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기로 (2)
뒤척일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는 낡은 기숙사 침대에 누운 채 희나는 아주 오랫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간간이 짧은 잠에 빠져들 때마다 싫은 꿈을 꾸었다. 지난 2년간 벌써 몇 번이나 꾼 꿈이다.
《미안해.》
《괜찮아. 사실 안 괜찮지만.》
희나는 침대에 앉아 있었고, 지훈은 그녀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리고 지훈은 눈물을 흘리고 있다.
장면을 보는 것만으로 단번에 인상이 찌푸려지며 마음에 통증이 느껴진다. 그 통증 덕에 간신히 옅게 든 잠에서 깨어나 버리고 만다.
몇 번이나 꿈을 꾸고 깨어나길 반복한 희나는 진저리를 내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 기세에 이층 침대의 위층에 잠들어 있는 룸메이트가 작게 짜증을 내는 소리가 들린다.
공동으로 사용하는 기숙사에서는 마음껏 심란해할 자유도 없다.
잠옷 위로 카디건을 걸쳐 입은 채 희나는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그러나 시골구석에 위치한 기숙사를 나온다고 한들 딱히 갈 곳이 있을 리 만무하다.
희나는 아직까지 한참 어두운 바깥으로 걸어 나왔다. 5월이라 해도 새벽은 쌀쌀하다. 기숙사 앞 자판기에서 따뜻한 커피를 뽑아 들고 희나는 어슴푸레한 가로등 아래의 벤치에 걸터앉았다.
희나가 계속 꾸는 꿈은 지훈과 희나가 헤어지던 날의 장면이다. 둘이 앉아 있던 침대는 두 사람이 3개월이나 함께 사용하던 침대다.
연애 1년. 동거 6개월. 그리고 한 침대를 사용한 것이 3개월.
두 사람은 스무 살이었다. 지훈은 희나를 깊이 좋아했고, 희나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그가 감정만이 아니라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한다는 것도.
동거를 시작하고 어느 날 밤인가부터 침대에 들어와서 손을 잡고 함께 잠들기 시작했을 때 이미 그것은 짐작이 아니라 확실한 사실이었다.
그는 줄곧 잠들지 못한 채 희나의 작은 뒤척임에도 침을 삼켰고, 맞잡고 있는 손은 초조한 듯 희나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단순히 얼굴을 내려다보는 표정,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손놀림, 내쉬는 숨결 하나하나에서 떨림과 열기, 그리고 열망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끝내 육체적인 관계로 갈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희나에게 있었다.
지훈은 이미 희나를 만나기 전부터 어린 나이임에도 상당한 경험이 있었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정확히 알고 있던 그는 나날이 참기 힘들어했다.
그러나 희나는 지훈이 그런 욕망을 내비치는 것들이 무섭고 꺼림칙하고 싫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가 옆에 누울 때마다 암담한 기분이 들었다. 키스를 하는 것도 피하고 그가 몸에 손을 대려고 하면 바들바들 떨었다. 그런 희나를 지훈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사실 안 지 오래됐어도 사귀기 시작했을 땐 겨우 스무 살. 육체관계가 없다고 해도 썩 이상한 나이는 아니다. 이제 갓 소녀를 벗어난 경험 없는 여자가 두려워하는 것은 드문 일도 아니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희나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필요하다면 계속 기다릴 테니 무서워할 것 없다고 안심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희나는 스킨십에 점점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거부감이 더 악화되고 있었다.
오히려 함께 잠들게 된 후로 전에는 그럭저럭 받아들였던 키스나 포옹까지 불편하게 여기게 되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서로 알게 되었다. 희나가 그저 처음이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감정이 언제까지라도 변하지 않을 거란 것을.
남자의 손길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지훈의 손길을 원하지 않는 것이란 것을.
희나가 지훈과 사귀었을 때는 이미 진혁을 만나지 못한 지 2년 가까이 지나 재회에 대한 가능성을 거의 포기했을 때였다.
그래서 지훈을 받아들이는 것에 마음을 딱히 닫고 있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녀는 무엇이든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자신을 괴롭히는 고통스러운 감정에서 도망치고 싶어 했다.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 남자를 그리워하면서 괴로워하느니 깨끗이 지우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만큼 시간이 지나도 몸에 새겨진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다.
희나는 자신을 감싸 안는 팔에서 진혁에 대한 향수와 함께 차이를 느꼈다.
진혁의 품에 파고들어 팔에 안겨 있으면 따뜻하고, 안락하고, 행복했다. 어떤 싫은 일이 있어도 넓은 품에 고개를 묻으면 반드시 찾아오는 기분 좋은 설렘과 몸을 달구는 열기에 다른 모든 것은 아무래도 좋은 기분이 되었다.
하지만 지훈의 팔이 자신의 몸을 감아왔을 때의 감정은 깊이 고찰해볼 필요도 없이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희나는 아무리 애정을 받아도 지훈의 여자가 될 수 없을 거란 걸 확신하게 됐다. 점점 어색해지고 함께 있는 게 숨이 막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는 위태롭게 계속 이어졌다. 희나는 끝낼 용기가 없었고 지훈은 희나를 포기하지 못했다.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극에 달한 어느 날 밤, 아무것도 아닌 문제에 둘 다 격하게 반응해서 싸웠다.
