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도란도란 (1)
“이렇게 한 다음에 여기 이쪽이랑 맞물려서 접으면 돼. 알겠어?”
“쉽네요, 뭐. 나 피자 상자도 많이 접어봤어요.”
희나가 곧 능숙하게 손잡이가 달린 상자를 접기 시작하자 진혁이 옆에서 고개를 끄덕거리며 “응, 응, 그렇게.” 하면서 가르쳐준다.
곧 하나를 예쁘게 뚝딱 접어내고 희나가 이거 보라는 듯이 고개를 우쭐대자 진혁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 잘 접네.”
“그쵸? 근데 상자 그림 되게 이쁘네요. 귀엽다.”
“디자인 회사 하시는 선배가 인심 써서 해주셨어. 예쁘지?”
하얀 바탕에 몽글몽글한 캐릭터가 블루베리 모양으로 그려져 있는 파스텔 톤의 상자는 깜찍해서 여자들이 좋아할 것 같았다.
귀여운 상자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희나를 보며 진혁이 우려하는 어조로 말했다.
“정말 할 거야? 별로 돈도 안 되고…… 상자 접으면 손도 꽤 많이 다치는데.”
“이게 뭐 힘들다고. 피자 상자에 비하면 훨씬 쉽죠-.”
그래도 진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곁에 서 있자 저만치 서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승수가 참다 참다 못 참겠다는 듯 소리를 빽 질렀다.
“아, 거 상자 접는 거 가지고 유난은! 진짜 눈꼴셔서 못 봐주겠네!”
“아, 미안. 금방 갈게.”
“됐으니까 그만해-! 니가 해달라면 철판으로 학도 접을 애니까 내버려 두고 빨리 가자. 해 떨어지겠다.”
승수의 계속된 재촉을 받고서야 진혁이 원두막 난간에서 몸을 떼어냈다. 곧 두 사람은 트럭을 타고 과수원을 떠났고 희나는 포장 상자와 함께 원두막에 남겨졌다.
블루베리 수확을 앞두고 포장 상자가 도착해서 아르바이트를 구한다는 말에 희나는 자진해서 나섰다. 돈은 필요 없다고 사양했지만 진혁이 굳건했기 때문에 상자 접기에 대해서는 소정의 아르바이트비를 받기로 했다.
보통 상자 접는 부업이라면 개당 몇십 원 정도로 쳐줄 텐데 시급으로 해준다고 해서 받는 쪽은 조금 받겠다고 우기고 주는 쪽은 많이 주겠다고 다투다가 결국 최저 시급으로 합의했다.
대부분의 물량은 플라스틱 박스에 포장해서 도매상에 납품하고 소량만 인터넷으로 직판하기 위해 선물 포장용 박스를 준비했다고 한다. 그래서 수량은 500장 정도였기 때문에 혼자서 장시간 하면 충분할 양이었다.
피팅 모델로 일할 때는 시급이 5만 원인 희나다. 돈 벌려고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최대한 짧은 시간에 다 접어버리겠다는 의욕이 만땅이었다.
“언니, 나도 할래-.”
그러나 상자만 접는 게 아니라 붙어 있는 껌딱지도 보살펴주어야 하는 이중 작업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희나는 계속 보채게 하느니 하나 쥐여주고 씨름하게 하는 게 나을 듯싶어서 상자를 건네주었는데 어린 게 이리저리 쳐다보더니 은근히 잘 따라한다. 상자가 작고 일반적인 상자보다 얇아서인지 미래의 가느다란 팔로도 충분한 듯했다.
부드러운 아이의 손이 혹시 종이에 베기라도 할까 봐 조마조마했지만 곧 익숙해져서 희나의 절반 정도 속도로 접게 되었다.
“미래 잘하네-. 대단하다-!”
“미래 잘하지! 선생님이 똑똑하다고 맨날 칭찬해.”
“미래 때문에 언니 밥줄 끊기겠어~.”
“미래가 돈 벌면 언니 다 줄게.”
희나가 농담으로 엄살을 떨자 미래가 인심을 쓴다. 졸지에 아동을 착취해서 돈을 벌게 생겼다.
착한 미래의 얼마 없는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다가 희나는 문득 돈을 받으면 미래한테 선물이나 사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진혁에게 받은 돈은 쓰고 싶지 않았기에 좋은 생각인 것 같았다.
“그러면 미래 예쁜 원피스 살까? 공주님 같은 거.”
“언니가 전에 입었던 거 같은 거?”
“여섯 살에 시스루는 너무 이르다. 예쁜 거로 언니가 골라줄게.”
그렇게 희나가 미래랑 수다 떨며 상자를 접고 있으려니 몇 시간 후 하우스 쪽에 일하러 갔던 진혁과 승수가 피로한 얼굴로 돌아왔다.
잠시 휴식 겸 식사를 가져와서 함께 둘러앉아서 먹었다.
서울에서 자란 희나는 원두막에서 새참을 먹는 것이 즐거워서 연신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진혁이 미래를 데리고 주변에서 놀아주는 사이 승수가 벌렁 드러누워 희나에게 말을 걸었다.
