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단, 그 너머에는-70화 (70/140)

70화. 썰 (1)

“3700원이에요.”

희나는 어색하게 돈을 지불하고 약봉지를 받아 들었다. 그러면서 카운터 너머에 서 있는 남자를 흘깃 쳐다보자 그가 눈을 반짝 빛낸다.

그 남자는 진혁이 아니었다. 서른이 좀 넘어 보이는 순박한 인상의 낯선 남자는 시골에서 보기 드문 미녀인 희나를 보고 헤벌쭉 웃었다.

‘하아, 역시 선생님은 없는 건가?’

진혁을 우연히 만나고 벌써 일주일째. 약국에 올 때마다 진혁 대신 이 사람이 나와 서 있었다.

처음에는 일이 있어서 다른 사람이 나오는가 보다 싶어 묻지 않고 얌전히 물러났다. 바로 앞이니까 또 오면 되지- 하는 가벼운 기분으로.

너무 집착하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아 잠잠히 기다려볼 생각이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헛걸음하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진혁이 이 약국에서 일하는 게 맞는지 아닌지 정도는 확인해야 할 때가 된 거다.

희나는 약을 받아 들고도 나가지 않고 머뭇거리다가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혹시 여기 약사이신 건가요?”

“아니요. 저는 약사는 아닌데…… 이런 일반 약들은 약사 아니어도 팔아도 되거든요.”

역시 여기 약사는 아니구나. 약사에 어울리는 외모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남자의 행색을 볼 때 과수원에서 일하는 일꾼 같아 보였다. 희나는 떠보듯이 물었다.

“그럼 약사분은 안 계세요?”

“아, 그게 약사는 잠깐 안에 일이 바빠서요. 뭔가 용무라도 있으신가요?”

“그게…… 좀 할 말이 있어서…….”

“얘기는 다음에 하셔야 될 거 같은데요. 혹시 처방전이나 그런 거 가져오시면 나오실 거예요.”

“저기, 여기 약사 선생님이 혹시…….”

희나가 약사에 대해서 자세히 물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가게 전화벨이 울려 말이 끊겼다. 구식 전화기의 벨소리는 째지는 듯 요란했다. 남자는 양해를 구하듯 손짓을 하더니 전화를 받았다.

“어, 어- 왜? 맞는데? 아, 알았어. 재촉 그만해.”

남자는 귀찮다는 듯이 대답하더니 전화를 휙 끊었다. 그리고 머리를 긁적이다가 희나에게 굽신거리며 말했다.

“저 좀 들어가 봐야겠는데…… 안에서 불러서……. 살 거 다 사신 거죠?”

“……네.”

희나는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카운터 안쪽에 있는 CCTV를 잠시 주시하며 똑바로 노려보고는 등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그녀가 처음 이 약국에 왔을 때도 텅 비어 있었고 별로 큰 소리를 내지 않았는데 얼마 안 돼서 바로 그가 나왔었다. 아무래도 그다지 손님이 많은 약국은 아니어서인지 과수원에서 약국 내부를 볼 수 있게 설비를 해놓고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았다.

시골 동네 약국 주제에 거창도 하지. 하지만 그 설비를 유용하게 이용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진혁은 희나가 오면 대놓고 피하는 것 같았다. 어차피 딱히 아파서 오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을 테니까.

번호를 남겨두고 왔지만 전화가 올 기미는 없었다. 책상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성격이니 보지 못했을 리도 없는데.

‘이런다고 내가 포기할 줄 아나. 사람 잘못 보셨어, 바보 아저씨.’

희나는 이를 득득 갈면서 약국 문을 밀고 나왔다. 아무래도 그냥 점잖게 약국에 찾아오는 걸로는 성과가 없을 모양이라 다른 대책을 강구해야 할 것 같았다.

굳이 밀어붙이자면 사실 그냥 바로 뒤편에 있는 집으로 찾아가서 벨을 누르거나 하루 종일 이 근처에서 기다리면 만날 수는 있을 거다. 하지만 희나는 진혁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피하는 이유가 마음 쓰였다.

만약 결혼해서 가정이 있어서 그러는 거라면…… 집으로 무작정 찾아가는 건 별로 현명한 행동이 아니었다. 그렇게 되면 이쪽 기분을 밀어붙일 수 없게 된다.

고심에 휩싸인 채 걷던 희나는 초점 없는 시선으로 앞을 보다가 흠칫 놀랐다. 상가들 사이에 나 있는 진혁의 과수원으로 가는 오솔길, 그 입구에 그 아이가 서 있었다.

