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충돌 (1)
룸메이트의 말에 희나의 눈이 번쩍 뜨였다.
사장이라면 지훈? 누워 있던 몸을 벌떡 일으키며 희나가 물었다.
“지훈이가 왔다고? 주점으로 갔어?”
“응. 축제 보러 왔나 보더라. 혼자가 아니라 몇 명이서 왔던데.”
일을 빠져서 정말 축제에 참가하는지 확인하러 온 건가?
아니, 왜 왔는지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주점으로 갔다면…… 거기에는 진혁이 있다.
둘이 만나게 두어서는 안 된다.
벌떡 일어난 희나는 룸메를 밀친 채 기숙사를 빠져나와서 필사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툭- 하는 느낌과 함께 머리카락을 동여맨 고무줄이 끊겼다. 밤이 되자 불기 시작한 바람에 흩어진 머리카락이 마구 흩날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희나는 다시 머리를 가다듬을 정신도 없이 시야를 가리는 머리카락만 손으로 헤치며 속도를 늦추지 않은 채 곧장 달려 나갔다.
희나의 머릿속에는 빨리 지훈을 만나 주점으로 가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주점에는 진혁이 있다. 지훈이 진혁을 보면 일부러 감췄다고 생각하고 화를 낼 게 분명했다.
물론 일부러 감춘 것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아직 아무 사이도 아니고 얘기도 못 했는데 둘을 마주치게 할 수는 없었다.
있는 힘을 다해서 달려 주점이 내려다보이는 운동장 입구 언저리에 도착한 희나는 이쪽으로 정신없이 달려오고 있는 보혜를 발견했다.
보혜는 희나를 보더니 양팔을 마구 흔들며 다급하게 외쳤다.
“언니이- 언니! 큰일 났어요!”
희나는 살짝 속도를 늦추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이미 늦었다는 직감이 왔다.
“보혜야! 선생님은? 지훈이 왔어?”
“네-, 왔어요! 보자마자 분위기 장난 아니었어요!”
둘은 숨을 몰아쉬며 이제 달리는 대신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지금 어디 있어?”
“아까까진 저쪽에 있었는데 둘이 어디 가려고 해서 언니한테 알리려고 가는 중이었어요.”
“가다니, 어디를?”
“모르겠어요. 언니, 진혁 오빠랑 그 사람이랑 둘이 무슨 일 있었어요?”
희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슬쩍 끄덕였다. 보혜는 울상을 지으며 눈을 깜빡거렸다.
“방금 전에 와서 처음에 인사하고 거기까진 분위기 좋았는데, 진혁 오빠 앉아 있는 걸 보더니 표정이 싹 바뀌어 가지고는 막- 얼굴이 시뻘게져서 당신이 왜 여기 있냐고 소리 지르면서 술상을 엎었어요-. 그러니까 진혁 오빠가 여기서 이러지 말고 나가자고 해서…….”
말하는 사이 주점이 있는 자리에 도착했다.
들은 대로 입구 부근에 술상이 엎어진 흔적이 있고 동아리 회원들이 쭈그리고 앉아 치우는 중이었다.
희나가 자리를 비우기 전까지는 가장 북적북적했는데 손님도 얼마 없다.
더할 나위 없이 미안해서 사과하려고 빠르게 접근하던 희나의 다리가 순간 멎었다. 평상 위에서 아는 얼굴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큰 키를 구부려 술로 더러워진 평상을 닦고 있는 그는 희나의 남동생 희원이었다.
희나는 빠르게 다가가서 그의 어깨를 잡아 올렸다.
“니가 왜 여기 있어? 여기서 뭐하는 거야? 지훈이는 어딨어?”
희원이 희나를 딱딱하게 올려다보더니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질문에 대한 대답 없이 툭 내뱉듯 말했다.
“너 진짜 노답이다.”
“시끄러워. 어딨냐고.”
“니가 알아서 뭐하게.”
퉁명스러운 말투를 듣고 물어봤자 소용없음을 깨달은 희나는 몸을 돌려 다른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주점 내에는 어딜 갔는지 거북이도, 경부도, 승수도 없었다.
