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일상의 침입 (4)
줄곧 냉정하게 대했기에 희나는 금방이라도 그렇다고 대답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진혁은 말문이 막힌 듯 잠시 침묵했다. 계속 담담하던 진혁의 까만 눈동자가 곤란한 기색을 띠고 희나를 보고 있었다.
한동안 그러고 있다가 진혁은 한숨을 내쉬고 과수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분명하게 말했다.
“네가 옆에 있는 게 불편해. 이러지 말았으면 좋겠어.”
잔뜩 긴장하고 있던 희나는 거부의 말이 분명한데도 어쩐지 안도했다. 그가 질문의 핵심은 피한 채 교묘하게 돌려 대답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나 보고 얘기해요, 딴 데 보지 말고. 내가 그렇게 싫어요?”
희나가 팔을 잡아당기며 진혁과 다시 눈을 맞췄다. 안경 너머의 눈이 흔들리는 것 같다 싶더니 그가 입을 딱 다물었다.
그걸 보자 희나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거짓말을 못 하는 남자니까 정말 싫으면 싫다고 말했을 거다.
싫어하지는 않는다. 그것만으로도 뛸 듯이 기뻤지만 이왕 몰아붙인 김에 좀 더 몰아치기로 하고 희나는 난감해하는 진혁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정말 내가 그렇게 싫다면 그냥 피하거나 무시하지 말고 확실하게 말을…….”
“아빠, 언니랑 뭐 해?”
그러나 희나의 푸시는 뒤에서 들려오는 미래의 목소리에 뚝 끊겨버렸다.
“할머니가 밥 먹으러 오래. 언니랑 아빠랑 불러 오랬어.”
“미래야, 먼저 들어가서 먹고 있어. 언니는 집에 가야 돼.”
간신히 코너로 몰아붙였는데 이 바보 아저씨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또다시 도망칠 기세다. 희나가 다시 발끈해서 쏘아붙이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미래가 소리를 질렀다.
“싫어-! 가지 마!”
소리칠 선수를 미래에게 빼앗겼다. 기묘할 정도로 커다란 아이의 눈에 순식간에 눈물이 고이더니 뚝뚝 흘러내린다. 진혁은 미래의 그런 모습을 보고 적잖이 놀란 표정이었다.
미래는 그렇게 소리를 빽 지르더니 후다닥 달려와서 희나의 다리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언니, 가지 마! 밥 먹고 간다고 했잖아아아. 언니랑 더 놀 거야!”
흥분해서 감정이 격해지자 미래는 몸도 가누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었고, 그렇지 않아도 안 좋은 얼굴색이 더 창백해져서 무슨 석고 마스크처럼 보였다. 이러다 경련이라도 일으킬 것 같아서 희나는 미래를 안고 달랬다.
“알았어, 알았어. 안 갈 테니까 울지 마, 울지 마!”
“진짜 안 가?”
안 간다고 하니 방금 전까지 그렇게 크게 울던 아이가 거짓말처럼 눈물을 뚝 멈춘다. 그러더니 사기 당한 기분으로 입을 떡 벌린 채 어리벙벙하게 있는 희나를 쿡쿡 찌르며 대답을 재촉했다.
“언니, 안 갈 거야? 응? 갈 거야?”
희나가 빨리 대답을 안 하자 다시 눈에 눈물이 고인다. 또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아서 희나는 황급히 대답했다.
“그래, 밥 먹으면 안 갈게.”
“진짜?”
“그래, 그러니까 들어가서 먼저 밥 먹고 있어. 그러면 진짜 안 갈게. 약속.”
희나가 손가락 걸고 약속을 하자 미래는 활짝 웃더니 품에서 내려와 다시 거실로 후다닥 달려갔다. 반응을 보니 어른들이 약속해놓고 들어주지 않은 적이 별로 없는 모양이었다.
희나는 미래가 거실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진혁을 흘깃 올려다보았다. 그는 일련의 소동에 충격이라도 받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고는 그 전까지 하던 얘기는 잊은 듯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대체 널 왜 이렇게 따르는 거지. 엄청나게 낯 가려서 어머니하고 있을 때도 조용하고, 승수 옆에도 안 가려고 하는데.”
