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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그 너머에는-91화 (91/140)

91화. 수확하는 날 (2)

희나가 입구를 돌아보니 보혜가 예쁘장한 얼굴을 쏙 들이민 채 생글생글 웃으며 팔을 흔들었다.

“언니, 저 왔어요!”

블루베리보다 상큼한 여대생의 목소리가 하우스에 울리자 세 남자는 황급히 자세를 고쳤다.

키가 커 보이기 위해 등을 꼿꼿이 펴고 얼짱 각도를 하면서 가오를 잡는 거북이와 경부를 본 희나가 혀를 차며 입구 쪽으로 다가갔다.

“잘 찾아왔네. 얼른 들어와.”

“꺄아- 생각보다 더 덥네요. 언니, 우리 뭐 하면 돼요?”

“우리가 도움이 될까 모르겠네.”

희나가 호들갑을 떨며 들어오는 여대생을 맞이하려 다가가는데 뒤에서 크흠크흠, 하는 기침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어서 우리를 소개시키라는 압력이 가득 담긴 눈빛들이 장난이 아니다.

희나는 마지못해 세 사람을 소개했다.

“여기는 선생님 친구분들인데 도와주러 오셨어.”

성의 없는 소개에도 원래 성격이 싹싹한 동아리 멤버들은 고개를 꾸벅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천보혜예요.”

“신은영이에요.”

“곽도한입니다.”

보혜와 은영의 인사까지는 헤벌쭉하던 남자들이 도한의 인사는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곧장 자신들의 어필에 들어갔다.

“나는 전승수야.”

“오빠는 박민하야. 민하 오빠라고 불러. 여기 이 짧은 놈은 거북…….”

“조현우야. 야, 둘 다 너무 예쁘게 생겼네.”

거북이가 자신이 거북이라고 소개되기 전에 경부의 말을 자르며 냉큼 끼어들었다.

5년 만에 거북이와 경부의 본명을 처음 알게 된 희나는 입을 턱 벌렸다. 생각보다 이름들이 멀쩡하다.

“난 편하게 오빠라도 불러도 돼.”

“그래그래. 편하게 불러.”

두 서울 남자들은 넉살 좋게 말을 걸었다.

은영과 보혜가 쓴웃음을 짓고 있는 것이 어떻게 봐도 불편해 보여 희나가 나서서 뜯어말리려 할 때였다.

다시 하우스의 문이 열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다들 와 있었네.”

“와- 약사 오빠!”

입구 근처에 슈트를 입은 진혁의 모습이 나타나자 희나의 입가가 가만히 샥 올라갔다.

아니, 하우스 내에 있던 여인들의 입가가 다 올라갔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거북이와 경부의 넉살에도 나오지 않던 오빠란 소리가 진혁을 보자마자 보혜의 입에서 절로 튀어나온 걸 보면 말이다.

“오- 약사 오빠 정장 간지 쩐다아아아.”

보혜가 낮은 소리로 중얼거리는 말에 희나를 포함한 잉여 4인방의 표정이 구겨졌다.

“이야, 유진혁 왔냐? 우리들이 도와주러 서울에서 내려왔다!”

“볼일은 잘 봤냐? 정장 입으니까 인물이 확 사네.”

어쩐지 어색할 정도로 진혁을 반기며 허그를 날린다. 이상해서 희나가 슬쩍 그쪽으로 다가가 보니 아니나 다를까 거북이는 미소를 지으며 복화술로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왜 과수원에서 양복을 입고 다니냐. 빨리 옷 갈아입고 와!”

“지금 막 도착해서 그냥 일단 보러 온 건데…….”

“우린 너 일 도와주려고 여기까지 왔는데 넌 청춘사업도 못 도와줘?”

“썩 나가서 옷 갈아입고 와. 촌스러운 거 입어. 그 녹색 추리닝!”

진혁은 살짝 한숨을 쉰 뒤 알았다는 듯 손을 까딱거렸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으러 돌아서려다가 뭔가를 깨닫고 말을 꺼냈다.

“어, 그래. 그런데 노지 재배 쪽 수확하시는 분들은 이미 반쯤 끝나 가던데…… 여긴 어째…….”

진혁의 시선이 아직도 귀퉁이에서 전혀 작업이 진전되지 않은 하우스를 한번 훑는 것을 보고 거북이 황급히 그를 밀어냈다.

“이제 막 하려던 참이야. 넌 빨리 가서 옷이나 갈아입고 와! 이 형님들한테 다 맡기고!”

