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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그 너머에는-75화 (75/140)

75화. 조우와 재회 (4)

“나 선생님 얘기 다 들었어요.”

“무슨 얘기?”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지금 어떤지 같은 거요.”

진혁의 표정은 담담해 보였지만 희나는 그가 순간이나마 미간을 찌푸렸다고 느꼈다. 역시 자신의 사정을 알리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뭐 어쩌려는 건데. 내 얘기는 알아서 뭐하려고.”

목소리는 친구들에게 말할 때와 달리 무척이나 건조했다. 희나가 비켜서지 않을 거란 걸 안 그는 포기한 듯 몸을 돌려 손님들을 위해 마련해놓은 낡은 대기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약들이 쌓여 있는 벽에 시선을 두었다.

희나가 슬쩍 움직이자 흰 얼굴이 살짝 움찔한다.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아 희나는 문 앞에 기대앉았다.

“그냥 알고 싶었어요.”

“…….”

“선생님은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안 궁금해요?”

진혁은 묵묵히 대답이 없었다. 또 선생님이란 말이 나왔지만 그는 씁쓸한 듯 단정한 입가를 조금 움직였을 뿐 같은 말을 더 반복하진 않았다.

“선생님…….”

“…….”

“선생님을 위해서 좀 살아요.”

“네가 상관할 문제가 아니야.”

내내 침묵을 지키던 진혁이 딱 잘라 말했다. 확고하게 선을 긋는 그에게 희나는 발끈했다.

“그런 거 알 게 뭐예요. 다들 걱정하고 있어요. 그냥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단 말이에요.”

“난 괜찮아. 대체 뭐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다는 건지…….”

“선생님이 위태로워 보이니까요.”

못마땅한 듯 움직이던 그의 입가가 멎었다. 위태로워 보여서 가만히 둘 수 없다. 진혁이 5년 전 희나에게 했던 말이었다.

기억력이 좋은 남자는 그것을 깨달은 듯했다. 자신이 했던 말을 부정할 수는 없는지 그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친구들이 선생님이 텅 비어 보인대요. 그래서 위태로워 보인대요. 나도 보자마자 그렇게 생각했어요.”

“…….”

“선생님, 지금 뭐 중요한 거 없어요?”

“중요한 거 없어.”

“옛날에…… 내가 중요하다고 했잖아요.”

고요한 약국 내부에 침묵이 흘렀다. 어찌나 조용한지 문 바깥에 부는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소리마저 들리는 것 같다. 긴장으로 가득한 침묵은 진혁의 낮은 목소리에 의해 깨졌다.

“이젠 없어.”

그가 하는 말에 희나는 힘이 쭉 빠졌다. 뭘 기대한 건지 모르지만 아무튼 침울한 기분이 들었다. 힘없이 눈을 내리뜬 희나를 흘깃 보고 진혁은 미간을 찌푸렸다.

“왜 이런 얘기를 꺼내는지 모르겠다. 이미 다 지나간 일이잖아. 아무 의미도 없어.”

“지나간 일이라면서 왜 그렇게 나를 피해요?”

“그게 그렇게 이상해? 그래서 이러는 거야?”

진혁이 왜 그렇게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희나가 묵묵히 있자 그는 긴 손가락으로 자신의 얼굴을 쓱 문질렀다. 그리고 하고 싶지 않은 말을 쥐어 짜내듯 빠른 속도로 말했다.

“너한테는 그저 어렸을 때 변덕 조금 부린 장난 같았는지 모르겠지만 난 정말 힘들었어. 이제 와서 다시 지나간 일을 신경 쓰면서 살고 싶지 않아.”

조용조용한 말투가 비수처럼 차갑게 그녀의 마음으로 날아와 꽂힌다. 그의 질책이 아프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만회하고 싶었다. 희나는 다급하게 변명했다.

“저도 전혀 장난 같은 거 아니었어요. 선생님한테 그런 식으로 말한 거 진심이 아니었어요. 그러고 나서 얼마나 후회했는지 몰라요.”

“……네가 지금 하고 싶은 말이 그거야?”

진심을 다해서 말했지만 진혁은 듣고 싶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정말, 많이 보고 싶었어요.”

제발 마음이 전해지길 바라면서 희나는 간절하게 말했다.

“……그런 말을 듣기엔 이젠 너무 늦었어.”

차가운 말에 희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꼭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빠지고 입술이 떨렸다. 그런 그녀를 보지 않은 채 진혁의 냉정한 말이 이어졌다.

