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기로 (1)
“선생님.”
“응?”
“그동안 연애는 안 했어요?”
“그럴 여유 없었어.”
진혁은 아주 잠깐 텀을 두었지만 곧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다시 책에 시선을 떨어뜨리려는 그에게 희나가 다시 물었다.
“선생님은 내가 어떻게 지냈는지는 안 궁금해요?”
“글쎄, 잘 지낸 거 같으니 뭐…….”
“연애 같은 거 어땠는지도요?”
책장을 넘기던 진혁의 손가락이 멎었다.
“들어서 좋을 게 없잖아.”
조용한 목소리. 책을 읽는 것 같진 않은데 진혁의 시선은 책장에 못 박히듯 꽂혀 있었다.
궁금하지 않다는데 굳이 알려주려 하는 건 영 모양새가 이상하다. 잠시 말문을 잃었던 희나가 살짝 입술을 내밀며 물었다.
“선생님, 지금 나랑 있는 거 어때요?”
“……좋아.”
나직한 말에 희나의 입가가 올라가려 했으나 곧 이어진 말에 다시 멈춰 버렸다.
“지금 정도가 딱 좋아.”
“지금 정도요……?”
희나가 힘없이 중얼거리자 진혁은 한숨을 내쉬더니 읽는 척하고 있던 책을 덮었다.
“네가 도와주는 건 고마워. 네가 있어서 미래도 기력이 나는지 밥도 잘 먹고 잘 놀아서 정말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하지만 미래는 아파. 정말 괜찮아질 것 같다가도 무섭게 아파. 나는 네가 그걸 보게 되는 건 싫어.”
몇 번이고 단단히 그어놓은 선에 걸리고 만다. 그래도 걸릴 때마다 그어진 선이 점점 본체에 가까워지기는 한다.
처음에는 보고 싶지 않다, 다음에는 같이 있기 불편하다, 어째야 좋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어쨌든 고맙다에서 결국 같이 있는 것이 좋다는 데까지 왔으니까.
하지만 언제까지나 선에 걸려 있다가는 넘어갈 기력을 잃어버리고 말 거다. 선생님이 나를 밀어내는 이유가 싫어서는 아닌 거라면, 그렇다면 그 외의 문제는 전부 감당할 각오를 하고 있는데, 이렇게 자꾸 밀려나는 것이 답답하기만 하다.
선생님의 마음에 걸리는 문제가 그거라면…….
희나의 조용한 목소리가 침묵을 깼다.
“미래가 그렇게 아프면…… 혹시 내가 낫게 해줄 수도 있지 않아요?”
말에 내포된 의미를 깨달은 진혁의 미간이 단번에 찌푸려졌다.
“나도 미래가 아픈 건 싫어요. 그러니까 병원에서 검사해보고 혹시 괜찮으면 내가…….”
“그만.”
화난 듯한 진혁의 목소리가 희나의 말을 잘랐다.
“그만 얘기해.”
뭔가 더 설명하려고 하는 희나에게 진혁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여태껏 본 적 없는 아주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얘기가 내가 너한테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말이야.”
“…….”
“데려다줄게. 가자.”
아직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았지만 그의 목소리엔 거부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진혁이 저렇게 화를 내는 건 처음이었다.
희나는 움츠러들어서 그가 하자는 대로 따라 나올 수밖에 없었다.
어둡고 긴 과수원 길을 걸으면서 진혁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희나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뭐 때문에 저렇게 기분이 상한 건지 희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침울해졌다가 곧 서운해졌다. 호의로 말한 걸 알 텐데 저렇게 화낼 필요는 없지 않나.
그대로 어색한 침묵을 유지한 채 오솔길을 빠져나와 약국이 있는 도로변에 다다랐을 때쯤 희나는 잔뜩 삐져서 입이 비죽 나와 있었다.
“여기까지면 됐어요. 혼자 갈게요.”
샐쭉하게 말하고 훌쩍 걸으려는데 진혁이 뒤에서 불렀다.
“희나야, 잠깐만.”
무시하고 휙 가버리고 싶은데 뒤통수가 근질근질해서 그럴 수가 없었다.
희나가 부루퉁한 얼굴로 돌아보자 진혁이 천천히 다가와서 앞에 섰다.
“화내서 미안해.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마.”
“됐어요, 뭐.”
“하지만 정말로 그런 생각은 하지 말아주면 좋겠어.”
“무슨 생각요.”
“미래는 아주 착하고 좋은 애야. 그래서 옆에서 아픈 걸 지켜보면 정말 어떻게든 해주고 싶어져. 가까이에서 지켜보면 아마 누구라도 그렇게 될 거야. 나는 네가…… 혹시라도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건 싫어.”
“…….”
“건강하고 기분 좋을 때 함께 있어주는 걸로 충분히 고마워. 그러니까 우리도 지금 정도로 거리를 두고, 굳이 더 가까워질 필요는 없어.”
“그게 다예요?”
희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 앙칼지게 물었다.
