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단, 그 너머에는-76화 (76/140)

76화. 일상의 침입 (1)

“언니 요즘 어디 아파요?”

“어? 아니, 왜?”

“아뇨, 유난히 약 같은 걸 많이 먹는 거 같아서요.”

보혜의 지적에 희나는 찔끔하며 마그네슘을 보충해준다는 영양 드링크를 내밀었다.

“그냥- 요즘 피부도 안 좋고 몸이 너무 허한 거 같아서. 너도 먹을래?”

“이거 먹으면 피부 좋아져요? 언니가 먹는 거라면 먹어볼 만하죠-.”

“어? 그런 거면 나도 먹을래-.”

희나는 신나서 드링크를 받아 드는 보혜와 손을 내미는 은영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효능이 뭔지 보지도 않고 샀기 때문에 피부가 좋아지는지 알 수 없다. 희나는 어쨌든 잘됐다고 생각했다. 잔뜩 샀는데 어린이 입맛인 희나의 입에 전혀 안 맞았기 때문이다.

2주째 아침저녁으로 진혁의 약국을 기웃거리는 중이라 쓸데없이 사 오는 일반 의약품이 너무 많았다. 희나는 어렸을 때부터 돈 버는 것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뼈저리게 경험했기에 돈 낭비는 질색인지라 어쨌든 산 건 꾸역꾸역 먹고 있었다.

영양제를 사발로 먹은 효과가 있는지 아침에 빈혈에 시달리는 일은 좀 줄어들었지만 반대로 기력이 조금씩 나빠지고 있었다. 입맛도 없어서 살도 조금 빠진 것 같다.

“언니, 밥 안 먹어요?”

“응. 나 먼저 일어날게. 이따가 기숙사에서 봐.”

“언니 남자 친구 생겼어요?”

“아니, 웬 남자 친구?”

“요즘 강의만 끝나면 엄청 빨리 사라지잖아요. 기숙사에도 안 오고.”

“맞아. 거기다가 너 요즘 어떤 아저씨 같은 남자랑 학교 앞에 술집에서 술 마셨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시골 학교 특유의 좁은 사회 덕에 조금만 누군가랑 어울리면 금방 소문이 난다. 특히 나름 유명인에 눈에 띄는 희나는 더욱더.

“전혀 그런 사이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 그냥 좀 친한 오빠야. 그럼 이따가 봐-.”

희나는 손까지 휘휘 저어 부정하고는 황급히 학생 식당을 나섰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혜와 은영은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그리 넓지 않은 캠퍼스를 빠르게 지나친 희나의 발걸음은 자동적으로 진혁의 약국 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발걸음이 별로 가볍지는 않았다.

진혁은 약속대로 더 이상 대놓고 피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뭐 반겨주는 것도 아닌지라 2주가 지났어도 관계에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희나가 아무리 말을 걸어도 진혁은 아주 짧은 단답으로만 대답했고 볼일이 없어 보이면 심지어 가게에 내버려둔 채 일하러 가버리기까지 했다.

그나마 다른 손님이라도 있으면 희나는 완전히 뒷전이었다. 특히 그것이 정말로 아파서 약국에 찾아온 사람일 경우 진혁은 설교하는 듯한 시선으로 그녀를 보곤 했다. 그 눈빛이 ‘약국은 이런 사람들을 위한 장소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희나를 짜부라지게 만들었다.

하도 바빠 보이는 덕에 투정을 부릴 수도 없었다. 문턱이 닳도록 약국에 드나들다 보니 진혁과는 전혀 친해지지 못했지만 졸지에 진혁과 만나게 도와줬던 약국 봐주는 남자와 친해졌다.

그의 이름은 전승수로 처음엔 아저씨인 줄 알았는데 진혁과 동갑인 동네 친구라고 해서 희나를 경악하게 했다. 진혁은 희나가 승수와 어울리는 것을 못마땅해하는 것 같았지만 딱히 대놓고 말리지는 않았다.

