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조우와 재회 (3)
너무 기뻐서 벅찬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던 희나는 거북이의 손을 두 손으로 와락 붙잡고 흔들었다. 활짝 웃는 희나의 예쁜 얼굴을 보고 굳어 있던 거북이의 입꼬리도 슬쩍 올라갔다.
“야, 대신 너, 서울 가면 너랑 같이 모델 하는 애 소개해주는 거다?”
“네, 골라서 말만 하세요. 연락처 바로 쏴 드릴게요.”
“와, 살다 살다 내가 유진혁 덕을 다 보네. 너 약속 잊지 마라.”
“절대 안 잊을게요. 그런데 어떻게 만나게 해주실 거예요?”
잠시 곰곰이 생각하던 거북이가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내더니 말했다.
“너 이 근처 살아?”
“네.”
“들어가면 술판 벌일 거니까, 술 잔뜩 먹인 다음에 이따 내가 약 좀 집어 달라고 핑계 대서 진혁이 약국으로 끌고 나올게. 숨어 있다가 거기서 진혁이 붙잡고 만나.”
“그걸로 괜찮을까요? 또 도망가려고 하면…….”
“내가 과수원 쪽 문은 잠가 버릴 테니까 니가 바깥쪽 문 잡고 못 나가게 해. 그 다음은 뭐 네가 알아서 하고. 어쨌든 내가 연락하면 바로 약국으로 와. 알았지?”
“네, 알았어요.”
합의를 확인하듯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누고 버스 정류장에서 일어났다. 저녁이 되면 진혁을 만난다. 희나는 신나서 거북이에게 몇 번이고 고개를 조아린 뒤 황급히 기숙사로 향했다.
***
“뭐 하는 거야?”
“쉿, 쉿-. 나 바쁘니까 나중에, 나중에.”
은영은 침대에 드러누운 채 스마트폰만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바쁘다고 하는 희나를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쫓아내듯 손을 휘휘 젓던 희나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우왓, 깜짝이야!”
“왔다!”
스마트폰을 번쩍 치켜들며 일어서다가 희나는 이층 침대에 머리를 박고 다시 주저앉아야 했다. 은영은 신기한 표정으로 그런 희나를 쳐다보았다. 평소 늘 차분하고 다소 시니컬한 희나가 뭔가에 저렇게 격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건 드물었기 때문이다.
“뭐가 왔는데?”
은영이 물었지만 희나는 대답 대신 스마트폰을 내팽개치고 침대에서 내려와 재킷에 허둥지둥 팔을 꿰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액정을 본 은영은 곧 허탈한 표정이 되었다.
「ㄴㅇ」
보낸 사람 이름은 거북이. 내용은 ㄴㅇ이 전부였다. 저게 뭐길래 저렇게 기뻐한단 말인가.
은영이 고개를 갸웃거리든 말든 희나는 호들갑을 떨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ㄴㅇ’은 이미 ‘나와’인 것으로 자동 완성되어 있었다. 차림새가 만족스러워지자 희나는 말을 거는 은영을 내버려 둔 채 그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 밤에 어디 가?”
“나 기다리지 마아아아아아-.”
희나는 메아리를 남긴 채 바람처럼 달려서 기숙사를 빠져나왔다. 기숙사에서 도로로 향하는 가파른 비탈길을 구르다시피 내려와 곧장 다리가 빠지도록 약국으로 달렸다.
원래 가깝기 때문에 약국은 5분도 지나지 않아 모습을 드러냈다. 시골 상점가지만 대학가라 술집이나 편의점들은 여전히 성업 중이다. 그러나 약국은 이미 문을 닫은 지 오래라 불도 꺼져 있었고 입간판도 보이지 않는다.
문 앞까지 달린 희나는 슬그머니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깜깜해서 안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팔을 뻗어 조심스럽게 손잡이를 당겨보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문 위쪽에 붙은 세콤 스티커가 허세이길 바라며 희나는 조금 더 세게 당겼다. 다행히 세콤 경보는 울리지 않았으나 문 역시 꼼짝하지 않았다.
‘아직 안 왔나?’
희나가 기웃거리고 있을 때였다.
약국 안쪽에 인기척이 있더니 불이 확 켜졌다. 화들짝 놀란 희나는 반사적으로 자세를 홀랑 낮춰 커다랗게 약이라고 쓰인 불투명 유리 아래로 몸을 숨겼다.
