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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그 너머에는-72화 (72/140)

72화. 조우와 재회 (1)

그리고 시간은 흘러 일요일 아침.

희나는 부스스 침대에서 일어나 시계를 보았다. 오전 일곱 시였다. 주말에 일어나기엔 좀 이른 시간이지만 희나는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토요일에 새벽같이 서울에 올라와 하루 종일 일을 하고 지쳐 쓰러져 잤다. 여전히 피곤해서 더 자고 싶었지만, 오늘 다섯 시까지 충남으로 돌아가려면 시간이 없었다. 서둘러 방을 걸어 나오자 여느 때처럼 호화로운 복도가 눈에 들어왔다.

익숙하게 샤워실로 찾아가 샤워를 시작했다. 희나가 있는 곳은 이제는 거의 자기 집같이 친숙하게 느껴지는 지훈의 집이었다.

샤워를 끝내자마자 대충 옷을 걸쳐 입고 쌩얼에 뿔테 안경을 쓴 채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내려가면서, 인터폰으로 일어났음을 알렸다. 아직 잠에 취해 있던 카메라맨과 직원이 잔뜩 쉰 목소리로 곧 나오겠다고 말했다.

계단 아래의 커다란 거실을 지나서 안쪽 복도를 지나가 한 방문을 노크하자 또 잠에 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영 언니, 일어났어요? 저, 희나예요.”

“어? 어……. 오늘 일찍 가야 된댔지? 잠깐 기다려. 금방 나갈게.”

“미안해요, 언니. 천천히 나오세요.”

자신의 사정 때문에 너무 많은 사람들을 일찍부터 깨우는 것 같아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다음에 꼭 한턱내야겠다고 생각하며 희나는 천천히 걸어 분장실로 향했다.

희나가 깨우고 있는 것은 모두 지훈이 운영하는 쇼핑몰 스텝들이었다. 지훈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상병신 트리오와 함께 인터넷 쇼핑몰을 운영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명실상부한 잘나가는 쇼핑몰 CEO가 되었다.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가 이미 진입 장벽이 높을 대로 높아진 쇼핑몰 업계에서 살아남은 것은 전적으로 집안의 배경이 컸다. 홍콩의 아버지가 지훈의 사업 계획을 듣고, 이미 한국에서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는 중규모 쇼핑몰을 인수한 뒤 그에게 넘겨주었다.

아무리 레드오션이라 해도 빵빵한 자본과 인맥을 갖고 시작했기에 망하기가 더 힘든 상황. 거기에 지훈의 센스가 시너지를 더하자 사업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고공 행진을 시작했다.

옆에서 그가 성공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희나는 돈이 돈을 부른다는 말을 실감했다. 오픈 초기부터 공격적인 광고와 투자를 한 덕에 겨우 2년 만에 10~20대 남성 쇼핑몰에서 압도적인 매출 1위를 달성했다. 그리고 그 후로는 그야말로 탄탄대로였다.

처음 시작할 때는 지훈과 친구 셋이 서로 모델을 서서 피팅했으나, 지금은 사업을 확장해서 남자 모델만 일곱 명 정도 있었다. 그리고 2년 전에 10~20대 여성 의류까지 확대하면서 지훈의 강력한 권유에 따라 희나도 피팅 모델이 되었다.

총괄 MD가 지훈인데 희나는 그가 스스로 밝힌 이상형이었기에 일종의 뮤즈나 다름이 없었다. 아무 경험이 없는 모델이었는데도 그녀를 염두에 두고 제작한 옷들을 전부 피팅시켜 익숙해질 때까지 시간을 들여 촬영했다.

그렇게 3년이 지나자 이제 여성 의류까지 시장에서 확고히 자리를 잡아 유명 쇼핑몰이 되었다. 그리고 희나는 그 쇼핑몰의 얼굴이나 다름없는 메인 모델이었기에 길에서 알아보는 사람들도 꽤 많아졌다.

