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버리지 못한 것은 (4)
“옷까지 쫙 빼입고……. 혹시 데이트라도 하러 나가는 거예요?”
겉으로는 지나가듯이 쿨한 척, 속으로는 그렇다고 대답하면 과수원에 화염 방사기를 설치하겠다고 생각하며 은근히 떠보았다. 그러자 진혁이 가볍게 픽 웃으며 대답했다.
“데이트는 무슨. 학교 다닐 때 신세 지던 교수님이 충남대에 전임해 오셨거든. 학회 때문에 좀 도와달라고 하셔서.”
“이미 졸업했는데 그런 부탁을 해요?”
“음, 신세를 워낙 많이 져서.”
“아직도 친한가요?”
“친하다기보다는 원래 교수님 밑에서 박사까지 할 생각이었는데 갑작스레 그만뒀거든. 이쪽으로 오시고 나서 더 학교로 돌아오라고 말씀이 많으셔.”
학회든 박사든 대학도 간신히 졸업하는 희나로서는 잘 모르는 얘기였다.
학교로 돌아오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지만 희나도 진혁이 과수원보다는 학교에 있는 게 훨씬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분위기든 성품이든 학자에 어울리는 사람이니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 진혁의 차가 병원에 도착했다. 전에 왔던 아홉 시보다 한 시간 빠른 여덟 시였다. 다행히 오늘은 오전 수업이 없기 때문에 미래를 데려다주고도 수업을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미래를 안고 내리는 희나를 보고 진혁이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고마워. 그럼 잘 부탁해.”
“걱정 말고 일 잘 보고 와요.”
희나는 실실 웃으면서 병원으로 들어섰다. 새벽같이 일어나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는 귀찮은 일이었지만 진혁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이 기뻤다.
고생을 워낙에 많이 하고 자란지라 전혀 힘들지도 않았다. 불편한 잠자리에서 하루에 네 시간씩 자고 하루도 쉬지 않고 육체노동인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교까지 꼬박꼬박 다녔었던 희나에게 이 정도는 노동도 아니었다.
“언니, 언니. 이거 봐봐.”
정신없이 자던 미래가 투석기에 연결되고 나서는 잠이 다 깼는지 종알종알 말을 걸어온다. 희나는 며칠 전처럼 미래가 누워 있는 의자 옆에 기대앉아서 미래가 하는 말을 들어주었다.
어린이집과 과수원, 진혁에 대해서 계속 말을 늘어놓던 미래는 네 시간이나 같이 놀고도 아쉬운지 투석이 끝날 때쯤 되자 희나의 손을 붙잡고 물었다.
“이따 미래랑 놀아주러 와?”
“글쎄? 하는 거 봐서?”
“착하게 있을게. 말 잘 들을게.”
놀아 달라고 몸을 배배 꼬며 애교를 부리는 미래를 보고 희나는 킥킥 웃었다.
기괴해 보였던 얼굴도 이젠 귀엽기만 하다. 예쁜 짓만 골라서 하는데 어떻게 안 예뻐할 수 있으랴.
진료를 마친 미래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진혁에게 카카오톡을 보냈다. 이곳에서 재회한 후 진혁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건 처음이라 괜히 설렜다.
「몇 시쯤에 끝날 거 같아요?」
별것도 아닌 메시지인데 보내놓고 나니 긴장이 되었다. 수업 도중에도 틈틈이 확인했지만 1이 사라지질 않는다.
풀 죽어 있던 희나는 수업이 모두 끝나는 네 시쯤 진혁에게서 답장이 온 것을 발견했다.
「미안. 늦게 봤어. 아마 아홉 시에나 집에 들어갈 것 같아.」
「그럼 내가 이따 미래랑 놀아줄까요?」
「그렇게까지 폐를 끼칠 순 없지. 괜찮으니까 신경 안 써도 돼.」
「내가 미래랑 놀고 싶어서 그러는 건데요. 선생님이나 이상한 신경 쓰지 마요.」
너무 쉬운 여자로 보이지 않기 위해 ‘딱히 너랑 놀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거든!’이란 뉘앙스를 섞어 도도하게 답장을 보냈다.