“미래 문제밖에 없어요? 그냥 미래 때문에 그러는 거냐고요.”
진혁의 흰 얼굴이 다시 난감한 빛을 띠었다. 그는 뭔가 생각을 정리하는 듯 시선을 돌려 도로를 내려 보다가 툭 말했다.
“나한테 듣고 싶은 말이 뭐야?”
“그냥 선생님 생각이 듣고 싶은 거예요. 이런저런 다른 얘기들 말고.”
“내 생각을 듣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네?”
“내가 너한테 휘둘리는 게 재밌어?”
진혁의 말에 이번엔 희나가 당황했다. 드물게 감정을 내비치는데 이유는 모르겠고 어쩐지 화가 난 것 같다.
진혁은 너무 많이 말했다 싶은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손으로 이마를 짚고 말했다.
“……지금 한 말은 잊어버려. 데려다줄 테니 빨리 가자.”
“무슨 뜻이에요? 휘둘리다뇨?”
“그만하고 가자.”
그렇게 말하고 진혁이 먼저 걷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일방적으로 얘기를 끝내려는 게 화가 나 쫓아가서 따져 물으려던 희나의 몸이 멈칫했다. 달리다가 주머니에 있는 휴대폰의 무게를 느꼈기 때문이다.
지훈이 전화한 걸 본 거란 감이 왔다.
잔뜩 찌푸려져 있던 희나의 표정이 펴졌다. 진혁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를 깨달은 희나는 발걸음을 재촉해서 진혁의 팔을 붙잡아 세웠다.
“이런 얘기는 이제 이쯤에서 그만하자.”
“선생님, 나 피팅 모델 하는 거 알죠?”
말을 막으려는 진혁에게 희나가 다짜고짜 물었다. 수입이 넉넉하다는 걸 아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고, 거북이도 이미 알고 있었던 걸 볼 때 아마 진혁도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희나가 여전히 지훈과 함께 일한다는 걸 안다는 말이다.
진혁은 왜 이런 말을 꺼내는지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말이 없었다. 희나는 진혁을 빤히 쳐다보다가 불쑥 말했다.
“나 지훈이랑 사귀었어요. 1년간.”
“……그래.”
아주 잠깐 입가가 움찔했지만 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담담한 것처럼 보인다. 그 반응이 희나는 살짝 서운했다.
먼저 헤어지자고 한 건 저였지만 선생님이 연애했다고 말한다면 자신은 질투에 휩싸여버렸을 거였다.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저 관심이 없는 걸까. 아니, 방금 전의 대화 내용을 볼 때 관심이 없는 건 아닌 것 같았다.
희나는 빠르게 덧붙였다.
“그리고 헤어졌어요. 벌써 2년 전에.”
꼭 다물고 있던 진혁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하지만 아까…….”
의아한 표정으로 뭔가 말하려던 진혁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말하지 않아도 희나는 그가 하려는 질문을 알 수 있었다.
“헤어졌지만 여전히 같이 일해요. 그래서 연락하는 거예요.”
“…….”
“아직도 나한테 듣고 싶은 거 아무것도 없어요?”
진혁의 눈동자가 복잡한 심경을 반영하듯 불안하게 흔들렸다.
놀란 그의 표정에서 희나는 그가 여태껏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더 좋은 사람이 있을 거라고 말했을 때 눈치를 챘어야 하는데.
진혁의 낮은 목소리가 물어 왔다.
“너를…….”
“네.”
“너를 아주 좋아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왜 헤어졌어?”
“지훈이가 바람 피웠어요.”
대답을 듣고 진혁의 눈이 크게 뜨였다. 희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작게 덧붙였다.
“내 잘못이었어요.”
그 말을 마쳤을 때 다시 휴대폰이 울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주머니 쪽으로 향했다.
희나는 천천히 손을 넣어 휴대폰을 꺼냈다. 액정에는 지훈의 이름이 떠 있었다.
8통째 전화를 걸어오는 지훈의 이름을 보고 희나는 진혁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음을 느꼈다.
전화기를 감추지 않고 내보이며 희나는 진혁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 얘기는 나중에 마저 해요. 여기서부터 혼자 갈게요.”
그 말을 남기고 희나는 굳은 표정을 짓고 있는 진혁을 두고 돌아서서 천천히 기숙사 쪽으로 걸었다.
진혁은 혼자 걷기 시작한 희나를 따라오지는 않았지만 멈춰 선 채 가는 모습을 줄곧 지켜보고 있었다.
희나는 계속 잠잠히 걷다가 모퉁이를 꺾어 더 이상 그가 보이지 않게 됐을 때 계속 울리고 있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왜 전화 안 받았어?]
지훈의 느릿한 목소리가 잔뜩 갈라져 있었다. 목소리를 듣자 마음이 누그러진다. 희나는 작게 한숨을 쉰 뒤 물었다.
“술 마셨어?”
[조금.]
“술 마셔서 전화한 거야?”
[아니, 전화 안 받아서 술 마셨어.]