주 2회 촬영만 하지만 온갖 주력 상품의 피팅은 희나의 차지였다.

지훈은 이미지 모델이나 다름없는 희나를 끔찍이 아꼈다. 둘이 헤어진 지 2년이 넘었는데도 변함없이 관계가 이어져온 것은 그러한 비지니스적인 얽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희나는 모델을 하라는 말이 무척이나 어색했지만, 지금은 솔직히 고마웠다.

그녀가 뒤늦게나마 이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대학에 갈 수 있었던 것도, 혼자서 넉넉하게 자립할 수 있었던 것도 피팅 모델 일을 하면서 수입이 아주 넉넉해진 덕이었다. 지훈이 그녀를 배려해서 아주 좋은 조건으로 계약해주었기에 한 달 풀로 일할 때에는 연봉이 억대를 넘나들었다.

학교를 다니는데도 촬영 스케줄을 몽땅 주말로 옮겨주고, 사정을 봐준 건 CEO가 지훈이 아니었다면 힘들었을 것이다.

복도 모퉁이를 꺾은 희나의 발길이 예전에 서재가 있던 자리로 들어섰다. 지훈은 살고 있던 펜트하우스를 업무용으로 개조해서 아래층 서재는 이제 촬영용 간이 스튜디오가 되어 있었다.

야외 촬영이나 외부 스튜디오 촬영도 하지만 일이 많을 때는 내부 스튜디오도 돌렸다. 오늘은 희나의 스케줄에 맞춰주느라 촬영 스텝들도 모두 전날부터 지훈의 집에 와서 머물고 있었다.

희나가 스튜디오 한쪽에 칸막이를 세우고 간단하게 만든 분장실에 가서 앉아 있으려니 곧 메이크업 담당인 주영이 들어왔다. 들어오자마자 하품을 하는 걸 보니 많이 피곤한 듯했다.

“언니, 미안해요. 저 때문에 이렇게 오게 해서…….”

“아냐, 아냐. 어제 촬영 끝나고 술판 벌인 게 문제지. 아침 촬영 같은 거 전혀 문제없어.”

“술 드셨어요?”

“어. 아, 어제 너 들어가고 나서 사장님 왔거든.”

지훈이 돌아왔다는 말에 희나는 입술을 조금 깨물었다.

지훈은 쇼핑몰 사업을 해외까지 확장하기 위해 최근 출장이 잦았다. 중국에 차린 사무실은 이미 잘 돌아가고 있었고, 이번에 일본 라쿠텐에 입점까지 해서 투자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 그럼 집에 있어요?”

“응. 새벽까지 마셨으니까 아직 자고 있을걸.”

“……혼자 왔어요?”

희나의 질문에 주영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3년 전부터 스텝으로 합류한 주영은 지훈과 희나가 연인 사이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지훈이 희나를 따라다녔으며, 파국을 맞은 이후 극도의 여성 편력에 시달리게 된 것까지.

오늘도 그는 누군가를 집까지 데려온 모양이다. 주변 스텝들은 모두 지훈이 바람을 피워서 희나와 헤어지게 되었다고 알고 있기 때문에 지훈이 그럴 때마다 희나의 눈치를 보곤 했다.

그들이 아는 게 아주 틀린 사실은 아니었지만 지훈이 그러는 게 희나는 전혀 불쾌하거나 싫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그저 마음 한구석으로 죄책감과 작은 불안감, 안타까움이 느껴질 뿐이었다. 자의식 과잉일지 모르지만 지훈이 그렇게 된 데에 자신의 책임이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인기가 많은 데다 아직 나이도 어리고 혈기왕성할 때니 상관없지만, 계속 저러다 진짜 한번 된통 당할 거 같은데. 언제까지 저러려나 몰라.”

“어련히 알아서 잘하려구요. 자기 처신은 칼같이 하는 애잖아요.”