약국에 방문할 이유가 필요했기에 승수랑 친하게 지내면서 그 근방에서 어울렸다. 학우들이 본 희나와 어울린다는 남자는 바로 승수였다.

같이 술 마실 일이 있으면 약국 맞은편 호프의 야외 테이블에 주로 가고, 약국에서 나와서도 일없이 버스 정류장에서 어슬렁거리며 아이스크림을 먹음으로써 희나는 다른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진혁을 보기 위해 약국을 상습적으로 드나드는 여자가 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희나가 확인한 바로는 옆 편의점에서 알바하는 여자와 건너편 호프집의 사장 동생은 확실히 진혁에게 관심이 있었다. 승수의 말에 따르면 대략 일곱 명 정도 되는 여자들이 정기적으로 약국을 찾아온다고 했다.

약국 대기 의자에 그런 여자들이랑 같이 앉아 있다 보면 같은 처지인데도 희나는 그녀들이 무척이나 못마땅했다.

아니, 사실은 같은 처지도 아니었다. 그녀들도 아파서 오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진혁은 그녀들을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대놓고 찬밥 신세인 것은 희나뿐이다.

어제는 “이렇게 자주 오지 말고 많이 필요하면 인터넷에서 주문해.”라는 말까지 들었다. 민망해서 얼굴이 빨개진 희나는 뒤에서 쿡쿡 웃는 라이벌들의 웃음소리가 악몽 같았다.

생각에 잠겨서 걷는 사이 어느덧 발길은 약국에 닿았다. 조금 설레는 기분으로 문을 밀고 들어갔으나 몇 분 후 카운터로 나온 것은 승수였다. 혀를 차며 나오는 그를 보고 희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나라서 미안하구만.”

“선생님은 또 바빠요?”

“그래. 그나저나 너 방법을 좀 바꿔봐야 되지 않겠냐? 성의는 갸륵하다만 어째 헛고생만 하는 것 같네.”

“그러게 말이에요. 이대로는 그냥 수많은 동네 여자 1이 되겠어요.”

희나는 카운터에 주욱 엎드리며 침울하게 말했다. 차라리 지금처럼 진혁이 저 혼자만 구박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여자들이랑 완전히 똑같이 대해지기 시작하면 오히려 더 암울할 것 같다.

승수는 힘내라는 듯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 꺼내서 엎드린 그녀의 머리 위에 올려주었다. 그리고 아이스크림을 받아 냠냠 먹고 있는 희나에게 턱을 긁적거리며 말했다.

“다른 방법을 좀 생각해봐. 개인적으로 친해질 만한 계기를 만들어.”

“그치만 완전 무시하는데 그런 방법이 어딨어요. 이잉……. 그냥 도움이라도 되려는 건데 왜 이리 까칠하대.”

“뭔가 방법이 있을 테니 약국 와서 그만 기웃거려. 너 땜에 이번 달 지갑 빵꾸 나겠다.”

신세 한탄 겸 해서 그와 좀 자주 어울리기는 했다. 희나는 입을 비죽거리며 승수를 올려다보았다.

“오빠가 먼저 술 먹자고 했잖아요! 가난한 대학생한테 술 좀 사준 거 가지고…….”

“꼬셔보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스토커인 줄은 몰랐지. 그리고 니가 나보다 더 벌잖아! 담부터 얻어먹으려면 이쁜 친구라도 데려와.”

“여대생을 넘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장가를 못 갔죠.”

“내 친구한테 들이대는 주제에 남 말 하네.”

한동안 카운터에 매달린 채 승수와 시시껄렁한 한탄과 잡담을 나누었지만 손님도 없고 해서 진혁이 나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아이스크림을 다 먹은 희나는 아쉬운 발걸음으로 약국을 나섰다.

‘정말 냉랭하네. 생각해보면 학교 다닐 때도 따라다니는 여자애들한테 선을 확실히 그었었지.’

고백도 받고 그렇게 열렬했는데도 따로 연락하는 애가 하나도 없었다.

