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Wake up
“으음…….”
작은 신음 소리를 내며 희나의 얼굴이 조금 움직였다. 예쁜 이마를 찌푸리나 싶더니, 곧 긴 속눈썹 아래에 덮여 있던 커다란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주 긴 꿈을 지나서 잠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꿈속인지 현실인지 잘 분간이 되지 않아 희나는 멍한 눈으로 전등이 달린 낯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불이 꺼져 있었지만 방 안이 환한 것으로 보아 아직 낮인 모양이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네모난 방 안에 깔려 있는 푹신한 이부자리 속이다. 왼쪽에 유리로 된 미닫이문이 있고 그 건너로 나무로 된 마루와 흐릿하게 바깥이 보이는 걸로 보아 시골집의 거실 같은 분위기였다.
잠시 자신이 왜 이런 곳에 있는지 머리를 굴리던 희나는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장면을 떠올리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선생님!”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분명히 쓰러지기 전에 진혁을 보았다.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얼마나 만나고 싶었는데…….’
5년 전 진혁에게서 떠난 뒤 몇 달간은 지금까지도 떠올리기 싫을 정도로 괴로운 시간이었다.
어떻게 해도 진혁의 괴로운 눈동자의 기억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그의 체온, 목소리, 단단한 몸과 다정한 얼굴 모든 것이 사무칠 정도로 그리웠다. 둘이 나누었던 별 의미 없는 대화 하나하나를 되새길 때마다 살이 에이는 것 같은 안타까움이 온몸을 파고들었다.
눈을 뜨면 울었고 누워도 좀처럼 잠이 들지 못했다. 무언가를 먹으면 곧 토해버려 그렇지 않아도 호리호리하던 몸이 위험할 정도로 살이 빠졌다.
결국 희나는 3개월도 지나지 않아 자신이 했던 결정을 뼈저리게 후회하며 다 쓰러져가는 몰골로 진혁의 집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거기서 나온 것은 진혁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
얼마 안 되는 연결 고리가 끊긴 것을 깨닫자,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만나러 갈 수 있다고 생각하며 지탱했던 마음의 보루가 무너졌다.
정말 다시는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런 것을 깨달은 후부터 절박한 헤맴이 시작되었다. 아무 보장도 없이 진혁의 학교 교문 앞에 서서 하루 종일 기다리고, 그의 학과 사무실에 문의까지 했다. 그러나 알게 된 것은 진혁이 조기 졸업을 해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학교에 오지 않을 거란 사실 뿐이었다.
당황해서 수진에게 전화해 진혁의 행방을 물었지만 그녀는 냉정하게 희나를 무시했다. 갖은 냉대와 함께 진혁이 고향으로 내려갔다는 말을 한 게 다였다.
그를 찾기 위해 고심하던 희나는 결국 지훈에게 진혜의 전화번호를 묻기까지 했다.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한 다짐을 깨는 꼴이었지만, 정말 희나가 심하게 위태로워 보였는지 지훈도 진혜의 전화번호를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결국 희나가 진혁을 찾기 위해 할 수 있었던 것은 거기까지였다.
망연자실해진 희나는 그때부터 눈물에 젖은 채 그가 다시 자신을 찾아 돌아와 주길 기다렸다.
가지 말라고 말해줬는데, 그렇게 슬퍼했는데 다시 연락해 오지 않을까. 혹시 술이라도 마시고 전화라도 걸어주지 않을까. 그런 실낱같은 기대를 하며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실수로라도 걸어온 전화를 받지 못할까 봐 수업 시간이나 화장실에 갈 때조차 희나는 휴대폰을 몸에서 떼어놓지 않았다. 그가 더 이상 서울에 있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혹시 무의식중에 스쳐 지나갈까 봐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꼼꼼히 살피는 것은 이제 거의 습관이 되어 있었다.
