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페스티벌 (1)
도한이 사진을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우와, 미친!”
“와, 언니, 고등학교 때도 진짜 이뻤네요!”
“대박이다! 이렇게 생긴 여고생이 키스해달라는데 안 했다고요?”
“남자도 아니야, 이 자식은! 희나 진짜 예뻤는데!”
사진을 보고 경부는 예전의 희나 모습이 떠올랐는지 진혁의 머리를 마구 흐트러뜨렸다.
“이 자식 왜 이리 머리가 풍성충인가 했더니 남성 호르몬이 부족한가 보구만.”
“친구로서 하는 말인데, 너 진지하게 거시기 한번 테스트해봐야 되는 거 아니냐?”
“시끄러워. 여자애들 앞에서 이상한 말 좀 그만해!”
모두들 마구 웃는 사이에서 진혁이 빨개진 얼굴로 경부를 밀어내며 화를 냈지만 셋 다 들은 척도 안 했다.
“여기서 잘 거지? 내일 아침에 소식 있나 체크해!”
“니들 서울 가서 자!”
화를 내기 시작한 진혁의 입을 막고 난장판이 벌어졌다.
마구 웃고 떠들고 술잔도 몇 개 깨먹고 하는 사이에도 혼자 계속 술을 마시던 희나가 어느 순간 풀썩 고개를 수그렸다.
고개를 가누지 못하는 희나를 도한이 발견하고 붙잡았다.
“누나 잠들었다!”
“나…… 나…… 안 자아아.”
“어? 희나 완전 취했나 보네!”
술기운에 머리가 어질어질해서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꼿꼿이 앉아 있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 희나를 쳐다본 진혁이 거북이의 팔에서 빠져나오며 말했다.
“많이 취한 거 같은데. 데려다줘야겠어.”
“야, 너도 술 마셨는데 데려다주긴 뭘 데려다줘? 니 방에다 재워.”
“그래. 미래에게도 외숙모가 필요한 시점…….”
“이상한 말 좀 그만해!”
진혁이 경부와 거북이의 머리를 꾹 누른 뒤 희나 쪽으로 다가왔다.
그가 부축해서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다리가 풀린 희나는 곧 바로 다시 쓰러졌다.
“못 걷겠는데요. 오빠, 일단 업어서 안에다 재워요.”
은영의 말에 진혁은 고개를 끄덕이고 도움을 받아 희나를 업었다. 집 쪽으로 걸어가는 둘을 보고 뒤에서는 휘파람을 불고 난리도 아니다.
“늦게 와도 모르는 척해줄 테니까 천천히 와라!”
“그래, 뭐하면 안 와도 돼!”
장난치는 친구들에게 일일이 반박하는 것도 한심하게 느껴져서 진혁은 한숨을 푹 내쉰 채 걷기 시작했다. 완전히 취해서 늘어진 희나의 몸이 자꾸 흘러내려 업기가 어려웠다.
원두막에서 5분쯤 걸었을 무렵 진혁이 살짝 자세를 고치는데 흔들리는 바람에 꾸벅꾸벅 졸고 있던 희나가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부르르 떨었다.
“선생님……?”
“응?”
“서언생니이이임. 맞아요?”
“어, 나야.”
진혁이 대답했지만 희나는 몸을 뻣뻣하게 긴장시켰다. 그러고는 자신을 업고 가는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듯 손으로 진혁의 얼굴을 매만지다가 안경테를 만지곤 헤헤 웃었다.
“안경, 안경.”
“……안 그래도 깜깜한데 안경 벗기지 마.”
“헤헤헤. 선생님 맞네. 나 업어준 거예요?”
실실 웃더니 희나가 긴장을 풀고 팔로 진혁의 목을 감았다. 그리고 아주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목덜미에 얼굴을 묻더니 깊이 숨을 들이쉬는 바람에 진혁은 하마터면 희나를 놓칠 뻔했다.
“헤헤……. 바보 아저씨 냄새다. 맞네.”
“……바보야, 장난치지 마.”
그러나 진혁의 말에도 아랑곳없이 희나는 계속 향기를 맡고 머리카락을 배배 꼬고 장난을 쳤다.
얼굴이 뜨거워져서 진혁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장난치다가 떨어져. 잘 잡아.”
“헤헤. 우리 어디 가는 거예요?”
“내 방에서 자. 아침에 데려다줄게.”
대답하는 것과 동시에 거의 집에 도착했다.
