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당신의 모든 순간 (4)
진혜를 보내고 한동안은 그저 떨떠름하기만 하다가 적막에 싸인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희나는 기분이 우울해졌다.
세상이 다 돌을 던져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죽을 생각을 하다가 선생님만 바라보고 다시 살아가기로 했지 않은가.
그런데 그 돌을 다 나에게만 던져주면 좋겠는데, 선생님에게로 가는 게 훨씬 많다. 그렇게 정도를 걸으려고 애쓰는 남자를 사람들이 알아주려고 하지 않는다.
수려한 외모에 예의 바른 태도. 여태까지 선생님은 사람을 만나면 좋은 인상만을 주었을 거다. 하지만 선생님을 좋게 생각하다가도 옆에 있는 나를 보면 다들 기묘한 표정을 짓고 말 거다. 장례식장의 어른들이 그랬던 것처럼.
선생님을 잘 아는 사람들도 둘이 사귄다고 하면 우선 불유쾌한 표정부터 짓고 난감해할 거다. 선생님은 앞으로도 대체 얼마나 많은 오해에 휩싸이게 되는 걸까.
희나는 유령처럼 걸어서 다시 진혁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까 뽑아서 보려고 했던 앨범을 꺼냈다. 앨범을 꺼내며 건드려버렸는지 옆에 꽂혀 있던 파일도 함께 딸려 나왔다.
다시 돌려놓으려다가 문득 희나는 그 파일을 열었다. 안에는 각종 중요한 서류들이 그의 성격처럼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희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대학교 장학 증서, 각종 강습 수료증, 자격증, 어학 성적표, 봉사 활동 감사장, 친구들이 써준 롤링페이퍼, 희나의 반에서 마지막 날에 전달한 편지들까지.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보여주듯 차곡차곡 쌓인 서류들 맨 위에는 희나의 학교 이름이 찍힌 공문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윤리 위반 조사위원회 참석 통지서」
굵은 글씨로 딱딱하게 쓰인 그 문구를 본 희나는 온몸의 피가 사악 식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이 한 장의 종이는 다른 것들과 너무나도 이질적이다. 그의 파일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너무 싫은 기분이 북받쳐 올라 차마 읽을 수가 없어서 희나는 그것을 휙 덮어버렸다. 그리고 잠시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듯 깊게 호흡하며 서 있던 희나의 떨리는 손가락이 앨범을 들췄다.
앨범은 진혁의 아주 어린 시절 사진부터 있었다. 일반적으로 자취하는 남자 방에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다.
어머니가 보낸 앨범인지 다소 투박한 글씨로 날짜와 상황이 여백에 간략하게 적혀 있었다.
앨범을 넘길수록 떨림이 가라앉고, 희나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지금의 얼굴 그대로 줄어든 듯한 진혁의 어린 시절은 아주 귀여웠다. 장난스럽게 웃고, 뛰어다니고, 강아지를 안고 좋아하고, 동생을 업어주고, 책을 읽고 있는 사진들 하나하나가 장면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생생했다.
자랄수록 점점 상을 받고 있거나, 공부하는 사진들이 많아졌다. 간간이 사진에 등장해 아들의 팔짱을 끼고 있는 어머니의 얼굴은 자랑스러움으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사진에 찍힌 모든 사람들이 진혁을 보면서 흐뭇하게 미소 짓고 있다.
그 행복해 보이는 사진첩을 한 장 한 장 넘겨 갈수록, 희나는 마음 깊이 절감했다.
아, 내가 이 사람을 망치겠구나, 라고.
진혁의 집에 있는 것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희나는 도망치듯이 그곳을 빠져나왔다. 갑갑하고 우울하고 스스로가 너무 싫다. 학교에 가서 마구 소리 지르고 싶다.
니들이 대체 뭘 아냐고. 니들이 뭔데 선생님을 조사하냐고. 무슨 권리로 우리에 대해 판단하려고 드느냐고.
그따위 거지같은 윤리 개나 주라지.