“하나하나 그렇게 반응하지 좀 마.”
“너나 그러지 마. 제발 나 좀 내버려 둬. 싫으면 네 방으로 돌아가면 되잖아.”
“나랑 있는 게 그렇게 싫어?”
“너도 싫잖아. 나도 네 옆에 있기만 해도 숨이 막혀. 그냥 나갈래. 이제 이렇게는 못 살겠어.”
한 번도 희나에게 화낸 적이 없이 언제나 괜찮다고만 말하던 지훈은, 그녀가 나가겠다고 말하자 정말 화가 난 것 같았다. 잔뜩 퍼붓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뭐라 말하는 대신 입술을 깨문 뒤 집을 나가 버렸다.
그렇게 집을 나간 지훈은 해가 뜰 무렵에야 돌아왔다. 그는 술 냄새를 풍기며 들어와 침대에 누운 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던 희나의 옆에 누웠다. 그리고 잔뜩 혀가 꼬인 말투로 다른 여자와 자고 왔노라고 희나에게 말했다.
주정처럼 “나가지 마. 대신 이제 나랑 헤어져도 괜찮아.”라고 몇 번이나 말한 뒤 그는 희나의 옆에서 그대로 잠들었다.
잠든 지훈을 옆에 두고 희나는 울었다. 사귀고 있던 남자 친구에게 배신을 당해서가 아니라 결국 상황을 여기까지 몰고 와버린 것에 대한 자책감에서였다. 솔직히, 헤어져도 괜찮다는 말에 안도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희나는 담담하게 헤어지자고 말했고, 그 말을 들은 지훈은 희나를 끌어안고 울었다.
희나가 조금이라도 화내는 걸 바랐을 거다.
깨어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헤어지자 말하는 희나를 보고 그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정말로, 아주 정말로 아픈 표정을 지었다. 아주 오랫동안 모르는 척하며 묻어두려 했던 희나의 감정에 결국 직면해버린 거다.
그녀는 남자가 우는 걸 보는 건 처음이었지만 꼴사납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마음이 아파서 계속 마주 안고 있었다. 바람을 피운 건 지훈인데 상처는 지훈에게만 남았다.
그 뒤로 지훈은 한동안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와서 만나고, 작별 인사를 하면 희나가 떠날 것이란 걸 알기라도 하듯이.
희나는 그가 오지 않는 집에서 아주 오래 기다리다가 어떤 분기를 놓친 채 그의 옆에 남게 되었다.
헤어지고 난 뒤 지훈은 늘 여자를 달고 살았다. 그리고 희나에게 부적절하게 손을 뻗어오는 일 없이 늘 입버릇처럼 친구라고 강조하며 거리를 두었다.
그러나 희나는 지훈이 그렇게 편력을 부리고 다니는 게 자신을 옆에 붙들어두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진지한 마음을 내비치면 희나가 떠날 것을 알기 때문에, 일부러 남녀 관계가 아니란 걸 과시하듯 주변에 여자들을 두는 거라고.
헤어졌지만 지훈의 곁을 떠날 기회를 놓쳐버렸고, 그게 편했기에 희나는 그냥 그 관계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대로 지훈의 옆에 있어도 줄곧 평행선일 뿐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언제까지고 서로의 마음이 교차하지 않을 이 관계는 이상하다. 정말 좋아해서인지, 아니면 그냥 집착이 되어버린 건지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건 어느 쪽이든 건강한 관계는 아니란 것이다.
희나도 이대로 방치해서 좋을 게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자신을 위해서도 그랬지만 지훈도 이제 이런 이상한 관계에서 자유로워져야 할 필요가 있다는 걸.
그가 다른 여자에게 진심이 되지 못하는 건 자신이 어설프게 주변에 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자각이 있었다.
하지만 계속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녀는 지훈의 옆에 있는 것이 솔직히 안락했고, 가지 말라는 지훈을 굳이 뿌리치고 싶은 의욕이 강하지도 않아서 떠나지 못했다.
진혁이 없을 때는 대체로 감정들이 명확하지 않았다. 붕 뜬 것처럼 정말 견딜 수 없는 일이 아니면 그저 받아들였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살아지는 대로 살아왔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는 희나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무릎을 꼭 끌어안은 채 빽빽하게 나무가 심어진 화단을 쳐다보며 희나는 지훈과의 관계를 정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그렇게 결론을 내려도 머리가 깨끗해지긴커녕 여태껏 미뤄오다 비로소 직면한 많은 현실적인 문제들에 머리가 더욱 지끈지끈 아파오기만 했다.
5년은 정말 긴 시간이다. 그 시간 동안 희나의 삶은 지훈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녀의 삶에서 지훈이 연관되지 않은 부분을 찾기가 더 힘들 지경이었다.
