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단, 그 너머에는-80화 (80/140)

80화. 일상의 침입 (5)

희나의 발걸음이 멈췄다.

오솔길 도로 건너에 있는 호프집 야외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동아리 친구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당황한 희나는 빠르게 몸을 피하려고 했으나 그러기 전에 이쪽 방향을 향해 앉아 있던 보혜가 그녀를 발견했다.

보혜는 희나를 보고 손을 흔들려다가 옆에 함께 서 있는 진혁을 보고 입을 딱 벌렸다. 그리고 호들갑스럽게 옆에 앉아 있는 은영과 도한을 찌르며 이쪽을 가리켰다. 그 바람에 테이블에 앉아 있던 전원이 두 사람을 발견하고 말았다.

진혁과 오붓하게 더 걷고 싶지만 저 녀석들에게 발견당한 이상 그럴 수가 없을 듯했다. 희나는 금방이라도 차도를 건너올 태세인 녀석들에게 기다리라는 손짓을 하고 진혁을 올려다보며 황급히 말했다.

“저, 여기까지면 괜찮아요.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기숙사까지 데려다줄게.”

매우 수락하고 싶은 제안이었으나 희나는 한쪽 눈썹을 찌푸리고 도로 건너편을 가리키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기 친구들이 있네요.”

그러자 진혁이 희나가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그는 콧구멍까지 벌름거리며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한 무리의 대학생들을 발견하고 말했다.

“친구 많이 생겼네.”

말하면서 진혁이 빙긋 웃었다. 희나는 그가 아웃사이더였던 자신의 고교 시절을 떠올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새침하게 팔을 툭 때렸다.

“그럼 계속 친구 없을 줄 알았어요?”

“아냐. 그럼 재미있게 놀아. 난 가 볼게.”

“네. 그럼 내일 아침에 봐요.”

밝게 웃으며 인사한 희나가 진혁이 오솔길 사이로 들어가는 걸 보고 가려 하는데 그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아직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희나를 보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꺼냈다.

“나한테 뭔가 미안해서 그러는 거라면 그러지 않아도 돼.”

“네?”

“찾아오고, 굳이 미래랑 놀아주고 그런 거 마음은 고맙지만, 네게 뭔가 마음의 짐을 지울 생각은 없어.”

죄책감 때문에 그러는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오해하게 하기 싫어서 희나는 황급히 손을 저으면서 부정했다.

“나 마음의 짐 같은 거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에요. 내가 좋아서 하는 거예요. 미래랑 노는 거 재미있었어요. 정말로 밥도 맛있고.”

희나의 말을 듣고 진혁은 잠시 말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하얀 얼굴은 계속 띠고 있던 미소가 사라진 채 무표정했다.

갑자기 왜 그가 그런 말을 꺼내는지 영문을 모르는 희나가 입술을 깨물며 작게 물었다.

“내가 그러는 게 불편해서 그래요?”

“…….”

진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 고요한 얼굴을 본 희나의 입에서 아까 대답을 듣지 못했던 질문이 다시 나왔다.

“선생님, 내가 싫으세요?”

“……싫어하지 않아.”

내내 침묵을 지키던 그의 입술이 열렸다. 그와 함께 긴장해서 굳어졌던 희나의 입매가 풀어졌다.

“너랑 약국에서 얘기하고 나도 좀 생각해봤어. 나도 내가 한 행동들이 어른스럽지 않다는 거 알아. 그런데 네가 주변에 있으면 혼란스러워.”

“…….”

“너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냥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대하는 게 더 좋다는 건 알겠는데, 잘 안 돼. 그래서 너와 있는 게 불편해.”

그가 자신을 피하는 이유가 단순히 싫어서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희나는 말도 못 하게 기뻤다. 그래서 건너편에서 친구들이 쳐다보고 있다는 것조차 잊고 진혁 쪽으로 다가서서 열심히 말했다.

“그냥 선생님이 하고 싶은 대로 대해주면 돼요. 난 괜찮아요. 그냥 이렇게 지내다가 선생님이 좀 편해지면…….”

“편해지면……?”

“다시 옛날처럼 지내고 싶어요…….”

희나는 용기를 쥐어짜 내서 말을 내뱉었다. 그러나 기분 좋게 상기되었던 그녀의 얼굴은 곤란해하는 진혁의 표정을 보고 조금 굳어버렸다.

“그건 무리야.”

또 거부의 말이 나오자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다.

괜찮다고, 포기 안 한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누가 심장을 움켜쥐는 것 같은 기분은 익숙해지질 않는다.

“나는 미래 옆에 있어줘야 해. 그리고 너는 이제 내가 옆에 없는 편이 훨씬 낫지.”

“그렇지 않아요. 나는 선생님 옆에 있는 게 좋아요.”

