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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그 너머에는-73화 (73/140)

73화. 조우와 재회 (2)

저 앞쪽에 하얀색 폭스바겐 골프가 멈춰 서더니 이내 떠들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우, 젠장. 차 왜 이렇게 막히냐-, 진짜!”

누군지 바로 떠올려 낼 수는 없었지만 분명히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였다. 희미한 기억을 더듬으며 희나는 황급히 상가 건물 안쪽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유리문 뒤 층계에 돌아선 채로 거울을 꺼내 든 희나는 슬쩍 말소리를 내고 있는 사람들을 비춰 보았다.

스포티한 모자를 눌러쓴 귀염상의 남자, 그리고 생글생글 웃는 상에 살짝 키가 작고 아주 눈에 띄는 원색의 옷을 입은 남자.

둘의 얼굴을 확인한 희나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들은 예전에 진혁의 자취방에서 만난 적이 있는 경부와 거북이가 틀림없었다.

‘선생님을 만나러 온 걸까?’

두 사람은 희나가 서 있는 쪽을 스쳐서 편의점 쪽으로 걸었다. 그러다가 경부가 멈춰 서서 휴대폰을 보더니 거북이에게 뭐라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야, 야. 여기 편의점에서 먹을 거 좀 사서 먼저 들어가. 나 저 앞에 마트에 좀 갔다 오게.”

“뭐야, 미리 좀 사 오지. 뭐 사게.”

“진혁이 이놈이 다 오고 나니까 심부름 좀 해달라고 문자 보내잖아. 누군 가고 싶어서 가나. 거기 술 종류 거의 없으니까 여기서 니가 마실 것들 좀 사.”

“술병 들고 걸어가라고? 미친놈이. 야, 그냥 요 앞에 벤치에 앉아서 기다릴 테니까 오면 태워서 가.”

“알았어. 그럼 갔다 온다.”

투닥거리며 대화를 나눈 뒤 경부는 다시 차에 올라타고, 거북이는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희나는 몸을 다시 돌려 황급히 거북이가 들어간 편의점을 살폈다.

진혁을 만나러 온 것이 확실했다. 다섯 시경에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던 건 이 사람들에게 물어보란 뜻이었던 건가? 그래서 서울에서 알던 사이인지 확인한 건가?

기든 아니든 재고 따질 시간이 없었다. 희나는 무작정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 거북이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저기요, 잠깐만요.”

눈썹을 조금 찌푸리고 ‘뭐야?’ 하는 듯 돌아보던 거북이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는 입술을 깨물며 묵례하는 희나를 보고 반색을 했다.

“어? 너? 희나 아냐?”

겨우 한 번 봤을 뿐인데 여태까지 자신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던 희나는 어쨌든 다행이다 싶었다. 웃고 있는 얼굴을 보니 만나서 싫어하는 것 같진 않았다.

“야, 진짜 이뻐졌네. 너 잘나가더라. 쇼핑몰 모델 하는 거 사진도 봤어. 여긴 웬일이야?”

“저 요기 앞에 대학 다니기 시작했어요.”

“그래? 가출하고 속 썩이더니 대학도 가고, 다 컸네. 잘했어, 잘했어.”

거북이는 신난 듯 희나의 등을 팡팡 두드리며 반가워했다. 희나는 그의 흥분이 가라앉을 때까지 조금 기다리다가 조심스럽게 떠보듯 말을 꺼냈다.

“오빠는 여기서 뭐 하세요?”

“어? 어…… 그게 친구랑 잠깐 요 앞에 볼일이 있어서.”

난처한 듯 말을 돌린다. 그러나 희나는 오늘이야말로 승부를 보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그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볼일 아니잖아요. 오빠, 선생님 만나러 온 거죠?”

희나의 물음에 거북이 움찔했다. 그러곤 작게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진혁이 만났어?”

“오빠 잠깐 얘기 좀 해요.”

