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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그 너머에는-83화 (83/140)

83화. 버리지 못한 것은 (3)

“우와, 진짜 넓잖아! 이게 그냥 남는 땅에다 심은 거라구요?”

“그냥 놀리는 땅은 아니고, 딸기 따고 나면 참깨도 심어. 기름도 그거로 짜니까 나물들이 맛있지.”

“헤에, 여기 과수원 전체 다 넓이가 얼마나 되는 거예요?”

“임지랑 택지까지 합쳐서 5,000평 정도 되려나.”

“5,000평이요?”

진혁의 대답에 희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엄청 크네! 난 한 100평 정도 될 줄 알았는데…….”

“서울 스케일이군. 100평으로 먹고살려면 돈나무라도 심어야겠네.”

“계속 서울, 서울 하지 마요. 이제부터 서울 애가 얼마나 일 잘하는지 보여줄 테니까.”

장담하며 희나는 자신감 있게 밭두렁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진혁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런 희나를 쳐다보았다.

“정말 괜찮겠어? 난 약국도 왔다 갔다 해야 되고 다른 작물도 보고 와야 해서 계속 여기 있을 수가 없는데.”

“걱정 말고 맘대로 다녀와요. 대신 내가 딴 거 내가 다 먹어도 되는 거죠?”

“그래. 그리고 가져가고 싶은 대로 가져가도 괜찮아.”

희나는 문제없다는 듯이 브이 자를 그렸다. 그리고 진혁의 설명도 대충 들은 채 딸기를 마구 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패기가 충만하여 ‘따다가 남는 건 전에 교통 정체의 원인이었던 5일장에 내다 팔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신규 사업 진출에 대한 꿈은 접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노동력이 그다지 보잘것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아아, 허리 너무 아프다아아아.”

“거 봐, 힘들댔잖아.”

희나가 10분도 못 버티고 일어나서 한숨을 내쉬자 옆쪽에 앉아 있던 진혁이 웃었다.

막막한 표정으로 넓은 밭을 쳐다보고 있던 희나가 동그란 눈을 굴리며 물었다.

“이거 수확하다가 못 한 것들은 어떻게 해요?”

“그냥 버리거나 드실 분들 와서 따 가시라고 하거나 해. 딸기는 인기 많으니까 아마 다 따 가실걸. 양배추 같은 건 잘못 심으면 그냥 다 버리지만.”

“우와, 너무 아까운데요. 나라면 다 따겠다.”

“다음 주부터 블루베리 수확해야 해서 여기에 일꾼을 쓸 수가 없어. 노지 딸기는 어차피 돈이 안 돼서 대충 재배한 거라 대부분 규격 미달이고.”

규격 미달이라지만 다 맛있어 보이고 색깔도 예쁘다. 잠시 곰곰이 생각하던 희나의 머릿속에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선생님, 과일 주면 공짜로 일할 일꾼들이 몇몇 있는데 쓰실래요?”

“일꾼? 무슨 일꾼?”

희나는 다음 주 토요일에 있을 학교 축제에서 동아리 주점을 하기로 한 것에 대해 얘기했다. 과일이 비싸서 문제지 만약에 공짜로 얻을 수만 있다면 어마어마하게 남는 장사가 될 거다.

“아마 과일 준다고 하면 다들 일하러 올 거예요. 과일 남는 거 좀 있어요? 어때요?”

“과일이야 냉동 보관하는 것도 있고 하우스 과일도 있으니 얼마든지 괜찮지만…… 만약에 정말 일하러 오면 일당도 줄게.”

“일당요? 정말요?”

“그래. 그렇지 않아도 일손이 부족한데 우리야 좋지 뭐.”

진혁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희나는 친구들에게 메시지를 날려 열광적인 답변을 얻어냈다.

주말에 다 같이 와서 하우스 작물 수확하는 걸 돕는 걸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희나는 다시 딸기 따기에 복귀했다.

따고 따고 또 따고 잔뜩 땄다. 매일 하면 힘들겠지만 처음 하는 거라 그런지 허리가 아프긴 해도 놀이 같고 재미있었다.

중간에 점심도 챙겨 먹고 또 손보다 입을 훨씬 많이 움직여가면서 진혁과 웃고 떠들며 딸기를 따다 보니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해가 기울어갈 무렵, 진혁과 희나는 가득 찬 바구니를 끼고 밭 가운데에 있는 원두막에 올라갔다.

녹초가 된 희나가 풀썩 쓰러져 있는 동안 진혁이 하우스 앞의 수도에 가서 딸기를 씻어서 가져왔다.

