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수확하는 날 (1)
상큼한 블루베리의 향이 감도는 하우스 내부. 희나는 주말을 맞아 진혁을 돕기 위해 내려온 거북이, 경부 그리고 승수와 함께 수확을 돕고 있었다.
그러나 한쪽 귀퉁이에서 시작한 작업의 진척 속도는 그다지 좋다고 할 수 없었다. 맨 앞쪽에 서서 열심히 진도를 나가야 할 거북이의 손놀림이 영 신통찮기 때문이었다.
결국 참다못한 경부가 거북이에게 소리를 빽 질렀다.
“아, 거 휴대폰 그만 들여다보고 손 좀 움직여라!”
그러자 거북이의 둥근 얼굴이 금방 찌푸려지더니 깊은 탄식을 토해 낸다.
“으헝-. 아영이가 연락을 안 받아! 왜 답장이 없지!”
아영은 희나가 소개해준 같은 쇼핑몰의 모델이었다. 일주일 전쯤에 만난 후 계속 연락 중인 것 같았다.
경부가 거북이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며 버럭 소리쳤다.
“누가 아침 여덟 시부터 문자질을 한다고 답장 타령이야! 빨랑 일이나 하지 못해?”
그러고 나서 휴대폰을 덥석 빼앗아 드는 것을 보고 뒤에서 승수와 희나는 내심 속 시원한 표정을 지었다.
거북이는 자기가 잘못했다는 자각은 있는지 휴대폰을 돌려 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도리어 실실 웃으면서 휴대폰을 빼앗아 간 경부를 약 올렸다.
“왜 질투 나서 그러냐?”
“질투는 무슨 똥 같은 소리야.”
“넌 진작에 차였지만 난 아직 연락 중이었단 말이야.”
“시끄러워! 차이긴 누가 차였다는 거야! 서로 별로였거든?!”
“별로는 개뿔. 이쁘다고 헬렐레해놓고서는. 쯧쯧. 가엾은 녀석.”
희나가 경부에게도 그가 얘기했던 단발머리 모델을 소개했었는데 잘 안 된 듯 보였다.
경부는 이를 북북 갈고는 거북이를 노려보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아무리 이쁘다고 해도 너무 사람을 지갑 취급한단 말이야. 만난 지 일주일 만에 툭하면 뭐 가지고 싶다고 카톡하고 안 사준다고 하면 잠수 타고. 그래서 그냥 내버려둔 거지 차인 거 아니거든?”
“뭐 그 정도급 만나면 돈 들어가는 거야 당연한 거지.”
“그래도 몇십짜리 선물을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몇 개씩이나 사 줄 수야 있나. 내가 무슨 재벌 2세도 아니고. 게다가 나보다 돈도 훨씬 잘 버는데 사 달라는 것부터가 좀.”
“우와-. 서울 여자들 무섭네. 꽃뱀 많구만.”
옆에서 듣고 있던 승수가 입을 쩍 벌리며 끼어들었다. 일부러 꽃뱀이란 단어에 힘을 줘 말하는 것이 자신을 놀리려고 하는 것 같아 희나가 옆구리를 꼬집었다.
“서울 여자가 아니라 걔네가 그런 거지 뭔 꽃뱀 타령이에요. 그리고 사 달란다고 사다 바치는 사람들이 더 문제지.”
“이야- 꽃뱀이 꽃뱀 두둔한다!”
“대체 누가 꽃뱀이야! 밭일하고 애 봐주는 꽃뱀도 봤어요?”
희나가 걷어차려 했지만 승수는 히죽히죽 웃으면서 슬쩍 피했다. 그러자 경부가 밀짚모자를 쓴 희나의 예쁘장한 얼굴을 쳐다보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하아. 그러게. 꽃뱀이 너 같으면 얼마나 좋겠냐. 저런 이쁜이가 밭 갈아 주고 있고, 유진혁 이 복 받은 새끼! 아오, 짜증 나!”
“질투하지 마라. 머리털 더 빠진다.”
약점인 탈모를 언급당해 분노한 경부가 거북이에게 베어 허그를 먹이며 길길이 날뛰었다.
옆에 서 있다가 함께 얻어맞은 승수까지 합세해 한동안 소란을 부리다가 다들 희나에게 등짝 스매시를 한 대씩 맞고서야 다시 작업에 복귀했다.
소동 덕에 부러진 블루베리가 잔뜩 달린 가지 하나를 집어 들고 상품을 골라내던 거북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승수에게 물었다.
“근데 왜 우리들만 일하고 있는 거야? 유진혁 놈은 어디 가고 왜 코빼기도 안 보여?”
진혁이 내려오고 나서 자주 드나든 탓인가 동갑인 승수와도 말을 놓는 사이가 되었다.
질문을 받은 승수 대신 희나가 대답했다.
“일이 있다고 교수님 만나러 갔대요.”
이미 오전 일곱 시쯤에 진혁의 집에 갔다가 진혁의 어머니에게 들은 말을 전하자 거북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교수님? 웬 교수님?”
“나도 잘 몰라요. 여기서 무슨 학회 같은 걸 한다던데.”
