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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그 너머에는-81화 (81/140)

81화. 버리지 못한 것은 (1)

다음 날 아침.

희나는 삐빗- 하고 알람이 소리를 내자마자 눈을 떴다. 그리고 알람이 룸메이트를 깨우기 전에 얼른 끄고 일어나 침대 밖으로 나왔다.

양치를 하며 세면대 거울을 보니 얼굴이 조금 푸석해 보였다.

아침 일곱 시. 어제 동아리 친구들과 새벽 세 시까지 술을 마신 터라 피곤했다.

아침 수업은 열한 시니 더 자도 괜찮지만, 희나는 미래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러 가야 한다.

어제 그런 대화를 나눈 터라 갈까 말까 잠들기 직전까지 고민했지만 결국 가는 걸로 결론을 내렸다. 진혁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지만 어쨌든 지금은 이렇게 하는 것 말고 다른 좋은 방법이 생각이 안 났다.

꼼꼼히 세안을 마치고 희나는 옷장을 열었다. 학교에 갈 때는 그냥 니트에 청바지를 입고 화장도 거의 하지 않지만 오늘은 철저히 메이크업을 할 생각이었다.

어쨌든, 두 눈 시퍼렇게 뜬 채로 내가 못 먹는 걸 도둑고양이가 꿀꺽하게 내버려 둘 순 없지.

한참을 거울 앞에서 씨름한 희나는 시계가 여덟 시를 가리킨 걸 보고 허둥지둥 달려서 기숙사를 나왔다. 미래는 병원에서 아홉 시부터 진료를 받은 뒤 어린이집에 간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먼저 출발하기라도 할까 봐 그녀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익숙지 않은 하이힐을 신은 발로 열심히 과수원 흙길을 달려서 집 근처까지 가자 커다란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 마당 쪽에서 흐앙 흐앙 서럽게도 울고 있는 미래를 안고 있는 진혁이 보였다.

“언니!”

희나가 온 걸 발견하자마자 미래가 진혁의 품에서 내려오더니 쪼르르 달려와 품에 덥석 안겼다.

희나가 미래를 안아 든 채 옆으로 다가오자 진혁이 가만히 그녀를 쳐다보더니 중얼거리듯 말했다.

“안 올 줄 알았는데.”

“약속했잖아요.”

진혁은 조금 복잡해 보이는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안도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쨌든 덕분에 살았어. 아까부터 이제 너 다시는 안 오는 거냐고 울고 장난 아니었어.”

어지간히 진땀을 뺀 모양인지 진혁은 한숨을 내쉬며 눈가를 꾹꾹 눌렀다. 그리고 언제 울었냐는 듯 뚝 그친 채 희나를 보고 실실 웃고 있는 미래의 볼을 꼬집었다.

“언니가 좀 놀아줬다고 나는 완전 뒷전이네, 이제.”

“아빠도 좋아. 그치만 어린이집은 언니랑 갈 거야.”

새침하게 말하는 미래를 보고 진혁이 쿡쿡 웃었다. 아침부터 웃고 있는 그를 보니 기분이 설레고 상쾌하다. 희나도 입가에 미소를 띠우고 미래를 살짝 땅에 내려놓았다.

미래는 입을 헤- 벌리고 희나를 쳐다보더니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언니 치마 입었네. 언니, 공주님 같아.”

희나는 씨익 입꼬리를 올리고 브이 자를 만들었다. 어린이집 선생님 앞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오늘 평소엔 영 입지 않는 원피스를 꺼내 입은 것이 적중한 것이다.

미래는 주변을 폴짝폴짝 뛰어다니더니 진혁을 올려다보면서 물었다.

“아빠, 언니 이쁘지? 이쁘지?”

“응, 예쁘네.”

예쁘다는 말은 수도 없이 듣는 희나지만 진혁이 하니까 완전 다른 말처럼 들렸다. 부드러운 시선을 받고 희나의 볼이 살짝 빨개졌다.

“이렇게 차려입고…… 무슨 약속이라도 있어?”

“뭐, 조금요.”

어린이집 선생에게 미모로 기죽지 않으려고 꽃단장을 했다는 말을 할 수 없어 희나는 대충 얼버무렸다.

“자, 그럼 내가 미래 병원이랑 어린이집 데려다주고 올게요.”

“괜찮겠어?”

“그러려고 온 건데요. 당연히 괜찮죠.”

당당하게 장담하는 희나를 보면서 진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너 차 있어?”

“차요? 아니요?”

희나는 고개를 저었다. 차는커녕 운전면허도 없다.

그러자 진혁이 조금 기막힌 표정을 지으며 다시 물었다.

“그럼 어떻게 데려다주려고?”