“먹어봐. 직접 딴 거라 더 맛있을 거야.”

“우웅, 손 씻으러 가기 귀찮아요.”

찌뿌둥한 몸으로 뒹굴던 희나는 옆에 앉아 있는 진혁을 올려다보면서 입을 벌렸다.

“입에 넣어줘요.”

“…….”

안경 너머의 긴 속눈썹이 살짝 흔들렸다. 진혁은 “이 바보가…….”라고 작게 중얼거리며 희나의 이마를 톡 때렸지만,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누워 있는 희나의 입에 딸기를 넣어주었다.

좁고 어둑어둑한 사회과 지도실에서 먹었던 딸기도 너무 맛있었지만, 아주 오래되어 삐걱거리는 원두막에 드러누운 채 탁 트인 밭과 꽃이 핀 과실수들을 보면서 먹는 딸기는 더할 나위가 없었다. 물론 옆에서 먹여주는 흰 손가락이 그때나 지금이나 맛의 원천이겠지만.

희나는 만족스럽게 웃으면서 입에 들어온 딸기를 오물오물 먹었다.

“일곱 시 되면 미래 집에 올 텐데. 버스 정류장에 나가봐야겠다.”

모이 먹는 새처럼 잘도 받아먹는 희나의 입에 딸기를 계속 넣어주던 진혁이 시계를 보더니 말했다. 구운 떡처럼 늘어져 있던 희나의 몸이 그 말을 듣고 벌떡 일어섰다.

“내가 갈게요!”

“네가 간다고? 피곤하잖아. 다리 안 아파?”

“안 아파요! 갈 수 있어요!”

“같이 갈까?”

“아니요. 선생님은 집에 있어요.”

진혁과 같이 걷고 싶기도 하지만 그보다 그 여인네들이랑 시시덕거리는 모습을 보기 싫은 마음이 더 컸다.

희나의 칼답에 진혁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원두막에서 내려와 컴컴해지기 시작한 과수원 길을 걸어오는 도중에 진혁이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녁때인데…… 오늘도 밥 먹고 갈래?”

별거 아닌 제안이지만 진혁이 뭔가 권하는 걸 듣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른다. 희나의 볼이 발그레하게 물들고 입가가 샤악 올라갔다.

그녀가 은근히 진혁을 쳐다보자 그는 조금 머쓱한 표정을 지은 채 다른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깜깜해지면 데려다줄 거예요?”

얼굴을 살짝 내밀며 묻는 희나에게 진혁은 부드럽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다정한 표정이 너무 좋아서 하마터면 희나는 그의 목덜미에 매달릴 뻔했다.

“헤헤. 그럼 먹고 갈래요.”

“그럼 10분쯤 있으면 미래 도착할 테니까 짐은 나 주고 먼저 올라가. 난 잠깐 기구 좀 정리하고 갈게.”

집으로 가는 갈림길에서 희나는 바구니를 진혁에게 넘겨주고 나무 뒤쪽으로 꺾었다. 그리고 30초쯤 걸었을까, 저 멀리서 누군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눈을 가늘게 뜨고 보니 승수였다.

“야- 유진혁, 어떻게 된 거야?”

승수는 뒤쪽에서 걷고 있는 희나는 발견하지 못한 듯 진혁에게만 손짓을 했다. 왜 왔나 궁금하기도 하고, 히죽히죽 웃고 있는 것이 어째 불안해서 희나는 잠시 멈춰 선 채 승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응? 뭐가?”

“너 서울에서 온, 남자 신세 여럿 망쳤을 거같이 생긴 불여시 같은 꽃뱀한테 홀려서 땅 다 날릴 것 같다고 온 마을에 소문이 파다하던데?”

“뭐……?”

멍하니 반문하는 진혁의 뒤에서 얼굴이 잔뜩 빨개진 희나의 분노에 찬 외침이 울려 퍼졌다.

“누가 꽃뱀이야-!”

***

“진짜 정성이 뻗쳤구나, 아주.”

“오빠는 뭐 한다고 아침부터 여기 나와 있어요?”

이죽거리는 승수를 향해 희나가 까칠하게 받아쳤다.

전날 밤 갑자기 온 진혁의 전화에 좋아라 하며 새벽같이 일어나 신나게 과수원으로 달려왔다가 집 앞에서 승수를 마주친 것이다.

“할 일 없이 나와 있는 줄 알아? 저 녀석 자리 비우면 내가 과수원 일 봐줘야지.”

“오빠도 나랑 마찬가지면서 무슨.”

