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당신의 모든 순간 (5)
희나는 팔로 얼굴을 감싸고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억누르며 처절하게 울었다. 이를 악물어도 안에 담긴 감정이 자꾸 북받쳐 올라와서 욱, 욱 하는 소리가 나왔다.
삶의 어느 한 부분을 아무렇게나 베어서 내보여도 그늘이나 결점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밝고 정직하고 결백하게 살아온 선생님이 오직 나와 연관되면 말문이 막힌다.
내가 선생님에게 그늘을 만들었다. 선생님이 그런 말을 듣게 만들었다. 사람들이 선생님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싫어. 선생님을 그렇게 보지 마. 그렇게 생각하지 마. 제발 그 사람을 나쁘게 보지 마.
공허한 마음의 외침은 아무 힘도 없었다. 한참을 훌쩍거리던 희나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힘없이 휴대폰을 들어서 진혁과 찍은 사진을 꺼내 보았다.
희미하게 웃고 있는 얼굴이 못 견디게 좋고 사랑스럽다.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이렇게 슬픈데, 헤어지고 나면 살아갈 수 있는 걸까.
사진을 쓰다듬으면서, 희나는 숨죽여서 울고 또 울었다.
진혁의 목소리가 계속 떠올라 마음을 약하게 만들었다.
“내가 어떻게 될지 걱정 안 해도 돼. 나한테는 네가 제일 중요해.”
그 착한 사람은 모든 걸 감수하고 함께 있겠다고 말해주었다. 정말로 그렇게 하고 싶다. 하지만 선생님이 모든 걸 감당하게 내버려두면 안 된다. 점점 희나는 그렇게 마음을 굳혀 가고 있었다.
‘나만 괜찮으면 된다고……? 당신이 괜찮지 않으면 난 괜찮을 수가 없는걸.’
사진 속의 웃는 얼굴에 방울져 떨어진 눈물들이 고였다.
티 없이 맑은 순백의 사람.
지금 돌아서지 않으면 내가 선생님의 모든 순간에 짙게 낀 얼룩이 될 거야. 지금이라면 아직 되돌릴 수 있어.
한참 뒤, 잔뜩 눈물을 흘리고 슬픈 감정까지 마비돼서 멍하니 앉아 있는 희나의 귀에 계단을 쿵쿵쿵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희원의 방은 1층이었으므로 이 발자국 소리는 지훈일 거다.
귀를 기울여 방으로 들어가는 발소리를 확인한 후 희나는 핏기 없는 얼굴로 일어나서 천천히 지훈의 방으로 걸어가 노크했다.
“들어와.”
지훈은 노크한 것이 희원이라고 생각했는지 뒤돌아선 채 거리낌 없이 입고 있던 후드를 벗고 있었다. 옷을 벗어 매끈한 등이 드러나자 뒷목덜미에 한 문신이 선명하게 보였다.
벗은 몸을 보는 것이 쑥스러워서 희나가 일단 문을 닫고 나가려는데 지훈이 말없는 것에 의아해졌는지 이쪽을 돌아보았다. 잘생긴 눈매가 희나를 발견하고 크게 뜨였다.
“어? 이모네 집에 간다더니……?”
그렇게 말하다가 지훈은 빨개진 희나의 눈가를 보고 곧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가만히 선 채 뭐라고도 말을 꺼내지 못하는 지훈에게, 희나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훈아…… 나 도와줄 수 있어?”
선뜻 뭐라고 대답하지 않고 그는 가만히 침묵을 지켰다. 어두운 표정을 보고, 희나는 문득 지훈의 웃는 얼굴을 본 것이 아주 오래된 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는 항상 생글생글 웃고 있었는데, 싸우고 나간 이후로 희나의 앞에서 밝게 웃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처연하게 젖어 있는 희나를 쳐다보다가 곧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거기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일단 들어와서 앉아.”
희나가 들어가 앉는 동안, 지훈은 옷장을 열어 집에서 입는 저지를 꺼냈다. 지훈의 상체는 각종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답게 근육이 선명하게 잘 잡혀 있었다.
벗은 몸 위에 집에서 입는 저지를 걸치자 다시 호리호리한 소년 같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는 의자에 앉은 희나 맞은편에 있는 넓은 소파에 앉아서 그녀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도와달라는 게 학교 일 말하는 거야?”
“응? 그게…….”