희나는 진심을 담아서 말했다. 그러나 진혁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살짝 시선을 돌려서 도로 건너편의 희나 친구들을 가만히 보더니 그녀를 보면서 조용히 말했다.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어쩐지 여운이 남는 목소리에 희나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라고 말하고 진혁은 바로 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이 너무 쓸쓸해 보여서 희나는 그를 부르지 못하고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어버렸다.

멈춰 선 채 돌아가는 진혁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희나는 뒤에서 큰 소리로 부르는 보혜의 목소리를 듣고 몸을 돌렸다. 재미있게 놀 기분은 전혀 아니었지만, 조금 술이 마시고 싶긴 했다. 희나는 천천히 걸어서 도로를 건넜다.

희나가 다가오자 보혜가 앉아 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달려왔다. 그리고 희나의 팔짱을 낀 채 플라스틱 의자로 이끌어서 앉히며 호들갑을 떨었다.

“언니! 뭐예요? 둘이 뭐 하고 있던 거예요?”

“약사 오빠가 너 예전에 학생이었던 거 알아본 거야?”

“데이트했어요?”

보혜와 은영, 도한에게서 질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희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맥주를 쭈욱 들이켰다.

“데이트는 무슨 데이트. 그냥 잠깐 집에 갔다 온 거야.”

“집까지 갔다고요? 왜?”

“언니 약사 선생님이랑 사귀어요?”

“그런 거 아냐.”

희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친구들의 질문 공세 속에서도 그녀의 머릿속은 아까 고개를 가만히 젓던 진혁의 씁쓸한 미소로 온통 가득 차 있었다.

그 웃음의 의미는 뭐지. 옛날처럼 지내자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인 걸까. 연인이 되고 싶지 않다는 걸까? 아니면 더 이상 뒤치다꺼리를 하는 것은 사양하고 싶다는 걸까.

서글픈 표정을 지으며 맥주를 홀짝홀짝 마시는 희나를 보혜가 신기한 표정으로 쳐다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언니 혹시…… 약사 오빠 좋아해요?”

희나는 살짝 눈썹을 찡그렸을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어색한 표정과 붉어진 뺨을 보면 대답한 거나 다름이 없었다. 보혜가 입을 떡 벌리며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헐. 진짜요? 와, 말도 안 돼!”

“말이 안 되긴 왜 안 돼? 너도 그 오빠 좋아하잖아.”

은영이 호들갑 떠는 보혜를 쿡 찌르자 보혜는 입을 비죽 내밀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약사 오빠 물론 나한테는 천상계지만 희나 언니는 이 동네 아웃라이어잖아요. 좀 더 화려한 남자 좋아할 줄 알았는데요. 막 모델 같은 남자들요.”

“내가 왜 그런 이미지야?”

“언니가 일단 모델이고, 예쁜 옷만 입고 다니고, 머리도 손톱도 풀 세팅에, 무슨 잡지에서 튀어나온 여자 같잖아요.”

희나는 커다란 눈을 찡그렸다. 그냥 지훈이 주는 옷만 입고 다니고 매주 직업상 관리를 받으니까 머리와 손톱이 세팅되어 있을 뿐, 예전부터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쓰는 타입은 아닌데. 언제부터 내가 그렇게 보이게 된 거지?

“딱히……그런 건 아닌데.”

“나는 누나 일하는 쇼핑몰 사장이랑 사귀는 줄 알았는데.”

도한이 툭 던지듯 말했다. 지훈과 통화도 자주 하고 가끔씩 그가 학교로 데리러 오곤 해서 희나가 아무리 부정해도 은근히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주변에 많았다. 지훈이 워낙 이쁜 희나, 이쁜 희나 입에 달고 다니니 그렇게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그래요? 근데 난 그 사장이 언니 좋아하는 거 같던데요.”

“내가 보기에도 그렇게 보이던데.”

“지훈이랑은 아무 사이도 아니야. 그냥 친구지.”

지훈과 엮이는 얘기가 나오자 희나는 신경질적으로 말을 잘랐다. 잠시 말이 끊기는가 싶더니 은영이 오징어 하나를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으며 또 질문을 던진다.

“좋아하는데 왜 안 사귀는 건데? 약사 오빠한테 거절당한 거야?”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집에 가서 애랑 놀아준 게 다라니까.”

“짝사랑하는 거야? 솔직히 희나 네가 아까운데.”

“뭐?”

희나는 당황해서 반문했다. 선생님한테 내가 아깝다니, 이런 말을 들을 날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희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자 은영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렇게 놀라? 당연한 거 아니야?”

“맞아요. 언니가 뭐가 아쉬워서 그 오빠를 좋아해요?”

“아, 여자들 무섭다. 사귀지도 않는데 저울질하는 거 봐.”

“이게 뭐가 저울질이야? 그냥 사실을 말하는 거지.”

도한과 여자애들은 서로 티격태격하기 시작했다. 당사자는 별말 안 하는데 자기들끼리 누가 아깝네 하며 열기가 과열되는 것 같아 희나는 팔을 휘저어서 셋을 뜯어말렸다.

