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일상의 침입 (3)
“진혁이가 늦네.”
유리문을 열자 기분 좋은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이제 5월도 한창이라 나무마다 꽃이 만발해 한옥 마당과 어우러진 풍경이 아주 운치 있었다.
입을 헤 벌리고 문 밖을 쳐다보고 있으려니 진혁의 어머니가 옆에 와서 앉으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해가 지고 있는데, 너무 오래 붙잡아둬서 어떻게 하지?”
“아뇨-. 괜찮아요. 돌아가도 할 일도 없고요……. 그런데 너무 오래 신세를 져서 죄송하네요.”
“아이고- 신세는 무슨. 덕분에 미래도 얌전하고 편하기만 한데.”
그러면서 진혁의 어머니는 희나를 쳐다보고 좀 웃었다. 아마 미래가 네 갈래로 나눠서 머리를 묶은 데다가 동그랗게 말아 놔서 레이디 가가나 시도할 법한 머리스타일이 되었기 때문일 거다.
“애기랑 참 잘 노네요. 미래가 낯을 가려서 나한테도 안 오고 제 아빠한테만 딱 달라붙어 다니는데 신기하게도 붙어 있네.”
“그런가요?”
애 보는 데 소질이 있다는 건 처음 알았는데. 아니, 그냥 미래가 특이한 거뿐이라고 희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진혁의 어머니는 인자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물었다.
“나이가 어떻게 돼요?”
“저 스물셋이에요.”
스물셋이라는 말에 진혁 어머니의 표정이 조금 아련하게 변했다. 그녀는 희나에게서 살짝 눈을 돌려서 해가 지기 시작한 과수원 쪽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 과수원을 쳐다보다가 나무 밑에서 움직이는 사람들 몇몇을 발견한 희나가 물었다.
“저 사람들은 누구예요?”
“일해주는 사람이랑, 마을 사람들이랑 진혁이 친구들이야. 진혁이가 내려오고 나니까 사람들이 만날 와서 도와주는 통에 손이 빈다니까요.”
역시 도와주는 사람이 많구나. 희나는 이 인간 자석 같은 농촌 총각의 마력이 곤란스러웠다. 이러면 도와줄 게 없잖아.
우울하게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으려니 진혁의 어머니가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아까 이름이 뭐랬지요? 내가 기억력이 나빠 놔서…….”
“아, 저 주희나예요. 말씀 편하게 하세요, 어…… 어머니.”
그렇게 부르자 진혁의 어머니가 다시 시선을 돌려 희나를 쳐다보았다. 불러 놓고 어색해서 희나는 얼굴이 빨개졌다. 아주머니는 왠지 좀 그렇고, 이모, 여사님, 사모님 같은 별 호칭 중에 고민하다가 툭 튀어나온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란 단어가 너무 생소해서 입 안에 턱턱 걸린다.
혹시 실수를 한 게 아닌가 싶은 희나가 조심스레 눈치를 살폈으나 진혁의 어머니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웃는 모습 어딘가에서 진혁의 분위기가 나서 기분이 편안해진다. 그녀는 희나의 어깨를 톡톡 두들기며 좋아했다.
“그럴까? 그럼 말 편하게 할게.”
“네, 네. 편하게 해 주세요. 막 해 주세요.”
민망해서 괜히 오버해서 굽신대는 희나를 만류한 뒤 진혁의 어머니는 끄응, 하고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배고프지? 아무래도 더 늦게 전에 우리끼리라도 먹는 게 좋을 것 같네. 상 차릴게.”
“아뇨, 아뇨. 저는 참을 만한데요.”
“그래도. 아, 그렇지. 잠깐 있어 봐. 내가 진혁이한테 전화 좀 하고 올게. 내 전화기가 어디 있지?”
중얼거리며 일어선 진혁의 어머니가 총총 방 안으로 들어갔다. 희나의 시선이 이제 거의 어둑어둑해져 버린 마당으로 다시 향했다.
멍하니 석양에 물든 예쁜 과수원을 쳐다보았다. 과실수들도 단정하게 심어져 있었지만 특히 마당 주변에는 커다란 나무들이 모양 좋게 둘러 심겨져 있었다.
그런데 마당을 둘러싼 나무 중 커다란 한 나무만 이가 빠진 듯 깨끗하게 베어진 모습이 눈에 띄었다.
별생각 없이 나무가 잘렸나 보다 하고 무심하게 시선을 돌리던 희나의 머릿속에 문득 거북이의 말이 떠올랐다.
“자살했대, 여기 과수원에서 목매고.”
한 그루만 베어진 나무. 희나는 너무 깊이 생각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기분이 싸했다.
