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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그 너머에는-93화 (93/140)

93화. 페스티벌 (2)

“미래는요?”

“있다가 승수가 데리고 올 거야.”

“누구누구 오는 거예요?”

“거북이랑 경부랑 승수 다 올 모양이더라. 술은 넉넉해? 셋이 완전 마시고 죽을 기세던데.”

“우와, 우리 오늘 매상 대박 나겠네요. 나도 첫 타임 끝나면 같이 합류할래요.”

여덟 시까지만 서빙을 하기로 했으니 합류할 수 있었다.

다 같이 놀고 마실 생각에 들떠서 헤헤 웃고 있는 희나를 내려다보며 진혁이 말했다.

“합류하는 건 좋지만 술은 적당히 마셔.”

“할아버지 같은 소리. 내가 알아서 할게요.”

“술에 취하면 위험하겠던데?”

진혁의 말을 듣고 희나는 며칠 전 원두막에서 술을 마시다가 진혁에게 업혀 간 기억을 떠올렸다.

“그 정도는 취할 수도 있죠. 이제 다 컸으니까 괜찮거든요?”

새침하게 말하자 진혁은 쿡쿡 웃다가 묘한 표정으로 눈썹을 찡긋했다.

“그래, 뭐 다 크긴 했더라.”

어쩐지 진혁의 표정에 평소에는 잘 짓지 않는 느물함이 담겨 있는 듯하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희나는 그날 자신이 진혁을 품에 안았던 걸 떠올려 내고 얼굴을 붉혔다.

몸은 못 가눴었지만 필름이 끊어지진 않았다. 진혁이 제 품에 푹 파묻혀서 당황해하던 감촉이 목덜미와 그 아래쪽으로 생생하다.

창피했지만 능글맞게 나오는데 부끄러워하면 지는 기분이라 희나는 뻔뻔스럽게 나가기로 결정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웃지 말아요! 탈아시아급 포옹을 받았으면 영광이죠!”

“아하하. 그런가. 그렇긴 하네.”

밝게 웃는 소리가 듣기 좋았지만 희나는 진혁과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 얼떨떨했다.

오늘의 진혁은 묘하게 밝고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리고 항상 느껴지는 조심스러움도 어쩐지 사라진 듯했다.

웃으며 얘기하는 사이 어느덧 교정에 다다랐다. 주점 쪽에서 희나와 진혁을 발견하더니 도한과 다른 과 동기가 후다닥 달려와 상자를 받아 들고 달려갔다.

짐을 넘긴 진혁이 희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래도 조심 좀 해. 경계심 없는 것도 여전하고, 변한 게 없어.”

다정한 말투가 두근두근할 정도로 기분 좋았지만 희나는 입을 비죽거렸다. 경계심 없으면 어떠나. 단둘이 있는 상황에 경계심 없이 굴어도 손 하나 대지 않는 남자니 고자로 의심받지.

“선생님도 변한 게 없잖아요.”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먼저 손을 내밀어 오지 않는다.

대답 없이 그냥 웃기만 하는 진혁을 잠깐 쳐다보던 희나가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면서 우물우물 말을 꺼냈다.

“선생님, 나 내일 아침에 서울 갔다 올 건데요.”

“지훈이 만나러?”

말을 맺기도 전에 빠르게 치고 들어온 진혁의 물음에 희나는 놀랐다.

동그래진 눈을 보고 그가 픽 웃으며 설명했다.

“네가 그렇게 말했어.”

말한 기억이 없는데 그랬다는 걸 보면 주정을 부리는 사이에 그런 말도 꺼낸 모양이네.

희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혁을 올려보았다.

“네. 지훈이 만나고 올 거예요.”

그렇게 말하고 잠시 반응을 기다렸지만 진혁은 말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으려 해도 얼굴은 무표정하고 마주친 안경 너머의 까만 눈동자는 잠잠했다.

한동안 기다리던 희나가 어색해서 “그럼 이따 봐요.” 하고 돌아서려는데 진혁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녀오면 연락해.”

허구한 날 놀러 가니 굳이 연락하고 말고 할 것도 없는데 희나는 그 말이 어딘지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침을 꿀꺽 삼키며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진혁의 큰 손이 희나에게로 뻗어왔다. 그는 등 뒤로 늘어져 있는 헐렁헐렁한 후드를 그녀의 머리에 씌우고 미소 지었다.

“귀엽네.”

그러더니 토끼 귀를 한 번 쓰다듬고는 먼저 걸어가 버렸다.

진혁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던 희나는 주점에서 빨리 오라고 부르는 재촉을 듣고서야 돌아섰다.

교정은 이제 아주 북적이고 있었다. 플라스틱 의자와 테이블을 둔 다른 주점들과 달리 평상을 놓은 것이 주효했는지 희나의 동아리 주점은 이제 막 개시했는데도 눈에 띄게 손님이 많았다.

