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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그 너머에는-71화 (71/140)

71화. 썰 (2)

‘와서 숨어 있으라니 무슨 의미지?’

희나는 잠시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으나 도저히 결론이 나오질 않았다. 결국 일요일 다섯 시에 오는 수밖에 없는 건가.

‘오늘이 금요일이니 내일모레인가. 주말에는 아르바이트를 하러 서울에 다녀와야 하는데, 맞출 수 있을까.’

잠시 고민하던 희나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이건, 고민할 여지가 없다. 맞출 수밖에 없다. 이 갑갑한 상황을 벗어날 수 있다면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시원스럽게 결정을 한 희나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전화를 걸자 몇 번 울리기도 전에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 지훈아. 이번 주 주말 아르바이트 말인데, 사정이 좀 생겨서…….”

진땀을 흘리며 희나는 대충 학교에 일이 있다는 식으로 둘러댔다. 눈치가 빠른 지훈이었지만, 쌓아둔 신뢰 덕분인지 그다지 의심하는 기색 없이 흔쾌히 다섯 시에 맞춰서 도착할 수 있도록 끝내주겠다고 말해주었다.

전화를 끊은 희나는 가만히 끊긴 휴대폰 액정을 내려다보았다.

진혁과 헤어지고 난 후 5년 동안 그녀는 지훈에게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었다. 많은 상처를 주고받았어도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왠지 선생님에 얽힌 일은 지훈에게 곧이곧대로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또다시 시작되는 건가.

씁쓸하게 지훈을 생각하던 희나는 곧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슬슬 해가 지기 시작한 버스 정류장을 떠났다.

기숙사로 돌아갈까 하다가 희나는 간만에 동아리방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일주일 동안 약국 출퇴근하느라 얼굴을 비추지 않았지만 지금은 왠지 술이 당겼다.

학생 회관에 들어가 복도를 지나쳐 희나의 발이 멈춘 곳은 「여행 동아리」라고 쓰인 문 앞이었다. 여행에 흥미 같은 건 딱히 없는 희나가 굳이 여행 동아리에 가입한 것은 오래전 진혁과 진혁의 친구들을 본 영향이 컸다. 그들의 유대감이 너무 부러웠기에 기대를 품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언니- 왔어요?”

희나가 문을 열자 앉아 있던 여학생 하나가 그녀를 반겼다. 같은 과 동기로 이름은 천보혜. 희나가 2년 늦게 입학했으므로 동기들이 대부분 희나보다 어렸다.

자기들끼리 뭔가 떠들썩하던 남학생들이 보혜의 말을 듣고 문 쪽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누나, 누나- 이거 봐. 도한이가 초코볼 10개 입에 넣으면 맥주 3천 쏜대. 지금 벌써 8개 넣었어!”

“야, 돼지새끼야-! 그만 넣고 처뱉어! 돈 없어!”

“이 새끼 방해 못 하게 붙잡아-. 야, 공간 없으면 콧구멍으로 밀어 올려-! 참아!”

평소처럼 쓸데없는 내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음…… 이 정도면 나름 비슷한가. 기대했던 거보다 상당히 덜 어른스럽지만.

희나는 킥킥 웃으며 옆에 앉아서 초코볼을 넣고 있는 동아리 멤버들을 쳐다보았다. 5년 전과 다르게 이제는 희나의 주위에도 사람이 상당히 많다.

“우와! 진짜 10개 넣었어! 됐다-! 맥주, 맥주!”

“아, 시발-! 이거 절대 안 들어간다고 사기 친 놈 누구야?”

“사기를 치긴 누가 쳐-. 니 혼자 안 된다고 깝친 거지! 됐고, 쏘기나 해-! 주포 가자, 주포!”

남학생 둘이 떠들썩하게 소리치며 일어나자 여학생들도 따라 일어나기 시작했다.

오늘 술자리는 나까지 다섯 명인가. 평소보다 단출한 인원이지만, 동아리 술꾼들은 다 모였다.

먼저 일어난 보혜가 가만히 앉아 있는 희나를 툭툭 치며 말했다.

“언니, 안 가요? 같이 마시러 가요.”

“어, 그래. 나도 가고 싶네.”

나가기 위해 희나가 방금 내려놓았던 가방을 집어 드는데 안에서 비닐봉지가 비어져 나왔다. 가방이 잘 잠기지 않았던 모양이라 추스르려 내려놓자 옆에서 쳐다보던 보혜가 눈을 반짝 빛내더니 물었다.