“미래가 선생님만 따라다니죠?”
“그래, 거의 나한테만 껌처럼 붙어 있어.”
희나는 속으로 미래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떠올려보았다. 희나, 진혁, 어린이집 선생님. 공통점은 비주얼뿐이다. 이 취향 확고한 외모 지상주의 꼬마 같으니.
그러나 희나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희나는 팔짱을 끼고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끄덕거리며 말했다.
“쟤는 나 좋아해요. 나 약국 왔다 갈 때마다 졸졸 따라다니더라고요.”
“왜 좋아하는데?”
“내가 예뻐서 그래요.”
그러자 진혁의 얼굴이 기묘해졌다. 말해놓고 괜히 찔린 희나는 그의 시선이 얘가 이 상황에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가- 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얼굴이 새빨개진 희나가 팔을 붕붕 휘둘렀다.
“농담하는 거 아니에요! 못 믿어요?”
“자신감이 넘치는 건 좋지만 이 상황에. 미래는 아직 어린애에 여자애고…….”
“이익! 공주병 같은 거 아니에요! 사실을 말한 거란 말이에요!”
그러나 진혁은 여전히 웃는 것도 부정하는 것도 아닌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희나는 입술을 꽉 깨물고 고개를 돌려서 저 멀리 거실 안쪽에서 당근을 깨작거리고 있는 미래를 힐끔 본 후 진혁을 쿡쿡 찌르며 말했다.
“증거를 보여줄 테니 기다려보세요!”
자신감 있게 말하고 거실로 혼자 먼저 들어온 희나는 유리문을 통해 진혁이 보고 있는지 확인하고는 미래의 옆에 앉아 큰소리로 말했다.
“너 이거 당근 먹어야지. 왜 안 먹어?”
“당근 싫어. 당근 안 먹어.”
“그래? 맛있는데. 못생긴 애들이 당근 안 먹더라.”
계획된 도발에 넘어간 순진한 아이가 발끈해서 소리쳤다.
“미래 안 못생겼어! 언니가 더 못생겼어!”
“난 예쁜데.”
얼굴에 철판을 깔고 뻔뻔스럽게 대답하자 미래의 말문이 막혔다. 씩씩거리면서도 희나가 예쁘다고 생각하는지 반박을 하지 못한다. 희나는 놀리듯이 히죽히죽 웃으면서 미래의 접시에서 당근을 하나 집어 먹고는 말했다.
“다들 나보고 이쁘다고 하더라. 당근 먹어서 예뻐졌는데. 안 먹고 있다가 나중에 후회하지 마.”
잠시 미래의 작은 머릿속에서 장래의 미모와 현재의 식도락 사이에서 심각한 고뇌가 이루어졌다. 미래가 곧 조그만 입을 비죽 내밀더니 질색하는 표정으로 당근을 포크로 찍었다.
“쪼끔 먹을래, 그럼.”
그리고 눈을 꼭 감고 약이라도 먹듯 당근을 삼켰다. 희나는 착하다는 듯 머리를 토닥토닥 쓰다듬어주었다.
“잘하네. 하여튼 이쁜 건 알아 가지고, 쪼그만 게.”
그렇게 말하고 다시 슬쩍 일어난 희나는 마루로 나왔다. 그리고 팔짱을 끼고 진혁에게 의기양양한 태도로 물었다.
“봤죠? 내 말 맞잖아요!”
그러나 진혁은 동의하는 대신 고개를 조금 숙이고는 손으로 입가를 짚은 채 조금 떨고 있었다. 당당하게 웃고 있던 희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어서 진혁의 옆으로 걸어갔다.
“어? 왜 그래요?”
희나가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며 묻자 진혁의 입에서 풋- 하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뭔가 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진혁이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렸다.
“아하하하하하하하.”