“나한테 학교에 거짓말해달라고 하려고?”
먼저 말을 꺼내 오는 바람에 희나가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지훈이 설명하듯 말했다.
“너희 반 담임 선생님이 나한테도 전화했어. 면담에서 너랑 말 좀 맞춰줄 수 있냐고 물어보던데.”
“…….”
“대놓고 감싸주려는 거 보고 좀 어이없더라. 그 선생도 그 녀석 어지간히 좋게 봤나 보지. 하여튼 여자들이란.”
코웃음을 치며 내뱉듯 말하는 지훈을 보자 희망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침울해하는 희나를 보는 것은 역시 내키지 않는지 지훈은 시선을 살짝 옆으로 돌리며 딱 잘라 거절했다.
“미안하지만 난 거짓말 안 할래. 너는 돕고 싶지만, 그 사람은 돕기 싫어.”
“정말 마지막으로 부탁할게. 한 번만 도와줘, 응?”
사람들에게 부탁하는 것도 동정받는 것도 싫어하는 희나로서는 어렵게 하는 부탁이었다. 간절한 목소리를 듣고 지훈은 더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다시는 이런 부탁 안 할게. 선생님이랑은…… 이제 정말 안 만날 거야.”
“그 사람이랑 이제 안 만난다고?”
“……이제는 안 만나.”
졸업할 때까지라고 시한을 정해 두었는데도, 스스로 그렇게 말하는 게 너무 괴로워서 큰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지훈이 희나의 얼굴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얼굴은, 아직도 전혀 포기 못 했는데.”
“이제 나도 만나면 안 된다는 거 알아. 그래서 안 만날 거야.”
“그렇게 말해도 나, 그 사람에 대해서는 너 못 믿겠어.”
지훈은 마음에 담아두었던 게 많은지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긴 손가락으로 이마를 누르며 한숨을 쉬었다.
“너 나한테 부탁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아는 거야? 면담하다가 우리끼리도 동거했다는 거 밝혀지면 징계 받을지도 몰라. 최소한 우리 부모님한테 연락 갈 거고.”
진혁만큼은 아니지만 지훈의 입장도 곤란해지는 게 사실이었다. 여태까지 도움만 받았는데 희나는 지훈의 마음에 들 만한 행동을 한 적도 없다. 애초에 진혁을 생각해서 이런 부탁을 지훈에게 한다는 것부터가 그를 상처 주는 짓이었다.
면목이 없어서 희나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내가 그렇게까지 해준다고 하면 또 나랑 사귄다고 거짓말이라도 할 거야?”
“그런 거 사귀는 거 아니잖아.”
날카로운 목소리로 던져진 질문에 희나는 창백한 얼굴로 살짝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다른 거,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다 할게. 도와주면 잊지 않을게. 언젠가는 꼭 보답할게.”
“나도 무슨 바보는 아니야. 의미 없는 사귀자는 제안을 또 반복할 생각은 없어. 같은 여자한테 몇 번씩이나 똑같은 이유로 차이는 건 싫어.”
잘라 말하면서 지훈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 희나를 쳐다보았다. 애초부터 그녀의 외모가 이상형에 가까워 반했던 만큼, 처량하게 있는 모습을 앞에 두고 있으니 마음이 약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를 좋아해주면 좋을 텐데. 그럼 아무 문제도 없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는 희나가 야속하다. 제게 부탁하는 내용은 뻔뻔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희나의 부탁을 계속 거절할 수 없을 정도로 여전히 끌리고 있는 게 사실이었다.
지훈은 답답한 듯 머리를 감싸고 흐트러뜨렸다. 그리고 한번 크게 인상을 찡그리고는 무릎을 짚고 몸을 내밀며 희나에게 물었다.
“학교에 그렇게 말하면 어쨌든 사귀는 거처럼 행동해야 되는 거 알지? 나도 그걸로 서로 사귀는 거라고 생각하진 않을 테지만 도와줘놓고 바보 취급당하는 건 싫어.”
“바보 취급 같은 거 안 해. 도와주면 정말, 정말 고맙게 생각할게.”
“나한테 확실하게 약속해. 그 자식이랑 헤어져. 아니, 다시 만나지도 마. 나랑 사귀지 않더라도, 거기에 대해서는 배신하지 마.”
희나는 진지한 지훈의 눈을 보면서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훈은 그래도 믿음이 가지 않는지 확인하듯 재차 물었다.
