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당신의 모든 순간 (6)
곧장 미소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뀐다. 그 표정을 보니 굳은 결심 같은 건 그냥 사르르 녹아버린다. 도저히 말 못 할 거 같다. 그냥 이대로 안겨서 다 버리고 도망치고 싶은 그런 기분만 마구 몰려왔다.
그의 단단한 목덜미에 매달려서 소리 지르며 울어버리고 싶은 마음을 아주 간신히 억누르며 희나는 말없이 진혁을 지나쳐 집 안으로 들어섰다. 활기라고는 조금도 없는 그 걸음걸이에 진혁이 따라와 다시 걱정스런 말투로 물었다.
“왜 그러는 거야. 또 무슨 안 좋은 일 있는 거야?”
그러면서 손을 뻗어왔다. 희나는 얼굴을 만지려는 커다란 손을 저도 모르게 거칠게 뿌리쳤다. 순간 움찔한 진혁을 쳐다보지 못한 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을 뱉었다.
“할 말이 있어서 왔어요.”
“할 말? 무슨 말?”
“……우리 아무래도, 이러면 안 될 거 같아요.”
“안 되다니, 뭐가?”
진혁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되물었다. 희나는 얼굴이 뜨거워지는 느낌을 받으며 말을 이어 갔다.
“……학교 조사위원회에 가면 어떻게 되나 박 선생님한테 들었어요.”
“아…… 그 얘기 들은 거야? 걱정 말라니까…….”
“그렇게 쉽게 말할 얘기가…….”
희나의 말이 중간에 멈췄다. 진혁이 몸을 당겨서 꼭 안아왔기 때문이다.
넓은 품에 안겨 너무 좋아하는 진혁의 향기를 맡자 얼어붙은 듯 굳어 있던 손발이 녹기라도 하는 것 같다. 진혁이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교직 이수 못 해도 괜찮다니까. 최악의 경우라도 학교에서 제적당하지는 않을 거야.”
“선생님이 그런 일을 당하는 건 싫어요.”
그대로 품에 안기고 싶었지만 진혁이 받게 될 불이익이 언급되자 비로소 밀어낼 용기가 생겼다. 희나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을 억지로 움직여 진혁의 품에서 벗어났다.
안겨 있기를 좋아하는 희나가 진혁을 밀어내는 건 처음이었기에 그의 얼굴도 심각해졌다.
“나 때문에 그렇게 되는 거 보고 싶지 않아요. 혼자 생각해봤는데…….”
“희나야.”
진혁이 말을 잘랐다. 그는 희나의 어깨를 잡고 진지한 얼굴로 바라보며 말했다.
“나도 계속 생각했어. 정말 신중하게.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앞으로 얼마나 힘들어질지 다 생각했어.”
“…….”
“하지만 아무리 싫은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도 역시 나한테 제일 중요한 건 너야. 같이 있는 것 때문에 무슨 일이 생기게 된다면 난 다 감당할 거야.”
차분하게 이어지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파도처럼 가슴으로 밀려와 그녀의 심장을 때렸다. 머리를 들여다본 것도 아닌데 어쩜 그는 이렇게 듣고 싶은 말만 정확히 해줄 수 있는 걸까.
“들킨 것도 사귀기로 한 이상 결국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어. 다 각오한 일이야. 앞으로 일이 아무리 잘못돼도, 내가 너 하나 정도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렇게 말하고 진혁은 얼굴을 조금 붉혔다. 너무 많이 말해버렸다고 생각한 것이다.
희나는 그가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었단 것을 알고 나니 더 심장이 쿵쿵 뛰는 것 같았다. 달콤한 말이 결심을 자꾸 무뎌지게 만든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그렇게 하게 두면 안 된다. 희나는 이를 악물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진혁의 앞에서 마음이 흔들려서 결심이 바뀐다면 그건 틀린 결심이라고 단단히 ?뗌습?먹고 왔다.