눈만 빼꼼 올려서 조심스럽게 내부를 살피자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거북이가 보였다.
그리고 잠시 후 희나의 입꼬리가 삭- 올라갔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들어오고 있는 진혁의 흰 얼굴이 보였기 때문이다.
‘진짜 데려왔네! 됐다!’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환호를 날리고 있던 희나의 입가는 잠시 뒤 놀라 굳어졌다. 들어온 사람이 진혁과 거북이 다가 아니었다. 뒤로 경부도 술에 취해 다소 빨개진 채 들어서고 있었다.
‘왜 같이 들어온 거지? 들킨 건가?’
희나는 불안해서 콩닥콩닥 뛰는 심장을 억누르며 안쪽의 동향을 주시했다. 밤을 맞은 시골 도로는 차량의 통행도 없이 조용한 덕에 안쪽의 목소리가 고스란히 들려왔다.
“그냥 맘대로 가져가도 되는데…… 왜 굳이…….”
“야, 니가 골라줘야지. 우리가 뭘 아냐-.”
“……너 제약 회사 다니잖아.”
“난 그냥 영업맨인데 뭘 알아-. 야, 좋은 약 좀 골라서 찾아줘 봐. 영양제, 뭐 그런 거 없냐?”
“서울에서 제약 회사 다니면서 시골 약국에 뭐 먹을 게 있다고 그래.”
진혁은 둘의 억지에 어처구니없어 하면서도 등쌀에 밀려 하는 수 없이 선반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가 몸을 돌리는 것과 동시에 경부가 갑자기 기지개를 켜더니 하품을 하며 말했다.
“아으아, 약국 공기가 왜 이리 텁텁하냐? 선선한 공기 좀 마시고 싶다. 문 좀 열자.”
“방금 전까지 밖에 있었잖아. 금방 나갈 건데.”
“야, 환기 좀 하고 살아야지. 문 연다-!”
“과수원 뒤에 두고 왜 굳이 도로 쪽에서 선선한 공기를 마셔.”
진혁의 만류를 들은 척 만 척하며 경부가 희나가 숨어 있는 문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당황한 희나는 도망치려고 했으나 그럴 새가 없었다.
순식간에 다가온 경부가 시원스럽게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공기만 마시는 게 아니라 멍한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결국 쪼그리고 앉아 있던 희나와 눈이 딱 마주쳤다. 필사적으로 고개를 휘젓고 검지손가락을 세워 조용히 하라는 사인을 날리는 그녀를 본 경부는 숨을 깊숙이 들이마시더니 커다란 소리로 말했다.
“우와, 역시 시골 깡촌이라 공기가 좋긴 좋네-!”
다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말한 그가 작은 소리로 아주 빠르게 덧붙였다.
“거북이한테 다 들었다. 나도 모델 부탁한다. 난 그 단발머리 여자애가 좋더라.”
속사포처럼 쏘아붙인 그는 어안이 벙벙한 희나를 남겨 둔 채 돌아서 안으로 쏙 들어갔다. 잠그는 손동작은 했지만 잠기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희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문을 열어주기 위한 연극이었던 거다.
다시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유리 너머를 살펴보니 두 사람은 여전히 연기를 하며 진혁을 뛰쳐나가지 못할 만한 깊숙한 곳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야- 정력에 좋은 거 뭐 없냐? 죽은 남자도 벌떡 되살아나게 하는 그런 거 말이야!”
“탈모약이 아니고?”
“죽을래! 그건 이미 안 먹어 본 게 없어! 그딴 거 말고 막 그런 거 있잖아- 어마어마한 거. 어마어마해지는 약! 근육이 막 탁탁 붙고!”
“음……. 이 동네는 대부분 노인분들뿐이라 젊은 사람이 먹을 만한 게 없는데…….”
두 사람의 연극에 넘어간 순진한 진혁이 몸을 굽혀 친구들을 위해 안쪽 선반을 뒤지는 사이 둘은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쳐 과수원으로 통하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문 앞에 다다르자 경부와 거북이는 고개를 비죽 내밀고 보고 있는 희나에게 브이 사인을 그려 보이고는 입 모양만으로 ‘모델 모델’이라고 말했다.
희나는 킥킥 웃으며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만족한 미소를 지은 두 사람은 번개같이 약국을 빠져나가 과수원 쪽으로 향하는 문을 세차게 닫았다.