희나의 대답을 듣고 제약 회사에 다니는 경부가 블루베리 나무에 박고 있던 얼굴을 떼어내며 말했다.
“아, 나도 몇 번 전화 받았는데. 박남호 교수님이던가? 이번에 이쪽으로 오셨다던데.”
“박 교수님? 이쪽이라니?”
“충남대 교수로 왔다는 말을 들었어.”
“서울대 교수에서 충남대 교수로 갔다고? 왜? 나이도 젊지 않나?”
아무래도 국내 최고 대학의 교수가 타 대학으로 옮겨 가는 것은 결코 흔히 있는 일이 아니다. 경부가 거북이의 당연한 의문에 찬찬히 대답했다.
“글쎄, 자세한 건 잘 모르지만 워낙 성향이 강경해서 학내 주류 파벌에서 밀려났었지, 아마? 실적 빵빵한 부교수인데 정교수 임용이 안 될 거라는 소문이 있었어.”
“그럼 파벌 때문에 밀려나서 온 거야?”
“그 정도는 아닐 거야. 젊은데 실력은 아주 확실해서 약전 쪽 연구 강화하는 차원에서 이쪽 대학에서 모셔 가다시피 했다고 들었어. 거의 학과장급으로 간 걸로 알아.”
경부는 생명과학부 전공이라 약대 쪽에도 상당히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경제학과 출신인 거북이는 잘 몰랐던 이야기인지 이것저것 물어보았고, 덕택에 은근히 궁금하던 희나의 궁금증도 묻어서 해결할 수 있었다.
“호- 그래? 근데 그럼 나름 쓸 만한 사람 많을 텐데 굳이 진혁이는 왜 불러 간 거야?”
“뭐, 외부 임용 교수니까 기존 교수들이랑 마찰도 있을 거고……. 이런저런 이유로 자기 사람 모으려는 것 같은데. 진혁이 학부 때부터 무진장 예뻐했으니까.”
“예뻐했다고 한들…… 이미 졸업하고 개업까지 했는데.”
“개업이라 봤자 망해가던 시골 약국 인수한 게 다잖아. 전에 진혁이한테 들었는데, 학교로 돌아오라고 난리라더라. 자기가 다 알아서 해줄 테니 밑에서 박사까지 하라고.”
희나도 비슷한 이야기를 진혁 본인에게서 들은 적이 있음을 떠올려 냈다.
거북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크게 물었다.
“뭐야, 그럼 교수 임용시켜준다는 거 아니야? 어지간히 이뻐 보였나 보네!”
“선생님이 교수가 될 수 있다고요?”
거북이의 탄성을 듣고 희나가 흰 얼굴을 불쑥 내밀면서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경부가 볼을 긁적이면서 대답했다.
“뭐 일단 될 수야 있겠지만 공부가 장난이 아니라…… 교수 임용되려면 박사 학위를 따야 되는데 아직 석사 학위도 없잖아. 최소 4년은 걸릴 텐데, 나이도 있고…….”
“교수가 좋기야 하지만 학위 따는 게 장난도 아니고 이미 약사 면허도 있는데 무리할 필요는 없지. 충남대라고 해도 여기서 한 시간 반도 넘게 걸릴 테고, 거기다 미래가 있으니까 힘들지 않겠어?”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으나 희나는 커다란 눈을 굴리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진혁이 자신 때문에 포기한 교단에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 거다.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희나를 힐끔 쳐다본 승수가 툭 물었다.
“뭘 그렇게 생각하냐? 너 또 쓸데없는 생각 하고 있지?”
“또 쓸데없는 생각이라뇨? 내가 언제 쓸데없는 생각을 해요?”
“아님 말고. 그나저나 유진혁 아직도 못 넘어뜨렸냐?”
“……넘어뜨리긴 뭘 넘어뜨려요? 이 에로 아저씨가!”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열 번 넘게 찍고 있는데 나무를 못 넘겼냐는 말이지.”
승수와 희나가 투닥거리기 시작하자 옆에서 거북이와 경부도 잔뜩 호기심 섞인 눈으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러고 보니 어떻게 된 거야? 이제 좀 잘 지내나 본데. 진혁이 놈이랑 잘 풀렸어?”
“뭐…… 그냥저냥…….”
희나는 괜히 블루베리가 잘 안 따지는 척하며 고개를 수그렸다.
아직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관계다. 조금씩 속내를 교환하기 시작했지만 그저께 그렇게 돌아오고 나서 잘 들어갔냐는 진혁의 메시지에 짧게 답장한 것이 전부였다.
희나는 우선 다음 주 주말에 지훈과의 관계를 깨끗이 정리하고 그의 집에서도 나온 후에 진혁에게 제대로 고백해볼 생각이었다.
고백이라니, 생각만 해도 부끄럽고 설레고 진땀이 나서 자다가도 일어나 이불 킥을 할 정도로 긴장된다.
희나가 조금 어물어물 얼버무리자 잘 안 됐다고 생각한 건지 거북이가 희나의 머리카락을 위로하듯 토닥토닥 두들겼다.