우선 그녀의 남동생인 희원은 5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지훈의 집에서 살면서 현상이 따로 운영하는 곱창집에서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죽은 후 혼자 살며 악착같이 학교를 다니고 이모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희나와 달리 희원은 곧장 학교를 그만두었다.
물론 그는 희나가 지훈과 사귀지 않던 시기에도 지훈과 함께 살고 있었고, 함께 보내는 시간이 희나보다 훨씬 기니까 둘 사이에 희나와 상관없는 유대가 생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훈이 과연 두 사람을 완전히 구분해서 생각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희원이 지훈과 현상의 지원을 떠나 혼자서 살아갈 수 있을지 생각하면 희나는 난감하기만 했다. 자포자기해서 자신의 아버지가 걸은 길을 다시 걷지 말란 법도 없는 거다.
뭐 그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 없이 살아온 자업자득에 가까우니 희원 본인이 알아서 하게 내버려둔다고 해도 희나 본인도 문제였다.
지훈의 쇼핑몰을 그만두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을까.
3년간 고소득을 올린 데다가 원래부터 악착같은 희나는 3년간 상당한 금액을 저금해두었다. 하지만 앞으로 3년 가까이 남은 대학 생활을 생각하면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장학금을 받을 수 있을 거 같지도 않으니 대학교 등록금도 내야 하고 돈 들어갈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다. 어떻게든 소득이 없어도 저금해 둔 돈으로 버틸 수는 있겠지만 그녀도 여태껏 누려온 경제적 안락함은 포기해야 했다.
그렇다고 진혁에게 경제적으로 폐를 끼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뭔가 일이라도 하고 싶지만 이 주변에 아르바이트 자리 같은 건 가뭄에 콩 나듯 하나 있을까 말까다.
잠시 서울을 왔다 갔다 하며 다른 곳의 피팅 모델을 하는 방법도 떠올렸지만 희나는 곧 고개를 저었다.
지훈만큼 고소득에 시간과 관리까지 하나하나 배려해주는 곳이 있을 턱도 없거니와, 차마 지훈의 일을 그만두고 다른 쇼핑몰로 옮기는 짓은 할 수 없었다. 그런 짓을 하지 않아도 아마 넘칠 정도로 상처를 주게 될 테니까.
“아, 싫다……. 진짜.”
다 마신 커피 캔을 찌그러트리며 희나는 질색하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경제적 문제도 크지만 역시 가장 직면하고 싶지 않은 문제는 이렇게 말하고 나면 지훈을 이제 다시는 볼 수 없게 된다는 거였다.
그는 재미있고, 센스도 좋고, 서글서글하고 멋진 녀석이다. 그녀는 진혁보다 훨씬 더 긴 시간 지훈과 함께 있었다. 바람을 피웠어도 얼마만큼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그녀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이제 희나에게도 지훈은 돈을 떠나서 끊고 싶지 않은 소중한 인연이었다. 그런 사람을 다시 못 보게 될 것을 생각하면 괴롭고 씁쓸하기만 했다.
그녀는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도, 상처 주고 싶지도 않았다. 애정 이외의 것이라면 뭐든 다 해주고 싶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그녀가 줄 수 없는 단 하나였다.
‘지훈이에게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하나.’
희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녀도 정말 가능하면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다.
지훈이가 날 친구로만 생각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감히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할 수도 없다. 나는 지훈에게 딱히 잘해 준 적도 재미있게 해준 적도 없으니까. 애정이 없었다면 나 같은 걸 친구로 여길 이유는 전혀 없겠지.
그렇게 되는 걸 생각하자 속상해져서, 희나는 떠나려는 마음이 또 약해질 것 같았다.
희나는 우그러진 캔을 꼭 쥔 채 가만히 진혁의 다정한 얼굴을 떠올렸다.
떠올리기만 해도 너무 좋다. 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만나고 싶다. 계속, 계속 곁에 붙어서 떨어지고 싶지 않다.
그렇지만 나보다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이 좋다며 밀어내는 남자인 걸. 제대로 서로 마음을 확인하지도 못했고, 곁에 있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게 솔직히 두렵다.
“그래도 해야 돼. 꼭 해야 돼.”
불안한 마음이 소리가 되어서 흘러나온다.
희나는 다짐하듯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모든 것이 명확해지고 난 뒤에 선택하면 아마 온전하게 떳떳하지 못할 거다.
사람 감정을 이용해 보험을 들어 놓는 건 옳지 못하니까. 늦기 전에 최선을 다해야 해. 어쨌든 이제 후회하면서 사는 나는걸.
금요일에 축제가 끝나면 바로 서울로 올라가서 모델 일을 정리하고, 지훈과의 연을 끊어야겠다.
온전히 선생님에게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라도. 선생님이 스스럼없이 마음을 열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의미 없는 시간을 방황하고 있는 지훈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마음을 먹으며 희나는 벤치에서 일어나 완전히 찌그러진 캔을 휙 던졌다. 가까운 거리인데도 캔은 쓰레기통에 제대로 들어가지 못하고 튕겨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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