그래놓고 또 두근두근 휴대폰을 부여잡고 답장을 기다리던 희나의 얼굴에 웃음이 샤악 번졌다.
「정말 고마워. 그러면 집에 가면 데려다줄 테니까 혼자 어두운 길 걷지 말고 기다려.」
희나는 별 내용도 없는 카톡 메시지를 몇 번이고 쳐다보며 실실 웃었다. 휴대폰을 보며 히죽히죽 웃는 희나를 다들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하늘로 슝 날아가 버릴 것 같은 기분으로 희나는 미래가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 과수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그림 그릴 거야. 언니, 크레파스.”
“귀찮아. 네가 갔다 와.”
“잉. 나 화장실 가고 싶은데.”
푸세식은 아니지만 집이 넓어서 화장실은 거실을 나가서 마루를 통과해 옆 통로로 가야 있다. 희나는 먼 여행(?)을 떠나는 미래를 위해 크레파스를 갖다놔 주기로 하고 뒹굴고 있던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어디에 있는데?”
“저기 방 서랍에.”
대강 대답하고 미래는 급한지 화다닥 거실을 나갔다. 좀 더 자세히 가르쳐주지, 하고 투덜거리며 희나는 미래의 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미래의 방에 있는 조그만 어린이용 책상 서랍에는 크레파스 같은 건 없었다.
잠시 주변을 찾다가 희나는 미래의 방을 나왔다. 미래가 올 때까지 기다리려 하다가 문득 희나의 눈길이 닫혀 있는 진혁의 방으로 향했다.
전부터 들어가 보고 싶었다. 거기에 크레파스를 찾는다는 명분을 가진 희나는 천하무적이다.
슬쩍 다가가서 방문을 열자 상쾌한 진혁의 향기가 났다.
두근두근하며 방으로 들어서 안을 둘러보았다. 방은 아주 깔끔했지만 좀 살풍경하다. 꽤 넓은데도 침대와 책상, 그리고 장롱이 방 안에 있는 가구의 전부였다.
서울의 집처럼 책이나 다큐멘터리, 예술 영화 DVD가 가득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빗나갔다. 이래서는 크레파스 찾는다는 핑계로 뒤적거릴 만한 공간도 없다.
희나는 슬그머니 안으로 들어가 책상 쪽으로 걸어갔다. 서울의 집에 있던 것과 다르게 묵직하고 커다란 책상이다.
정갈하게 정리된 책상은 말 그대로 어른의 책상이란 느낌이 강해서 당연히 어린이용 크레파스 같은 게 있을 것 같진 않았다.
한편에 놓인 달력과 메모 보드에 깔끔하게 쓰인 진혁의 메모를 읽던 희나는 아무 생각 없이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곧 서랍 안을 본 그녀의 움직임이 멈췄다.
정돈된 서랍 한편에 오래된 폴라로이드 사진이 있었다.
약간 쑥스러운 듯 웃고 있는 진혁의 단정한 얼굴, 그리고 그 옆에서 갈색 고양이 머리띠에 갈색 머리를 하고 발그레해져서 웃고 있는 것은 희나였다. 그 얼굴 양쪽에 바보, 천재라고 희나가 쓴 글자가 그대로 있었다.
둘이 놀이 공원에서 찍고, 코스트코 에서 인화해서 서로 나눠 가졌던 그 사진이었다.
“절대 버리면 안 돼요-. 평생 계속계속 가지고 있어야 돼요!”
분명히 내 입으로 그렇게 말했었지. 선생님은 마지못해 그러마고 대답했었고.
그러나 막상 그렇게 말한 본인은 그 후 신변에 일어난 이런저런 난리 통에 휩싸여서 어디 갔는지도 모르게 잃어버렸다.
이런 게 있었었지, 하는 것을 아주 오랜만에 깨달은 희나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서랍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자주 사용할 것 같은 물건들도 들어 있었다. 잊어버리고 몇 년째 그냥 방치해둔 것은 아니란 뜻이다.
아니, 애초에 진혁이 이곳으로 내려온 것은 두 사람이 헤어진 이후다. 그리고 사진이 여기 있다는 건 일부러 챙겨서 가져왔다는 뜻이다. 그런 얼굴을 했던 주제에…….
