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버리지 못한 것은 (5)
요상하게 몰려오는 긴장을 가라앉히려 희나는 심호흡을 했다.
빤히 쳐다보는 미래의 시선이 왠지 낯간지러웠지만 과감히 마음을 먹고 옷을 벗었다. 그리고 미래를 안은 채 천천히 커다란 탕에 함께 들어갔다.
지훈의 집에서 거품 욕조를 사용한 걸 빼면 거의 목욕은 하지 않았다. 간만에 탕에 들어오니 기분이 아주 좋다.
“아, 따뜻하고 좋다. 미래 너 맨날 목욕해?”
아까까지 울었던 게 부끄럽기도 하고 목욕하는 것이 어색해서 불편한 것을 감추려고 희나는 괜히 오버해서 수다스럽게 말을 걸었다. 그러나 미래는 입을 헤 벌리고 희나를 쳐다보고 있더니 불쑥 큰소리로 말했다.
“언니 찌찌 짱 크다!”
“…….”
안 그래도 낯간지러운데 이놈의 꼬맹이가 마음을 몰라준다.
시집도 안 간 처녀인 희나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물속으로 몸을 좀 더 깊이 담그며 미래를 꼬집었지만 미래의 눈치 없음은 막을 수 없었다.
“헤, 신기해.”
“어른은 원래 다 있는 거야. 할머니 꺼 안 봤어?”
“미래는 아빠랑 목욕해. 아빠는 찌찌 없는데.”
진혁이랑 목욕한다는 말에 희나는 괜히 부끄러워졌다.
그러고 보면 목욕을 아주 좋아하니까 맨날 이 욕조에 몸을 담그겠구나. 쓸데없는 생각에 얼굴에 피가 쏠려서 희나는 고개를 저으며 찬찬히 설명했다.
“여자만 있는 거야. 아빠는 남자잖아.”
“그 대신 이상한 거 있어.”
“……그래. 별로 안 궁금하니 그만 말해.”
희나가 말을 돌리려 했으나 미래는 활짝 웃으며 천진난만하게 말을 이었다.
“언니는 모르지? 짱 큰데.”
“…….”
완전히 홍당무가 된 채 아, 누가 와서 얘 입 좀 막아주면 좋겠다고 희나는 마음 깊이 생각했다.
미래는 희나가 모르는 것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기쁜지 약 올리는 것처럼 웃으며 으스댄다. 희나는 우쭐해서 일어서 있는 미래를 붙잡아 뜨거운 물속으로 앉히며 입을 비죽거렸다.
“나도 알아, 큰 거.”
“진짜 알아? 이따만 해!”
미래가 양팔을 쫙 벌리며 말했다.
……그따만 하면 좀 곤란하겠는데.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다가 희나는 도리도리 얼굴을 저었다. 본 적은 없지만 감촉(?)으로 대강 짐작할 수 있다.
“뻥치지 마.”
희나의 말투가 확신에 차 보였는지 허풍을 떨던 미래의 자신감이 위축되었다. 미래는 눈을 깜빡거리더니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아냐. 사실은 한 이 정도?”
“아아아악! 구체적으로 표시하지 마!”
희나는 기겁을 하며 거시기 사이즈를 묘사하기에는 너무나도 천진한 소녀의 손을 붙잡아 헝클어뜨렸다.
미래는 그녀가 당황하는 것이 재미있는지 한동안 더 장난을 치다가 욕조로 첨벙 넘어졌다.
목까지 잠겨 머리만 간신히 내민 미래는 희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손을 덥석 내밀어 가슴을 찔렀다.
“뭐, 뭐해!”
“언니도 크다. 푹신푹신해.”
재밌다는 듯 희나의 가슴을 만지작거린다. 그냥 아이가 만지는 거지만 여태까지 살면서 다른 사람이 가슴을 만진 적이 없기에 너무 민망했다.
희나는 노골적으로 주물럭대는 미래의 작은 손을 떼어내며 말했다.
“주물거리지 마.”
“왜?”
“내 거니까. 넌 니 거 만져.”
“그치만 난 아무것도 없는데.”
미래가 서글픈 시선으로 자신의 밋밋한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것이 귀엽고 웃겨서 희나는 킥킥 웃었다. 그리고 미래의 볼록 나온 배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좀 있으면 생길 거야.”
“나도 그만 해져?”
아이가 눈을 빛내고 있는 걸 보니 장난이 치고 싶어졌다.
일부러 우쭐거리는 표정을 지은 희나는 검지를 세워 가로저으며 약을 올렸다.
“넌 힘들어. 언니는 탈아시아급이거든.”
“탈아시아급이 뭐야?”
“언니와 같은 여자가 머물기엔 아시아가 좁다는 말이지.”
뜻을 잘 이해하지 못했는지 미래는 작은 머리를 갸웃갸웃한다.
작은 아이의 움직임이 귀엽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미래의 시선이 더 아래로 내려가 영 좋지 않은 곳에 꽂힌다.
“그런데 털은…….”
결국 가장 피하고 싶은 화제까지 흘러가고 말았다. 아직 성 교육을 감당하기엔 너무 어린 희나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어린 떠버리의 입을 막기 위해 물을 바가지째 들이부었다.
***
미래의 말썽에 웃고 떠드느라 나올 때쯤 되니 희나도 알몸으로 있는 것에 자연스러워졌다.
