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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그 너머에는-82화 (82/140)

82화. 버리지 못한 것은 (2)

“아, 그게, 요 앞에 대학교 학생인데.”

“어떻게 아는 사이예요?”

“서울에서 좀…….”

진혁은 설명하기 난감한 듯 희나를 돌아보았다. 하긴 뭐라고 설명하기 애매한 사이이긴 하지.

하지만 그냥 아는 사이 따위로 얼버무려지고 싶지 않은 희나는 말을 돌리기 위해 진혁의 팔을 턱 잡았다.

갑자기 팔을 잡힌 진혁이 왜 그러냐는 듯 돌아보자 희나는 눈을 깜빡거리며 새침하게 말했다.

“미안해요, 굽이 높아서.”

“바보네. 그러게 왜 이런 불편한 신발을 신어.”

“예쁘잖아요.”

“안 신어도 예뻐.”

늘 그렇듯 별생각 없이 자연스럽게 나온 칭찬이었지만 희나의 볼이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그리고 진혁이 팔을 잡아 부축해주자 희나의 입가에는 미소가, 주변 처자들 입가에는 썩소가 떠올랐다.

그렇게 희나가 조금 소심한 승리감을 만끽하고 있을 때였다.

“선생님, 오셨어요?”

미끄럼틀 쪽에서 아이랑 놀아주던 문제의 선생이 이쪽으로 걸어왔다. 얼씨구? 선생님?

희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보았다. 다들 오빠라고 부르는데 혼자 미래 아버지도 아니고 선생님이라니. 어감이 묘하기도 하고 자신과 겹치는 호칭이 어째 영 꺼림칙했다.

이 사람이 아마 99% 미래가 낙점한 장래 외숙모일 것이다.

희나는 뚫어져라 그녀의 모습을 관찰했다.

조신한 현모양처 타입에 단정한 이목구비. 화려한 맛은 없어도 남자들이 결혼 상대로 아주 좋아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말하자면 “평생 너만 예뻐하고 너만 사랑할게!”라는 프러포즈보다 “내 아이의 엄마가 돼줘!”라는 프러포즈를 받기 매우 적합한 타입이란 거다.

그녀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달리 희나에게는 별 눈길을 주지 않은 채 곧장 진혁에게 걸어와 수줍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저번에는 정말 감사했어요. 아버지도 굉장히 좋아하고 계세요.”

고맙다니? 뭐가? 아버지가 뭘 좋아하는데? 희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 사람의 대화에 집중했다.

“아뇨. 친구가 구해준 건데요.”

“그래도 다 선생님 덕이죠. 그런데 혹시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구할 수 있을까요?”

“네. 그러면 다음에 댁으로 가져가겠습니다.”

집으로 가져가다니! 대체 뭘!

희나의 예쁜 눈이 찡그려졌다. 두 사람의 기류가 탐탁찮은 것은 희나뿐만이 아닌지 다른 세 선생도 별로 표정이 밝지는 않았다.

방금 전까지 부러움을 사다가 다른 세 명과 같은 처지가 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은 희나가 다시 그녀가 진혁에게 말을 걸려는 타이밍에 그의 팔을 당기며 말했다.

“이제 가요. 나 다리 아파요.”

“응? 아, 그래. 많이 아파?”

“아파요.”

그러면서 일부러 조금 다리 아픈 척을 하자 진혁이 팔을 잡아 부축해주었다. 아주 허술한 여우 짓인 만큼 진혁에게는 통했으나 다른 여인들의 심기는 좀 더 불편해진 듯했다.

“그럼 가볼게. 수고해. 미래 잘 부탁드립니다.”

인사를 하고 여선생, 어린이들, 노인들까지 전 연령대에 걸친 열렬한 시선을 받으며 차에 올라타자마자 진혁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러게 웬 하이힐을 신었어. 많이 아파?”

그러나 희나는 대답 대신 진혁을 못마땅하게 아래위로 훑어보며 입을 쭉- 내밀었다.

“괜찮아요. 그보다 선생님 왜 그렇게 어린이집에 차려입고 오는 거예요?”

“차려입다니…… 무슨.”

“집에서는 맨날 저지만 입고 있잖아요.”

잘 안 입는 깔끔한 브이넥 셔츠에 진까지 입은 진혁이 못마땅한 것이다. 그러자 진혁이 한쪽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병원도 가고 선생님들 계신데 추레하게 하고 올 순 없잖아.”

“추레하게 오면 왜 안 돼요?”

진혁은 당연한 상식을 설명해야 하는 고뇌에 빠진 사람의 표정을 지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희나를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

“그러는 너야말로 어린이집 갔다가 클럽이라도 가?”

“난 학교에 가잖아요.”

“학교 가는데 그렇게 차려입었어? 멋진 남자 선배라도 있어?”