“진짜 바보 같네…….”
희나의 입술 사이로 작은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이 몰려와 희나의 커다란 눈동자에 눈물이 고였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진혁을 떠나던 날 자신을 쳐다보던 그의 슬픈 눈동자는 잊히질 않는다.
여태까지 태연하게 대하기 힘들 정도로 괴로웠다면서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었던 그의 마음이 너무 애처롭고, 미안하고, 고맙고, 말할 수 없이 가슴이 아팠다. 지난 일이 너무너무 후회가 돼서 마음에 사무쳤다.
그러면서도 희나는 사진까지 가지고 있는 주제에 모르는 척하고 피하고 선을 긋고 차갑게 굴었던 바보 아저씨가 밉기도 했다.
그녀가 사진 한 장을 들고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 있는데 거실에서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미래가 화장실에서 돌아왔다는 것을 깨달은 희나는 황급히 눈물을 닦았다.
진혁의 방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았는지 곧 미래가 작은 머리를 문 사이로 쏘옥 디밀었다. 미래는 희나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언니 왜 울어?”
눈물을 닦은 보람도 없이 들켜버린 것이다.
달려와서 다리를 붙잡고 걱정스럽게 묻는 아이에게 설명할 말이 궁색해 희나는 사진을 보여주며 툭 말했다.
“니네 아빠가 너무 바보라서.”
“바보?”
미래는 사진을 보고 거기 써 있는 글씨를 읽더니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우리 아빠 천재야. 서울대 다녔어. 언니가 바보야.”
이런 어린아이에게 지방대생이라고 무시를 당하다니. 미래의 별생각 없는 말에 대미지를 입은 희나는 발끈해서 조그만 볼을 잡아당겼다.
“니네 아빠 완전 바보거든? 내가 더 잘 알아.”
“힝. 아빠 바보 아냐! 언니 나빠!”
얼마나 아빠를 좋아하는지 아빠 험담 좀 했다고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다.
희나는 울먹거리는 미래를 품에 꼭 끌어안고 중얼거렸다.
“그래, 아빠 바보 아니야. 내가 훨씬 바보야.”
예쁜 눈에서 눈물이 다시 한 방울 또로록 흘러내리자 놀란 미래가 작은 손으로 닦아주며 위로한다.
“언니 울지 마. 언니 바보 아니야. 언니 착하고 예뻐.”
“언니 안 착해. 못돼먹었어.”
희나가 우니까 영문도 모르고 미래도 따라 울기 시작했다. 둘이 쭈그리고 앉아 진혁의 방에서 훌쩍훌쩍 울고 있는데 거실에서 다시 인기척이 들렸다.
당황한 희나는 방에서 나가려고 했으나 그러기도 전에 진혁의 어머니와 마주치고 말았다.
희나는 눈물 자국이 선명한 얼굴로 어쩔 줄을 몰라 굳어 버렸다.
진혁의 어머니는 아들의 방에서 나오는 희나를 잠시 놀란 얼굴로 물끄러미 쳐다보았지만 곧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밥 먹고 갈 거니, 희나야?”
“아, 네.”
“그래. 그럼 밥 먹기 전에 씻을래?”
“아, 그게, 괜찮은데…….”
“오늘은 진혁이가 늦게 오니까 혹시 괜찮으면 우리 미래랑 같이 목욕해주면 좋고.”
몰래 울었다는 걸 알고 씻게 해주려는 것이다. 모르는 척해주는 것이 너무 고마워 희나는 또 눈시울이 빨개질 것 같았다.
“네, 그럼 그렇게 할게요.”
“그래. 그럼 금방 뜨거운 물 준비해줄 테니까 미래랑 놀고 있어.”
“아뇨, 제가 할게요!”
희나는 황급히 대답하고 미래의 손을 잡은 채 진혁의 집 목욕탕으로 걸어 나왔다.
집을 증축해서 만든 듯한 목욕탕엔 아주 커다란 욕조가 있었다. 온수기를 켜고 물을 받으려니 방금 전까지 요동쳤던 감정이 쑥 사그라들고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했다. 남이랑 목욕하는 건 생전 처음이다.
‘뭐 어린애인데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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