“주말에 네 친구들 도와주러 온다며?”
“네, 네 명이 온다고 했어요.”
희나가 듣기로 블루베리는 손으로 일일이 수확해야 하는 데다 수확 시기도 짧아서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인력이 많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경험도 없는 초보자들임에도 여러 명이 도와주러 온다는 말에 진혁이 상당히 반색을 했었다.
“근데 두 명이 여자앤데 일을 잘할지 모르겠네요.”
희나의 우려 섞인 말을 들은 승수가 다른 포인트에 주목했다.
“뭐? 여대생들이 아르바이트하러 온다고?”
“침 흘리지 마요! 오빠 나이에 맞는 여자 찾아요, 좀.”
“어려서 좋다는 건 줄 알아? 나이 따지게 생겼냐고! 나이 맞추다가 몽달귀신 되겠다.”
“어린이집 여선생 어때요? 예쁘던데?”
희나가 이참에 라이벌을 좀 줄여볼 생각으로 넌지시 던졌으나 승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도전 안 해봤겠냐? 어린이집 여선생들 우리 마을 연애 먹이사슬 최상위 포식자야. 마을 총각들 돌아가면서 딱지 맞고 있다.”
“흐응. 최상위 포식자는 따로 있는 거 같은데.”
희나가 중얼거리자 두 사람의 시선이 짜기라도 한 듯이 동시에 진혁에게로 쏠렸다. 최상위 포식자들 위에서 군림하고 있는 최최상위 포식자는 미래를 목마 태워서 원두막 근처에 있는 아카시아 나무의 꽃을 따게 해주고 있었다. 그 평화로운 모습을 보며 승수가 혀를 끌끌 찼다.
“최상위 포식자의 피지컬을 가졌으면 뭐하냐, 초식 동물인데.”
“누구를 풀떼기 취급하는 거예요?”
“너가 먹이라고 한 적도 없는데?”
희나가 약 올리는 승수를 꼬집고 있을 때 아카시아 꽃을 꺾은 미래가 꽃을 양손에 쥔 채 이쪽으로 후다닥 달려왔다.
“언니, 언니, 이거 먹어봐! 꿀 나와!”
“엥?”
아카시아 꽃을 처음 보는 희나는 승수와 진혁의 설명을 들은 후에 매우 꺼림칙한 표정으로 꽃에 입을 갖다 댔다. 그러고는 말대로 정말 꽃에서 꿀 같은 맛과 향이 나자 재미를 느끼곤 미래랑 정신없이 꽃을 가지고 장난치기 시작했다.
둘이 좋아하자 진혁이 꽃가지를 좀 더 꺾어다 주었다. 그리고 난간 밖에 선 채로 잎사귀가 붙은 줄기도 몇 개 건네주었다.
“잎은 왜 뜯어 왔어요?”
“잎사귀 점 몰라?”
희나의 물음에 진혁이 놀란 듯 되물었다. 세대 차이를 느꼈는지 잠시 한숨을 쉬다가 잎사귀 줄기를 들고 이파리를 하나씩 뜯으면서 시범을 보여 주었다.
“이렇게 한 줄기 꺾어서 이파리를 한 장 한 장 뜯으면서 점치는 거야. 한다, 안 한다, 한다, 안 한다, 이런 식으로. 다 뜯으면 효력이 생긴다고.”
“너는 무슨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철수냐? 뭐야, 그게. 궁상맞게! 고리타분한 자식!”
희나가 픽 웃고 승수가 입을 내밀며 핀잔을 주었지만 진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궁상맞나? 여자애들이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안 해봤어?”
“해본 적 없는데요.”
“서울에서는 안 하나? 어렸을 때 진혜가 많이 했는데.”
진혜의 이야기가 나와서 희나는 살짝 움찔했지만 진혁은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맨날 마음에 드는 동네 오빠 생기거나 뭐 가지고 싶은 거 생길 때마다 점친다고 나보고 뜯어달라고 했어. 조르는 게 귀찮아서 가지째로 부러뜨려서 줬다가 어머니한테 엄청 혼났는데.”
담담해 보이지만 나뭇가지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아련하다.
진혁은 가만히 잎사귀를 손에 쥐고 쳐다보다가 미래를 잡아당겨 안으며 아이의 손에 쥐여주었다.
“미래야, 해볼래?”
“뭐를?”
“잎사귀 점. 나중 일을 맞히는 거야.”
미래는 잘 모르겠다는 듯 커다란 눈을 깜박거리기만 했지만 진혁은 미소를 지으며 미래를 끌어안고 잎사귀를 쥐여주었다.
“미래도 아마 좋아할 거야. 한번 해봐.”
“어떻게 하는데? 미래도 해볼래.”
진혁이 커다란 손으로 미래의 작은 손을 감싸 쥔 채 하나하나 잎을 떼어 가면서 가르쳐주었다.
미래가 신나서 무슨 점을 칠지 곰곰이 생각하는 사이 진혁의 부드러운 눈동자가 희나를 쳐다보았다.
“희나도 해볼래?”
희나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잎줄기를 받아 드는 희나를 보고 승수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뭐야, 안 어울리게. 너도 그런 거 믿냐?”