“무슨 얘기…… 하려고?”

“잠깐이면 돼요. 뭐 거창한 거 하려는 거 아니에요. 그냥 저기 앉아서라도 괜찮아요.”

그는 난색을 표했으나 희나를 뿌리치지 못하고 그녀에게 팔을 붙잡힌 채 편의점 밖으로 끌려 나왔다. 버스 정류장 벤치에 나란히 앉자 거북이가 질문을 던져왔다.

“진혁이 때문에 여기 학교 다니는 거야? 둘이 다시 만나?”

순순히 따라온 건 그도 궁금한 게 있어서였던 모양이다. 희나는 질문에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아뇨. 저 2학년이에요. 저 일주일 전에 선생님 우연히 봤어요. 진짜 놀랐어요. 여기서 약국 하던데…… 약사라니 어떻게 된 거예요?”

“뭐, 그냥 졸업하고, 약사 면허 따고 고향 내려와서 그렇게 된 거지.”

뭉뚱그려서 말을 얼버무리려 하는 점이나 희나가 진혁을 찾는 것에 난색을 표하는 거나 어느 정도 사정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희나는 딴청을 부리는 거북이의 팔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저희 얘기 들으셨어요?”

“무슨 얘기…….”

“아시잖아요. 모르는 거 같지가 않은데…….”

“너 학교 다닐 때 진혁이랑 사귄 이야기?”

역시 알고 있었구나. 희나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거북이가 구부리고 있던 등을 쭉 펴더니 의자를 짚고 앉았다. 그냥 터놓고 얘기해보기로 마음먹은 듯한 자세였다.

“그때 진혁이가 우리들 다 모아 놓고 너랑 사귈 거라고 말했었어.”

“그래서요?”

“그래서는 뭐, 학교에서 징계 받을지도 모르는데 미친놈이라고 다 같이 욕하고 뜯어말렸지. 그래도 괜찮다고 뻣뻣하게 버티더니 얼마 안 가서 갑자기 헤어졌다고…….”

거기까지는 그녀도 아는 사실이고, 그녀가 알고 싶은 건 그 후의 이야기였다. 초조해진 희나는 눈을 들어서 거북이를 쳐다보며 이야기가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그 후에 선생님은 어떻게 하신 거예요?”

“뭐, 그냥 며칠 술에 절어서 살더니…… 바로 조기 졸업 신청하고 서울 집 정리하더라.”

“그럼 교직 이수는요? 이제 선생님은 못 하게 된 거예요?”

“교직 이수는 된 거 같은데…… 본인이 안 하겠다고 했어. 교사는 자기랑 안 맞는 거 같다고.”

거북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그는 희나가 궁금해하는 부분을 깨달은 듯 묻지 않아도 간결하게 그 후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런데 또 무슨 생각을 했는지 peet를 보더니 학교 약전원에 진학하더라고. 서울로 오긴 했는데 미친놈처럼 학교에 틀어박혀서 불러내도 나오지도 않고…… 그래도 워낙 열심히 해서 점점 괜찮아지나 보다 했지. 교수님이 그 녀석 워낙 좋게 봐서 박사 따고 교수까지 계속 공부하려나 했는데…….”

“그런데 왜 여기로 내려온 거예요?”

서울대를 나와서 동 대학 약대로 진학했다는 건 잘 모르는 희나도 아주 좋은 스펙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돈을 들여서 공부한 엘리트가 손님도 별로 없어 보이는 시골 동네 약국이라니. 그 경위가 신경 쓰인다.

거북이는 다시 또 한숨을 아주 깊이 내쉬었다. 그러더니 대답 대신 말을 돌려 질문을 했다.

“너 진혜 알지? 네가 진혜 찾아 줬댔나?”

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래의 나이를 알았을 때부터 혹시 진혜의 아이가 아닐까 조금 짐작하고 있었기에 진혜의 얘기가 나와도 의아하다기보다는 납득이 갔다. 그러나 뒤이어 나온 말에 희나의 입이 벌어졌다.