정신적으로 무척이나 피로한 목욕을 마치고 나오니 눈물 자국은 흔적도 없었다.
머리를 말리고 밥도 먹고 진혁의 어머니를 도와서 머위를 손질하고 있는데 마당에서 차 소리가 들려왔다.
“아빠다!”
미래가 벌떡 일어나서 마루로 달려갔다.
진혁이 집에 돌아왔다고 생각하니 잠시 한편으로 접어 둔 채 잊고 있던 사진 생각이 나서 희나는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곧 진혁이 마루 위로 올라서며 부드러운 목소리가 집 안에 퍼졌다.
“다녀왔습니다.”
“왔어요?”
부엌에 있는 진혁 어머니 대신 희나가 고개를 쏙 내밀며 말하자 다정한 얼굴이 미소를 짓는다.
“아직 있었네. 힘들었지? 정말 고마워.”
희나의 입가가 헤죽 올라간다.
부엌에 있던 진혁의 어머니가 얼굴을 내밀며 아들에게 물었다.
“밥 먹었니?”
“아뇨. 조금 먹을게요.”
“그래, 그럼 차려놓을 테니 옷 갈아입고 나와서 먹어.”
그러자 진혁이 고개를 끄덕이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문이 닫힌 지 3초 뒤 황급히 방문이 다시 열리더니 진혁이 당황한 목소리로 희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혹시 내 방에 들어왔었어?”
잔뜩 빨개진 얼굴을 보고 아까 사진을 꺼내 보고 넣어두지 않았음을 떠올린 희나의 입꼬리가 고양이처럼 올라갔다.
“글쎄요? 왜요? 뭐 문제 있어요?”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진혁은 희나가 자신의 방에 들어왔었음을 확신한 것 같았다. 얼굴이 빨개진 주제에 냉정함을 가장하며 진혁이 딱 잘라 말했다.
“오해하지 마. 있는지도 몰랐으니까. 잊어버리고 안 버린 거야.”
“네, 알아요. 누가 뭐래요?”
히죽히죽 웃고 있는 희나를 보고 진혁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할 말이 잔뜩 있는 얼굴로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언니, 왜 웃어? 뭐 재밌어?”
“아무것도 아냐.”
오늘 밤 이불 킥을 할 진혁을 상상하며 희나는 킥킥 웃었다.
진혁은 옷 갈아입는 것치고는 아주 오랜 시간 방 안에서 머문 후에야 거실로 나왔다.
평소보다 훨씬 일찍 일어난 탓에 꾸벅꾸벅 졸던 미래는 진작에 잠들었고, 농가 사람인 진혁의 어머니도 상을 차리자마자 잠자리에 들었기에 그가 나왔을 때 거실엔 희나뿐이었다.
진혁은 짐짓 태연한 표정으로 거실 가운데 차려진 상 앞에 가서 앉았지만 태연한 척하고 있는 게 더 웃겼다.
“밥 먹었어?”
“네. 선생님 오기 전에 이미 먹었어요.”
“그럼 먼저 데려다줄까?”
“아뇨. 힘들게 차리신 건데 식기 전에 드세요.”
그러자 진혁은 식사를 시작했다. 희나가 밥 먹는 걸 유심히 쳐다보고 있자 괜히 찔렸는지 진혁이 근엄한 목소리로 말한다.
“남의 방에 함부로 들어오면 안 되잖아.”
“함부로 들어간 거 아니에요. 미래가 크레파스 찾아 달라는데 없길래 들어간 거예요.”
“…….”
근엄한 설교는 3초도 안 돼서 본전도 찾지 못하고 끝났다.
다시 묵묵히 밥을 먹기 시작한 진혁은 정말 단정하게 밥을 먹는다. 희나는 그 모습을 부담스럽게 계속 쳐다보다가 헤헤 웃었다.
“왜 웃어?”
까만 눈동자가 그녀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묻는다. 희나는 고개를 저은 뒤 또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
진혁은 불안한 듯 입가를 매만졌다. 웃는 희나를 보고 입가에 뭐가 묻었나 보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런 건 아니었다. 그냥 너무 좋아서 웃은 거였다.
희나는 뭐 때문에 아직까지 사진을 가지고 있냐고 캐묻는 건 그만두기로 했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면 시간이 해결해줄 테니까. 괜히 빠르게 걸어 나가려 하지 않아도, 지금 이 현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좋으니까.
그냥 눈을 마주치고 ‘왜?’라고 묻는 진혁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좋다. 거짓말을 못 하고, 성실하고, 몇 년 동안이나 사진을 간직하면서 아무 말도 안 하는 구식 감성을 가진 남자가 좋다.
베개든 곰 인형이든 마구 껴안고 뒹굴고 싶다. 아마 잠들기 전에 괜히 실실 웃으면서 진혁의 당황한 얼굴과 목소리를 몇 번이고 떠올릴 것 같다.
밥 먹는 모습도, 슈트를 입은 멋진 모습도, 다정한 목소리도 전부.
모두 별것도 아니다. 아무 말도 아니고 아무 의미도 없는 일상의 풍경인데, 그저 거기에 당신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 의미가 생겼을 뿐인 하루다.
단지 그것만으로 가슴이 저미도록 행복한 하루가 된다.
간질간질한 기분으로 희나는 진혁을 쳐다보며 계속 헤헤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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