“넌 정말 속도 좋다. 나는 전 남친이 저러고 다니는 꼴 바로 옆에서 두고 본다는 상상만 해도 피꺼솟인데. 아무리 돈이 좋다 해도……. 너 정도면 다른 데로 이직해도 오라는 데 많을걸.”

“어허, 어허. 큰일 날 소리-.”

혼자 마구 수다를 떨던 주영은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허스키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하마터면 들고 있던 고데기를 떨어트릴 뻔했다. 희나는 웃으며 어느 결에 왔는지 거울에 비친 지훈에게 말을 던졌다.

“새벽까지 마셨다더니 일찍 일어났네?”

“어. 귀가 근질근질해서 일어났더니 예상대로 주영 누나가 내 뒷담화하고 있었구만?”

“내가 틀린 말 했나. 사장님 걱정 좀 한 거지, 뭐.”

“농담이라도 하지 마요. 우리 희나 이직하면 나 장사 접을 거야~.”

문가에 서 있던 지훈이 장난스럽게 말하면서 두 사람 옆으로 다가왔다. 직원들 대다수가 지훈보다 나이가 많았기에 사장임에도 대부분 격의 없는 태도를 취했고 지훈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임으로써 실력 있는 스태프를 많이 모을 수 있었다. 물론 일에 관련된 부분에서는 칼 같았기에 쇼핑몰의 운영에는 지장이 없었다.

“야, 오랜만에 보니까 더 이쁘네. 힐링된다.”

“오랜만은 무슨. 저번 주에도 봤잖아.”

“떨어져 있기엔 너무 긴 시간이야. 희나 빨리 졸업하고 서울 와.”

“와도 너랑 같이 안 살아, 바보야.”

날름 다가와서 풀 세팅을 마친 희나를 뜯어보고 덥석 끌어안으며 지훈은 너스레를 떨었다.

헤어지기 전이나 후나 그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희나를 외쳐대면서도 수도 없이 여자를 갈아타는 지훈과 그런 전 애인 옆에서도 태연하기만 한 희나를 주변에서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희나는 달라붙는 지훈을 억지로 밀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에 준비 끝났어?”

“어. 번호 붙여놨으니까 갈아입고 나오기만 하면 돼.”

희나가 바로 옆에 붙은 간이 탈의실로 들어가자 행거에 피팅해야 할 옷들이 순서대로 걸려 있었다. 옷을 갈아입는 동안에도 지훈은 분장실에 앉아서 희나에게 말을 걸었다.

“학교는 좀 다닐 만한 거야? 힘든 건 없어?”

“이미 1년이나 다녔는데 새삼스럽게.”

“서울에서 진학하면 좋았을걸.”

“머리 나빠서 안 되는 거 알잖아.”

“일주일 내내 학교에 있으면서 뭐가 그리 일이 많아? 주말까지 일찍 내려가야 되고…….”

“이번 주만 그런 거잖아.”

투덜거리는 지훈에게 달래듯 말을 하고 희나는 옷을 갈아입은 채 밖으로 나왔다.

“무슨 일인데?”

“이미 전화로 얘기했잖아. 동아리에 볼일이 있다고.”

대충 대답한 희나가 시선을 피한 채 스튜디오로 나가려고 하는데 지훈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정말이야? 동아리에 무슨 볼일인데?”

물어보는 지훈의 눈매가 날카로웠다. 방금 전까지 실실 웃고 있었는데 눈이 웃고 있지 않았다. 뭐가 이상하게 보였는지 모르지만, 유달리 좋은 지훈의 촉에 뭔가 거슬린 모양이다. 긴장한 희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축제…….”

“축제?”

“축제 때 동아리에서 주점하기로 했는데…… 작년에도 아무것도 안 했으니 올해는 좀 도와줘야 돼.”

그리고 금요일 술자리에서 애들이 떠들던 것을 간신히 떠올려내어 대답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움츠러든다.

지훈은 눈썹을 살짝 치켜 올렸다.