“진혜가 죽었어. 작년에.”

“죽어요? 왜 죽었어요?”

“자살했대. 여기 과수원에서 목매고.”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자살이라니……. 어째서?

희나는 진혜를 겨우 한 번 만났을 뿐이지만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목소리가 크고 말투가 저속하지만, 그다지 싫은 느낌은 아니었다. 그녀는, 진혁과 희나가 만나고 있던 당시 두 사람에게 잘해보라고 말해 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둘이 사귄다는 말에 크게 웃던 그녀. 보란 듯이 아이를 잘 키울 거라고 큰소리 땅땅 치던 그녀.

5년이나 지났어도 기억 속에 생생히 살아 있는데 죽었다니. 희나는 깊은 충격을 받았다.

“엄마는 죽었어. 저기서.”라고 말하던 미래의 천진한 목소리가 어른거린다. 말 그대로 진혜는 저기서 죽었던 거다.

“그럼 미래는 역시…….”

“미래도 이미 봤어? 미래가 진혜 딸이야.”

“왜 자살한 거래요?”

“얘기가 긴데…….”

거북이는 머리를 조금 긁적이며 어디서부터 설명할지 고민하는 듯했다.

“너, 진혜가 진혁이한테 신장 이식받은 거 알아?”

“신장 이식이요?”

금시초문이다. 희나가 놀란 눈으로 고개를 젓자 거북이가 조금 눈썹을 치켜 올리며 물었다.

“그 녀석 몸에 흉터 큰 거 아직도 있는데, 몰라? 너네 선은 안 넘었나 보네.”

“선생님이 그럴 사람이 아니잖아요.”

“우와- 미친, 그런 아까운 짓을!”

거북이는 희나의 따가운 눈총을 받더니 목을 가다듬고 다시 설명을 이어 갔다.

“흠흠. 어쨌든 진혜가 애 낳고 얼마 안 돼서 남자한테 버림받고 친정 내려왔다나 봐. 그래도 어찌어찌 애는 키워 보려고 발버둥 쳤다는 거 같아. 그런데 뭐 진혁이네 부모님은 원래부터 진혜랑 진혁이랑 비교하고 그랬는데 애까지 딸려서 왔으니 곱게 봤겠어.”

“그래서요?”

“과수원 일 도우면서 같이 사는 정도로만 허락해줬대. 그런데…… 미래도 진혜가 걸렸던 그 병에 걸렸어. 그리고 자기 엄마가 했던 거처럼 본인도 여기 일 돕고 바쁘게 사느라 신부전 일으킬 때까지 눈치를 못 챘나 봐.”

희나의 얼굴이 안타까움으로 어둡게 물들었다. 눈앞에 앙상하게 마르고 또래보다 훨씬 작은 데다 얼굴빛도 납빛 같은 미래의 가냘픈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서 그렇게 보였던 거구나.

“이식 안 하면 매주 투석 받으면서 살아야 돼. 그런데 가족 중에 없으면 현실적으로 이식을 받을 확률도 무척 낮고. 그래서 안 그래도 심적으로 많이 불안하던 진혜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거야. 자기가 죽으면 자기 신장 딸한테 주라고…….”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하……. 애초에 자기 신장도 아니고 이식받은 지 오래된 신장인 데다가 건강 상태가 좋았던 것도 아니니 이식이 될 리가 없지. 진혁이 놈은 이미 이식해줬으니 또 해줄 수도 없고. 부모님들은 진혜 때부터 부적합이셨고…….”

“…….”

“외동딸 시체가 나무에 매달린 걸 발견하시고…… 충격 받아서 진혁이 아버지도 시름시름 앓다가 곧 돌아가셨어. 진혁이 어머니도 넋 나간 사람처럼 이상하시고. 그러니까 바로 다 팽개치고 내려간다고…….”