쳐다봐도 다들 눈치 보듯 말이 없는데 얼마 뒤 뒤쪽에 서 있던 도한이 쭈뼛거리며 나서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누나, 둘이서 주차장 쪽으로 갔어요.”
희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모두에게 고개를 숙여서 사과했다.
“다들 정말 미안해. 여기 일은 갔다 와서 보상할게.”
그리고 몸을 돌려 가려는데 뒤에서 도한이 팔목을 붙잡았다.
“잠깐만요. 그런데 아무도 따라오지 말라고 하던데요…….”
“괜찮아. 금방 갔다 올…….”
“가지 마. 그냥 내버려 둬.”
도한의 뒤쪽에서 희원이 끼어들었다.
희나는 팔을 뿌리치고 인상을 찌푸리며 까칠하게 대꾸했다.
“넌 참견하지 마.”
“가지 말라고.”
희원은 평상에서 내려와 다가올 기세였다.
희나는 방해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무시하고 돌아서서 도한이 말한 주차장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아, 진짜!”
짜증을 내는 희원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따?璨윱?기척이 있었다.
희나는 좀 더 속도를 높여서 달렸지만 키가 한 뼘도 넘게 훨씬 큰 데다가 남자인 희원을 따돌릴 재간이 없었다. 결국 운동장을 벗어나는 지점에서 붙들리고 말았다.
“넌 여기 있어, 그냥.”
“이거 놔! 왜 이래, 진짜!”
“가만히 있어.”
“어떻게 가만히 있어!”
희나는 발버둥을 쳤지만 남자의 손에서 벗어날 방법이 만무했다.
소란에 주변의 이목이 쏠리기 시작했으므로 희원은 희나를 끌고 운동장에서 벗어나 건물 그늘께까지 걸어갔다. 그러고는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물었다.
“좀 가만히 있으라고! 왜, 안 따라가면 저 사람이 지훈이 형한테 처맞을까 봐 겁나냐?”
“닥쳐! 참견하지 말라니까!”
“끝낼 거잖아! 그럼 지금은 좀 놔두라고!”
그 말에 희나의 몸부림이 멎었다.
커다란 눈동자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희나를 보고 희원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잡고 있던 팔을 놓았다.
그리고 그때, 옆쪽에서 갑자기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희나는 흠칫 놀랐다.
“희원이 말대로 그냥 얘기하게 놔둬. 할 말 정도는 좀 직접 하게 해줘.”
컴컴한 건물 그늘 뒤쪽이라 희나는 한 사람이 더 있는 줄은 생각 못 했었다. 말을 건 것은 바로 현상이었다.
그는 조금이나마 빛이 닿는 두 사람 쪽으로 걸어 나오며 낮게 말했다.
“나도 일단 따라왔는데 둘은 지금 저 앞에 있어. 감정이 격해져 있는 거 같긴 하지만 딱히 물리적 충돌이 있을 것 같진 않으니 여기서 지켜보자.”
“하지만…….”
따르는 것이 타당한 말이었지만 희나는 그래도 망설여졌다. 그러자 희원이 아주 못마땅한 어조로 내뱉듯 물었다.
“지훈이 형이 이유 없이 사람 패고 다니는 거 봤어? 그렇게 사람을 못 믿냐?”
“그런 식으로 말하진 않았어.”
“저 사람 다칠까 봐 그래? 넌 그거만 걱정되냐?”
“…….”
“누가 더 다치는지 넌 안 보여?”
할 말이 없어진 희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눈앞에 선 희원은 진혁과 만나고 있던 희나를 명백히 탓하는 표정이었지만 그 옆의 현상은 담담했다.
“걱정되면 저기서 봐. 그럼 뭐 하는지는 보일 거야. 대신 보기만 하고 좀 가만히 있어.”
5년간 지훈의 옆에 있으면서 희나는 현상과 병태, 지훈 세 사람의 우정이 얼마나 지극한지 잘 알고 있었다.
분명히 지훈에게 악영향만 끼쳐온 희나가 무척이나 미울 텐데도, 표정은 희나를 탓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지훈을 걱정하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더 고집을 부릴 수 없어 희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가능한 한 소리를 죽여서 건물 모퉁이로 갔다. 근처까지 가자 지훈의 격양된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셋은 살짝 몸을 내밀고 주차장 쪽을 보았다.