“정말이지? 다시 만나는 거, 연락하는 거 내가 알게 되면 이제 다음은 없어, 정말로.”
“정말…… 다시는 안 만날 거야.”
목소리는 떨렸지만 진심이었다. 희나는 지훈을 똑바로 쳐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결심과 의지가 그에게 전해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지훈은 내밀었던 몸을 다시 푹신한 소파에 뉘며 살짝 팔을 벌리고 말했다.
“이리 와.”
희나는 뻣뻣하게 걸어가서 지훈의 옆에 앉았다. 그러자 그가 그녀의 몸을 감고 감싸 안아왔다.
“이제라도 결심해서 다행이네. 잘 생각했어.”
조용조용히 말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희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속으로는 동의하지 않은 채였다.
과연 잘 생각한 걸까. 선생님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선생님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 하지.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하고 나니 다음 문제에 대한 불안감이 몰려왔다. 희나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넘칠 것 같은 눈을 내리감고 지훈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
희나는 현관에 앉은 채 천천히 스니커즈를 신었다. 이 스니커즈는 슬리퍼를 신고 집까지 찾아온 희나에게 진혁이 사준 것이다. 결코 비싸다고 할 수 없는 평범한 신발이었지만, 지금 희나에겐 어떤 명품 구두를 준다고 해도 이것보다 맘에 들 수는 없을 거다.
그 신발을 신고, 그녀는 지금부터 진혁을 만나러 간다. 가서 자신이 해야만 하는 말들을 떠올리면, 그렇지 않아도 무거운 발걸음을 신발이 뒤로 잡아당기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지훈의 집을 나와서 역으로 간 뒤 전철을 탔다. 자리에 앉자 그녀는 계속 보는 것을 피하고 있던 휴대폰을 꺼내 들고 심호흡을 한 뒤 카카오톡을 구동했다.
「서울 올라왔어. 바쁜가 보지?」
「전화할 수 있을 때 전화해. 데리러 갈게. 잠깐 얼굴이라도 보자.」
대화 창들 사이에서 진혁이 보낸 두 통의 메시지를 보니 심장이 아렸다. 그냥 뭔가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아프고 슬프다. 하지만 미리 익숙해져야 한다는 생각에 희나는 대화 창을 올려 진혁과 나눴던 대화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같이 웃고 시답지 않은 대화를 나눈 게 너무 예전 일처럼 느껴진다. 아직 그와의 끈을 놓지도 않았는데 벌써 숨이 벅차다. 절벽 길을 걸어 한 걸음씩 낭떠러지로 걸어가는 것 같다.
낙성대역에서 내리자 그 극도의 불안감은 점점 그녀의 온몸을 깊이 잠식해서 마치 익사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함께 지나면서 웃었던 기억들이 너무 깊이 새겨져 있어서 길을 지나는 발걸음 하나하나가 인어공주의 그것처럼 쓰렸다. 학교에서 진혁에게 키스해달라고 하고 거절당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때도 그녀는 긴장을 놓으면 바로 흘러넘치는 눈물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지만 이렇게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은 기분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기계적으로 움직인 다리 덕에 어느덧 희나의 발걸음은 진혁의 집 문 앞에 멈췄다.
집에 있을까.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다시 이 길을 걸어올 생각을 하면 끔찍하다. 두 번 다시 반복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한참 동안 꼼짝도 못 하고 밀랍 인형처럼 서 있던 희나는 아주 간신히 굳어진 손을 문 쪽으로 내밀었다. 그가 준 열쇠를 사용하고 싶지 않아서 굳이 벨을 눌렀다.
대답하지 마. 나오지 마.
희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곧 문 안쪽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허탈하게 다시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이어서 문이 열리고, 미소 띤 진혁의 얼굴이 꿈처럼 나타났다.
“어? 왔어?”
“…….”
“연락했으면 역까지 데리러 갔을 텐데. 열쇠 잃어버렸어? 벨을 누르고…….”
언제나처럼 단정한 흰 얼굴이 듣기 좋은 목소리로 다정하게 반겨주었다. 그 모습을 보니 숨도 쉴 수 없다.
희나는 잠시 선 채로 말을 듣지 않는 호흡을 조절했다. 진혁은 평범하게 말을 걸며 들어가려다가 희나가 창백해져서 딱딱하게 굳은 채 현관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뭔가 이상한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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