“같이 걸어가려고 했는데요.”

“너 어린이집이 어딘지 알아?”

“지금 물어보려고 했는데……?”

어리바리한 표정을 짓는 희나를 보고 진혁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희나의 이마를 가볍게 톡 때리면서 쿡쿡 웃었다.

“걸어가다니……. 이래서 서울 애들은.”

“왜요? 멀어요?”

“시골에서 차 없이 어딜 다닌다고 그래.”

그러면서 진혁이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차 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고 희나는 발끈했다.

“멀면 택시로 가면 되잖아요! 내가 알아서 데려다줄게요.”

“누가 어린이집에 그렇게 부르주아처럼 등원해. 내가 데려다줄 테니 신경 쓸 거 없어.”

그러나 희나는 후다닥 달려가 차에 올라타려는 팔에 매달렸다. 이대로 생선이 도둑고양이에게 걸어가는 꼴을 방치할 순 없었다.

“내가 갈 거예요.”

“그럴 거 없어. 여긴 택시도 안 잡히는데.”

“콜택시 부르면 되죠. 전에도 금방 오던데요, 뭐. 내가 갈 거라니까요.”

진혁은 왜 희나가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리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는 잠시 곰곰이 생각하더니 조용히 제안했다.

“그럼 같이 갈래?”

대답은 들을 것도 없었다. 희나는 활짝 웃는 얼굴로 미래를 안아 든 채 진혁보다 빠르게 조수석에 올라탔다. 곧 세 사람이 탄 차가 천천히 과수원을 빠져나왔다.

진혁의 차는 어린이집에 가기 전, 병원에 들렀다.

몇 번이고 따라오지 않아도 된다고 굳이 만류하는 게 의아했던 희나는 병원에 도착해서야 그 이유를 깨달았다.

희나는 미래가 받는 것이 그냥 정기 진찰 같은 걸 줄 알았다. 진료실 들어가서 체온 재고 아픈 데 없나 문진하고 뭐 그런 정도로 생각했기에 미래의 몸에 투석기가 연결되었을 때 희나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한 번 투석 받는 데 세 시간이 넘게 걸린다는 말에는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평상시엔 병약한 겉모습을 빼면 잘 뛰어다니고 잘 웃어서 그렇게까지 병자 같지 않은데 투석을 하는 모습을 보니 얼마나 아픈지 뼈저리게 실감이 되었다.

저렇게 작은 아이가 일주일에 몇 번이나 몇 시간씩 누워서 치료를 받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니.

아픈 사람을 보는 건 원래 괴롭지만 아픈 아이를 보는 것은 특히 더 괴롭다.

아이를 데려다주는 것쯤 그냥 한 시간 정도 투자하면 되겠거니 하고 왔고, 열한 시 수업에도 들어갈 예정이었지만, 투석기에 연결되어 누워서도 웃고 있는 미래를 보고 나니 희나는 차마 가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과수원에서 일꾼을 워낙 많이 써서 진혁이 왜 굳이 학업과 취업을 모두 그만두고 귀향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이제 좀 알 것 같았다.

건강이 좋지 않은 어머니에게 아픈 아이를 전적으로 맡겨 둘 수도 없고, 주중에 3일 네 시간씩 쉬면서 일을 할 수도 없었던 거다.

걱정하는 진혁에게 집에 가서 일을 보라고 말하고 희나는 미래의 옆에 남았다. 그리고 투석을 받는 시간 동안 손을 잡고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방싯방싯 웃는 미래와 이야기를 하는 게 즐거워서 지루하다거나 고생스럽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택시 타고 간다고 몇 번이나 말해도 끝날 때쯤에 데리러 오겠다고 해서 진혁의 연락처를 받게 된 건 덤이었다.

이미 익숙한 듯 얌전하게 구는 미래 덕에 긴 투석을 무사히 마치고 나오니 진혁이 미리 데리러 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차를 타고 미래가 다니는 어린이집으로 향했다.

병원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장소여서 차를 탄 지 5분 만에 어린이집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바깥을 내다보고 희나는 깜짝 놀랐다. 시골 어린이집이라서 외딴 곳에 있고 규모도 작을 줄 알았는데 생각 외로 컸다.

주변에 큰 도로도 있고 그냥 단순히 어린이집이라기보다 공원처럼 조성된 부지가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 양로원 건물도 붙어 있는 등 종합 복지 센터 같은 느낌이었다.

이미 오후로 접어든 시간이라서인지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게 울타리 밖에서도 보였다. 한편에 자리 잡은 등나무 정자에서는 마을 노인들 대여섯 명이 나와 앉아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어? 저기 선생님이다!”