호언장담은 했으나, 거북이와 경부는 보혜와 은영을 데리고 노닥거리느라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남초 현상으로 소외된 승수와 도한이 2라인씩 끝낸 덕에 잉여 라인이 있음에도 해가 지기 전에 무사히 일이 끝났다.

생각보다 훨씬 두둑한 일당에다 시골 학교 축제에서 쓰기에는 과분할 정도의 과일을 뭉텅이로 받았다. 횡재에 세 사람의 입이 이미 귀에 걸렸는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주변에 식당도 별로 없어서 거의 기숙사 밥만 먹어 온 네 사람은 진혁의 어머니가 원두막에 차려놓은 불판을 보고 거의 열광하다시피 했다.

다들 시원하게 탁 트인 원두막에 올라가 즉시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우와, 대박이에요! 우리 매주 일하러 오면 안 돼요?”

“아, 진심 존맛이네요! 나도 매주 올래요!”

“와 주면 고맙지. 많이 먹어.”

진혁의 어머니가 준비해준 고기와 밑반찬에 거북이와 경부가 서울에서 사온 바비큐 재료와 술까지 꺼내 왔다. 하루 종일 노동하며 서로 친해진지라 술이 돌아가자 분위기는 바로 깊숙이 무르익었다.

“축제에서 주점 낸다고? 언제 하는 거야?”

“축제는 이번 주 목금토인데 우리 주점은 금요일에 해요! 오빠들도 올 수 있어요?”

“우리 가도 돼?”

“와도 되죠! 안 그래도 시골 대학 축제라 젊은 사람들도 별로 없는데 오빠들 놀러 오세요!”

보혜가 애교스럽게 권유하자 곧 세 오빠들의 고개가 자동으로 끄덕여진다.

“갈게, 갈게! 보혜가 오라는 건데 무슨 일이 있어도 가야지!”

“……너네 출근 안 해?”

“그깟 출근이 문제야? 연차 쓰지 뭐!”

남의 대학 축제에 오려고 연차를 쓰겠다는 서른 살 친구들을 보며 진혁이 쓴웃음을 지었다.

보혜가 눈을 빛내며 그런 진혁을 쳐다보다가 물었다.

“진혁 오빠, 오빠도 오실 거죠?”

“어? 나?”

보혜의 지목에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짓는 것이 그는 안 올 생각이었던 것 같다.

“바로 앞이잖아요! 오빠네 과일이니까 오빠는 오시면 공짜로 해드릴게요.”

“인심 쓰는 척하기는. 너 이 형님 앞에다 앉혀놓고 손님 끌려고 그러지?”

도한이 옆에서 참견하자 정곡을 찔린 보혜가 쏘아보며 팔을 팡팡 때렸다.

집게를 든 채 고기를 굽고 있던 은영도 열심히 진혁에게 권유했다.

“우리 과 애들이 오빠 얼마나 보고 싶어 하는데요! 꼭 오세요!”

“가고 싶지만 저녁에는 미래를 봐야 해서.”

“에이, 데리고 오면 되죠. 요 앞인데~! 희나야! 너도 오라고 해!”

자기는 선생님이라고 부르는데 보혜와 은영이 거리낌 없이 오빠 오빠 하는 것을 보고 조금 입을 내밀고 있던 희나는 은영의 재촉에 딴 데를 보며 마지못한 듯 말했다.

“집에서 할아버지같이 있지 말고 와요. 미래도 축제 오고 싶댔어요.”

“야, 희나가 오래잖아. 다 같이 가자! 나도 공짜 술 좀 먹자!”

승수가 어깨를 툭툭 치며 권하자 진혁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있던 거북이가 넉살좋게 술잔을 내밀었다.

“희나, 술 한잔 받아! 마시고 싶을 텐데.”

희나는 술잔을 받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자 다들 신나게 술잔을 부딪치며 따라서 마시기 시작했다.

모두에게 술이 몇 잔씩 돌아가 조금 얼근하게 취하자 보혜가 눈을 깜빡거리면서 희나를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쳐다봐?”

“언니이- 나 궁금한 게 있는데에에에-.”

“뭐?”

보혜는 은영과 묘한 눈짓을 주고받더니 신나는 목소리로 물어 왔다.

“진혁 오빠랑 언니랑 둘이 무슨 사이예요?”

희나의 얼굴이 조금 빨개지고 진혁이 마른기침을 시작했다. 쑥스러워서 당황한 희나는 손을 설레설레 저으며 부정했다.

“별로……. 아무것도 아니야.”

‘아직은’이란 말은 삼켰다.

곁눈질로 보니 진혁은 물을 마시고 있다.

