어조로 말했다.

“희나와 내 사이는 희나와 내 문제고 넌 제삼자야. 너랑은 상관없어.”

지훈의 모양 좋은 눈썹이 꿈틀했다. 제삼자라고 말한 것에 화가 난 것이다.

그는 움직이지 않는 바위 같은 진혁에게 더 이상 얘기하는 건 시간 낭비라고 깨닫기라도 한 듯 툭 돌아서며 말했다.

“제삼자는 당신이지. 뭐, 좋아. 말도 안 통하는데 그만두지. 희나는 내가 데려갈 거야.”

“넌 못 데려가.”

걸어 나오려던 지훈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가 주먹을 꾹 움켜쥐는 게 보였다.

진혁을 돌아보는 얼굴의 관자놀이께에는 혈관이 불거져 있다. 금방이라도 주먹을 날려 진혁의 단정한 얼굴에 꽂을 것처럼 보였다.

내내 잠잠하던 희나 양옆의 두 남자도 느슨하던 자세를 조금 긴장시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도 막상 바로 앞에 있는 진혁은 흔들림이 없었다.

“네가 데려갈 수 있었으면 여기서 나한테 이럴 이유가 없지.”

희나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지훈의 팔이 순식간에 뻗어 와 진혁의 멱살을 잡아당긴 것이다.

희나의 옆에 서 있던 두 남자는 달려 나가려고 하다가 진혁이 지훈의 팔을 잡는 것을 보곤 움직임을 멈추었다.

“네가 희나를 데려가지 못하는 건 희나의 의사야. 나한테 이런다고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어.”

조용한 말과 함께 진혁은 잔뜩 찌푸린 지훈의 얼굴을 쳐다보며 멱살을 잡은 손을 잡아 떼었다.

잡을 때의 강한 기세가 허망하게도 지훈의 손은 너무나 쉽게 떨어졌다.

조금 창백해진 듯한 지훈을 밀어내고 진혁이 한 발 물러섰다.

시선을 떨군 지훈을 보고 그들의 이야기가 끝났다고 생각한 희나가 그늘에서 천천히 걸어 나갔다. 희원과 현상도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지훈은 미동도 없었으나 진혁은 인기척을 느꼈는지 다가오고 있는 희나를 돌아보았다. 그는 마치 희나와 다른 이들이 보고 있었던 것을 알기라도 했던 것처럼 평온했다.

안경 너머의 부드러운 눈이 울 것 같은 희나를 스쳐 지훈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굳어져 있는 지훈을 본 후 다시 희나를 보고 작게 한숨을 쉬더니 곧 희나가 오고 있는 쪽 반대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행동이 정리할 시간을 주기 위해 자리를 피한 것이라고 생각한 희나는 진혁을 따라가는 대신 지훈의 옆으로 다가갔다.

희나가 다가가자마자 지훈의 힘없는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 꽂혔다. 조금 떨리는 듯한 단단한 팔이 희나를 살짝 잡는가 싶더니 곧 강한 힘으로 품으로 끌어당겼다.

“희나야, 나한테 이러지 마.”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절박하게 귓가에 울렸다. 희나는 눈을 꼭 감으며 지훈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미안해, 지훈아.”

그 말에 지훈이 희나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그는 자신이 안고 있는 게 무엇인지 확인하는 것처럼 희나의 몸을 꼭 부여잡았다. 그 팔에 담긴 감정의 깊이가 전해져 마음이 미어질 것 같은 미안함이 몰려왔다.

희나의 눈가가 순식간에 붉어지고 눈물이 뺨으로 흘러내렸다.

“정말 미안해. 진짜…… 진짜 미안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때의 기분이라면 누구보다도 더 잘 아는 그녀였다.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을 절감했을 때의 상실감과 무력함은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자신을 꼭 끌어안고 더듬는 지훈의 팔이 너무나 위태롭게 느껴져 마주 안아 붙잡아주고 싶은 기분이 솟구쳤지만 희나는 그 기분을 힘들게 눌러 참았다.

이렇게 안겨 있으니 역설적으로 끝이라는 것이 더 실감되었다. 뜬구름같이만 느껴지던 마지막이 확실한 현실로 특정 지어진 것이다.

이 필사적인 팔을 벗어나면, 지훈과 이걸로 끝이다.