“너도 이제 어린애가 아니고, 나도 널 신경 쓸 여유가 없어. 너한테 더 휘둘릴 생각도 없고.”

“…….”

“너와 다시 보고 싶지 않아. 이런 식으로 찾아오지 마.”

이렇게 얘기하게 될 것을 준비하기라도 했던 것처럼 그의 말은 단호하고 거침이 없었다.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 무겁고 아프다. 거부와 차가운 말들이 너무 슬프다.

하지만 가슴 저미도록 아프면서도 희나는 묵묵히 받아들였다. 그가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모두가 내가 뿌린 씨앗이다. 가지 말라고, 간신히 꺼냈던 선생님의 부탁을 무시한 건 나다. 선생님이 받았을 상처와, 그것 때문에 단단히 닫힌 마음이 짐작이 간다.

5년에 걸쳐서 닫아버린 마음이, 자기 좋을 대로 찾아와서 툭 던지는 보고 싶었단 말 한마디에 녹아버리진 않겠지. 게다가 선생님 성격에 자신의 힘든 현실에 누군가를 끼워 넣고 싶지도 않을 거야.

“……선생님 말 이해해요. 내가 잘못했으니까.”

솔직한 사과에도 진혁의 무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딱딱하게 굳은 흰 얼굴이, 그냥 자기 편리하게 생각하는 건지 몰라도 희나에게는 뭔가 괴로워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다시 보지 말자는 말을 하지 마세요……. 그건 싫어요.”

“서로 다시 안 보는 게 좋다고 말한 건 너잖아.”

“그 말을 했을 때, 전 열여덟 살이었어요.”

비겁하다는 건 알지만 그렇게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희나는 가능한 한 감정적이지 않게 들리도록 노력하며 차분히 말했다. 이제 더 이상 그에게 억지 부려도 좋은 어린애가 아니고, 그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를 바랐다.

“선생님 스스로 지나간 일이라고 말했잖아요. 그 말도 같이 흘려버려요. 피하지 마세요. 정말 내가 아무것도 아니면.”

“피하는 게 아냐. 난, 그냥 괜히 신경 쓰기 싫으니까…….”

“내가 뭘 하든 이렇게까지 피해 다니는 거 이상으로 신경 쓸 일이 있어요?”

진혁은 살짝 얼굴을 찡그렸지만 반박하진 못했다. 스스로도 너무 이상할 정도로 피해 다녔다는 자각은 있었던 모양이다.

“뭘 어쩌고 싶은 건데……?”

“나 여기 학교 다니니까 약국 올 거예요. 지금처럼 무슨 잡상인마냥 취급받는 건 싫어요. 평범하게 대해주세요.”

그는 거절할 이유를 찾고 있는 것 같았지만 찾지 못한 듯싶었다. 논리적인 그는 이미 다 지난 일이라는 자신의 말에 모순되는 행동을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결국 진혁은 깊은 숨을 내쉬며 체념한 듯한 말투로 말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네 마음대로 해. 대신 너도 일 없으면 오지 마.”

“그러죠. 대신 나 오면 이제 피하지 않기로 약속한 거예요?”

그는 마지못해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희나가 만족한 듯 쌕- 웃자 진혁이 확인하는 것처럼 물었다.

“이게 할 얘기 전부야?”

“음……. 그렇지는 않지만 일단은요.”

지금 내 입장만 거세게 밀어붙여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니 희나는 우선 한 발 물러서기로 하고 그렇게 말했다. 어쨌든 그의 솔직한 생각을 들었고, 자신의 마음을 전해 생각할 여지를 만들었고, 다시 관계를 이어 나갈 교두보를 만든 걸로도 이런 일을 벌인 보람은 있었다.

희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진혁은 바로 의자에서 일어섰다. 기다렸다는 듯 과수원으로 난 문 쪽으로 돌아서는 그의 모습이 서운했지만, 그래도 희나는 자신의 마음을 추슬렀다.

‘앞으로는 결국 나 하기 나름이겠지. 바보, 맨날 올 거다.’

약국에 올 핑계 같은 건 얼마든지 만들 수 있어. 자기가 한 말을 설마 주워 담지는 않겠지. 아무리 징그러워해도 맨날맨날 와서 두드려 댈 거야. 선생님 마음이 녹을 때까지.