“어? 뭐야? 뭐하는 거야?”
갑자기 문이 닫혀 당황한 진혁은 과수원 쪽으로 향하는 문으로 다가가 손잡이를 흔들었지만 이미 바깥쪽에서 잠근 뒤였다. 진혁은 문을 쾅쾅쾅 세게 두들기면서 큰 소리로 친구들을 불렀다.
“무슨 장난이야? 이거 안 열어?”
“으하하하하. 안에서 잘 놀아라! 한 시간 있다가 열어주러 올게.”
“뭐야? 도로 쪽 문은 약국 안쪽에서 열리는 거 몰라? 나가면 가만 안 둬!”
진혁이 소리쳤지만 바깥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는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진혁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도로 쪽 문으로 나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아, 저 바보들. 하여튼……!”
작게 중얼거리던 진혁의 움직임이 멈췄다. 약국 안쪽에 서 있는 희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희나는 소란이 일어난 사이 잽싸게 들어와서 낑낑거리며 간신히 문 꼭대기에 있는 고리를 잠근 뒤 문을 등지고 서서 진혁을 쳐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고 한동안 진혁은 말이 없었다. 그는 못 박힌 듯이 서서 희나를 그저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희나도 정면으로 시선을 받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흰 셔츠에 저지를 입었을 뿐인데 말끔해 보이는 그는, 정말 아무리 봐도 변한 게 없었다. 아까 거북이와 경부도 동안인 편이지만 세월의 흐름을 느낄 수가 있었는데, 그는 그저 그대로였다.
그와 한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두근두근 떨렸다. 당장 꺼내고 싶은 말이 산더미같이 많았지만 희나는 그의 말문이 열리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한참을 가만히 서 있던 진혁이 한숨을 내쉼으로써 숨 막힐 것 같던 침묵이 깨졌다. 그는 단단히 조여져 있던 몸의 긴장을 누그러뜨린 뒤 잠시 바닥을 내려다보다가 희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곧 그녀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가 다가오자 희나는 안 그래도 떨리던 심장의 박동이 더 거세졌다. 너무나 그리웠던 얼굴이 가까워진다. 희나의 예쁜 입술이 살짝 벌어지고 볼이 발그레하게 홍조를 띠었다.
그러나 몇 미터 안 되는 거리를 걸어오는 찰나의 순간에도 희나는 깨달았다. 그는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의 시선은 희나가 아니라 뒤에 있는 문을 보고 있었다.
기분 좋게 벌어졌던 입술을 꽉 다문 희나는 앞으로 한 발짝 걸어 나갔다. 그러자 그의 걸음이 흠칫 멈춘다. 희나는 양팔을 넓게 벌리면서 앙칼지게 말했다.
“나 문에서 안 비킬 거예요.”
그러자 진혁이 눈썹을 찌푸리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살짝 기울인 얼굴로 희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쟤들이랑 이러기로 짠 거야?”
아까부터 계속 들려오던 목소리였지만 자신에게 말을 하는 거라고 생각하니 내용과 상관없이 또 심장이 뛴다. 희나는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얘기 좀 해요.”
“네 선생님 아니라고 했잖아. 그렇게 부르지 마.”
다소 신경질적인 반응이었다. 항상 차분하던 그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에 놀란 희나는 움찔했다. 겁먹은 그녀를 보고 진혁은 또다시 한숨을 쉬었다.
“……할 얘기가 뭔지 모르겠지만 별로 듣고 싶지 않아. 비켜줘.”
“안 비킬 거라고 했잖아요. 얘기 안 듣고 나가고 싶으면 밀고 지나가세요.”
희나는 이를 앙다문 채 굳게 버티고 서서 진혁을 올려보았다.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져서라도 그냥 보내지 않겠다는 각오였다.
그녀의 진지한 표정에 딱딱하게 굳었던 진혁의 얼굴에 곤란해하는 빛이 번져갔다. 그 익숙했던 얼굴을 보자 희나는 자신이 알던 진혁으로 돌아오기라도 한 듯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는 입술을 깨문 채 머뭇거렸다. 혹시 정말 밀고 지나갈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그러진 않을 모양이다. 아무리 변했다 해도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희나는 믿고 싶었다.
그는 한참 망설이다가 눈썹을 찡그리더니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얘기가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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