“난 엄연히 돈 받고 하는 거야-. 너처럼 전화 한 통에 뛰어나오진 않는다. 진짜 얼굴값 못 하는구나, 너.”

“알면서 꽃뱀이라고 소문을 내요?”

희나가 쏘아붙이자 승수는 씨익 웃었다. 여전히 희나가 꽃뱀 취급당하는 걸 재밌어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누가 소문을 내? 이미 소문이 파다하다고 알려주러 온 거지.”

“오빠도 파다해지는 데 일조했잖아요!”

“그건 부정할 수 없겠군.”

승수가 낄낄 웃으면서 더 능글맞게 희나를 놀려 먹으려는데 진혁의 집 거실 유리문이 드르륵 열렸다. 그리고 슈트 차림으로 미래를 안고 나오는 진혁의 모습이 보이자 찌푸리고 있던 희나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아주 입이 찢어지는구나.”

“흥. 외로워서 질투하는 거죠?”

“내가 왜 널 질투해? 이 꽃뱀 스토커가!”

“뭐예요? 이 소작농이!”

“소작농이라니! 우리 집도 농사짓거든? 우리 땅이 이 녀석네보다 더 넓어!”

“반 이상이 선산이라서 나오는 것도 없다고 전에 술 먹고 한탄했잖아요.”

승수와 티격태격하던 희나는 진혁이 가까이 다가오자 말을 뚝 멈췄다.

진혁은 승수에게 눈인사를 한 후 희나를 돌아보고 아주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미안해. 갑작스럽게 이런 부탁을 해서……. 정말 수업은 괜찮은 거야?”

“네. 문제없어요. 괜찮으니까 걱정 마세요.”

“문제 있어도 괜찮겠지만.”

“오빤 일하러 안 가요?”

옆에서 한마디씩 툭툭 던지는 승수를 밀어내고 희나는 진혁과 함께 차에 올라탔다.

“그럼 잘 부탁해. 정말 고마워.”

“여기 일은 걱정 말고 샌님은 샌님 같은 일이나 걱정하셔-.”

기껏 도와주러 와놓고서도 얄미운 소리만 하는 승수였지만 진혁은 익숙한 듯 그냥 웃으면서 다시 한 번 고맙다고 말하고 차를 출발시켰다.

희나는 얼굴을 창밖으로 내밀어 승수에게 혀를 베- 내밀어 보이고는 그가 인상을 찌푸리는 것을 보며 킥킥 웃었다.

“정말 덕분에 살았어. 미래가 워낙 낯을 가려서 그간 다른 사람한테 맡기고 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거든.”

차를 도로로 진입시키며 진혁이 말을 꺼냈다. 희나는 무릎 위에 앉아 정신없이 자고 있는 미래의 침을 닦아주며 고개를 저었다.

“뭐 그냥 병원 데려가서 앉아만 있는 건데요. 별것도 아니에요.”

“애 보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는데 뭐. 괜찮으면 아르바이트비라도 주고 싶은데.”

“됐어요. 무슨 돈이에요.”

“사양 안 해도 돼. 이런 시골까지 도와주러 오는 사람도 없는데 돈 주고라도 부탁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희나는 진혁에게 돈을 받고 싶진 않았다. 돈을 받으면 호의로 봐주러 온 게 아니라 애 봐주러 온 알바생으로 거리감이 세워질 것 같아서다.

“안 받아도 괜찮아요. 나 돈 잘 벌어요.”

“그거야 그렇겠지만 그래도…….”

“됐어요. 이 얘기는 이제 끝!”

희나가 탁 잘라 말하며 손을 움직이는 바람에 정신없이 자고 있던 미래가 잠에서 깨어났다.

‘내가 무슨 일 하는지 아는 건가?’ 하는 의문이 뒤늦게 떠올랐지만 잠투정을 부리는 미래를 토닥여 재우느라 그녀는 묻는 것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다시 미래가 잠들자 희나는 커다란 눈으로 슬쩍 운전 중인 진혁을 곁눈질했다. 다크 그레이의 슈트가 희고 정갈한 얼굴에 아주 잘 어울린다.

눈이 흐뭇한 건 좋은데 그녀의 머릿속에는 마음에 걸리는 것이 생겼다.

전에도 그렇고 슈트 차림으로 어딜 가는 걸까?

“그런데 선생님 어디 가는 거예요?”

궁금한 건 못 참는 희나는 별로 문제될 질문도 아닐 것 같아 대뜸 물었다.

“옷까지 쫙 빼입고……. 혹시 데이트라도 하러 나가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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