“그만들 해. 그리고 잘 몰라서 그러는데, 선생님이 나한테 훨씬 아까운 사람이야.”

진심을 담아서 희나는 그렇게 말했다. 불도 안 들어오는 곰팡내 나는 지하 단칸방에서 가정 폭력에 찌들어 살던 소녀가, 어느새 화려한 도시 여자가 됐는지 모르지만 진혁과 둘 사이에 아깝거나 손해라거나 그런 계산이 끼어든 적은 없었다. 그 사람이 조금만 계산적이었다면 지금의 진혜가 지금의 희나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언제 어떤 때라도 나를 제일 먼저 생각해주던 사람인데.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제멋대로 굴어도 내가 하고 싶은 건 다 해주려고 했었는데.

심지어 잔인한 말로 헤어지던 순간에도 네가 그게 좋다면 그렇게 하라고 말해 준 사람인데, 그런 사람에게 저울질이라니. 그런 거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희나의 진심이 전해졌는지 다들 조금씩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특히 보혜는 볼을 부풀리며 안타까워하는 어조로 말했다.

“우와, 언니 겉보기랑 완전 다르네요. 내가 언니라면 진짜 미남이란 미남은 다 만나고 다녔을 텐데.”

“약사 오빠, 약사 오빠, 노래를 부르고 다닐 땐 언제고 그렇게 말하냐?”

“나랑 언니는 다르잖아. 나야 어디 가도 그런 훈남 만나기 힘들지만 언니는 많잖아요.”

“그게 뭐야? 이거 완전 속물이네!”

“속물인 게 뭐가 나빠? 그만큼 언니가 예쁘다는 거지! 그니까 약사 오빠는 내 거 하고 언니는 다른 더 훌륭한 미남을 찾아보라는…….”

“꿈 깨. 그 형님이 너 만나주기나 한대냐?”

도한이 보혜의 이마를 쿡쿡 찌르자 이미 술이 많이 올라 있는 보혜가 발끈해서 그를 쏘아보았다.

“잘하면 될 수도 있지! 나이도 많다고 하고, 애도 딸렸고 농가 사람이잖아.”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잠잠히 있던 희나가 진혁을 폄하하는 말에 울컥해서 쏘아붙였다.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그냥 겉으로 드러난 몇 가지 사실만으로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촉망받는 재원이었고 외모도 물론 좋다. 하지만 진혁의 진짜 가치는 그런 게 아니다.

“너넨 몰라. 모르니까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야.”

말 그대로 이 애들은 모른다. 진혁에 대해서도, 희나에 대해서도.

어머니에게 버림받고 아버지가 노숙자에 살해당한 고아라는 것도. 머리 뒤편에 술병에 맞아 찢어진 상처가 있는 것도. 바닥에 떨어지던 순간에 마음이 부러지지 않도록 지탱해준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도.

모든 사람들이 어두운 구석을 알게 되면 뒤에서 얕잡아 볼 거라고 생각하던 그런 사춘기 시절의 감상은 버렸지만, 그래도 희나는 사람들에게 집안 사정에 대한 얘기는 철저히 함구해왔다. 그 결과 이렇게 사람들이 그녀를 곱게 자라서 화려한 생활을 좋아하는 모델 아가씨 정도로 생각하게 된 모양이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 진혁의 전부가 아니듯 희나 역시 그랬다. 사람의 본질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희나가 보고 있는 진혁의 빛은 그의 외모가 아니라 그 본질에 있었다.

“언니, 화났어요? 미안해요. 화내지 마요오.”

“그냥 뭐 얘기해본 거지. 야아아, 왜 삐지고 그래.”

희나의 표정이 영 좋지 않자 보혜가 애교를 부렸다. 희나도 불쾌하긴 했지만 딱히 진심으로 화가 난 건 아니었다.

모르고 한 말이지만 그의 진짜 가치에 대해서 알려줄 생각도 없었다. 안 그래도 경쟁률 높은데 나만 알고 있는 게 더 낫지. 희나는 보혜를 꼬집으면서 딱 잘랐다.

“안 삐졌어. 어쨌든 이런 얘긴 이제 그만해.”

거기까지 말하자 셋도 희나의 기분을 알았는지 더 파고들진 않았다. 그리고 어색해진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듯 일부러 오버해서 리액션을 하며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축제 주점 메뉴로 김치전이 좋은지 해물파전이 좋은지 같은 얘기로 열을 올리기 시작한 녀석들에게 적당히 고갯짓만으로 맞장구를 치며 희나는 마음속으로 딴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녀의 주변엔 확실히 사람이 늘었다. 하지만 아무리 사람들이 많아도 그녀에게 그는 특별했다. 이제 희나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어도, 희나에게 진혁은 여전히 가장 중요했다. 어떻게 해도 흘러가는 마음을 멈출 수가 없다.

어떤 경우에도 당신이 내 옆에 없는 경우가 더 나을 수는 없어.

취기가 올라 흔들거리면서 희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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