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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그 너머에는-77화 (77/140)

77화. 일상의 침입 (2)

“우리 집? 진짜?”

같이 집에 간단 말에 순진한 커다란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그 눈빛을 보니 “아니, 사실은 그냥 해본 말이야-.” 같은 말은 도저히 할 수 없을 거 같다.

고개를 끄덕이며 희나는 살짝 아이의 몸을 잡았다. 아이를 안아본 적이 전혀 없어서 잘할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는데, 너무나도 간단하게 품에 안을 수 있었다. 한없이 가벼운 무게에 마음이 반대로 무겁게 내려앉았다.

아이를 안고 희나는 약국 사이에 있는 과수원으로 들어가는 오솔길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낸 기지였지만 마음이 두근두근 설렌다. 드디어 진혁의 집에 찾아갈 핑계를 얻은 셈이 아닌가. 이렇게 가까이 핑곗거리를 두고 여태까지 눈치 못 챘다니.

불순한 동기로 이용하는 것 같아 조금 찔렸지만 아이는 더없이 기쁜 표정이었다. 뭐, 일종의 윈윈 전략이라고 희나가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있는데 품에 안긴 미래가 그녀의 예쁜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며 물었다.

“우리 집 가는 거야, 정말로?”

“그래. 어차피 너네 집 가고 싶었어.”

“우리 집 왜?”

“음, 글쎄. 니네 아빠 보고 싶어서?”

희나는 괜히 죄책감 느낄 거 없이 솔직해지기로 하고 냅다 질렀다. 그러자 얌전히 안겨 있던 아이가 놀라더니 머리를 꼿꼿이 세웠다.

“우리 아빠? 왜 보고 싶은데?”

“보고 싶으니까.”

“언니 우리 아빠 좋아해?”

“글쎄, 아마도…….”

아이의 질문인데도 괜히 부끄러워진 희나가 얼굴을 붉히며 대답하는데 아이가 갑자기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안 돼-! 안 돼! 아빠 좋아하면 안 돼-!”

“아야-! 아프잖아. 머리 당기지 마!”

일부러 당긴 건 아니었는지 아이는 희나가 아파하자 곧 당기는 것을 멈추었다. 희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아이를 쳐다보았다. 뭐 딱히 허락받을 생각 같은 건 아니었지만 이 정도로 거부 반응이 격할 줄이야.

“왜 아빠 좋아하면 안 되는데?”

“아빠는 우리 선생님 꺼야.”

커서 아빠랑 결혼할 거야. 뭐 이런 대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무척이나 예상외의 말이었다. 무척 놀란 희나는 즉시 인상을 찌푸리며 아이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아이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선생님이라니? 누구?”

“우리 어린이집 선생님.”

어린이집 선생? 그건 또 어디서 굴러들어 온 도둑고양이야. 이 바보 아저씨는 농촌 총각 주제에 왜 이리 여자관계가 복잡해?

“이뻐?”

“어, 이뻐. 울 동네에서 젤 예뻐. 그래서 선생님이랑 맨날 놀았어.”

나도 예쁘다고 따라왔으니 이 아이가 잘 따랐다면 아마 예쁘겠지. 이런 외모 지상주의 꼬마 같으니. 희나가 속으로 툴툴대는데 더욱 가만히 들어 넘길 수 없는 말이 아이의 입에서 나왔다.

“아빠도 선생님 예쁘댔어.”

당장 속에서 질투의 불길이 치솟는다. 이쁜 어린이집 선생님이라니.

희나의 머릿속에 어린이집에서 우아하게 피아노를 치는 단정하고 고상한 미녀가 곧장 그려졌다.

나를 무시하면서 미모의 여인과 시시덕거리고 있단 말이지.

희나가 분해서 이를 부드득 가는데 미래가 바로 가까이에서 커다란 눈을 찌푸리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살짝 찌르면서 배시시 웃었다.

“근데 언니가 더 이뻐. 그니까 언니랑 놀 거야.”

그런 간단한 말 한마디에 질투의 불길이 급속히 사그라들어 버린 희나는 미래를 안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10분쯤 가자 한옥 건물이 보이기 시작한다.

“집에 누구 있어?”

“몰라. 나 나올 때는 할머니만 있었어.”

할머니라면 진혁의 어머니다. 여기까지 와서 생각하긴 늦었지만 ‘얼굴도 모르는데 그냥 대뜸 들어가도 되려나?’ 하는 고민이 들었다. 돌아가서 승수라도 데리고 올까 생각하며 희나가 넓은 마당을 어슬렁거리는데 뒤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진혜니?”

“에?”

“아이구, 진혜야……? 진혜야?”