큰 소리에 희나는 놀라서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진혁이 웃고 있었다. 웃음을 눌러 참고 있었는지 흰 얼굴이 살짝 상기되고 예쁜 눈매가 휘어져 있다. 5년 만에 보는 웃음이다. 보자마자 답답했던 마음이 확 뚫리는 것처럼 시원하고 심장이 두근두근 설렜지만, 희나는 샐쭉한 얼굴로 새침하게 말했다.
“왜, 왜 웃는 거예요!”
“아빠, 왜 웃어?”
밥을 먹고 있던 미래가 웃음소리를 듣고 거실에서 얼굴을 비죽 내밀며 물었다. 진혁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손을 저었지만 그래도 웃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러자 내내 부엌에 있던 진혁의 어머니가 마루로 나오면서 손짓했다.
“진혁아, 희나야, 거기서 뭐 해. 둘 다 들어와서 얘기해라. 음식 다 식겠다.”
어머니의 부름에 둘은 반사적으로 대답하고 거실 쪽으로 함께 걸었다. 희나가 다가오자 진혁의 어머니는 가느다란 희나의 팔을 끌어당겨 앉히며 말했다.
“얼른 앉아서 많이 좀 먹어. 이렇게 말라가지고, 살 좀 쪄야겠어.”
“아, 그게 저기…….”
“식당 밥만 먹고 기운이 나겠어? 나물 좋아한다고 했지? 방금 무친 거라 아주 맛있을 거야.”
아닌 게 아니라 시골 특유의 커다란 밥상에 가득 차려진 음식들은 매우 먹음직스러워서 보기만 해도 입에 군침이 절로 돌았다.
희나는 매우 먹고 싶다는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진혁을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신나게 웃어 놓고 어느새 다시 급정색을 하고 있었다.
그는 희나의 눈빛을 보고 깊은 한숨을 쉬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대로 해.”
희나는 신이 나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맛있어 보이는 호박전을 하나 집어 먹는데 진혁이 옆에 앉는 기색이 없었다.
“진혁아? 밥 안 먹어?”
“네, 전 먹고 들어왔어요, 어머니. 설거지는 제가 할 테니까 식사 끝나면 부르세요.”
그렇게 말하고 진혁은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쳇. 밥 정도는 같이 앉아서 먹으면 어디 덧나나. 들어가는 뒷모습이 서운해서 희나는 잠시 입을 비죽거렸지만 곧 나물을 입에 넣자 그 불만은 삭 사라져버렸다.
오늘 처음 보는 사람의 음식이지만 그녀에게는 그리운 손맛이었다. 왠지 울컥하는 마음을 억누르고 희나는 밥공기를 깨끗이 비웠다.
식사를 마쳐도 진혁은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희나는 자진해서 설거지를 하고 상을 치운 뒤 미래와 함께 그림을 좀 더 그리고, 책을 읽어주었다. 똑똑하고 엉뚱해서인지 놀고 있는 걸 쳐다보는 게 즐겁다.
그러나 아홉 시쯤 되자 미래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더니 곧 푹 잠들어버렸다.
어떻게 해야 되나 싶어 돌아보았지만 진혁의 어머니도 어디에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희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천천히 일어서서 진혁의 방문을 어색하게 노크했다.
“선생님.”
“응, 무슨 일이야?”
“미래 잠들었는데 어떻게 해야 돼요?”
그러자 곧 문이 열리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은 진혁이 나왔다. 그는 세상모르고 잠든 미래를 안아서 안쪽 방으로 데려가 자그마한 침대에 눕혔다. 희나는 뒤쪽에 쭈뼛쭈뼛 서 있다가 진혁이 거실로 나오자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전 그럼 이만 가볼게요.”
“잠깐 기다려.”
곧장 돌아서서 나가려는 희나를 진혁이 불러 세웠다.
“네?”
“데려다줄게, 어두우니까.”
그렇게 말하고 진혁은 겉옷을 입으려는지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은근히 이것을 노리고 있었던 희나는 마음속으로 예스를 외쳤다.
“맘대로 집에 와서 화났어요?”