그러나 주점에 가까이 가기도 전에 희나는 얼굴 마담으로서 호객 행위를 하는 데 동원되어 교내를 한 바퀴 도는 행렬에 끌려가게 되었다.

교문에서 시작해서 넓디넓은 교내를 한 바퀴 돌며 손님들을 잔뜩 몰고 한참 후에 돌아오니 이미 주점은 반 이상 꽉 차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진혁 일행들이 보였다.

진혁은 상의를 벗어 뒤에 내려둔 채 술을 마시고 있었다. 타이를 느슨하게 매고 흰 셔츠의 소매를 걷어 올려서 평소보다 어른스럽고 남자답게 보인다. 그래서인지 주변에 앉아 있는 여학생들이 흘끔흘끔, 아니 대놓고 쳐다보고 있다.

그러나 진혁은 언제나처럼 알아차리지 못한 듯 거북이와 대화하며 줄곧 웃고 있었다. 웬일로 꽤 많이 마셨는지 흰 뺨과 목이 살짝 붉어 보인다.

“희나 왔냐?”

승수가 희나를 먼저 알아보고 큰 소리로 부르자 진혁이 느리게 이쪽을 돌아보더니 희나를 발견하고 밝게 웃었다. 취기에 풀어진 듯한 얼굴이 나른해 보여 묘하게 색기가 있다.

“희나 언제까지 일해? 우리랑 같이 한잔 안 해?”

“조금만 있으면 끝나요. 그때부터 같이 마셔요.”

거북이와 경부는 보혜와 은영 말고도 여대생들이 가득한 것이 흐뭇한지 매우 업되어 있었다.

그들은 대학 주점에서는 보기 드물 정도로 안주를 잔뜩 시켰다. 그리고 자기들이 수확한 거라고 뿌듯하게 옆에도 나눠줘 가며 주점 전체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들었다.

분주하게 일을 하다 보니 금방 여덟 시가 되어 희나가 교대할 시간이 되었다.

이제 놀아야지, 하고 신나게 평상 쪽으로 다가간 희나는 그제야 승수와 진혁 사이에 미래가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주 작은 데다 평소와 다르게 조용해서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어른들끼리 얘기하는 것이 지루한지 미래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미래가 완전 졸린 모양인데요?”

“응. 아까부터 자고 있네.”

희나가 묻자 진혁이 취한 와중에도 살짝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미래를 내려다보았다.

평소 같으면 집에 데려다주고 왔겠지만 진혁의 집까지 들어가려면 꽤 긴 거리다. 술 마셔서 운전을 못 하니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둔 모양이었다.

희나는 좋은 생각을 떠올리고 진혁에게 말했다.

“내가 기숙사에 재우고 올게요.”

“기숙사에?”

“네. 바로 저 뒤 건물이니까 금방이에요. 시끄럽고 취해서 술 쏟을지도 모르는데 여기에 두기 좀 그렇잖아요.”

“하지만 자다가 깨기라도 하면…….”

“룸메이트 중에 방에서 안 나오는 애 있는데 부탁하면 봐줄 거예요.”

거기까지 듣자 안심한 듯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 좀 할게.”

그러면서 진혁은 기숙사까지 데려다주기 위해 졸고 있는 미래를 안으려고 팔을 뻗었다. 그러자 미래 옆에 앉아 있던 승수가 진혁을 만류했다.

“그렇게 뻘게져서 무슨 애를 업는다고 그래? 애 떨어트릴라.”

“그 정도로 취하진 않았는데.”

“안 데려다줘도 돼요. 잠깐 깨워서 같이 걸어가면 되죠.”

그렇게 말하면서 희나는 흔들거리고 있는 미래 쪽으로 몸을 숙였다.

“미래야, 들어가서 자자.”

하고 톡 건드렸더니 작은 몸이 기울어졌다. 그리고 붙잡을 새도 없이 쿵- 바닥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끄아아아아아아악!”

넘어진 건 미래인데 엉뚱한 곳에서 비명이 터졌다.

순간 무슨 일인가 하던 희나는 승수가 고통스러워하며 잔뜩 웅크린 채 바닥을 뒹굴고 있는 것을 보고 눈치를 챘다. 넘어지면서 미래의 손이 남자의 소중한 곳을 직격한 것이다.

“윽- 아프겠다. 야, 괜찮냐?”

경부가 고통에 감정 이입이 되는지 얼굴을 찌푸리며 응급 처치로 엉덩이를 두들겨주었다.

옆에 앉아서 눈을 깜빡이고 있던 미래의 입에서 폭탄 발언이 나왔다.

“쪼꼬매-.”

작은 소리로 말했지만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듣기엔 충분했다.