이 바보 아저씨가 웬 남자 선배 타령이야? 희나는 눈치 없는 진혁을 흘겨보며 새침하게 말했다.

“완전 많죠. 다 쩔게 멋있어요.”

“그거 좋겠네.”

진혁이 눈을 가늘게 뜨고 으스대는 희나를 보고 픽 웃으며 말했다.

그 여유 있는 태도가 화나서 희나의 볼이 불만스럽게 부풀었다.

학교 선배가 다 멋있긴커녕 사실 그런 거 없다. 괜히 동기들이 학교 앞 약국 총각에게 열광하는 게 아니지. 학내가 워낙 척박(?)하니까 외부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는 거다.

그러고 보면 이 근처에 사는 남자들 비주얼이 외모에 큰 관심 없는 희나가 보기에도 영 좋지가 않았다.

보혜나 은영이도 꽤 예쁘장하고 그 외에도 미녀나 훈녀들은 상당히 자주 눈에 띄는 데 반해서, 남자들은 공통적으로 새까맣고 미남은커녕 훈남도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희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운전 중인 진혁의 옆모습을 쳐다보았다.

피부가 희고 이목구비가 아주 가지런해서 지적이고 귀티가 난다. 이 동네에선 대단히 드문 타입이다.

이렇게 남성미의 황무지 같은 곳에서 혼자 우월하니 동네 아가씨들이 죄다 몰려올 만도 하지.

“맨날 어린이집 와서 수다 떨어요? 다 오빠라고 부르고 무지 친해 보이네요.”

“그럴 리가. 그냥 다들 어렸을 때부터 같은 동네에서 자랐으니까 서로 잘 아는 거지 뭐.”

“아까 어떤 선생님은 선생님이라고 부르던데요?”

“그분은 나 여기 있을 땐 안 계셨어. 한 7~8년 전쯤에 이사 오신 것 같더라.”

이 동네는 시골 동네인데 어째서 젊은 여자들의 이촌향도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지 희나는 심히 유감스러웠다. 거기다 그 사람한테만 그분이란 호칭을 쓰는 것도 유감이었다.

희나는 그녀의 또렷한 얼굴을 떠올리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괜히 기분 나쁘다 싶더니 재연을 좀 닮은 거 같기도 했다.

사방 천지에 제2, 제3의 심재연이 널려 있구나. 그나마 미래가 있어서 불특정 다수의 대시를 상당히 억제하고 있는 거다.

유일한 아군인 미래를 더 격하게 포로로 만들 계획을 세우던 희나는 문득 줄곧 궁금했던 것이 떠올랐다.

“근데 미래는 왜 선생님을 아빠라고 불러요? 선생님 호적에 올린 거예요?”

“아니, 그건 아닌데, 그냥 미래가 계속 아빠라고 부르길래 내버려 뒀어.”

“그거 그냥 그렇게 둬도 되는 걸까요?”

“음, 굳이 지금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라고 생각해서.”

“어떻게 하는 게 괜찮은 건지 모르겠네요.”

“그러게. 나도 잘 판단이 안 되네. 난 원래 누굴 가르치는 데 소질이 없기도 하고.”

마지막 말이 묘하게 여운이 남는다.

그가 교단에 서지 않게 된 가장 큰 원인이 자신인지라 희나는 괜히 찔끔했다. 그렇지만 모처럼 평범하게 얘기하고 있는데 괜히 숙연한 분위기 만들기 싫어서 가볍게 말을 돌렸다.

“선생님이 소질 없는 건 누굴 가르치는 게 아니라 개그죠.”

예전에 희나에게 개그를 했다가 핀잔을 들었던 게 떠올랐는지 진혁이 쿡쿡 웃으며 장난스럽게 받아쳤다.

“소질 없는 거 아니거든? 레퍼토리 좀 더 늘었는데 들어볼래?”

“나 구두 신고 차에서 뛰어내리는 거 보고 싶어요?”

무가치한 개그에의 열정을 아직 버리지 못한 진혁에게 희나는 차가운 일침을 날렸다. 진혁은 쿡쿡 웃으며 차를 우회전시켰다.

“학교 간댔지? 학교 앞에 내려주면 돼?”

대답하기 전에 희나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그녀는 무심한 척 그를 떠보았다.

“선생님은 나 내려주고 나서 뭐 해요?”

“난 과수원에 일이 있어서 도와야 돼. 딸기 딸 때가 됐거든.”

“딸기요? 딸기는 겨울에 나는 거 아니에요?”

“그건 하우스 딸기고, 노지 딸기는 지금이 철이야. 맛있어.”

희나는 5년 전에도 5월경에 딸기를 가져왔었던 게 떠올랐다. 그의 말대로 아주 맛있고 달콤해서, 그 맛은 여태까지 잊을 수가 없었다.