자신이 없는 사이 진혁에게 닥친 불행에 대해 들은 희나는 마음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곧 희나의 눈가가 빨갛게 물들고 눈물이 고였다. 거북이도 감정이 몰려오는지 조금 목이 멘 목소리가 되었다.

“어찌어찌 뜯어말려서 졸업까지는 하게 했는데 졸업하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내려갔어. 저놈이 여기서 이렇게 살 놈이 아닌데. 그놈이 우리 중에 제일 똑똑하고 성실하고……. 이렇게 살기 너무 아까워. 분명히 교수까지 됐을 건데.”

거북이의 한탄에서 친구를 생각하는 안타까움이 듬뿍 묻어났다.

희나는 눈물을 참기 위해 애를 썼다. 이야기만 들어도 안 봐도 비디오다. 그 책임감 강한 남자가 혼자 다 짊어지고 있을 걸 생각하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선생님은 내가 밑바닥에 있을 때 내게 살아가는 희망이 되어줬는데. 선생님 덕분에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 거나 다름없어. 내가 없는 곳에서 힘들어 할 것을 알았다면…….

그녀는 죽어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설령 모든 걸 다 잃어버리게 된다 하더라도.

결국 한 방울 흘러넘친 눈물을 손가락으로 살짝 닦고 희나는 몸을 휙 돌렸다. 그리고 거북이의 손을 덥석 잡고 간곡히 부탁했다.

“저, 선생님이랑 얘기 좀 하게 해주세요.”

“무슨 얘기? 찾아가서 만나면 되잖아.”

“자꾸 찾아가도 도망간단 말이에요. 잠깐이면 돼요. 좀 불러내 주세요.”

“직접 찾아가도 도망가는데 내가 무슨 수로…….”

“지금 선생님 만나러 가는 거 아니에요?”

“그거야 그렇지만…… 본인이 원하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오빠, 한 번만요. 네? 은혜 잊지 않을게요.”

희나는 난처해하며 거절하는 거북이를 붙잡고 몇 번이고 부탁했다. 그가 들어주지 않으면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늘어질 생각이었다.

‘옆에서 힘이 되어주고 싶어. 선생님이 모든 것을 혼자서 다 짊어지게 하고 싶지 않아.’

그녀는 어떻게든 진혁을 만나고 싶었다. 무슨 사랑 놀음 같은 걸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를 만나서 은혜를 갚고, 그가 자신에게 해주었던 모든 것을 되돌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거북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조금 냉정하게 말했다.

“너를 다시 그 녀석한테 데려가는 게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심지어 녀석이 싫다고 하는데. 나나 경부는 뭐 둘 문제는 둘의 문제니까 그럭저럭 괜찮은데, 수진이는 너 만나면 가만 안 둔다고 난리야.”

“제가 잘못한 거 알아요. 하지만…… 그땐 진짜 아무것도 몰랐어요. 오빠, 정말 한 번만 도와주세요.”

“그 녀석한테 힘든 일 많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원래 너 떠나고 나서부터 애가 이상해졌어. 꼭 눈 돌리면 어떻게 돼버릴 거 같아. 간신히 형태만 유지하고 있는 사람 같다고 해야 되나. 그렇게 인기도 많은 놈이 여자도 안 만나고 엄청 위태로워 보인단 말이야.”

“…….”

“너 이러지 마. 다시 힘들게 하면 안 돼. 그 녀석 이미 충분히 힘들어.”

“절대 그런 일 없을 거예요. 약속할게요.”

희나의 진지한 눈빛을 읽었는지 거북이는 흔들리는 듯했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누구에게 말하는 건지 모를 어조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처음부터 네가 그렇게 만들었으니 결국 되돌릴 수 있는 것도 너밖에 없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녀석들이 알면 날 욕하겠지만…….”

“오빠, 그럼 제 부탁 들어주시는 거예요?”

거북이는 마지못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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