“어? 언니, 이 약국 갔다 왔어요?”

“어, 좀 몸이 허한 거 같아서.”

보혜가 약국 얘기를 꺼내자 괜히 당황한 희나가 봉지를 황급히 밀어 넣었다. 교내에 매점도 있는데 피로 회복제랑 비타민 C를 사러 약국까지 갔다는 사실이 좀 이상해 보일까 봐서였다. 그러나 보혜의 관심사는 약이 아닌 듯했다.

“와- 거기 갔으면 봤어요?”

“뭘 봐?”

“거기 약사 오빠요.”

약사 얘기까지 흘러가자 더욱 당황한 희나는 짐짓 말을 돌렸다.

“어떤 오빠?”

“키 크고 안경 쓴 잘생긴 오빠요. 얼굴 하얗고.”

“야, 수다는 술집 가서 떨어, 가서-!”

“아, 알았다고!”

도한의 재촉에 보혜는 말을 하다 말고 생글생글 웃으면서 걸어가 버렸다. 희나는 살짝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서 있다가 황급히 그 뒤를 따랐다. 대체 이 동네 사람들은 왜 말을 하다 말고 자꾸 가는 거냐, 하고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학교 바로 앞에 위치한 주포마을이란 조그마한 술집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희나와 동아리 멤버들은 이른 저녁부터 술잔을 높이 들어 올리며 불금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희나의 마음은 아까 꺼내다 만 진혁에 관련된 화제에 집중되어 있었다. 다시 그 이야기가 나오지 않으려나, 하고 은근히 기대하고 있는데 마침 술을 한 잔 쭈욱 시원하게 들이켠 보혜가 다시 그 이야기를 꺼냈다.

“언니, 약국 가서 뭐 샀어요? 이잉- 언니 아픈 줄 알았으면 내가 대신 다녀오는 건데.”

“너 아직도 약국 오빠 타령이냐? 꿈 깨라니까.”

보혜가 몸을 배배 꼬며 아쉬워하자 옆에 앉아 있던 도한이 핀잔을 준다. 희나는 둘 다 약국에 대해 저보다 더 많이 알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왔다. 희나는 무심함을 가장하며 슬쩍 물었다.

“오빠? 그 안경 쓴 사람 말하는 거야? 그 사람이 약사야?”

“네. 약사 오빠 진짜 잘생겼죠?”

나름 이 근방의 유명인인지 약사 이야기가 나오자 보혜 말고 옆에 앉아 있던 다른 동아리 여학생도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그녀의 이름은 신은영으로 희나네 학과 동기 중에 유일하게 희나와 동갑인 여학생이었다.

“완전 대박 훈남 훈남-. 이런 시골구석에서 발견할 줄이야아아아. 내 이상형이야! 목소리도 짱 좋고!”

“이 동네에서 젤 잘생긴 거 같아요. 완전 조용조용한 게 귀엽지 않아요?”

“아, 그 형님 딴 데로 좀 안 가나. 여긴 내 구역인데.”

“그 오빠 가셔도 니 구역은 아니지.”

여학생들의 호들갑에 도한은 입을 비죽 내밀며 못마땅한 기색을 보였다. 아침에 나온 남자는 아저씨 스타일로 스무 살 정도의 여학생들이 좋아할 스타일이 전혀 아니니 진혁 이야기인 게 틀림없었다.

학부 당시에 약학 전공은 분명히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약사가 되어 있다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 약국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거야?”

“약국 자체는 우리 입학 때부터 계속 있었는데 주인이 그 오빠로 바뀐 건 올해 초인가 그럴걸? 그때 약국 이름도 바꿨어.”

올해 초. 이제 겨우 5월이니 얼마 되지 않았다. 1년간 바로 앞에 두고 몰랐던 건 아니구나. 그러고 보니 약국 자체는 낡았는데 간판만 새 거였지.

“그럼 여기 있은 지 몇 달 안 된 거구나…….”

희나가 조용히 입 안으로 중얼거리자 보혜가 몸을 불쑥 내밀면서 묻는다.

“왜요, 언니? 그 오빠한테 관심 있어요? 그럼 안 되는데. 상대가 안 되잖아. 안 돼, 안 돼-!”