거북이가 어색한 둘을 보고 호탕하게 웃더니 말을 꺼낸다.

“너네 얘가 희나 고등학생 때 교생이었던 거 알아?”

“네, 희나한테 들었어요.”

“그럼 얘가 교생 선생님 집에 육탄 돌격했다는 것도 알아?”

“네? 육탄 돌격이요?”

무슨 말을 할까 불안해하던 희나가 빨개진 얼굴로 거북이에게 상에 놓인 상추를 한 장 집어 던졌다.

“육탄 돌격은 무슨! 그런 거 아니잖아요! 선생님 뭐라고 말 좀 해봐요!”

“이미 5년간 아니라고 한 백번은 말한 거 같은데…….”

진혁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하긴, 말한다고 들을 인간들이 아니지.

이제 승수까지 포함해서 네 명은 아주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거북이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골치가 아파 희나는 앞에 놓인 술잔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 녀석이 교생 실습 나갔을 땐데 갑자기 동아리 방에서 자고 있길래 우리가 캐물었지! 그랬더니 희나가 재워달라고 갑자기 찾아왔다고 하더라고!”

“우와, 드라마 같다! 그래서요?”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고 하길래 술 진탕 먹여서 집으로 끌고 갔었지! 그리고 그 다음 날부터 둘이 한동안 같이 살았을 걸!”

“꺄아- 웬일이야! 순정 만화 같아요! 둘이 뽀뽀했어요?”

취기가 올라 온통 빨개진 보혜가 주먹까지 붕붕 휘두르며 잔뜩 흥분한 말투로 물었다.

옆에서 몰입해서 듣고 있던 승수가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젓가락으로 탁자를 툭툭 쳤다.

“뽀뽀는 했겠지. 그럼 안 했겠어?”

“아냐. 진혁이 놈 고자력을 생각하면 있을 수도 있는 일이야.”

“그래도 했겠죠! 요즘 세상에!”

성인이 된 후 음담패설의 화신 같은 지훈이네 패거리들과 술자리를 하도 많이 해서 희나도 나름 면역이 있긴 했지만 진혁과 농도 짙은 드립으로 엮이는 것은 어쩐지 너무 어색했다.

진혁이 당사자들을 앞에 두고 지들끼리 불타오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마. 그런 거 없었어.”

“안 덮쳤다고요? 미쳤다. 거짓말. 언니 저거 진짜예요?”

같이 살 때는 딱히 아무 일도 없었다. 뭐 둘이 맨날 끌어안고 잤지만. 그리고 선생님이 이마에 뽀뽀도 했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창피해져서 희나는 대답 대신 괜히 술잔만 들이켰다.

어색함을 피하려 맥주를 연거푸 원샷 하자 주변에서는 박수를 쳐가며 좋아했다. 어쨌든 취기가 올라오니 쪽팔림의 농도가 옅어졌다.

얼굴이 따끈따끈하고 기분이 좋아진 희나의 어깨에 은영이 기대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키스 정돈 괜찮잖아-! 왜 안 했어. 진혁 오빠 이렇게 멋있는데.”

“선생님이 안 해줬으니까아…….”

진혁에게 키스해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한 걸 떠올리면서 희나가 느릿느릿하게 웅얼거렸다.

아주 작은 목소리였지만 다들 들었는지 좌중이 엄청나게 조용해졌다.

“내가 해달라고 했는데…….”

옆에서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는 단정한 얼굴을 보며 희나는 볼을 부풀렸다.

그 말을 듣자 좌중이 발칵 뒤집어졌다. 경부가 진혁의 어깨를 짤짤짤 흔들며 다그치기 시작했다.

“그런 일도 있었어?”

“이런 미친 복 받은 고자 새끼! 그걸 안 하냐!”

진혁이 시달리는 사이 도한이 볼을 부풀리고 있는 희나를 유심히 보다가 얼굴을 요상하게 찌푸리더니 물어 왔다.

“누나 성형했어요?”

이건 또 무슨 질문이람. 희나는 얼굴을 붕붕 휘저었다.

“안 했어.”

“진짜 안 했어요?”

“쟤 안 했어! 고등학교 때 되게 예뻤는데……. 아, 나 사진 있는데, 사진 볼래?”

“오빠가 내 사진을 왜 가지고 있어요?”

소란을 피우는 와중에 도한과 희나의 대화를 들었는지 거북이가 나섰다.

희나의 느릿느릿한 질문은 묵살당하고 곧 화면에 희나가 교복을 입고 찍은 사진 몇 장이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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