진혁이 불이 꺼진 집 안을 익숙하게 걸어 들어가 방의 불을 켜자 그의 단정한 방 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희나는 진혁의 어깨에 괴고 있던 턱을 갸웃거리며 물었다.
“헤헤헤. 옛날처럼 같이 자는 거예여?”
“……그럴 리가 없잖아.”
진혁은 한숨을 내쉬면서 큰일날 아가씨를 침대에 얼른 눕혔다.
그냥 내려놓으면 그대로 잠들 것 같아 베개를 머리에 괴어 주고 이불을 덮어 주는 동안 희나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계속 헤헤 웃었다.
“난 원두막에 다시 가볼게. 여기 휴대폰 있으니까 자고 혹시 뭐 문제 있으면 전화해.”
그렇게 말하면서 진혁이 휴대폰을 머리 옆에 놔주는데 희나가 휴대폰 대신 진혁을 똑바로 쳐다보더니 불쑥 물었다.
“공부 안 해여……?”
살짝 꼬인 발음으로 던져 온 뜬금없는 질문에 진혁은 픽 웃었다.
“무슨 공부? 공부는 네가 해야지.”
“미래 내가 봐주께여. 공부해여…….”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빨리 자.”
그러면서 이마를 살짝 때리는 진혁의 손을 희나가 탁 붙잡았다. 그리고 취기가 가득한 눈동자를 깜빡거리면서 느릿느릿 말했다.
“샘은 샘인 게 어울려여어……. 정장 입고…… 재미없는 개그하고오-. 학생들한테 마악- 막 무시당하고…… 쩔쩔매고…….”
“어느 부분이 선생님에 어울린다는 거야.”
진혁은 침대 옆 바닥에 앉아 칭찬 같은 디스로 주정을 부리는 희나의 코를 잡아서 흔들며 쿡쿡 웃었다.
희나는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좀처럼 잡히지 않는 초점을 잡으려고 애썼다. 흐릿하게나마 눈앞에 다정한 눈이 예쁘게 휘어진 채 웃는 것이 보이고, 기분 좋은 낮은 웃음소리가 들린다.
좋아하는 사람과 단둘이 한 공간에 있다. 그게 왠지 안타까워져 참을 수 없는 충동을 느낀 희나가 저도 모르게 팔을 뻗어 진혁의 목을 감았다. 그리고 단정한 얼굴이 당황한 표정으로 끌려와 그녀의 품에 폭 묻혔다. 안경이 눌렸지만 희나는 그를 꼭 끌어안은 채 놓지 않았다.
진혁은 뭉클한 감촉에 목까지 빨개졌지만 희나를 밀어내지는 않았다.
진혁을 한동안 꼭 끌어안은 채 웃던 희나가 귓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나, 나 축제 끝나면 서울 갔다 올게여. 지훈이랑. 지훈이랑…….”
“지훈이랑 뭐?”
“흐으으으. 우리 얘기도 하고, 선생님 공부도…… 하움.”
“희나야?”
횡설수설하다가 희한한 소리를 내더니 꼭 붙잡고 있던 팔이 느슨해졌다. 곧 잠들어버린 희나의 호흡이 규칙적으로 바뀌었다.
희나의 품에서 살짝 벗어난 진혁은 허탈한 듯 웃으며 곤히 잠든 희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하여튼 매번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진혁의 손가락이 가볍게 희나의 이마를 톡 때리자 희나가 인상을 찌푸린다. 깨어나는 듯싶었지만 다시 입을 헤- 벌린 채 잠들어 버린다.
진혁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자 바보 같은 잠든 얼굴이 드러났다. 진혁은 미소를 띤 채 희나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가만히 중얼거렸다.
“넌 진짜 나한테 미안해야 돼.”
보드라운 볼을 잡아당겨 꼬집자 희나가 정체불명의 “으으으흥.” 하는 소리를 낸다.
팔로 턱을 괸 채 진혁은 한동안 잠든 희나의 볼을 찔렀다.
그리고 아주 무거운 발걸음을 떼었다.
***
“언니 전화 왔는데요?”
보혜의 말에 희나의 시선이 옆에 내려놓았던 휴대폰으로 향했다. 액정에 뜬 지훈이란 이름을 보고 희나는 들고 있던 감자 칼을 내려두고 전화를 받았다.
“왜? 나 지금 좀 바쁜데?”
전화를 하면서 다시 감자 칼을 집어 들고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과일 안주는 손이 많이 간다. 이번 축제 내내 사람이 많았다는 말을 듣고 희나는 낮부터 주점에서 쓸 과일들을 미리 잘라두는 중이었다.