순식간에 웃음이 터져버렸다. 억울(?)한 오명을 뒤집어쓸 위기에 처하자 승수가 고통도 잊은 채 벌떡 일어나 앉더니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오해하지 마! 그거 얘기하는 거 아니야! 표준은 충분하단 말이야!”

그러나 다들 이미 마구 웃고 있는 중이라 승수의 절박한 부르짖음은 공허한 외침이 되어버렸다.

진혁만이 난감한 표정으로 웃음을 참으며 미래를 잡아당겼다.

“괜찮아?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미래는…….”

“안 괜찮아! 그만들 웃어! 미래 같은 어린애가 뭘 알겠냐고!”

승수가 외치자 미래가 무시당했다고 느꼈는지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그리고 낭랑한 목소리로 승수에게 쏘아붙였다.

“미래는 다 알아! 아빠 꺼는 짱 크단 말이야!”

취기로 살짝 붉어져 있던 진혁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주변에 이번에는 웃음 대신 싸하게 정적이 흘렀다. 미래의 목소리가 커서 주점 내부에 쩌렁쩌렁 울린 것이다.

탈아시아급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희나는 지금 진혁의 심정이 어떨지 공감할 수 있었다.

새로 시킨 술을 서빙하러 들고 왔던 도한이 어디로도 갈 데 없는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보고자 땀을 뻘뻘 흘리며 정적을 깼다.

“아, 아하하하. 선생님 좋으시겠슴돠?”

그러나 대충 날린 성의 없는 드립은 진혁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할 말을 잃고 있던 사람들이 배를 잡고 웃기 시작한 것이다. 뒤집어지고 있는 거북이와 경부가 보였다.

사람들이 민망해서 할 말이 없으면 좋겠다고 하는 건가. 희나는 속으로 생각하며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돌이 되어버린 진혁의 옆에서 미래를 잡아끌었다.

“미래 너 내가 그런 소리 하는 거 아니랬지! 이리 와-. 빨리 자러 가자.”

“왜 하면 안 되는데? 언니도 봤다고 했잖아!”

연이어 터진 폭탄 발언에 사람들의 웃음이 멎고 이번에는 희나의 얼굴에 강한 당황의 빛이 떠올랐다.

“내가 언제! 오해할 만한 말 하지 마!”

“언니가 저번에 목욕할 때 그랬잖아!”

주변의 시선들이 경악과 흥미로 뭉쳐 이쪽으로 사정없이 쏟아졌다.

“그런 말 한 적 없어! 미래가 장난치는 거야!”

“오올, 고자 아니었구나!”

“꽃뱀, 해낸 거냐?”

건수를 잡은 거북이와 경부는 여름휴가라도 받은 듯한 표정으로 악마처럼 웃으며 이미 이쪽의 이야기는 들을 기색도 없었다.

돌이 된 진혁의 어깨를 감싸며 느물느물 묻기 시작하는 두 사람의 표정을 보니 이미 단단히 오해를 한 듯했다.

패닉에 빠진 희나는 완전히 빨개진 채 어물거리다가 미래를 덥석 집어 들고 달리기 시작했다.

“넌 쪼그만 게 남의 몸에 달린 거에 왜 이리 관심이 많아!”

“에헤헤헤헤, 언니 빨개졌다.”

“너 진짜! 으으으! 너 일부러 이러는 거지! 이 꼬맹이가 진짜!”

“헤헤헤- 찌찌찌찌 짱 큰 찌찌.”

희나는 떠들어 대는 미래의 입을 틀어막은 채 우사인 볼트가 부럽지 않은 속력으로 교정을 주파해서 기숙사로 들어섰다.

룸메이트는 어딜 나갔는지 방에 없었다. 자신의 참대에 이미 잠이 깨어버린 미래를 눕힌 희나는 빨개진 얼굴을 감싸 쥔 채 그 옆에 누웠다.

다시 바깥으로 나갈 용기가 없다. 이제 어쩌나- 으아아아아 같은 소리를 내면서 나가지 못하고 한참을 뒹굴고 있는데 문 쪽에 인기척이 있었다.

“어? 너 여기 있었어?”

들려온 것은 룸메이트의 목소리였다. 잠깐 흠칫했으나 트레이닝 복 차림에 편의점 봉지를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주점에서 오는 기색은 아니었다. 아까의 일을 모르는 사람이라 안심한 희나는 빨개진 볼을 누르며 태연을 가장했다.

“어, 잠깐 손님 애 좀 여기 재우려고. 재워도 괜찮지?”

“그건 상관없는데, 아까 전에 기숙사 앞에서 네 손님 마주쳐서 내가 너 주점에 있을 거라고 위치 알려줬는데.”

“손님? 누구?”

“있잖아, 너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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