정말 지훈을 보내는구나. 그것이 절절하게 느껴져 희나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이렇게 우는 것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지훈과 연인 관계를 끝낼 때도 울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지훈이 뺨을 대고 있는 희나의 머리카락도 젖어들기 시작했다. 그도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상처 주고 싶지 않다. 이러고 싶지 않아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희나의 팔이 가볍게 지훈의 몸을 밀어냈다. 그렇게나 꽉 붙잡고 있었는데 그는 놀라울 정도로 쉽게 밀려났다.

순간적으로 보인 잔뜩 상처 받은 지훈의 얼굴이 아래로 푹 꺼졌다. 바닥에 주저앉아 버린 것이다.

희나가 따르듯 힘없이 앉아 있는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자 지훈이 다시 희나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우는 얼굴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은 채 입술을 떨며 물었다.

“정말…… 정말 안 되겠어?”

“더 빨리 이렇게 했어야 하는데……. 미안해.”

“그런 말 하지 마. 계속 내 옆에 있어, 응? 희나야.”

“너도 알잖아. 같이 있으면 우린 서로 안 좋아.”

“안 돼. 난 너 못 보내. 희나야…….”

팔을 잡은 손에 힘이 더 강해졌다. 지훈은 입술을 한번 꽉 깨물더니 뭔가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힘겹게 입을 뗐다.

“저 사람 만나고 싶으면 만나도 돼.”

희나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희나의 눈이 커다랗게 뜨이자 지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만나고 싶으면 만나도 되니까 내 옆에 전처럼 그냥 있어. 나도 다른 여자 만나니까 괜찮아. 아무 말 안 할게.”

그 말에 희나는 칼로 에이는 것처럼 심장이 아려왔다. 그에게서 이런 말까지 나오게 했다는 것이 참담하게 느껴졌다.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희나는 차마 말도 못 하고 그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 끝내야 한다. 지훈을 더 망쳐버리기 전에 지금 끝내야 한다. 언젠가 다시 만나더라도 지금은 끝내야 한다.

희나가 붙잡는 지훈 앞에서 그저 발작처럼 고개를 젓고 있는데 누군가 어깨를 짚었다.

눈물 젖은 얼굴로 올려보니 현상이 다가와 있었다.

“이제 됐어.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할게.”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렇게 말한 뒤 현상은 지훈의 떨리는 팔을 희나에게서 떼어냈다. 그러자 거의 이성을 잃은 지훈이 다시 희나를 붙잡으려 했지만, 힘이 하나도 없는 그 팔은 현상에게 쉽게 저지되었다.

“그만해, 신지훈.”

무뚝뚝하게 말하고 현상은 희나를 잡아 일으켰다. 그리고 빨리 가보라는 듯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이제 가봐.”

“어…… 저기…….”

“잘 살아라.”

희나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현상은 낮게 말했다. 그 옆얼굴을 보며 희나는 이제 두 번 다시 현상과 눈을 마주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마 다시는 마주쳐주지 않을 것이다. 잘 살란 말 한마디가 그나마 남은 모든 호의를 닥닥 긁어서 뱉은 마지막 한마디였을 것이다.

희나는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지훈을 바라보았다. 지훈은 기어이 손을 뻗어 손가락 하나를 희나의 손가락에 걸고 있었다. 늘 당당하고 밝고 확신에 차 있는 지훈의 손이 너무나 힘없이 느껴져서 도저히 뿌리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나 마음이 무겁고, 아프고, 힘들어도 걸어야만 하는 길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하고 싶지 않은 말을 힘겹게 입 밖으로 꺼냈다.

“나 갈게, 지훈아.”

“어디 가. 가지 마, 가지 마, 희나야.”

“같이 있을 수 없어, 이제는.”

지훈의 모양 좋은 눈동자가 너무나도 절박한 빛을 띠고 있었다. 희나는 그 눈을 괴로운 듯 쳐다보면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

“나한테는 그 사람이 전부야.”

그러자 희나를 잡고 있던 손이 툭 떨어졌다.

희나는 축 늘어진 그 손을 잡고 위로해주고 싶었지만 손을 뻗지 못한 채 잠시 지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돌아서서 그곳을 벗어났다.

걸어 나오는 그녀의 뒤로 현상에게 기댄 지훈의 오열이 들려왔다.

희나의 눈에서도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지만 그녀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마음을 도려내는 것 같은 그 소리를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계속 걸었다.

그녀에게는 이제 해야 할 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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