[바빠? 나중에 다시 걸까?]
“응. 뭐 급한 얘기야?”
[뭐, 그런 건 아닌데. 오늘 축제라고 했던가?]
“응. 오늘 축제 마치면 바로 올라갈게. 급한 거 아니면 가서 얘기하자.”
그렇게 말하고 있을 때 동아리실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이제 슬슬 준비 시작해야 돼. 남자들은 짐 들고, 여자들은 옷 갈아입고 주점 자리로 내려가자.”
그는 4학년이라 바빠서 동아리에 얼굴을 잘 내밀지 않던 회장이었다. 딱히 권위 같은 게 있을 턱은 없었지만 그의 말에 따라서 다들 하던 작업을 갈무리하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미안. 나 지금 끊어야 돼. 나중에 얘기해.”
뭔가 말하려는 듯한 지훈에게 사과하고 희나는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다른 여학생들과 함께 옷을 갈아입기 위해 앞에 놓인 쇼핑백을 열었다.
안에 든 토끼 귀가 달린 후드를 보고 희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웬 토끼 귀 후드래. 여행 동아리와 아무 상관도 없지 않나?”
“회장 취미래. 근데 귀엽지 않아?”
희나를 제외하고 다른 여학생들은 좋아하는 눈치였다.
희나는 뭐 후드는 안 쓰면 그만이다라고 생각하며 옷을 갈아입고 여학생들과 함께 동아리실을 나왔다.
시골 학교답게 탁 트인 넓은 교정에는 벌써 축제를 위해 천막을 치는 학생들로 분주했다. 그리고 드문드문 마실 나온 동네 노인과 어린아이들도 있었다. 근처 주민들이 놀러 온 것이다.
1학년 때 처음 축제 광경을 보고 희나는 깜짝 놀랐었다. 동네 노인에 아주머니, 아저씨에 어린이들까지 축제 주점에 몰려들어 대학교 축제라기보다는 장터 같은 분위기를 풍겼기 때문이다.
학교 근처 마을 출신 학생들이 제법 많은 데다 학교의 토착화 정책 덕에 주민들이 학교 행사에 구경 오는 일이 잦았다.
이미 북적이기 시작했으므로 준비를 서둘러야 했다. 희나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남학생들 틈으로 끼어들어 가 과일을 세팅하고 만들어 온 간판과 장식을 달기 시작했다.
그렇게 준비를 거의 마칠 무렵 낮에 장을 보러 나갔던 도한과 명환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뭔가를 열심히 찾는 듯하더니 이마를 탁 치며 탄식한다.
“어? 접시랑 종이컵 차에 실어둔 채로 그냥 왔나 보다!”
“내가 갔다 올게.”
힘쓰는 일이 많았으므로 남학생 대신 희나가 나섰다.
도한에게서 차키를 받아 들고 교정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주차장으로 간 희나는 도한의 아버지 차 트렁크를 열었다. 트렁크에는 마트 상자가 세 박스나 남아 있었다.
거리가 좀 되기에 두 번이나 왕복하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종이 접시나 컵이어서 별로 무겁진 않았지만 부피가 엄청나다.
무리해서라도 한 번에 들고 갈 생각을 하고 세 상자를 들고 일어났는데, 높이 쌓인 상자가 위태롭더니 금방 기울어졌다.
떨어트린다. 그렇게 느낀 순간 희나는 움찔해서 눈을 감아버렸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감았던 눈을 뜬 희나는 박스 너머로 보이는 흰 얼굴에 입을 헤 벌렸다.
“선생님?”
“타이밍 대단하지?”
기울었던 박스를 잡고 미소 짓고 있는 것은 진혁이었다. 뜻하지 않게 진혁과 마주친 희나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선생님이 왜 여기에 있어요?”
“여기서 합류하기로 했거든.”
대답하며 진혁은 희나의 팔에서 상자를 두 개 받아 들었다. 시야가 넓어진 희나의 눈에 뒤쪽으로 좀 떨어진 곳에 주차된 진혁의 차가 보였다.
박스 옆으로 드러난 몸을 보니 정장을 입고 있다. 오늘도 교수님을 만나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학교로 바로 온 모양이다.
“이거 어디로 가져가면 돼?”
도와줄 모양이었다. 희나는 어색하게 팔을 들어서 운동장 쪽을 가리켰다. 그리고 둘은 박스를 든 채 함께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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