그가 다정하게 말할 거란 예상을 못 했던 건 아니었다. 차라리 진혁이 비겁하게 돌아서 주면 좋겠다는 편리한 생각 같은 건 하지도 않았다. 그가 그럴 수 없는 사람이란 걸 알고 있었기에 정말 하고 싶지 않은 말까지 미리 준비해 왔다. 처음부터 내가 시작한 일이니 어떤 원망도 내가 가지고 가겠다고, 각오했다.
밀랍 인형같이 딱딱하게 굳은 희나의 입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 주말에 이모랑 같이 방 보러 갔어요. 방도 계약했어요.”
갑자기 바뀐 화제에 진혁은 조금 눈을 크게 떴으나, 희나가 마음을 바꾸고 어색해서 말을 돌린다고 생각했는지 곧 입꼬리를 올리며 받아 주었다.
“그래? 잘됐네. 어디로 구했어?”
“여기서 조금 멀어요. 왔다 갔다 하기 힘들지도…….”
“내가 자주 보러 갈게. 어차피 이제 방학해서 한가하고.”
진혁은 이제 안심한 듯 희나의 팔을 끌고 함께 소파에 앉았다.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쳐다보는 진혁에게 눈을 맞추지 못한 채 희나는 말을 이었다.
“이모가 있으니까 여태까지 고생했던 문제들 다 해결되는 거 같아요. 친척이라 법적 보호자도 되고, 이모도 최대한 도와주려고 하구요. 의지할 데가 있는 게 좋긴 좋네요.”
“그렇지. 아버지 생각하면 못 할 말이지만, 잘됐어. 얘기 들으니까 이제 너도 좀 편해질 거 같아서 마음이 놓이네.”
한마디 한마디 너무 자상해서 눈가가 시큰하다. 희나는 최대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며 기계적으로 입만 움직였다.
“나 어렸을 때부터 엄마가 있으면 좋겠다고, 가족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평범하게 사는 게 꿈이었어요. 이제 조금이나마 그거에 가까워진 거 같아요. 그래서…… 이번 일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됐어요.”
“무슨 일?”
“이제 꿈에 그리던 대로 평범하게 살게 됐으니까…… 학교생활도 제대로 하고 싶어요.”
온 방 안이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멈춘 가운데 희나의 입만이 혼자 다른 몸인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스스로 하는 말에 거부 반응을 일으켜 심장이 부서져 버릴 거 같았다.
“선생님이 조사위원회 나와서 징계 받으면…… 학교에 소문나는 거 시간문제잖아요. 지금도 어쩌면 아는 애들 있을지도 모르고…….”
“…….’
“이런 얘기까진 하기 싫지만 지훈이랑 사귀면…… 그런 수군거림 같은 거 안 들을 수 있으니까요.”
머릿속이 스스로에게 마구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울린다. 싫어. 상처 주고 싶지 않아. 그만 말해. 환청 같은 소리가 온몸을 지끈거리게 만들고 있었다. 그래도 희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 말했다. 이건 그녀 자신을 위한 게 아니라 진혁을 위한 거였으니까.
“선생님도 그런 거 부담스러울 거잖아요. 솔직히 그렇게 좋은 학교 다니는데 학교 내에서 손가락질 받아서 좋을 것도 없구요. 그냥 학교 졸업하세요. 나랑 이제 상관할 필요 없어요.”
당신은 절대 망가지면 안 되는 사람이니까 지금의 삶을 지키면서 살아. 나 같은 애랑 연관되지 말고.
희나가 말을 멈추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살짝 벌어진 채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던 진혁의 입술이 침을 넘기듯 한번 굳게 닫혔다가 열리며 소리를 내어놓았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그래요.”
진혁의 손이 뺨에 와 닿자 희나는 움찔했다. 식어버린 얼굴에 퍼지는 손의 온기가 너무 따뜻하다. 그 손은 바닥에 시선을 꽂고 있는 희나의 얼굴을 돌려 그를 마주 보게 만들었다.
부드러운 검은 눈동자가 그늘을 드리운 채 똑바로 마주해왔다. 진혁이 다시 물었다.
“정말…… 그게 진심이야?”