“축제? 니가?”

“어이, 사장님. 왜 그리 꼬치꼬치 캐물어? 희나가 뭐 거짓말하는 애도 아니고 3년간 지각 한 번 한 적 없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보였는지 주영이 웃으면서 지훈을 툭 쳤다. 그제야 지훈이 머쓱한 듯 희나의 팔을 놓아 주며 말했다.

“그냥 어제 좀 꿈자리가 사나워서. 왠지 이상하단 말이야.”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 동아리 축제 준비한다는데. 질투하냐?”

“그런가?”

지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픽 웃었다. 희나는 입을 비죽거리고 지훈의 앞을 빠져나왔다. 지훈과도 진혁과도 아무 사이도 아닌데 다시 만났단 사실을 왜 감추는 건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자, 자. 촬영 시작합니다. 희나야, 그쪽으로 서. 테스트 샷 몇 장 찍게.”

멍청히 서 있던 희나는 부르는 소리에 황급히 스크린 앞으로 가서 섰다. 그리고 곧 촬영이 시작되어 희나는 촬영에 집중하려 했다. 지훈은 스튜디오 한구석에 선 채 촬영에 몰입한 희나를 주욱 지켜보았다. 평소와 다르게 그늘진 표정으로.

***

‘빨리…… 빨리 좀 가라…….’

희나는 초조하게 시계를 보면서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4시 20분. 희나는 정체에 휩싸인 고속도로의 버스 안에서 오도 가도 못 하고 있었다.

혹시나 이런 일이 있을까 봐 안전을 위해 한 시에는 출발하고 싶었지만 새벽같이 일어나서 협조해주는 스태프들을 두고 도중에 내팽개치고 올 수는 없었다.

모두들 빨리 끝내주려고 노력했으나 촬영에는 변수가 있기 마련이라 지연되고 지연된 끝에 간신히 세 시 고속버스에 올라탈 수 있었다.

희나는 이런다고 빨리 가는 것도 아니건만 등받이에 등을 기대지도 못하고 앞좌석 등받이에 매달린 채 하염없이 막히는 차들의 뒤꽁무니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이제 8km 정도만 가면 터미널이다. 아주 넉넉잡고 20분쯤 걸린다고 쳐도 터미널에서부터 택시를 잡아타면 어떻게든 5시에 맞출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터미널에 도착한 것은 네 시 55분이었다. 그래도 희나는 희망을 놓지 않고 미친 듯이 달려서 택시를 잡으려는 일행들보다 앞 도로까지 뛰어가 얌체처럼 택시를 잡았다.

혀를 차는 어르신들에게 마음속으로 사죄를 하며 택시 기사 아저씨에게 대학교의 이름을 말했다. 서두르는 희나의 기색을 눈치챘는지 기사 아저씨는 최대한 빨리 가주겠노라고 장담하며 운전대를 꺾었다.

그런데 맙소사.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말 그대로 장날이었다. 하필 터미널 옆에서 5일장이 열리고 있어 늘 원활한 구간이 턱 막히는 것이다. 아무리 빨리 달리려 해도 차들에 막혀 있는 바에는 답이 없다.

“아저씨, 그냥 여기서 내려주세요.”

결국 희나는 대학교가 저 멀리 보이는 지점에서 포기하고 내려서 달리기 시작했다. 원래 운동이랑 친하지도 않은 데다가 만일을 위해 차려입은 스키니 진과 구두는 불편하기만 했다. 그러나 희나는 턱이 차오를 때까지 달렸다.

이러다 쓰러지겠다, 싶을 때까지 달려 간신히 오솔길과 버스 정류장이 지척에 보이는 지점까지 왔을 때에야 걸음을 느슨히 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시계를 보니 5시 27분. 30분 가까이나 늦었다.

기회를 놓친 걸까? 이제 어쩌지?

절망한 희나가 손톱을 물어뜯으려는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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