“뭐 재미있잖아요. 오빤 안 믿어요?”
“남자가 뭐 그런 걸 믿어? 유진혁 같은 고자나 하고 노는 거지.”
자꾸 밉살맞은 소리만 하는 승수를 흘겨보다가 희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나뭇잎을 뜯기 시작했다.
“승수 오빠 장가간다, 못 간다, 간다, 못 간다…….”
그러자 관심 없다던 승수가 벌떡 일어나서 펄쩍 뛰었다.
“니 팔자나 점치지 왜 남의 팔자를 점치고 난리야!”
“왜요? 안 믿는다면서 좀 치면 어때요?”
“나의 인륜지대사로 장난치지 마!”
승수가 뭐라고 하건 말건 희나는 요리조리 피하며 잎사귀를 뜯었다.
진혁은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보고 조금 웃더니 식기들을 헹구기 위해 미래의 손을 잡고 수돗가로 걸어갔다.
“오, 간다는데요?”
“그래? 으하하하! 역시 이 몸이 총각귀신이 될 리가 없지!”
안 믿는다고 큰소리친 주제에 흐뭇해하자 희나가 입을 비죽거렸다.
“풀 가지고 장난치는 걸로 안심이 돼요? 이런 거 효과 없죠.”
“오호, 그래?”
그러자 이번엔 승수가 잎사귀를 하나 집어 들더니 희나 앞에서 보란 듯이 뜯기 시작했다.
“진혁이랑 너랑 사귄다, 못 사귄다, 사귄다…….”
“하지 마요!”
희나가 달려들었으나 승수가 원두막에서 내려와 도망치는 게 훨씬 빨랐다. 그리고 요리조리 도망치던 승수가 방향을 전환하기 위해 수돗가에 서 있는 진혁을 붙잡았다.
그 바람에 진혁은 들고 있던 호스를 놓쳐버렸다. 수압이 너무 세서 호스가 꿈틀꿈틀 움직이며 사방에 물을 흩뿌린다.
조금 멀리 있던 희나와 달리는 중이었던 승수는 잽싸게 피해서 무사했지만 앞에 서 있던 진혁과 미래는 물벼락을 맞고 말았다.
“아! 미안해요!”
“우와- 야, 쏘리 쏘리! 미안!”
제멋대로 움직이는 호스를 간신히 붙잡아 물을 껐지만 이미 둘 다 흠뻑 젖은 뒤였다. 미래의 얄팍한 원피스는 물론이고 진혁도 전신이 다 젖었다.
아래에 입고 있던 저지 바지는 그럭저럭 방수가 되는 모양이었지만 위에 입은 하얀 티셔츠는 여지없이 몸에 달라붙어 속이 다 비쳤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고 있는 진혁을 희나는 입술을 모으고 빤히 쳐다보았다. 예전에도 탄탄하다고 느꼈지만 노동으로 단련됐는지 근육이 잘 붙은 몸이다.
진혁이 젖은 상의를 앞으로 돌돌 말아 짜내자 복부가 살짝 드러났다. 단련된 복근 위에 희나가 들은 대로 커다란 상처 자국이 있었다.
“야, 침 떨어지겠다. 눈빛이 왜 이리 음흉하냐.”
희나가 정신없이 진혁을 쳐다보고 있자 어느새 다가온 승수가 뒤에서 이죽거렸다.
정곡을 찔려 민망한 희나는 앙칼지게 뒤를 돌아보고 기습적으로 승수의 티셔츠를 훌렁 걷어 올렸다.
“으앗! 뭐하는 거야!”
“으아아아, 내 눈! 오빠, 운동 좀 해요!”
“인마, 누가 들추래! 그리고 아직 뭘 모르네! 이게 다 인격이지!”
“누가 아저씨 아니랄까 봐 어디서 고릿적 변명을 하고 있어요! 그게 인격이면 삼중 인격이에요?”
“이 녀석이! 이리 와! 그럼 네 배는 얼마나 미끈한지 좀 보자.”
“꺄아아아아! 변태야!”
희나는 장난스럽게 비명을 지르면서 뱃살을 들추려는 승수의 손을 피해 도망쳤다.
옷에서 물을 짜고 있던 진혁은 잘못하고도 반성의 기미 없이 금세 다시 툭탁대는 두 사람을 보더니 눈썹을 약간 찡그렸다.
살짝 화가 난 진혁의 손이 기다란 비닐 호스를 그러쥐었다.
“우왓! 차거! 뭐야!”
“꺄아아아아아!”
진혁이 뛰어다니고 있는 두 사람을 정확히 조준해서 물을 뿌렸다. 입구를 야무지게 눌러서 사방으로 퍼지게 한 덕에 두 사람은 피하지도 못하고 고스란히 물세례를 맞았다.
10초도 안 돼서 쫄딱 젖은 두 사람이 보복을 위해 수돗가로 달려들었고, 결국 아수라장이 벌어졌다.
보복과 배신이 판치는 물의 전쟁 속에서 자그마한 무지개가 피어오르자 미래는 좋은지 꺄하하하 웃으며 한복판을 잘도 뛰어다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