“아, 저 진혜 아니에요. 잘못 보셨어요-. 저는 주희나예요.”

당황한 희나가 뒤에서 다가오는 사람을 향해 돌아서며 말했다. 희나가 팔까지 휘저으며 열심히 부정하자 마당 바깥쪽에서 달려오던 사람이 우뚝 멈춰 섰다.

거기에 있는 것은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린 개량 한복을 입은 작은 노파였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지만 희나는 그녀가 진혁의 어머니임을 곧 깨달았다. 아주 예전이지만 진혁의 앨범에서 본 적이 있고 진혜와도 아주 많이 닮은 모습이었다.

머리카락이 완전한 백발임에도 불구하고 얼굴은 그다지 늙지 않았다. 하긴 30세인 진혁의 어머니라면 나이가 많아도 60대 정도일 텐데 저 정도의 백발은 좀 이상했다.

딸이 죽고 나서 심한 충격 때문에 넋 나간 사람처럼 되어버렸다고 했던가. 그것을 떠올린 희나는 그녀의 기묘한 외관을 납득해버렸다.

희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이면서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실례합니다.”

“어떻게 오셨어요?”

“아, 저는 선생님이랑 좀 아는 사이인데…… 길에서 미래랑 만나서 잠깐 인사라도 드릴 겸…….”

당황해서 간신히 둘러댄 건데 제법 그럴듯한 변명이 되었다.

“선생님이요?”

“아, 네. 유진혁 선생님이요.”

희나의 입에서 진혁의 이름과 선생님이란 호칭이 나오자 그녀의 얼굴에서 경계심이 누그러들었다. 소박한 여인은 사랑하는 아들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미소를 가득 띠우며 다소 여유가 돌아온 말투로 손을 내밀었다.

“아유, 그랬군요. 그래그래. 흉한 모습을 보였네. 진혁이 만나러 온 거예요?”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할머니-. 나 언니랑 좀 놀 거예요. 놀아준대요.”

“어머, 귀찮을 텐데 괜찮겠어요?”

“네, 네. 아, 저야 괜찮은데요.”

“그럼 어서 들어오세요-.”

그녀는 옷자락을 여며 쥐고 바쁘게 마루로 올라서며 희나에게 손짓했다.

안정을 되찾은 진혁의 어머니는 딱히 아픈 사람처럼 보이지 않고 평범했다. 예상외의 환대에다가 아이와 마찬가지로 어르신들을 대하는 것도 익숙하지 않은 희나는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간신히 마루로 올라섰다.

“아이고, 집 정리도 못 했는데. 좁고 지저분하지만 편하게 놀다 가요.”

얇은 스타킹만 신은 발에 나무로 된 마루가 닿는 느낌이 기분 좋았다. 유리문 안쪽으로 들어서자 예전에 희나가 누워 있었던 바로 그 거실이 나왔다. 지저분하긴커녕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뭐 좀 마실래요?”

“아, 아뇨. 신경 안 써주셔도 괜찮아요. 정말 미래랑 잠깐 놀러 온 거라서…….”

“언니, 계속계속 가지 마. 같이 놀자. 언니 내가 장난감 보여줄게, 잠깐 기다려 봐-.”

너무 어색해서 가시방석처럼 앉아 있는 희나를 내버려두고 미래는 신나서 뛰어가 버렸다. 저렇게 가는 팔다리로 잘도 뛰는구나. 멍하니 쳐다보다가 희나는 다시 진혁의 어머니와 눈이 마주치고 찔끔했다.

그녀는 신기한 표정으로 희나를 보고 있다가 웃으며 말했다.

“아이구, 이렇게 고운 처자가 집에 다 오구. 진혁이랑 어떤 사이예요?”

“아, 전…… 그냥 선생님이 서울에 계실 때 좀 알던 사이예요.”

“맞네, 맞네. 보자마자 여기 사람 아닌 걸 알았다니까요. 아주 세련돼가지고 한눈에 서울 처자 같더라니까.”

희나는 간신히 작게 웃으면서 고맙다고 웅얼거렸다. 그냥 가볍게 좀 놀아주다 가야지- 하고 들어왔는데 이런 흐름이 될 줄은 몰랐다. 졸지에 진혁의 어머니까지 만나게 된 셈이다.

이런저런 호구 조사를 하는 그녀에게 희나는 꼬박꼬박 대답했다. 희나가 요 앞 대학교 학생이고 기숙사에 살고 있으며 진혁의 제자였다는 사실을 알고 그녀는 이런 우연이 있냐면서 박수를 쳤다.

어느 부분이 마음에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다행히 진혁의 어머니는 희나를 줄곧 웃으며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수줍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희나에게 간곡히 권했다.

