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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그 너머에는-87화 (87/140)

87화. 도란도란 (2)

한바탕 소란을 피우고 나서 진혁과 희나는 미래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왔다.

소동의 원인인 승수는 추방령을 받고 쫄딱 젖은 몰골로 경운기를 탄 채 집으로 돌아갔다.

물장난을 치기에 5월은 아직 너무 이르다.

입술이 파래져서 바들바들 떠는 희나에게 마른 수건을 꺼내 내밀며 진혁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많이 추워? 괜찮아?”

“난 괜찮아요. 그런데 미래 감기 걸리겠어요.”

“그러네. 빨리 씻겨야겠다.”

진혁이 미래의 젖은 원피스를 벗겨 내서 수건으로 닦아주며 다정하게 말했다.

“미래야, 춥지? 아빠랑 빨리 목욕하자.”

그러자 미래가 또랑또랑한 눈으로 아빠를 빤히 쳐다보더니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싫어! 아빠랑 목욕 안 할 거야.”

“응? 왜?”

“아빠는 남자잖아.”

미래의 낭랑한 말에 진혁은 조금 충격을 받은 얼굴이 되었다. 그는 잠시 입을 벌리고 미래를 쳐다보다가 희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벌써 이럴 나이인가?”

질문을 받았지만 희나에게는 아버지랑 목욕한 기억도 없고, 육아 상식이란 것은 당연히 있을 리 없었다. 희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잘 모르겠는데요. 그런데 원래 아빠랑 딸은 같이 목욕 안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런가? 난 잘 몰라서……. 초등학교 가기 전까진 괜찮을 줄 알았는데.”

“선생님 여탕 몇 살까지 갔어요?”

잠시 진혁의 입 모양이 대답할 것처럼 움직였으나 넘어오지는 않았다.

“논점 흐리지 마. 상관없는 얘기잖아.”

“입 모양을 보니까 여덟 살? 여섯 살?”

“…….”

“혹시 열 살?”

진혁은 대답하지 않고 한숨을 푹 내쉬며 거실을 나갔다가 곧 돌아왔다. 아마 목욕탕에 따뜻한 물을 틀어두고 온 것 같았다.

“미래야, 그럼 아빠가 씻어만 줄게. 이리 와.”

그래도 미래는 여전히 뾰로통한 얼굴로 고개를 휘휘 젓는다.

진혁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어머니 오실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그냥 젖은 채로 뒀다가 감기 걸리면 큰일인데.”

“그냥 내가 씻길게요.”

“네가?”

“벌써 목욕 같이 한 적 있어요. 어차피 나도 씻어야 되고.”

진혁은 조금 생각해보는 듯하다가 미래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물었다.

“미래야, 그러면 언니랑 목욕할래?”

진혁의 입에서 언니란 말이 나오는 게 귀엽다.

미래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더니 수건을 뒤집어쓴 채로 달려와서 희나의 손을 잡았다.

“응, 언니랑 할래.”

“그래, 그럼. 미안하지만 부탁 좀 할게.”

희나가 고개를 끄덕이고 미래를 데리고 나가려 하는데 뒤에서 진혁이 다시 불러 세웠다.

“잠깐, 미래 갈아입을 옷 가져가.”

“미래가 고를래.”

미래는 우다다 뛰어 아빠를 따라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깨끗한 거실에 물이 떨어질까 봐 마루에 서서 기다리는 희나의 귀에 옷을 고르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토끼 그려진 거 꺼내줄까?”

“응. 노란색. 아, 아빠, 아빠!”

“응?”

“언니, 찌찌 짱 크다.”

미래의 천진난만한 목소리가 넓은 방 안에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 직후 어마어마한 침묵이 흘렀다.

이를 어째야 하나. 아이의 천진함이 불러온 대참사의 충격을 극복하지 못하고 희나는 돌처럼 굳어버렸다.

그런데 곧 두 어른의 멘붕을 알기에는 너무 어린 미래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양팔을 활짝 벌려 덧붙이는 뒷모습이 보였다.

“이따-만 해.”

모든 큰 것의 단위가 양팔 벌려 ‘이따만 해’인 미래의 보충 설명이 이어졌다.

희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무라도 좋으니까 쟤 입 좀 막아주면 평생의 은인으로 모시고 싶다. 등을 돌리고 서 있는 진혁의 앞모습이 대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상상도 하기 싫다.

“어……. 좋겠네…….”

간신히 짜낸 듯한 목소리가 진혁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희나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똑같이 공황 상태에 빠져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한 진혁이 남 말 하듯 대충 내놓은 얼버무림에 희나는 깊은 정신적 대미지를 입었다.

좋겠네라니, 이게 뭐야아아아아!

이미 내상을 입어 너덜너덜해진 희나의 귀에 여전히 해맑은 미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니가 그러는데 탈아시아급이래.”

결국 참지 못한 진혁의 입에서 풉 소리가 터져 나왔다. 희나를 생각해서 못 들은 척하려 했던 진혁이 웃음을 터뜨려버린 것이다.