진혁을 아빠라고 불렀던 그 아이다. 그때 봤을 때는 머리카락도 짧고 바지를 입고 있어서 분간이 가지 않았는데, 오늘은 원피스를 입고 얼마 안 되는 머리카락에 앙증맞게 리본도 달고 있어서 여자아이라는 걸 확연히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작은 몸을 지탱하기도 버거워 보이는 앙상한 팔다리, 그리고 기묘할 정도로 창백한 안색이 주는 섬뜩한 분위기는 여전했다. 진혁과 함께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면 유령이라고 생각했을 법한 모습이다.

아직 해가 지기 전이고 주변에는 지나가는 사람도 많았기에 희나는 움츠러들지 않고 아이를 쳐다보았다.

계속 보다 보니 자그마한 얼굴에 유난히 큰 눈은 창백한 안색과 아이답지 않게 홀쭉한 볼을 제외하면 예쁘장하게 보일 법도 했다.

아이는 뭐가 재미있는지 그 커다란 눈동자로 희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희나는 아이를 마주 쳐다보았다. 딱히 다가오는 건 아니지만 눈이 마주쳐도 도망칠 기미는 없다.

잠시 아이와 마주 보고 있던 희나의 머릿속에 문득 아이에게 뭔가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저렇게 작아도 제법 말문이 트여 있던 아이였다. 조금 비겁한 방법이지만 이미 답답해 죽을 지경이니 별 도리 없었다.

아이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손짓을 하자 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희나는 빠른 걸음으로 약국 근처에 있는 편의점으로 가서 간식거리를 잔뜩 집어 담았다. 과자, 사탕, 초콜릿, 아무거나 대강 쓸어 담은 뒤 계산을 하고 나와서 황급히 돌아보니 아이는 다행히 아직 있었다.

희나는 천천히 걸어서 약국 바로 앞에 있는 버스 정류장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아이를 돌아보며 가볍게 손짓해 불렀다.

“잠깐 이리 와 봐.”

아이를 대해본 일이 전무한지라 말투는 어색하고 딱딱했다. 그렇지만 다행히 아이는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시골 아이인 데다 아빠와 함께 있는 것을 봐서 경계심이 조금 누그러든 모양이었다.

“먹을래?”

“아빠가 모르는 사람이 주는 거 먹으면 안 된댔어.”

“음, 니 아빠라면 맨날 그런 잔소리 많이 할 법하지. 원래 먹으면 안 되는데 난 모르는 사람 아니잖아. 그리고 어차피 저기서 방금 산 건데 뭐.”

말해놓고 나니 애한테 이런 식으로 말해도 되는 건가 좀 의문스러웠다. 희나는 더 말을 하는 대신 과자를 하나 뜯어서 먹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이가 뜯긴 과자 봉지를 가만히 쳐다보더니 초콜릿을 집어 들었다.

“여기 잠깐 앉아봐.”

아이는 자기 얼굴만 한 초콜릿을 들고 순순히 옆에 앉았다. 희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아이에게 질문을 시작했다.

“너 이름이 뭐야?”

“유미래.”

아이의 성이 유 씨라는 것에 조금 움찔했지만 희나는 질문을 계속 이어 갔다.

“미래? 지금 몇 살인데?”

“여섯 살.”

여섯 살? 이렇게 작은데 여섯 살이라고?

시선을 돌려 희나는 아이의 작은 체구를 쳐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여섯 살로는 보이지 않는다.

“진짜 여섯 살이야? 유치원 다녀?”

“유치원 낮에만 가. 여섯 살이야.”

말하면서 아이가 작은 손가락을 여섯 개 펴서 내보인다. 손가락 개수도 맞다. 혀는 아직 짧아도 말이 제법 유창한 걸로 보아 사실인 것 같았다.

여섯 살인데 이렇게 작고 마르다니, 역시 몸 어딘가가 안 좋은 걸까?

그런 생각이 드는 한편 마음속에 작은 안도감이 들어 굳었던 희나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여섯 살이면 그의 아이일 가능성이 거의 없다. 숨겨둔 자식이 있었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으니까.

근데 그럼 왜 이 애는 진혁을 아빠라고 부르는 걸까? 아니, 그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가 있다.

“너, 엄마는? 엄마는 어디 있어?”

질문이 핵심으로 들어가자 희나의 심장이 두근두근 떨렸다. 진혁을 아빠라고 부르니 엄마는 아마도 진혁의 부인일 거다.