그랬던 절박함과 기다림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희박해져, 1년여가 지났을 무렵에는 기대조차도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희나는 진혁이 교생 실습이 끝나던 날 어긋남이 있었을 때도 단 한 번도 연락을 해 오지 않았다는 걸 되새겼다. 그는 돌아보지 않는 사람인 것이다.
그것을 알면서 보내버렸다는 걸 깨달은 그녀는 아주 오랫동안 극심한 자기혐오와 후회에 몸부림쳐야 했다.
바보 같았어. 그렇게 돌아설 것이 아니라 설득해야 했는데. 2년만 기다려달라고, 어른이 되어서 만나자고 그렇게 말해야 했는데. 그랬다면 그 착하고 성실한 남자는 얼마든지 기다려줬을 텐데.
왜 그때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어렸기에, 미숙했기에, 그저 그에게서 얼른 떨어져야 한다는 당장의 상황에 사로잡혀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한 거다. 그런 어리석음 때문에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을지도 모르는 인연을 놓쳤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깜깜하고 절망스럽기만 했다.
그 후로 또다시 1년간 희나는 마음에 구멍이 뚫려 버린 사람처럼 붕 뜬 채 살았다.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고, 마음을 열고 친구도 만들었지만, 무엇을 해도 무미건조하고, 무엇을 해내어도 절절한 성취감이 없었다.
뭔가를 확실히 이루어 내고 싶다는 기분도 없고, 주유소에서 곁잠을 자며 푼돈을 벌던 생활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은 환경이 되었어도 그걸 즐길 기분도 없이 그저 공허했다.
아버지에게 학대당하던 시절이 그리워지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그녀였다. 비참하게 살았어도 그의 미소를 볼 수 있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이 약이라는 말처럼 첫사랑이 남긴 진한 상흔도 5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나면서 조금씩 아물어가는 듯했다.
이젠 그녀도 잠도 자고, 음식도 먹고, 평범하게 사람들과 얘기도 하고 웃기도 하며 지낼 수 있었다.
쳐다볼 수조차 없던 서울대나 낙성대역을 태연하게 걸을 수 있게 되고 밤에 우는 일도 없었다. 그에 대한 생각은 이제 가끔씩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욱신거리는 정도의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물론 여전히 닮은 사람을 보면 화들짝 놀라고, 진혁이라는 이름을 볼 때마다 가슴이 흠칫 내려앉는 것은 여전했지만. 그래도 어쨌든 그렇게 죽을 것 같았어도 살아지긴 살아지는구나, 라고 서서히 깨달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그를 본 것이다. 도저히 예상하지도 못한 곳에서.
기쁘고 행복해서 가슴이 쿵쿵 뛰었다. 고통스럽게만 느껴졌던 고열이 감사할 지경이었다.
‘이런 데 있으니까 못 찾았지. 어쩌다 이런 곳에 있는 걸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머리를 굴리다가 희나는 문득 자신이 쓰러졌던 약국 뒤편으로 널따란 과수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희나의 입이 깨달음으로 살짝 벌어졌다.
수진에게 물었을 때 그녀는 분명히 그가 고향으로 내려갔다고 했었다. 그리고 그의 부모님은 과수원을 하고 있었고.
희나는 너무나 허탈해서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작년에 입학해 벌써 2학년이다. 기숙사 생활을 했기에 줄곧 이 근처에 있었는데 바로 코앞에 두고 만나지 못했다니.
그러고 보면 1년간 약국 근처를 얼씬거린 적도 없었다.
희나는 어디가 아파도 나을 때까지 방치하는 자신의 성격이 통탄스러웠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1년을 허비한 셈이니.
‘그런데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던 거지? 여기서 과수 농사를 짓는 건가……?’
희나는 그가 흙이 살짝 묻은 작업복 같은 것을 입고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하지만 서울대를 조기 졸업한 재원이 이런 나이에 귀농이라니 좀 이상하다.