“걱정 마. 어느 남자가 널 차겠냐. 진혁이 놈이 계속 뻗대면 오빠한테 와, 알았지?”
“희나야, 저놈보단 오빠가 훨 낫지. 나한테 먼저 와. 그나저나 그놈은 여기까지 내려와서도 고자짓하고 있는 거야?”
“고자가 어딜 가겠어? 이런 애를 옆에 그냥 내버려 두고 있었는데.”
“왜 그렇게 고자가 된 걸까.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나름 카사노바였는데. 여자 친구도 자주 바뀌고.”
승수의 발언에 나머지 세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천하의 유진혁에게 카사노바의 과거가 있다니.
그러나 그 말의 진위 여부를 캐어물으려는 순간 전화가 왔다. 자기 얘기를 하는 걸 알기라도 한 것처럼 타이밍 좋게 걸려온 진혁의 전화였다.
살짝 일어나서 하우스 밖으로 나온 희나는 액정에 뜬 이름만 보고도 괜스레 얼굴을 붉히면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 일어나 있었네. 이따가 몇 시쯤에 올 거야?]
그저께 했던 대화의 여파가 가신 듯 딱히 평소와 다르지 않은 말투였다. 희나는 진혁이 어색하지 않게 대하는 것에 내심 안도했다.
“벌써 선생님 집에 와 있어요. 거북이 오빠랑 경부 오빠도 왔어요.”
[벌써 왔다고?]
“네. 지금 일하고 있어요.”
놀란 듯하던 진혁의 목소리가 금세 미안한 어조로 바뀌었다.
[자리 비운다고 미리 말을 했어야 되는 건데. 미안하네.]
“내가 맘대로 온 건데요, 뭐. 그나저나 오늘 늦게 와요?”
[아니, 교수님 역까지 모셔다 드리고 바로 집으로 갈 거야. 아마 열 시쯤이면 도착할 거 같아.]
열 시면 희나와 친구들이 원래 도와주러 오기로 한 시간이었다.
원래 맞춰서 올 생각이었구나.
곧 진혁이 온다는 생각을 하자 기분이 좋아져서 희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러나 실실 웃으면서도 반가운 기색을 내비치는 대신 새침하게 물었다.
“그런데 전화는 왜 한 거예요? 뭐 시킬 일 있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어차피 나온 김에 학교로 가서 태워 오려고 했지.]
기숙사에서 약국은 가깝지만 오솔길이 길고 과수원이 넓어서 꽤 걸어야 하기에 태워 가려 한 것이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기숙사에 있을걸. 희나는 허공에 주먹을 살짝 내려치며 아쉬워했다.
[그럼 혹시 미래 일어나면 잘 부탁해. 조금 있다가 보자.]
“네. 빨리 와요. 보…… 볼일 잘 보고요.”
[응. 이따가 봐.]
쿡쿡 웃는 듯한 목소리가 들리고 전화가 끊겼다.
희나는 빨개진 뺨을 어루만졌다. 하마터면 무의식중에 ‘빨리 와요. 보고 싶으니까’라고 말해버릴 뻔했다.
희나가 ‘이 정도면 중증이네’ 하고 중얼거리면서 하우스로 들어가자 그새 휴대폰을 빼앗아 들고 카톡을 확인하는 거북이와 일하고 있는 두 남자가 보였다.
“아, 아영이도 글렀나 보다. 그저께 아는 사람들이랑 술 마시러 간다고 하고 그 후로 답장도 없어.”
거북이는 한숨을 확 내쉬면서 포기한 듯 휴대폰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경부는 고소해하며 킬킬 웃다가 자신도 연락 끊겼음을 떠올리고 처량한 목소리로 물었다.
“희나야, 다른 아는 언니들 없어?”
“이제 모델은 소개 못 해줘요.”
지훈과 정리할 생각인데 지훈 쇼핑몰 소속 모델들에게 소개팅을 주선하고 다닐 순 없다. 희나의 말을 들은 거북이가 진저리를 치며 고개를 붕붕 휘저었다.
“모델은 지긋지긋해. 적당히 이쁘고 착하고 참한 언니 없냐?”
희나는 당장 라이벌인 어린이집 선생을 떠올렸다.
이 동네 먹이 사슬 최상위권이지만 이 둘은 동네 아웃라이어. 서울대 졸의 엘리트에 살짝 키작남이라거나 탈모라거나 단점이 있긴 하지만 둘 다 얼굴은 아주 훈남이다.
그러나 승수가 그런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무서운 표정으로 쳐다보자 희나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삼키고 말았다. 그렇지 않아도 시골 동네의 귀한 아가씨들을 외부로 반출하는 것에 대한 분노가 담긴 얼굴이었다.
“으어어어어 외롭다! 여자들이 필요해!”
“솔로로 너무 오래 지냈어! 연애가 하고 싶다!”
“농촌 총각 앞에서 불평하지 마라! 그래도 거긴 여자나 많지-!”
외로운 세 남자의 아우성을 들어 가며 작업을 조금 진척시키며 노닥노닥거리고 있은 지 얼마나 지났을까.
하우스 문이 열리며 바람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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