옆에서 자세히 보니 인덕이 어찌나 많은지 도와주려고 안달 난 사람도 주변에 많아 보인다.

‘처음엔 내가 선생님 옆에서 힘이 돼주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힘이 되긴 되는 건가……? 결국 나도 그냥 따라다니는 여자 중에 하나잖아.’

사실 돌이켜보면 금전적으로 도움을 줄 만큼 부자도 아니고, 농사에 도움도 안 될 거고……. 약국 청소라도 해주고 싶지만 사실 그런 일들에 전혀 소질도 없다. 이대로는 도움은커녕 번거롭게 만드는 거머리일 뿐이다. 콧구멍만큼 매상에 도움이 되는 정도이려나.

결국 객관적으로 보면 그녀는 5년 전에 2~3주 사귄 거 가지고 스토킹하는 여자일 뿐이다. 혼자 괜히 우쭐해 있었던 거 같다는 생각이 들자 참을 수 없어져서 희나는 버스 정류장으로 구르듯이 달려가 주저앉았다.

그리고 민망함에 빨개진 머리를 부둥켜안고 깊은 고민에 빠져 있을 때였다.

“언니, 언니, 아파?”

걱정하는 것 같은 목소리와 함께 아주 작은 무언가가 머리를 살짝 톡톡 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놀라서 고개를 들던 희나는 간이 떨어질 만큼 놀랐다. 바로 앞에 미래의 얼굴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주 봐도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얼굴은 여전했지만 그래도 그 원인이 병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전처럼 기괴하거나 섬뜩하진 않았다.

희나가 놀라서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하는데 미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언니, 아파서 못 움직여?”

“안 아파. 걱정할 거 없어.”

아이가 걱정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희나는 고개를 저은 뒤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물이나 한 병 살까 해서 편의점으로 들어가는데 미래가 졸졸 따라 들어왔다.

‘왜 따라오지……?’

좀 의아하기도 하고 당황스러웠지만 뭐 편의점에 볼일이 있나 보다 싶어서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러나 미래는 가게 안의 물건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희나 주변만 맴돌다가 희나가 물을 골라 카운터로 가자 그 옆에 섰다.

명백하게 자신을 따라오는 것임을 깨달은 희나는 영문을 몰라 하다가 손가락을 딱 맞부딪쳤다.

“너, 뭐 과자 먹고 싶어서 그래?”

전에 얘기를 캐낼 속셈에 과자를 잔뜩 사줬으니 과자 사주는 언니로 찍혔는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희나의 질문에 미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그저 희나의 니트 자락을 붙잡았다.

과자도 아니면 왜 따라오지? 희나는 혹시 사양을 하는 건가 싶어서 저번에 미래가 골랐던 초콜릿을 물과 함께 계산했다. 그리고 편의점을 나와서 “자-.” 하고 건네주자 아이가 과자를 받아 들었다.

“맛있게 먹어. 그럼 난 간다.”

“언니 어디 가는데?”

“나 집에 가야지. 그럼 안녕.”

손을 흔들고 학교로 가려는데 미래가 졸졸 따라왔다. 희나는 좀 더 걷다가 아이가 오솔길에서 너무 멀어지는 것 같아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미간을 좁힌 채 미래를 쳐다보며 물었다.

“너네 집 저쪽이잖아. 왜 따라와?”

“언니, 같이 놀자.”

같이 놀자니. 이 아이 눈엔 내가 자기 또래로 보이나? 아이에 전혀 익숙하지 않은 희나는 난감해졌다.

“전에 모르는 사람이랑 있는다고 혼났잖아. 나랑 같이 있는 거 니 아빠가 보면 싫어할걸.”

“언니 승수 아저씨랑 친구잖아. 괜찮아.”

대체 뭐가 괜찮다는 건지. 난색을 표하는 희나를 보며 미래는 빙글빙글 웃었다.

그러고 보면 미래는 희나가 이 근처에 왔다가 마주치면 웃으면서 뚫어지게 쳐다보곤 했다. 왜 그러는지 몰랐지만 그녀는 그냥 신경 안 썼다.