희나가 뒤에서 혀를 베- 내밀며 그런 생각을 하는 줄 꿈에도 모르는 진혁은 천천히 다가가 과수원 쪽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얘기 끝났으니까 열어.”

한 시간 후에나 열어 주겠다고 했는데 아직 40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 희나가 그 사실을 말해주려고 하는데 진혁이 한 번 더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이미 다 듣고 있었던 거 알아. 얘기 끝났으니까 열어줘.”

듣고 있었다고?

희나가 설마 하며 쳐다보는데 문 밖에서 부스스 일어나는 듯한 인기척이 있었다. 어떻게 알았지? 역시 오래된 친구라 그런지 서로에 대해 빠삭하다.

곧 문이 열리고 멋쩍은 듯 실실 웃고 있는 경부와 거북이가 보였다.

“오빠들 고마워요-. 은혜 갚을게요. 그리고 선생님, 이제 도망 다니지 마요-!”

확인하듯 소리치고 희나도 약국에서 나가기 위해 문 위의 잠금 장치로 손을 뻗었다.

잠글 때는 어찌어찌 초인적인 절박함으로 잠갔는데 나가려니까 어째 영 손이 닿지 않는다. 폴짝폴짝 뛰어가며 열쇠와 고전을 벌이는 희나를 본 진혁이 깊이 한숨을 내쉬더니 다가오기 시작했다.

희나의 바로 뒤에 멈춰 선 진혁이 팔을 뻗어 가볍게 잠금 장치를 풀어 주었다. 그와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로맨틱한 상황이 전혀 아닌데도 희나는 주체할 수 없이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너무나 그리웠던 그의 향기도 여전해서 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다.

문을 연 진혁이 붉어진 뺨을 감추려고 살짝 고개를 숙인 희나에게 말을 걸었다.

“혼자 왔어?”

“그럼 누구랑 와요?”

의아한 듯 반문하는 희나를 보며 진혁이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뭔가 말하려는 듯하다가 돌아섰다.

왜 그러나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그가 곧 과수원 쪽 문으로 걸어 나가 버렸으므로 그녀도 이내 돌아섰다.

희나가 약국 문을 나와 입을 비죽거리면서 기숙사 쪽으로 천천히 걷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거북이가 뛰어오고 있었다.

“희나야- 희나야.”

“왜요? 무슨 일 있어요?”

“내가 벌인 일이니까 나보고 책임지라고 하더라.”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희나는 어리둥절해졌다. 거북이는 희나의 머리를 톡톡 두들기더니 씨익 웃으며 말했다.

“데려다주고 오래. 이 근처 어두워서 위험하다고.”

그 말을 듣자 희나는 누르고 눌러 압축해두었던 감정이 툭 터져 비집고 흘러나와 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바보 아저씨. 진짜 변한 거 하나도 없어. 정말로 냉정하게 돌아서지도 못할 거면서 바보. 진짜 바보.

예전부터 그는 곤란해 하면서도 막상 중요한 순간에는 밀어내지 못했다. 그렇게 무르니까, 기대고 싶은 여지가 생기잖아.

방금 전까지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희나의 예쁜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참지 못하고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나왔다.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려고 해도 거부당하고 차갑게 대해져서 너무 슬프다. 사실 조금은 반가워해줄 거라고 기대했던 거 같다. 건조한 시선과 냉정한 말투가 너무 낯설어서 정말로 속상했다.

그치만 그거 이상으로, 선생님이 전혀 변하지 않아서, 아직도 다정한 사람이라서, 그렇게 심한 짓을 했는데도 조금이나마 나를 신경 써주고 있어서, 그것들이 너무나 기뻐서 참을 수 없다.

그녀가 울기 시작했지만, 거북이는 당황한 기색 없이 담담한 표정으로 어깨를 톡톡 두들겨주었다. 그렇게 울면서 희나는 그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나 포기 안 할 거예요.”

“그래.”

“맨날맨날 찾아올 거예요.”

“그래, 그렇게 해.”

“싫다고 해도…… 계속 옆에 있을 거예요.”

“그래.”

“선생님한테 나 울었다고 말하지 마요.”

“말 안 해.”

희나는 계속 훌쩍훌쩍 울면서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말을 늘어놓았고, 거북이는 웃는 얼굴로 그래, 그래 하고 꼬박꼬박 대답해주었다. 가로등도 별로 없는 길이었지만 머리 위에 떠있는 별은 서울보다 훨씬훨씬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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