“너 설마 희나 누나 아니면 그 형님이 너 좋아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야, 꿈 깨, 천보혜-.”

“되지 말라는 법 있어? 너네 같은 애들만 보다가 그 오빠 한번 보면 얼마나 상쾌한지-. 우리 낙이야-.”

보혜와 은영은 손을 맞붙잡고 혀를 내밀며 남자애들을 놀렸다. 여자애들이 진혁을 두고 꺄악꺄악, 하는 걸 보니 옛날 그의 교생 시절이 생각나 희나는 웃음이 나왔다. 그 바보 아저씨는 참 어린애들한테 인기도 많네.

“여전하네, 선생님.”

“선생님? 약사 오빠?”

“히히, 언니 선생님이라고 불러요? 난 그 오빠한테 선생님이란 말이 왠지 안 나오던데-.”

희나가 웃으면서 중얼거린 말을 듣고 은영과 보혜가 냅다 물었다. 희나는 고개를 저으며 맥주잔을 집어 들고 말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 사람 나 고등학교 때 교생이었어.”

“교생이요?”

“응. 고2 때 화학 교생으로 왔었거든. 선생님이라는 말이 입에서 안 떨어지네.”

그러자 보혜와 은영이 다시 불타올랐다.

“약사 오빠가 교생? 와. 나 고등학교 때 그런 교생 왔으면 진짜 공부할 맛 났을 텐데.”

“그러니까요. 확실한 거예요? 오, 나 조금 두근거렸어. 학교에서 완전 인기 많았겠네요.”

“근데 교생 하면 사범대 다닌 거 아니에요? 왜 여기 와서 약사를 하고 있지?”

“사범대는 아니고 화학과에서 교직 이수하고 있었던 걸로 알아.”

말해놓고 희나는 좀 움찔했다. 5년 전에 달랑 한 달 실습하고 간 사람에 대해서 너무 자세히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일 듯싶어서였다.

거기에 교직 이수란 단어가 입에서 껄끄러운 탓도 있었다. 진혁이 교직 이수를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모든 걸 포기한 그녀였으니까.

그런데 여기에서 약사가 되어 있다니. 대체 그때 함께 포기한 것들은 어떻게 된 거냔 말이야.

희나는 씁쓸함에 맥주를 들이켰다. 옆에 앉아서 손가락을 꼽으며 뭔가를 계산하고 있던 은영이 말했다.

“근데 우리 언니도 사범대생이라 아는데, 교생 실습은 4학년 때 나가는 거 아니야? 교생까지 하고 그 담에 약전 간 거면 지금 나이가 대체 몇 살인 거야?”

“그러게요? 약전이 몇 년제지? 아무리 봐도 스물네다섯 살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데.”

“그 사람 아저씨야. 지금 서른 살일걸.”

“뭐? 진짜?”

“에에에에에에에엑!?”

화제에 그다지 흥미 없어 하던 남자애들까지 덩달아 놀라는 것을 보고 희나는 픽 웃었다. 자기만 오래 알아와서 진혁이 전혀 변하지 않았다고 느꼈나 싶었는데, 역시 객관적으로 봐도 그렇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히잉……. 서른이라니, 완전 놀랐어. 하긴 약사인데, 나이가 많긴 하겠구나.”

“그러고 보니 그 오빠 약국에 들락거리는 아저씨들이랑 말 트고 지내던데. 친한 형인가 했더니 친구들이었나 봐~. 이럴 수가. 힝.”

“에잇, 뭐 어때요! 열 살 정도야. 우리 부모님도 띠 동갑이야. 극복할 수 있어욧!”

“뭘 니 맘대로 극복하고 말고야. 거기다 그 형님 애도 있잖아.”

“꿈 깨고 술이나 마셔, 바보야.”

다시 술을 마셔대기 시작해서 진혁에 대한 화제는 거기까지가 끝이었다. 다른 아이들도 딱히 자신이 알고 있는 거보다 더 많이 아는 것 같지 않았기에 희나도 포기하고 다른 화제에 동참했다.

부어라 마셔라 하며 불금의 밤은 무르익어 갔고, 밤이 너무 늦기 전에 희나는 완전히 꽐라가 되어버린 아이들을 두고 먼저 슬그머니 술집을 빠져나왔다. 내일의 아르바이트를 위해서였다. 과음해서 얼굴이 부으면 지훈이 화를 낼 게 뻔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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