희나는 아이가 불편했다. 여태까지 아이랑 친하게는커녕 말을 나눠 본 적도 별로 없다.

“너 친구 없어? 왜 나랑 놀려고 해?”

“나 친구 없어. 나밖에 없어.”

하긴 집 주변에 민가가 영 없으니 그럴 만도 하다고 희나는 속으로 생각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대응했다.

“그럼 아빠나 승수 아저씨한테 놀아달라고 하면 되잖아.”

“아빠 지금 나갔어. 아저씨 싫어. 나 언니랑 놀 거야.”

“왜 나야?”

“언니, 예쁘잖아.”

미래의 말에 희나는 눈썹을 치켜들었다. 아이는 조그만 손을 뻗어서 눈앞에 있는 희나의 예쁘게 웨이브 진 머리카락을 만지면서 말했다.

“언니 예뻐. 나 집에 책 있는데, 언니랑 닮은 공주님 나와.”

아이가 따라오는 것에 시큰둥했지만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훗. 애들도 보는 눈이 있군. 희나는 마음속으로 흐뭇해하며 슬쩍 웃었다. 희나가 웃자 미래도 같이 생글생글 웃었다.

“그러니까 나도 언니랑 놀래. 언니랑 있으면 나도 예뻐져.”

“왜 나랑 있으면 예뻐지는데?”

“아빠가 예쁜 거만 보고 예쁜 말만 하면 예뻐진댔어.”

바보 아저씨다운 말이구나. 희나는 킥킥 웃었다. 아이에 전혀 익숙하지 않지만 생각보다 말이 통하니 불편한 기분이 조금 사그라들었다. 기분도 좋고 할 일도 없는데 조금 놀아줄까 하는 관대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만 막상 놀아주려고 해도 난감한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너 근데 아프잖아. 이렇게 마음대로 나와서 돌아다녀도 돼?”

“나 안 아파.”

“너 아프잖아. 거짓말하지 마.”

직설적으로 말하자 아이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말실수했나 싶어서 희나가 찔끔하는데 미래가 웅얼웅얼 작은 소리로 기어들어 가듯 말했다.

“응, 거짓말이야. 나 아파. 그치만 아픈 거 싫어.”

“아픈 건 누구나 다 싫어해.”

“다른 애들은 안 아파. 나 혼자만 아파. 아, 언니도 많이 아프지?”

“나? 난 안 아픈데?”

“언니 그때 바닥에 넘어졌잖아. 언니도 병원 자주 가?”

아무래도 첫 만남에 기절한 것 때문에 같은 병자 동지쯤으로 오해하는 모양이다. 그런 게 아닌데 뭐라고 설명해야 되나, 희나가 고민하는데 미래가 다시 조금 웃으면서 말했다.

“넘어지면 막 깜깜해지지, 그치? 나도 많이 넘어졌어. 그럼 병원에서 몇 밤 자야 돼. 아빠가 걱정해.”

다 안다는 듯이 말하는 아이의 말이 가슴 아파서 희나는 내가 아픈 건 너와 다르다는 식의 설명은 차마 할 수 없었다. 똑똑한 아이는 이미 스스로도 다른 아이와 자신이 다르다는 걸 조금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그 소외감을 더 부추기고 싶진 않았다.

희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아이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능한 한 부드럽게 말했다.

“그렇게 아프니까 넌 이런 데 돌아다니면 안 돼. 어른들 걱정시키지 말고 집에 가.”

“싫어. 언니랑 놀 거야. 집에 안 갈래.”

미래의 눈이 다시 시무룩해졌다. 하지만 거절하기 마음 아파도 이렇게 어린 아이를 맘대로 데려가서 노는 건 안 될 일이다. 얘를 어떻게 집으로 돌려보낸다?

그 순간 희나의 머릿속에 교활한 꾀가 떠올랐다.

“그럼 너네 집 가서 같이 놀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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