지훈과 진혁은 가로등 아래에 서 있었으므로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 반면 이쪽은 어두워 보이지 않을 테니 어느 정도 대놓고 지켜봐도 괜찮을 듯싶었다. 아니, 셋이 빛을 받고 서 있어도 아마 둘은 이쪽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지훈은 감정이 격양되어 있었다. 어찌나 화가 났는지 눈빛이 파랗게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격해진 감정만큼이나 호흡도 거칠어져 어깨가 위아래로 크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 지훈과 달리 맞은편에 선 진혁은 술에 취해 흰 얼굴이 붉어져 있고 서 있는 자세가 조금 불안했으나 어쨌든 차분해 보였다.
“왜 또 당신이야? 왜 항상 당신이냐고!”
지훈이 자신보다 큰 진혁에게 사납게 따져 묻고 있었다. 앞의 내용은 제대로 듣지 못한 희나였지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는 뻔했다.
잔뜩 화난 지훈의 기색에도 진혁의 얼굴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바로 앞에 들이민 지훈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신 같은 거랑 비교도 안 될 만큼 긴 시간 동안 내가 계속 옆에 있었어! 여태까지 나 몰라라 하다 이제 와서 끼어드는 걸 그냥 두고 볼 것 같아?”
“네가 뭐 때문에 화내는지는 알겠는데 상관없는 사람들을 말려들게 하는 건 민폐야.”
묵묵히 듣고 있던 진혁의 입이 열렸다. 분명한 어조의 질책은 교생 시절과 달리 존대를 하고 있지 않았다.
“돌아가면 주점에서 네가 한 행동에 대해서 사과해. 다들 얼마나 열심히 준비했는지 알아?”
“그 따위 말을…….”
지훈은 진혁의 말을 듣고는 어이없는 얼굴이 되었다. 이를 악물며 뭔가 말을 삼킨 지훈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집어치워! 누가 그 따위 설교 들으려고 여기까지 따라온 줄 알아?”
“난 내가 왜 네게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어. 네가 행패를 부릴 권리도 없고.”
진혁의 조용한 목소리는 제법 거리가 있는데도 또렷이 들려왔다.
희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금방이라도 진혁의 입에서 희나와 아무 사이도 아닌데 왜 네가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말이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너희 둘은 이미 헤어졌다고 들었는데.”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건 조금 다른 말이었다.
담담한 말에 희나의 조마조마함은 진정되었지만 지훈의 표정은 더욱 일그러졌다.
“헤어졌어도 계속 함께 있었어! 같이 살았고, 같이 다니고 뭐든 함께했어. 난 절대 그 녀석 못 떠나! 희나도 이미 내가 없으면 안 돼! 당신 같은 인간 때문에 힘들어하고, 방황하는 동안 내가 계속 함께 있었어. 이제 그 애가 괜찮아졌고, 그래서 누군가를 선택한다면 그건 나여야 돼!”
지훈은 가만히 서 있기 힘든지 주먹까지 휘둘러가며 주변을 맴돌았다. 말을 하면 할수록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말을 하다가 멈춰 선 그는 진혁의 어깨를 치며 강한 어조로 위협하듯 말했다.
“어디로 떠나서 그간 나 몰라라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이제 와서 끼어드는 건 용서 못 해! 당신이 왜 여기 있는지는 상관없어! 희나는 내 옆에 있어야 돼!”
어깨를 치는 행동이 불쾌한 듯 안경 너머 진혁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러나 술에 취했어도 절제심이 강한 진혁은 화를 내는 대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사랑하면 바람 같은 거 피우지 마.”
조용한 말이었지만 지훈의 얼굴은 주먹으로 맞은 것보다 더 세게 한 방 맞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분노로 얼굴을 물들이며 소리쳤다.
“당신이 뭘 알아!”
지훈의 화난 기세가 멀리 있는 세 사람에게까지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희나는 금방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것을 꾹 눌러 참으며 불안한 시선으로 둘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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