어쩌면 또 부모님 일을 돕기 위해 잠시 내려온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은 평일이고 방학도 아닌데.
‘역시 교사는 그만둔 걸까? 왜 약국에 있었던 거지?’
미간을 찌푸린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희나는 문득 인기척을 느꼈다.
진혁이라 생각하고 설레는 기분으로 반갑게 돌아보던 그녀의 입에서 히익- 하는 소리가 나왔다.
흠칫 놀란 희나는 한 팔로 가슴을 누른 채 조금 뒤로 물러났다.
거기에 있는 것은 어린아이였다.
나이는 한 3~4세 정도 됐을까. 머리카락이 귀를 덮어 남자아이인지 여자아이인지 잘 구분이 가지 않는다.
쌍꺼풀이 진 커다란 눈은 기묘할 정도로 크지만 몸의 다른 부분들은 기묘할 정도로 작다. 팔도 다리도 몸도 머리카락까지도 모두 너무나도 가늘어서 민들레 홀씨처럼 불어 날려버릴 수도 있을 것처럼 보였다.
거기에 어린아이 특유의 보드라운 생기가 전혀 없다. 얼굴에 핏기가 너무 없어서 마치 밀랍인형의 피부처럼 서늘한 느낌을 주었다.
희나는 쓰러지기 전에 이 아이를 카운터에서 보았음을 기억해냈다. 열에 들떠 유령을 본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사람을 보았던 모양이다.
아이에게는 유령이 아니라는 걸 알려주는 것이 하나 있었다. 온몸의 모든 활기가 한 곳에 모인 것처럼, 커다란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아이는 뭔가 재미있는 것을 발견하기라도 한 듯 살짝 입꼬리를 올린 채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산 사람이라는 걸 알아도, 아이가 웃고 있는데 귀엽다기보다 섬뜩했다. 희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 누구야?”
희나가 말을 걸자 아이는 잠시 입을 헤 벌렸다. 그러고는 말릴 새도 없이 벌떡 일어나더니 문 밖에 이어져 있는 나무 마루로 뛰어나가 커다란 소리로 외쳤다.
“아빠! 일어났어요!”
‘아빠? 아빠라고?’
곧 미닫이문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단정한 얼굴을 본 희나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거기에 그가 있었다. 그렇게 간절하게 찾아 헤매었던 그 남자가.
5년이나 지났는데, 그의 주변만 시간이 멈춰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하나도 변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흰 피부와 단정한 얼굴, 까만 뿔테 안경에 감싸인 부드러운 눈매.
작업복을 걸친 체격이 예전보다 좀 더 다부져진 것처럼 보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학생처럼 보이는 앳된 구석까지 모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마치 희나의 기억 속에서 걸어 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희나는 감격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보았다. 여전한 그를 보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기쁨인지, 반가움인지, 원망인지, 슬픔인지 구별이 가지 않을 정도로 혼란스런 감정들이 뒤섞여 가슴이 너무 벅찼다.
오랫동안 그를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만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 흐려진 기억에 희나는 혹시 만나도 알아보지 못하고 스쳐 지나가는 건 아닐지 혼자 걱정했었다. 그렇지만 그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녀의 기억 속의 모습처럼 오롯이 남아 있었다. 그것이 희나는 말할 수 없이 기뻤다.
그러나 그런 희나와 달리 진혁의 눈빛은 재회에 들뜬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일어난 희나를 잠시 쳐다보던 진혁이 선이 아름다운 입술을 열고 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이름, 말해봐.”
“……네?”
“이름 말해보라고.”
‘갑자기 웬 이름? 나를 잊어버린 걸까?’
당황했지만 희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이름을 말했다.
“저…… 희나…… 주희나예요.”
희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그의 표정에는 알아들었다든가 하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실신했었기 때문에 이상이 없나 확인하는 절차 같은 거였던 모양이었다. 그는 조용히 설명하듯 말했다.