진혁의 어머니는 희나의 나이를 듣고 저 근처를 쳐다보았다. 진혜는 희나보다 한 살이 많고 작년에 죽었다.
‘죽었을 때, 스물셋이었겠구나.’
괜히 먹먹해져서 희나가 멍하니 나무가 베인 자리를 쳐다보고 있는데, 미래가 소매를 잡아끌었다.
“언니, 언니, 이거 봐-. 다 그렸어.”
상념에서 깨어나 시선을 미래 쪽으로 돌린 희나가 그림을 보고 오- 하고 입을 모았다. 여섯 살이면 졸라맨 같은 것밖에 못 그릴 줄 알았는데 상당히 잘 그렸다. 형태도 제법 확실하고 균형이 좋았다.
“잘 그렸네.”
“헤헤-. 응. 나 그림 잘 그려.”
희나가 칭찬하자 미래가 헤벌쭉 웃었다. 그림에는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공주 왕관을 쓴 작은 여자아이가 하나 가운데 있고, 양쪽에 있는 남자, 여자와 손을 잡고 웃고 있었다.
미래가 작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그림을 짚으며 자랑스레 말했다.
“이거는 나고 이거는 아빠야.”
“그럼 이건 나야?”
희나가 곱슬머리를 한 왼쪽의 여자를 짚으며 묻자 미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우리 어린이집 선생님.”
“…….”
희나의 입이 댓 발 나왔다. 같이 놀아주고 있는데 다른 사람을 그리다니. 사회생활의 기본이 안 되어 있군.
“선생님은 이렇게 팔락팔락하는 공주님 치마 많이 입어. 언니는 맨날 볼 때마다 바지 입고 있네.”
“공주님 패션은 유행 지나갔어. 넌 이 언니에게 패션 감각에 대해서 좀 배워야겠어.”
“그래도 난 공주님 치마가 좋아.”
미래는 그러더니 벌떡 일어나서 입고 있는 원피스 자락이 팔락팔락 흔들리도록 한 바퀴 휙 돌고는 혼자 까르르 웃었다. 장래 공주병 환자가 될 가능성이 농후한 아이를 붙잡아서 바닥에 앉힌 희나가 진혁의 어머니가 아직 방에 있나 살피고는 목소리를 낮춰서 물었다.
“너네 아빠랑 선생님이랑 사귀는 사이야?”
“사귀는 게 뭔데?”
“서로 좋아하냐고.”
“나는 둘 다 좋아해.”
동문서답이다. 아직 이성에 눈을 못 뜬 건가? 희나는 질문을 바꿔 보았다.
“선생님이랑 아빠랑 둘이 막 따로 만나거나 해?”
“아니, 나랑 같이만 만나.”
희나가 마음을 놓으려는데 미래가 한마디 덧붙였다.
“근데 선생님이 아빠한테 먹을 거 많이 줘.”
“먹을 거 뭐?”
“선생님이 과자 만들어서 애들 주는데 아빠랑 나눠 먹었어. 맛있다고 했어. 그러니까 선생님이 나만 맨날 아빠 거도 따로 줘. 미래는 엄마 없으니까 아빠 갖다 드리라구.”
‘이런 도둑고양이년!’
희나의 커다란 눈에 쌍심지가 켜졌다. 그것을 모르는 미래는 종알종알 선생님 자랑을 늘어놓아 화를 더욱 지폈다.
“선생님 과자 예쁘게 잘 만들어. 텔레비에 나오는 거 같아. 언니 과자 만들 줄 알아?”
과자는커녕 누룽지도 예쁘게 못 만든다. 희나는 예상치 못한 라이벌 여인의 존재를 깨닫고 쪼그라들었다.
약국에 오는 여자들만 경계했는데 진짜 복병은 따로 있었다. 예쁘고 요리 잘하는 어린이집 선생과 젊고 훈훈한 홀아비라니, 눈 맞기 딱 좋은 상황이 아닌가!
‘알게 된 이상 그냥 둘 수는 없지.’
희나는 계속 선생님 얘기를 하는 미래의 말을 턱 끊고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너 어린이집 맨날 가?”
“응.
“아빠가 데려다주는 거야?”
“원래 요기 앞에까지 할머니랑 나와서 버스 타고 가는데 병원 가는 날에는 아빠가 데려다줘.”
데려다주면서 가끔씩 마주치나 보구나.
“앞으로는 내가 데려다줄게.”
“왜? 나 아빠랑 가는 거 좋은데.”
미래는 입을 죽 내밀며 고개를 저었다. 희나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입술을 즈려 물고 말했다.