마당을 빠져나올 때쯤 희나가 불쑥 말을 걸었다. 아무 말 하지 않으면 내내 묵묵히 있을 것 같아서 먼저 말을 꺼낸 거다. 그런데 의외로 진혁의 흰 얼굴이 희나를 돌아보고 작게 미소를 지었다.
“아니, 사실은 고마워. 덕분에 오랜만에 저녁 시간을 느긋하게 보냈네.”
시큰둥한 반응을 각오하고 물은 건데 부드러운 대답이 돌아오자 희나는 당황했다.
“아이랑 놀아주는 거 힘들었을 텐데, 미안하네.”
“아니요. 애랑 노는 건 처음이었는데 재미있었어요. 말도 잘하고, 귀여워서.”
“미래가 좀 까다롭지. 워낙에 허약해서 심하게 울면 경련도 잘 일으키거든. 그래서 응석을 받아줄 수밖에 없어서 좀 제멋대로야. 낯도 많이 가리고.”
말 한마디 한마디에 아이를 예뻐하는 마음이 묻어났다. 조용조용히 말하던 진혁이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희나를 보곤 말을 멈췄다.
“왜 그래?”
“아니요, 아까 그냥 밥도 안 먹고 방으로 들어가 버려서 또 피하는 건가 했는데…….”
“그런 거 아니야.”
픽 웃으면서 고개를 젓는 그를 보자 희나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말투도 전처럼 건조하지 않고 다정한 천성이 묻어 나오는 본래의 말투에 가까워져 있었다.
마음이 풀린 건가, 하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기분 좋게 뛴다.
“그러면 가끔 미래랑 놀아주러 와도 돼요?”
그러나 그 말을 듣자 진혁은 조금 망설이는 듯하다가 대답했다.
“글쎄. 귀찮을 텐데.”
“안 귀찮아요.”
“그게 과연 잘하는 일인지 모르겠네.”
“에, 뭐 별거 아니잖아요. 미래랑 있으면 재미있고, 그리고 와서 집 밥도 얻어먹고 싶고.”
또 사양할까 봐 희나는 애써 별거 아닌 듯 밝게 말했지만 진혁은 복잡한 표정을 지은 채 잠잠히 대답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까 웃은 이후로 그의 안에서 뭔가가 조금 허물어진 듯이 보였다. 살짝 보이는 틈을 파고들어야만 한다. 희나는 고개를 기울여서 진혁을 올려다보며 큰 눈을 깜빡였다.
“와도 되죠?”
희나는 순간 진혁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고 생각했다. 그는 슬쩍 희나에게서 시선을 돌리면서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네가 괜찮다면…… 뭐…….”
대답을 듣자마자 희나의 예쁜 얼굴에 미소가 확 번졌다. 자진해서 베이비 시팅이라니 좀 구차하기 짝이 없지만, 이렇게 함께 걷고 대화를 나누게 된 것만으로도 기뻤다.
기분이 한결 밝아진 희나는 손가락을 맞부딪치면서 신나게 말했다.
“아, 맞다! 내가 내일 미래 어린이집 데려다줄게요.”
“왜?”
“그냥요. 그러기로 약속했어요.”
협박해서 약속한 거지만. 그러자 진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너도 학교 가야 되는데 번거롭지 않아?”
“괜찮아요. 약속을 어길 수는 없잖아요. 애를 실망시킬 수도 없고.”
성실한 남자는 이런 이유에 수긍해버린다. 희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단정한 옆모습을 보면서 헤헤 웃었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 약국이 있는 도로가 보이기 시작했다.
오솔길을 빠져나가면 인사를 해야 하나? 기숙사까지 데려다주려나?
점점 짧아지고 있는 남은 길이 너무 아쉽게 느껴진다.
간만에 대화의 물꼬를 텄는데. 더, 더 오래 얘기하고 싶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는 길은 점점 짧아져, 두 사람은 어둑어둑한 오솔길을 빠져나와 약국이 있는 상가 거리로 나왔다. 그리고 거기서 희나의 발걸음이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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