장난기가 섞인 말투와 함께 낮게 웃는 소리가 들린다.
평소 같으면 잡담이라도 나눠주겠지만 지금 그녀는 어울려 줄 기분이 아니었다.
“장난하지 마. 할 얘기 뭔데? 왜 이렇게 전화 많이 했어?”
딱딱한 희나의 말에 지훈의 웃음소리가 멎었다. 그는 잠시 느리게 숨을 쉬다가 조용히 물어 왔다.
[이번 주 주말에도 쉰다고 연락했다며?]
역시 진혁의 집 수확을 도우려고 일을 쉬겠다고 한 것 때문에 연락한 모양이다. 통화가 길어질 것 같아 희나는 기숙사로 들어가는 대신 앞쪽 계단에 쭈그려 앉았다.
“응. 갑자기 쉬어서 미안해.”
[동아리 주점 때문에 바쁘다고?]
“어…….”
거짓말을 하는 것이 껄끄러워서 희나의 목소리가 조금 잦아들었다.
지훈은 이런 쪽 눈치가 빠르다. 분명히 연속으로 일을 쉬는 것으로 뭔가 낌새를 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했던 질문이 던져진다.
[그쪽에 남자 친구 생겼어?]
학교 행사는커녕 어떤 이유로도 일을 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니 이런 의심이 들 법도 했다. 하지만 지훈이 이런 말을 물을 때마다 희나는 한숨이 나왔다.
“생기긴 무슨.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술 마셨으면 잠이나 자.”
[왜, 술 마신 전 남친이 이러는 거 평범한 거잖아. 좀 상대해줘.]
“전 남친은 무슨. 너랑 나랑 이제 그냥 친구 아냐?”
[……친구지, 친구.]
말투에서 풍겨 나오는 아련함이 불편하다. 희나는 살짝 이마를 찌푸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일 제대로 못 해서 정말 미안해. 얘기는 만나서 하고 이제 그만하고 좀 쉬어. 너 바쁘잖아.”
[신경 쓰여서 잠이 안 와.]
“뭐가 그렇게 신경 쓰이는데.”
[어쩐지 감이 이상해. 정말 남자 친구 생긴 거 아니야?]
“생겼다고 해도 너랑은 상관없잖아.”
느릿느릿하게 들리던 지훈의 호흡 소리가 뚝 멈췄다. 침대에 누워 있다가 일어나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뭔가 각 잡고 얘기하려는 기색이 보이자 희나는 조금 짜증스럽게 쏘아붙였다.
“우린 그냥 친구잖아. 네 입으로도 친구라고 해놓고, 왜 이러는데.”
[그렇게 말하는 수밖에 없잖아. 친구 아니라고 하면 너 또 집 나갈 거잖아.]
지훈의 말에 희나는 골치가 아파 와 이마를 짚었다.
잘 지내다가도 1년에 한두 번씩 꼭 이런다. 아니, 잘 지내는 게 표면적인 거고 이게 진짜일 거다.
역시 이대로는 잘 해나갈 수 없다. 친구라는 성을 아무리 견고하게 쌓아도 토대가 완벽히 정리되지 않은 감정이란 모래밭의 위란 것을 우리 둘 다 알고 있으니까.
“……또 이런 얘기 할 거야?”
희나가 지친 목소리로 묻자, 한동안 대답 대신 다시 지훈의 느릿한 숨소리만 들렸다. 한참 잠잠하다가 지훈의 갈라진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희나야.]
“왜 불러…….”
[그냥.]
하아- 하고 희나는 숨을 깊이 내쉬었다. 그리고 나지막한 지훈의 목소리가 희나의 지끈거리는 머리를 더 아프게 만들었다.
[보고 싶어.]
취기가 묻은 작은 속삭임에 담긴 감정이 희나의 마음을 더없이 무겁게 만들었다.
숙이고 있던 희나의 고개가 깊은 한숨과 함께 살짝 뒤로 젖혀졌다. 벌써 밤이 깊어서, 건너편 화단에 잔뜩 심어진 나무 위로 밝게 뜬 달이 보인다.
희나의 시선이 감상적으로 달을 올려다보았다. 그저 적당한 말들로 그어둔 선은 이제 더 이상 문제를 덮어둘 수 없었다.
“……축제 다음 주니까 끝나면 서울 올라갈게. 가면 만나서 얘기 좀 하자.”
[무슨 얘기?]
“만나서 얘기해.”
[왠지 별로 듣고 싶지 않은 얘기일 거 같은데.]
“……이제 그만하고 자. 나도 들어가 봐야 돼.”
지훈은 아무 말도 없었지만 계속 그 느릿한 숨소리는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한동안 그의 반응을 기다리다가 결국 희나가 먼저 “끊을게.”라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너무 오래 듣고 있어서인지 전화를 끊고도 계속 그 숨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희나는 어두운 시선으로 우두커니 앉은 채 한참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밤늦게 귀가하는 다른 학우들의 인기척을 느끼고서야 머쓱하게 기숙사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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