“어린이집 나랑 같이 안 가면 이제 안 놀러 올 거야. 그래도 아빠랑 갈 거야?”
애를 상대로 유치한 짓이지만 효과는 직방이었다. 미래는 얼굴을 갸웃거리다가 시무룩해져서 대답했다.
“그럼 언니랑 갈래.”
“그래그래. 아빠한테도 그렇게 말해야 돼. 알았지? 언니랑 갈 거라고.”
“응. 그럼 언니 나랑 맨날 놀아 줘?”
“그래. 맨날 놀아 줄게.”
모종의 교섭이 이루어졌을 때 해가 완연히 진 바깥에서 차 소리가 들렸다. 희나가 고개를 돌리는 것과 동시에 미래가 벌떡 일어나더니 방방 뛰며 외쳤다.
“아빠다!”
그 말에 뒤따르듯 마당으로 익숙한 하얀 차 한 대가 들어서고 있었다. 희나도 미래를 따라 방방 뛰고 싶은 기분이 솟아올랐다. 심장이 두근두근 설레서 심호흡을 하며 가라앉히는 동안 흰 차가 마당에 부드럽게 주차되고 운전석의 문이 열렸다.
“아빠-!”
미래가 다다다 달려가 차에서 내리는 사람의 다리에 매달렸다. 미래를 안아 올리며 웃고 있는 진혁의 얼굴이 보이자 희나는 괜스레 문 안쪽으로 몸을 숨겼다.
어디 멀리 다녀왔는지 진혁은 슈트를 입고 있었다. 최근에는 계속 작업복이나 저지를 입은 모습만 봤는데 간만에 슈트를 입은 걸 보니 이상한 기분이 든다. 이 모습은 고등학교 때 보았던 모습 그대로였다.
그땐 왜 이런 아저씨가 인기가 많냐고 혼자 구시렁거렸는데. 지금 보니 확실히 슈트 핏이 우월하긴 하다.
희나는 얼굴이 빨개진 채 입을 헤 벌리고 다가오고 있는 진혁을 쳐다보았다.
“다녀왔습니다.”
부드럽게 말하며 마루로 올라서던 진혁이 문에 매달려 있는 희나를 발견했다. 그와 함께 미소를 짓던 흰 얼굴이 삭 굳어버렸다.
그러나 싸늘해졌던 건 한순간이었을 뿐, 그 표정은 곧 기묘하게 변했다. 그가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너…… 여기서 뭐하는 거야?”
“그냥 미래랑 같이 놀고 있었어요.”
그 대답에 찌푸린 표정이 품에 안긴 미래에게 향했다. 미래는 진혁의 목에 매달린 채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가 언니 길에서 봤어. 같이 놀자니까 언니가 집에 왔어-. 미래가 같이 그림도 그리고, 공주님 머리도 해줬어.”
그 말을 듣고 여전히 해괴한 머리를 하고 있었던 것을 깨달은 희나는 황급히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묶고 있는 고무줄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노란 고무줄로 묶인 머리는 풀리지 않고 머리카락만 뽑혀 눈물이 찔끔 나게 아프기만 했다.
희나가 고무줄과 사투를 벌이려는데 진혁이 미래를 내려놓고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잠깐 얘기 좀 하자.”
얘기 좀 하자는 건 반가운 일이지만 표정을 보아하니 좋은 이야기일 것 같진 않았다.
희나가 주춤주춤 일어나자 진혁이 먼저 거실을 나갔다. 그는 마루 끝까지 가서 서더니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충분히 알아듣게 얘기했다고 생각하는데. 이렇게 집까지 찾아오면 곤란해.”
“막무가내로 찾아온 거 아니에요. 미래가 놀아 달라고 따라왔단 말이에요.”
“그렇다면 거기에 대해선 사과할게. 이제 그러지 않게 단단히 주의를 주지.”
혹시나 기분 좋게, 혹은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 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는데, 그러지 않을 모양이었다. 희나는 아까까지 줄곧 밝았던 기분이 한순간에 어두워지는 것을 느꼈다.
드디어 뭔가 계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정말 노력해도 가망 없는 걸까.
“…….”
“이미 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제 집에 가는 게…….”
건조하게 흘러나오던 진혁의 목소리가 멎었다. 희나의 눈에 눈물이 맺혔기 때문이다.
희나가 어지간해선 울지 않는 성격이란 걸 기억하고 있었는지 그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왜 울어? 그렇게까지 심한 말은 안 했잖아.”
“이제 나 완전히 싫어졌어요? 꼴도 보기 싫어요?”
빨개진 눈으로 올려다보며 희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