“의사 선생님이 다녀가셨어. 열이 높은 데다 빈혈 때문에 실신한 것 같다고 열이 내리지 않으면 병원에 가 보라고 하시더군.”
“아, 네…….”
“주사를 놔주셨지만 아마 병원에 가보는 게 좋을 거야.”
딱딱하게 필요한 말만 하는 그를 희나는 얼떨떨해서 쳐다보았다. 다시 만나게 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지든 굉장한 임팩트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무슨 과자 뒷면에 적힌 원료 설명이라도 읽는 듯 너무나 차분하다.
희나는 기쁨으로 얼굴도 가득 상기되어 있는데 그는 동요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다시 만난 게 기쁘지 않은 걸까? 아니면 나를 정말 못 알아보는 걸까?
침묵이 흘러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하자 진혁의 허벅지를 팔로 감은 채 매달리듯 서 있던 아이가 바지를 잡아당기며 물었다.
“아빠, 아빠, 언니 아파? 병원 가야 돼?”
희나는 저 아이의 존재를 순간 잊고 있었던 걸 깨달았다. 반복해서 나오는 단어는 어떻게 들어도 오빠가 아닌 아빠였다.
아빠라니. 저 아이는 선생님의 아이인 건가? 결혼한 걸까?
충격을 받아 굳어버린 희나의 귀에 둘의 대화가 들려왔다.
“글쎄, 아마 괜찮을 거 같긴 한데.”
“이 언니 갑자기 쓰러져버렸어. 난 언니 죽는 줄 알았어.”
“깨어났으니 괜찮을 거야. 의사 선생님도 그러셨고.”
희나를 향해 말할 때와 다르게 다정한 어조였다. 그 익숙한 목소리를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희나는 눈물이 핑 돌 정도로 반가웠지만 그 목소리는 그녀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면, 괜찮으면, 나 이 언니랑 놀아도 돼?”
아이의 말에 희나가 내리뜨고 있던 눈을 들어 진혁을 올려보았다. 순간 눈이 마주쳤지만 그는 곧 다시 시선을 아이에게 돌렸다.
그리고 물음에 대한 대답 대신 몸을 굽혀 아이를 안아 들었다.
“옆에 있는 봉투에 있는 약 꺼내서 먹어. 걸을 수 없을 거 같으면 이 부근엔 택시가 별로 없으니까 콜택시를 부르면 될 거야.”
“…….”
“쉬다가 괜찮아지면 돌아가. 난 할 일이 있어서.”
어떻게 들어도 빨리 가주길 바라는 말투였다. 이러면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싫어도 깨달을 수밖에 없다.
얼마나 오랜만에 만난 건데 조금도 반갑지 않은 걸까?
희나는 말을 남기고 바로 나가 버리려 하는 진혁이 야속하면서도 다급해졌다. 이대로 또다시 놓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묻고 싶은 게 산더미처럼 많은데.
그에게 아이가 있다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지만 그래도, 그래도 뭔가 해야만 했다. 희나는 소리를 높여서 진혁을 불렀다.
“서, 선생님!”
진혁의 움직임이 잠시 멈췄다. 그러나 돌아보진 않는 그에게 희나가 빠르게 말했다.
“나…… 희나예요. 주희나. 기억 안 나요? 천호고등학교에…….”
“난 네 선생님이 아냐.”
그러나 진혁은 낮은 목소리로 희나의 말을 잘랐다. 그 단호한 말에 희나의 얼굴에 돌고 있던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하얗게 굳은 그녀의 얼굴 위로 사무적인 어조의 진혁의 말이 떨어졌다.
“약값은 괜찮으니까 먹고 남은 약은 가지고 돌아가. 문단속 신경 쓸 거 없으니 나갈 때 굳이 부르지 않아도 돼.”
그리고 진혁은 아이를 안고는 그대로 미닫이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희나는 정지 화면처럼 굳은 채 걸어 나가는 진혁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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