“시간 괜찮으면 저녁까지 편하게 놀다가 밥이라도 먹고 가요.”

“네? 아뇨. 그렇게 폐를 끼칠 수는 없으니까요.”

“폐라니-. 그런 거 전혀 없어요. 저녁 먹고 가요.”

희나가 재차 사양하자 진혁의 어머니가 희나의 손을 잡았다. 당황해서 움찔하다가 희나는 문득 주름진 손이 조금 떨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희나의 큰 눈이 진혁의 어머니를 가만히 응시했다. 주름진 눈가가 애수로 젖어 있었다.

그 눈을 보고 희나는 그녀가 자신에게서 진혜를 겹쳐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얼굴도 체격도 별로 닮지 않았지만, 갈색 웨이브 머리와 화려한 분위기에서 자신의 딸을 느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저 자신의 딸과 또래인 여자가 미래를 안고 들어오니 작은 착란을 일으켰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진혁의 어머니의 눈은 딱히 정신이 불안정한 것같이 보이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저 부드럽게 웃으며 희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얼굴에서 친숙한 분위기가 느껴져 희나도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다.

“진혁이도 저녁 먹을 때쯤 되면 집에 올 거예요. 같이 좀 얘기라도 하고 가요.”

그 말을 듣자 희나는 안 그래도 하기 힘들었던 거절을 포기했다. 자신의 비겁함에 아주 조금 가책을 느끼며 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할게요. 뭐 제가 도와드릴 거 있을까요?”

“아이구, 그런 거 없으니 편하게 앉아 있어요. 간만에 손님이 왔으니 맛있는 걸 해야겠네.”

“아뇨- 안 그러셔도 되는데요.”

“사양할 거 없어요. 기숙사 살면 제대로 먹지도 못할 텐데. 정 뭐하면 우리 미래하고나 좀 놀아줘요-.”

진혁의 어머니가 총총 거실 바로 옆의 유리문을 밀고 연결된 부엌으로 들어가는 것과 동시에 미래가 다다다 뛰어나왔다. 그리고 박스에 가득 담긴 이런저런 장난감을 마구 꺼내서 늘어놓으며 희나에게 한참 동안 자랑스레 보여 주더니 희나를 바닥에 엎드리게 하고는 말했다.

“언니, 내가 공주님 머리 해줄게-. 여기 이렇게 가만히 앉아 있어.”

“그래…… 맘대로 해.”

희나는 미래가 같이 놀아주길 바란다기보다는 바비 인형이라도 하나 얻은 것처럼 여기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거울을 통해 희나는 신나는 표정으로 길고 부드러운 그녀의 머리카락을 꼼꼼히 묶고 있는 미래의 남자아이 같은 헤어스타일을 쳐다보았다.

아까부터 줄곧 희나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걸로 보아 긴 머리가 가지고 싶은 모양이다. 예뻐지고 싶어서 예쁜 사람과만 논다는 것도 그렇고, 상당히 외모에 신경을 쓰는 맹랑한 꼬마다.

하지만 침이 조금 흐를 정도로 입을 헤 벌린 채 잔뜩 몰입해서 괴상한 머리 모양을 만들고 있는 아이를 보며 희나는 입가에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예쁜 공주님이 되고 싶어 하는 병약한 어린 소녀가 애처로울 정도로 사랑스럽다.

아이랑 노는 것이 생각 외로 즐거워 다행이라며, 희나는 종종 놀러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낮까지 고민하던, 개인적으로 친해질 만한 계기는 잡은 셈이다.

“짠 거 잘 먹어요? 시골 반찬뿐이라 입에 맞을지 참……. 나물 같은 건 먹는지 모르겠네.”

“저 나물 진짜 좋아해요-. 고사리랑, 머위랑 다 정말 좋아해요.”

희나는 5년 전 좁다란 사회과 지도실에서 신문지를 깔고 먹던 만찬을 떠올리며 큰 소리로 대답했다. 희나의 대답에 진혁의 어머니는 즐거운 표정이 되었다. 희나도 입에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통통통 도마를 치는 경쾌한 칼 소리. 보글보글 끓고 있는 찌개의 맛있는 냄새. 거실 한가득 제멋대로 잔뜩 늘어져 있는 장난감과 한시도 떠나지 않는 아이의 기분 좋은 하이 톤의 웃음소리.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느긋하게 누운 채 듣도 보도 못 한 네 갈래 머리를 한 밉상 아가씨 하나.

바보 아저씨가 돌아와서 이 광경을 보면 대체 뭐라고 하려나. 희나는 혼자 그런 생각을 하면서 쿡쿡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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