여기서 흔들리면 안 된다. 희나는 입술을 한번 깨문 뒤 진혁의 눈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래요. 그때 장례식장에서 다들 이상하게 쳐다봤던 거 기억나요?”
“장례식장?”
“사람들이 어떻게 보는지 아니까 소름 끼쳤어요. 꺼림칙해서 혼자 계속 생각해보니까…… 솔직히 나이도 많고, 좀 이상한 거 같아요.”
잔인한 말이 거침없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다물고 있던 진혁의 입술이 힘없이 열렸다. 창백해진 얼굴에는 핏기 하나 없었다. 저런 얼굴을 하게 만들다니. 죽어서도 잠들 수 없을 것 같다. 희나는 이런 자신이 말할 수 없이 밉고 싫고 경멸스러웠다.
까만 눈동자가 눈앞에서 흔들렸다. 그는 이런 때에도 감정을 절제하려는 것처럼 보였지만 마주 보고 있던 얼굴을 유지하지 못하고 살짝 돌아앉았다. 그 모습이, 너무 슬퍼 보여서, 쳐다볼 수가 없다.
“그래. 네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
“나 때문에 네가 힘든 건 싫으니까……. 어쩌면 너한테 잘된 일이고…….”
중얼거리는 목소리에는 생기가 하나도 없었다. 이런 말을 들어놓고도, 배려해서 싫은 말을 못 하는 그 모습을 보는 것이 너무 괴로워서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희나는 바들바들 떨리는 다리에 힘을 줘서 소파에서 일어났다.
“할 말 했으니까 갈게요. 이제…… 서로 안 봤으면 좋겠어요. 선생님이 예전에 했던 말대로, 서로 안 보는 게 좋은 거 같아요.”
“……그래.”
진혁은 머리가 아픈 듯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있어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손 아래로 보이는 입술이, 그렇게 뜨겁게 열기를 품고 닿아 오던 입술이 너무 창백해 보여서 희나는 마음이 아팠다.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고 싶은데 보이지 않는다.
짙은 미련과 괴로움을 남긴 채 희나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현관으로 통하는 좁은 복도를 걸을 때 아주 희미한 소리가 부르는 것이 들렸다.
“……희나야.”
돌아보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진혁이 부르는데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은 힘없이 무릎에 얹어져 있었다. 흐려진 다정한 눈동자가 희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가지 마.”
아주 나직해서 꺼져버릴 것 같은 목소리가 그렇게 말했다.
하얗게 굳은 얼굴에 조금 붉어진 눈가, 언제나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던 입가가 괴로움으로 떨리고 있다.
선생님이 처음으로 자신을 위해 뭔가를 해달라고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곁에 남아달라고 말한다.
나한테 해줄 수 있는 걸 모두 해주려고 노력했는데, 내가 살아가는 의미가 되어줬는데, 나를 그렇게 행복하게 만들었는데, 나는 그 단 한 가지 말조차 들어줄 수가 없다.
여기서 돌아서면 저 눈빛을 잊고 살아갈 수 있는 걸까?
그에게서 돌아서고 있다는 것이 현실감이 없다. 밤새 생각하고 궁리했던 것처럼 이것도 혼자 머릿속에서 만들어내고 있는 시뮬레이션이 아닐까. 팔도 다리도 마치 남의 것처럼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희나는 의연하게 서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이라는 걸 곧 자각하게 되면 걷잡을 수 없어질 감정이 마음속에서 꿈틀대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그것이 터지면, 정말 미쳐버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 모든 감정을 품은 채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의연하게 다시 돌아섰다.
하얘진 머릿속으로 멍하니 생각했다. 철이 들고 나서부터 이를 깨물고 눈물을 참던 날들은 지금 이 순간을 위한 거라고. 지금 눈물을 참고 감정을 숨겨서 저 사람이 괜찮을 수만 있다면, 그동안 괴로워서 몸부림치던 날들이 모두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던 거라고.
당신만 괜찮으면, 나도 괜찮아.
그리고 희나는 그의 집을 걸어 나왔다. 천천히 닫히는 문틈으로 보이던 모든 것을 잃은 듯한 눈동자.
그것이 희나가 기억하는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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