창가에 붙어서 저건 뭐고 저건 뭐고 자랑스럽게 희나에게 설명하던 미래가 한 곳을 가리키며 외쳤다.

작은 손가락을 따라 어린이집 입구 근처에 서 있는 한 무리의 여자들을 본 희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규모가 커서인지 네 명 정도 되는 선생님들이 나와서 서 있었다. 그리고 그녀들의 모습은 희나가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달랐다.

공주님 치마래서 무슨 나풀대는 시폰 원피스 같은 걸 입고 화사하게 있을 줄 알았는데 그냥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플레어스커트에 머리도 하나로 단정하게 묶은 헤어스타일이었다.

다들 나름대로 조신하니 예쁘장한 가운데 유독 다른 사람들에 비해 눈에 띄는 여자가 한 명 있었다.

그녀는 다른 선생님들하고 떨어져서 미끄럼틀 근처에서 아이 하나를 봐주고 있었는데 계란형 얼굴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인이었다. 아마 그녀가 미래가 말한 예쁜 선생님일 것이다.

그러나 그녀 역시 예쁘다고 해도 일반인 레벨 정도지 유명 쇼핑몰 간판 모델인 희나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희나는 그녀의 수수한 모습을 보고 조금 사색이 되어 입술을 깨물었다.

“다 왔어. 미래야, 내리자.”

“응! 언니, 언니도 같이 내려!”

진혁의 차가 탁 트인 정문 앞에 멈춰 서자 어린이집 마당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미래의 재촉에 할 수 없이 내렸지만 희나는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내리자마자 주변 50m 이내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온통 인형같이 차려입은 희나에게 날아와 꽂힌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굵은 웨이브를 넣은 여신 머리에 꽃무늬가 들어간 흰색 프릴 시스루 원피스, 그리고 잔뜩 힘을 준 메이크업은 너무 눈에 띈다.

‘으, 이게 뭐야. 너무 오버했나.’

희나는 얼굴이 뜨거웠다. 예쁘다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긴 하는데 너무 창피했다.

이것은 마치 주말 동네 조기 축구회에 다들 추리닝 입고 왔는데 혼자 박지성 마킹한 국대 유니폼에 스파이크 신고 온 기분이라고나 할까.

희나가 화끈 달아오른 고개를 푹 숙인 채 뒤에 처져서 따라가는 사이 진혁과 미래가 어린이집 입구에 먼저 도착했다. 창피한 와중에도 희나는 그쪽의 동향에 귀를 기울였다.

“안녕하세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죄송하긴,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진혁 오빠.”

“오빠, 왔어요?”

진혁 오빠? 미래 아빠가 아니라? 친근하기 짝이 없는 데다가 고조되어 한 톤 높은 하이 톤이다.

상상과 다른 상황에 당황하여 쪽 팔림을 잊은 희나가 후다닥 진혁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그의 앞에 도달하기 조금 전에 이쪽으로 쪼르르 도로 달려온 미래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희나가 자랑스러워 미래는 더없이 의기양양해졌다. 미래는 입을 헤- 벌린 채 이쪽을 쳐다보는 어린이집 친구들에게 우쭐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희나에게 어리광을 부리며 안아 달라는 듯 팔을 벌렸다.

희나는 미래를 안아 들고 천천히 진혁 쪽으로 다가갔다.

그는 주변에 몰려든 선생님들이랑 가벼운 사담을 나누고 있었는데 어째 다들 친해 보였다. 그리고 그녀들은 갑자기 등장한 희나를 모두 은근히 경계하는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냥 선생님이 아니고 선생님들이었군.’

선생님들뿐이 아니고 저 멀리 등나무 정자에 앉은 노인들도 이쪽을 보면서 수군거리는 폼이 어째 껄끄러웠다.

희나가 다가가자 어쨌든 어린이집 선생들은 자동 반사적인 프로 의식을 발휘해 만면에 활짝 미소를 지으며 미래에게 물었다.

“미래 기분 좋은가 보네-. 병원은 잘 다녀왔어?”

“응, 갔다 왔어. 희나 언니가 계속 놀아줬어-.”

“희나 언니? 미래 언니야?”

“응, 내 언니야.”

“좋겠네- 미래. 그래도 이쪽으로 와야지? 지금 슬기반 노래 수업 시작했으니까 빨리 들어가자-.”

미래는 아쉬운 듯 희나를 쳐다보았지만 얌전히 선생님 손을 잡고 어린이집 안으로 들어갔다. 안고 있던 미래가 사라지고 나니 희나는 어째 적진에 알몸으로 남겨진 기분이 되었다.

뚫어져라 희나를 쳐다보던 선생 하나가 진혁을 보면서 물었다.

“오빠, 이쪽 분은 누구예요? 처음 보는 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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