“예전에 선생님이 갖다 준 거 먹어본 적 있잖아요. 맛있었어요.”

“아, 그러네. 맛있지? 노지 딸기는 타산이 안 맞는데 어머니가 워낙 좋아하셔서 심었어. 조금만 팔고 수확해서 동네분들이랑 먹으려고.”

“선생님이 직접 과수원 일도 하는구나. 안 힘들어요?”

“응, 나도 하지. 일꾼 구하기가 워낙 힘들어서 수익 나는 작물들 쪽만 사람 써서 재배하고 그냥 군데군데 먹으려고 심은 것들은 적당히 직접 수확해서 먹어.”

“부지런하네요.”

“난 과수원 일 하는 거 꽤 좋아해. 특히 수확하는 건 더 좋고.”

이야기하는 표정이 즐거워 보이는 것이 빈말 같지 않았다.

희나는 웃고 있는 진혁의 반듯한 옆모습을 흐뭇하게 쳐다보며 그때 먹었던 딸기를 떠올렸다. 달콤하고 향기롭고 커다란 딸기. 생각만 해도 침이 고인다.

“그럼 내가 도와줄까요? 나 오늘 공강인데.”

공강은 개뿔이고 오늘은 완전 풀로 수업이 있다. 원래 수업은 절대 빠지지 않지만 딸기도 먹고 싶고, 이미 몇 개 날려먹은 마당에 아무려면 어떠냔 기분이었다.

사실 진혁과 좀 더 같이 있고 싶은 게 제일 크지만.

희나의 제안을 들은 진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학교 가야 된다면서?”

“안 가도 돼요. 수업은 없는데 그냥 동아리 애들이랑 놀까 했죠. 집도 기숙사고 이 동네는 별로 놀 거도 없으니까.”

능란한 거짓말에 진혁은 순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똑똑한 주제에 본인이 거짓말을 잘 못해서인지 엄청 잘 속는다.

“하지만 도와준다고 해도 그 모습으로 딸기 따는 건 좀…….”

“아무 바지나 좀 빌려줘요. 나 해 보고 싶으니까.”

“그냥 갈아입게?”

“네. 안 돼요?”

“안 될 거야 없지만 기껏 예쁘게 입었는데 아깝잖아. 멋진 선배한테 안 보여줘?”

이 아저씨가 아직도 멋진 선배 타령이야.

희나는 실눈을 뜨고 진혁을 쳐다보다가 살짝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차가 신호 대기를 받아 멈췄을 때 진혁에게로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진혁이 흠칫 놀라는 것을 보고 희나는 씨익 웃으며 물었다.

“나 옷 입은 거 예뻐요?”

“어? 어, 그러네.”

오늘 몇 번이나 아무렇지 않게 예쁘다고 말해놓고 둘이 남자 어색해하는 게 재미있었다.

희나는 실실 웃으면서 진혁의 앞에 얼굴을 대고 장난치다가 위험하다고 혼난 뒤에야 물러났다.

“정말 딸기 딸 거야?”

차를 늘 세우는 마당 한편에 주차시키며 진혁이 확인하듯 다시 물었다.

“네. 이미 여기까지 왔는데 당연하죠. 하면 안 돼요?”

“안 될 건 없지만…….”

“그럼 됐어요. 하는 거예요.”

당차게 말하며 희나가 마당에 내려서자 진혁이 묘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쳐다봐요?”

“네가 과수원에 있는 건 좀 이상해. 시골집 마당에서 쇼캣을 풀어 놓고 키우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까.”

“옷 갈아입으면 얼룩이 나비로 보일 거예요. 옷 빌려줘요.”

희나는 진혁을 밀어붙여 집 안으로 들어간 뒤 함께 옷장을 뒤졌다.

진혜 옷은 다 버렸는지 없었지만 적당한 반바지를 찾아서 꺼내 입었다. 그 위에 거의 원피스가 돼버린 진혁의 티셔츠를 입고 적당한 샌들을 빌려 신고, 머리에는 수건을 양머리처럼 썼다.

그렇게 완전히 농촌 패션으로 무장한 희나는 커다란 바구니를 들고 털레털레 진혁을 따라 과수원 길을 걸었다.

진혁은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따라오는 희나를 한 번씩 돌아보며 킥킥 웃어서 희나에게 꼬집힘을 당해야 했다.

얼마간 과수원 안쪽까지 더 걸어 들어가자 나무들 뒤쪽으로 조금 트인 공간이 나왔다. 가운데엔 원두막이, 왼쪽엔 비닐하우스가 줄지어 있고 오른쪽으로 일구어 놓은 밭이 보였다.

“우와, 진짜 넓잖아! 이게 그냥 남는 땅에다 심은 거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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