이대로 진짜 탈아시아, 아니 탈지구, 탈이승해 버리고 싶다.

이불 킥 백 개짜리 흑역사를 적립한 희나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물이 떨어지건 말건 우다다 뛰어가서 배를 잡고 웃고 있는 진혁의 옆에서 미래를 집어 들고 뛰어나왔다

목욕탕으로 간 희나는 미래를 붙잡고 기나긴 설교를 했지만 미래는 아빠가 재미있어 했다며 신나 했다. 희나가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긴 하는데 이래서야 말이 잘 통했는지 알 수가 없다.

정신적 피로감과 함께 희나가 미래와 목욕을 마치고 나왔을 때 진혁은 방에 있는지 거실에 없었다. 그리고 희나가 미래의 머리를 말려주고 조금 놀아주다가 재우려고 침대에 눕힌 후에도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불러낼까 생각해봤지만 아까 있었던 일이 창피해서 아직 얼굴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모레 수확하러 올 테니 그때 보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가방을 챙기던 희나는 휴대폰을 원두막에 두고 왔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가지러 가려고 일어서자마자 그 두고 온 휴대폰이 거실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진혁이 가져다 둔 모양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액정을 켜던 희나는 깜짝 놀랐다. 부재중 전화가 12통이나 와 있었다.

보혜와 은영에게 온 전화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전화가 지훈에게서 온 것이었다.

화면을 도배한 지훈의 이름을 보고 희나는 조금 찔끔했다.

이번 주 주말에 진혁의 집 수확을 돕기 위해 일을 쉬기로 했기 때문이다.

물론 사실대로 말하기가 껄끄러워서 동아리 축제 준비 때문에 바쁜 걸로 가장했다. 받은 과일은 동아리 축제 주점에서 쓸 예정이니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어쨌든 폐를 끼친 게 사실이니 집에 가는 길에 전화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희나는 주머니에 휴대폰을 넣었다.

그리고 거실을 나가려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걸음을 멈췄다.

진혁이 원두막에서 전화를 가져오는 사이 지훈에게 전화가 온 것을 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희나는 다시 황급히 전화기를 꺼내 전화가 온 시간들을 체크해보았다. 4~5분 간격으로 계속 걸려왔다.

원두막에서 집까지의 거리를 생각하면 분명 가져오는 사이에 1통은 왔을 것 같았다.

얼굴을 마주하기 창피하다 해도 이대로 확인 안 하고 돌아가면 마음에 걸려서 숙면에 커다란 지장을 초래할 게 틀림없었다.

희나는 망설이다가 마음을 먹고 진혁의 방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노크에 대답은 없었다.

몇 번인가 더 노크해도 대답이 없어 희나는 슬쩍 문을 열어보았다. 방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어딜 간 거지?’

시간은 벌써 밤 아홉 시다. 해가 져서 과수원에 나갈 수는 없을 거고, 약국은 여덟 시면 닫는다. 시골이라 외출하기에도 별로 좋은 시간이 아니다.

잠시 고민하던 희나는 미래의 방으로 다시 돌아갔다. 아직 잠들지 않았는지 미래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언니야?”

“응, 미래야. 아빠가 없네? 어디 갔을까?”

“아빠? 아빠 놀이터에 있을걸.”

“놀이터?”

미래는 졸린지 하품을 하며 작은 손가락으로 마당 쪽을 가리켰다. 그러고 나서는 혀 짧은 소리로 뭔가 횡설수설했는데 어딘지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졸린 아이를 깨워 다그쳐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희나는 하릴없이 그냥 방을 나왔다.

어쨌든 집 밖에 있다는 말 같아서 희나는 바깥으로 나왔다.

마당을 쓱 둘러보다가 집 오른쪽에 있는 창고 같은 건물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는 건물이다.

희나는 얼른 다가가서 문을 노크했다.

진혁의 방과 달리 금방 반응이 있었다. 문이 열리고 진혁의 하얀 얼굴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는 휴대폰을 꺼내 시계를 보고서야 시간이 꽤 늦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 미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지금 집에 가려고?”

희나가 그를 유심히 바라보았지만 진혁의 말투도 표정도 그냥 담담했다. 아까의 민망한 상황을 신경 안 쓰는 것 같아 좋긴 한데 지훈의 전화를 본 건지 보지 못했는지에 대해선 확신이 서지 않았다.

“네, 이제 가려구요.”

“기다려. 데려다줄게.”

그렇게 말하고 진혁은 겉옷을 챙기러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아까 ‘놀이터’라고 했던 미래의 말에 호기심이 동한 희나는 열어둔 문틈으로 내부를 들여다보고 입을 헤- 벌렸다.

10평 정도 되는 창고 내부는 말끔하고 아늑하게 꾸며져 있었다. 1/3 정도는 흙바닥, 그리고 나머지는 지면에서 30cm 정도 높은 곳에 마루가 깔려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흙바닥 쪽에는 만들다 만 가구와 공구들이 잔뜩 있고, 운동 기구들도 있었다. 그리고 마루 위쪽에는 TV와 책상, 그리고 침대도 있었다.