긴장한 눈빛으로 대답을 기다리는데, 아이가 고개를 저었다.

“엄마 얘기 하면 아빠가 싫어해.”

“왜 싫어해? 아빠한테 네가 말했다고 안 하고 비밀로 할게. 말해줘.”

희나가 조르자 아이의 커다란 눈에 갈등의 빛이 떠올랐다. 조금 망설이다가 아이가 조그만 손가락을 까딱까딱 흔들었다. 가까이 오란 것임을 눈치채고 희나가 귀를 가져다 대자 아이가 한 손으로 과수원을 가리키며 느릿느릿 속삭였다.

“엄마는 죽었어. 저기서.”

천진한 아이의 목소리가 죽음을 말하자 섬뜩했다.

희나는 살짝 굳은 표정으로 아이를 쳐다보았다. 아이는 아직 죽음의 의미를 잘 모르는지 겁먹은 희나가 재미있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저기서 죽다니, 대체 무슨 의미지? 사별했다는 건가?

“너 혹시 엄마 이름이 뭔지 알…….”

“미래야! 너 모르는 사람이랑 얘기하다 아빠한테 들키면 혼나!”

희나가 질문을 하고 있는데 뒤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아까의 남자가 약국 문을 열고 고개를 내민 채 미래에게 손짓을 하고 있었다.

아직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아이는 붙잡을 새도 없이 벌떡 일어나더니 도도도 달려가 버렸다.

망연하게 문 안쪽으로 사라지는 아이를 쳐다보던 그녀는 질책하는 듯한 남자의 시선과 마주쳤다. 찔끔해서 고개를 숙이는데 남자가 이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애한테 이러시면 곤란해요.”

부모 허락도 없이 아이에게 접근한 게 사실이니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희나는 고개를 조아리며 솔직하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저 이상한 사람은 절대 아니구요……. 그냥…….”

“진혁이 만나러 오시는 거죠? 서울에서 알던 사이예요?”

남자의 입에서 진혁의 이름이 나오자 희나의 눈이 번쩍 뜨였다. 희나는 그에게서 뭔가 들을 수 있을까 싶어 황급히 대답했다.

“네, 저 주희나라고 합니다. 서울에서 선생님이랑 알던 사이인데요.”

그는 흐음, 하는 소리를 내며 잠시 희나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희나가 앉은 벤치 옆에 털썩 주저앉더니 혀를 차며 말했다.

“미친놈이 대체 왜 이런 아가씨를 안 보겠다고 똥고집인지, 참.”

“선생님이 저 보고 싶지 않다고 하던가요?”

남자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긍정의 의미일 테니 아까 그녀가 했던 추측은 대강 맞아 떨어지는 모양이다. 희나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지는데 남자가 다시 고개를 내밀고 쳐다보더니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진짜 이쁘네요. 혹시 모델이에요?”

“아뇨, 그냥 학생인데요…….”

“학생이면 일요일에, 한 다섯 시쯤에 시간 있어요?”

희나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예쁘다고 칭찬하더니 시간 있냐고 물어? 데이트 신청이라도 하려는 건가?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한 그녀가 뭐라 말을 쉽사리 꺼내지 못하고 있는데 남자의 말이 이어졌다.

“아가씨가 진짜 이쁘니까 내가 하는 얘긴데, 이렇게 계속 와도 못 만날 거예요. 근데 난 저놈에 대해선 아무 말 못 해요. 그렇게 약속했으니까. 저놈 화 절대 안 내는데 한번 화나면 진짜 무섭거든요.”

“그런가요…….”

“그러니까 일요일 다섯 시쯤에 이 근처에 와서 숨어 있어요. 그러면 뭐 아가씨가 알고 싶은 건 대충 알 거예요.”

“다섯 시에요? 뭐 하는데요?”

“정말 서울에서 알던 사이면 보면 알 거예요. 그럼 난 들키기 전에 이만.”

그렇게만 말하고 남자는 일어나더니 약국으로 들어가 버렸다. 자신이 말한 걸 들키기라도 할까 봐 불안한지 서두르는 모양새여서 붙잡을 수가 없었다.

희나는 망연하게 잠시 벤치에 앉은 채 머릿속에 가득한 물음표와 싸워야 했다.

오기 전보다 정보의 양은 좀 늘었는데 어째 의아한 구석은 더 많아졌다.

진혁을 아빠라 부르는 여섯 살짜리 아이, 과수원에서 죽은 엄마, 그리고 의문의 일요일 다섯 시.

‘와서 숨어 있으라니 무슨 의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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