벽면을 가득 메운 책들과 DVD를 보고 희나는 왜 진혁의 방이 그렇게 썰렁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이게 선생님 놀이터예요?”

“미래한테 들었어?”

진혁은 마루 위쪽에 놓아두었던 겉옷을 입으며 조금 웃었다.

“미래가 여기서 맨날 뭐하냐고 물어보길래 노는 데라고 했더니 놀이터라고 불러.”

“아까부터 계속 여기 있었던 거예요? 어디서 씻었어요?”

“이 건물 바깥쪽에 간이 샤워실이 있어서 간단히 했어.”

희나는 슬쩍 눈치를 보며 안쪽으로 들어섰다. 벽에 페인트도 칠해져 있고, 나무 소파나 책장 같은 건 전부 수공인 것 같았다. 대단히 그럴듯하게 조성된 내부가 무슨 드라마 세트장 같아서 희나는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감탄했다.

“대단하네요. 선생님이 다 꾸민 거예요?”

“응. 이런 거 하는 거 좋아해. 어렸을 때부터 꼭 만들어보고 싶었거든.”

“오, TV도 있네. 기숙사에는 TV 없는데 좀 놀다 가도 돼요?”

TV 같은 건 잘 보지도 않지만 좀 더 구경하고 싶어서 슬쩍 핑계를 댔다. 진혁은 잠시 고민하는 듯싶었지만 곧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허락을 받은 희나는 마루 위로 냅다 올라가서 이것저것 만져보며 구경했다.

“근데 이건 뭐예요? 이거도 선생님 취향이에요?”

희나는 아까부터 신경 쓰이던, 구석에 놓인 분홍색으로 칠한 화려한 취향의 소파를 가리키며 물었다.

“미래가 좋아할 줄 알고 만들었는데 별로 흥미가 없어.”

“이상하네. 미래가 좋아할 거 같은데요? 공주님 같은 거 좋아하잖아요.”

“그림책 보고 만들었는데…… 백설 공주는 좋은데 잠자는 숲속의 공주는 싫대. 방 좁다고 구박받고 여기로 옮겨 왔어.”

서글퍼하는 진혁의 목소리가 귀여워서 희나는 킥킥 웃으며 소파를 내려다보았다. 커다란 프레임에 안쪽으로 깊어서 소파라기보단 대방석 같은 느낌이다.

“이거 내가 앉아도 괜찮아요? 부서지는 거 아니죠?”

“다른 가구들이랑 똑같은 방법으로 만든 거라 그렇게 허술하진 않을 거야.”

대답을 듣고 희나는 안심하며 냅다 소파에 앉았다. 아주 푹신해서 온몸이 파묻히는 기분이다.

내친 김에 신발도 벗고 무릎을 끌어안고 앉은 뒤 책상 앞에 앉으려는 진혁을 손짓해 불렀다.

“선생님 책 볼 거죠? 여기 같이 앉아서 책 봐요.”

“같이 앉기엔 좁잖아.”

“빨리요.”

진혁은 조금 머뭇거리긴 했지만 거절하지는 않았다.

계속 읽고 있었던 듯한 책을 집어 들고 그는 천천히 희나의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그의 말대로 소파는 작았기 때문에 어깨가 밀착되었다. 팔이 맞닿고 항상 그리워했던 진혁의 부드러운 체향이 감돌자 희나의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희나는 살짝 고개를 돌려서 긴 다리를 쭉 뻗은 채 책을 펼치고 있는 진혁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주 가까워서 몸이 뜨겁고, 꼭 끌어 안겨서 흰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고 싶다.

희나는 그의 향기를 품듯 깊이 심호흡을 하고는 바로 옆에 있는 어깨에 살짝 머리를 기댔다. 진혁의 입가가 움찔하고, 침을 꿀꺽 삼키는 듯 목젖이 움직였다. 하지만 희나를 밀어내진 않았다.

그대로 둘은 잠시 침묵했다. 진혁은 무심한 척 책을 읽기 시작했지만 썩 진도가 잘 나가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진혁이 책 읽는 것을 몇 번이나 봤었던 희나는 그가 상당한 속독가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도 옆에 있는 희나를 신경 쓰고 있는 것이다.

“여기 참 좋네요, 아늑하고…….”

말을 걸자 진혁이 살짝 희나를 바라보았다. 가까운 곳에 있는 흰 얼굴을 보며 희나는 빙그레 웃었다.

진혁의 하얀 귓가가 살짝 붉어지는 것 같더니 다시 시선을 돌린다.

“……그러네.”

담담하고 낮은 목소리에 희나는 다시 헤헤 웃었다.

이대로 어깨에 기대고 있는 것만으로도 두근두근 기뻐서 가만히 있는 것도 좋지만, 희나는 간만에 둘이 조용한 곳에 있게 된 이 기회를 뭔가의 연결점으로 삼고 싶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망설이던 그녀가 아주 작은 소리로 진혁을 불렀다.

“선생님.”

“응?”

“그동안 연애는 안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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