희나는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차라리 스스로 학교를 그만둬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면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진혁을 괴롭히는 그깟 학교라면 다니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학교를 관둔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 봤자 그저 여고생과 이성 교제 문제를 일으켜 자퇴하게 만든 교생으로 진혁에 대한 수식어만 더 길어질 뿐이었다. 게다가 그 성실한 남자가 학교를 그만둔 그녀를 보고 얼마나 자책할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더는 문제를 일으킬 기운도 없어서 희나는 지훈의 집으로 돌아왔다. 희원과 지훈은 함께 밖에 나갔는지 집에 없었다.
계단을 올라와 방에 틀어박힌 채 희나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낮까지는 그렇게 기분이 좋았는데 마음이 무거워서 견딜 수 없었다.
싫은 생각들을 잊기 위해서 억지로 잠을 청했다. 얼마 후 간신히 잠드는 데 성공했지만, 희나의 잠은 곧 방해받고 말았다.
잠든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머리맡에 놓아 둔 휴대전화가 울렸다.
무시하고 싶었지만 혹시 진혁일까 근질근질해서 희나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액정에 뜬 번호는 등록되지 않은 모르는 번호였다. 왠지 마음에 걸려서 희나는 조심스레 수신을 터치했다.
그리고 수화기 저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낯익은 목소리였다.
[희나야, 선생님이야. 이제 좀 괜찮니?]
담임인 박 선생이었다. 뜻밖의 전화에 엉거주춤 몸을 일으킨 희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대답했다.
“아, 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학교는 언제부터 올 수 있을 것 같니?]
“네. 그게…… 아마 곧 갈 수 있을 거 같아요. 이번 주쯤…….”
이미 집안일은 정리되었지만 학교 따위 가고 싶지 않아 대충 얼버무렸다. 박 선생은 범인이 잡혔다는 말을 들었다든가, 학교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둥 아무래도 좋을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녀의 말투에서 희나는 꺼내기 어려운 화제를 위해 말을 돌리고 있음을 직감했다.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신중하게 본론으로 들어섰다.
[근데 말이야, 혹시 유 선생님께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진혁의 이야기가 나오자 희나의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희나는 긴장한 채로 침을 꿀꺽 삼키며 박 선생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다음 주 금요일에 너와 유 선생님 문제로 조사위원회가 있을 예정이야. 조사위원회를 소집하기 전에 너와 개별 면담이 있을 것 같구나.]
“무슨 면담이요……?”
[너랑 유 선생님에 대해서 네 이야기를 먼저 듣기로 했어. 잘하면 조사위원회를 캔슬할 수도 있을지 몰라.]
“캔슬할 수 있다고요?”
귀가 번쩍 뜨이는 말이었다. 희나는 자세를 똑바로 하고 앉아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원칙대로 일단 학교에 알리긴 했지만 나는 이 문제가 더 커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그래서 교장 선생님을 찾아가서 설득했어. 유 선생님을 소환하기 전에 먼저 사실 관계를 명확하게 해야 하지 않느냐고.]
“네. 그래서요……?”
[네가 등교하는 대로 나랑 다른 선생님 한 분이서 너를 차례로 면담할 거야. 거기서 너랑 유 선생님이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는 게 밝혀지면 굳이 유 선생님을 소환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구나.]
희나의 얼굴이 밝아졌다. 박 선생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희나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조사위원회에서 설령 결백함이 밝혀지더라도 그런 조사를 받았다는 거만으로 유 선생님께 안 좋은 경력이 될 거야. 위원회 결과는 결론이 어떻게 나오든 그런 위원회가 있었다는 자체가 학교로 통보가 가게 되거든. 그러니까 가능하면 캔슬할 수 있을 때 그렇게 하는 게 좋지.]
“네, 그러네요. 그럼 제가 어떻게 하면 되나요?”
[일단 선생님은 너와 유 선생님이 부적절한 관계가 아니라고 얘기할 생각이야.]
“부적절한 거 없어요. 유 선생님은 그런 사람 아니에요…….”
희나는 딱 잘라 말했다. 둘이 사귀는 건 맞지만, 부적절하다고 할 만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거리낌 없는 말투였다. 그 말투에 박 선생은 조금 마음을 놓은 듯 다시 말을 이어 갔다.
[그래. 다행히 너랑 지훈이가 사귀는 사이라는 증인도 꽤 많고, 유 선생님의 경우에도 교생들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다른 교생 선생님이랑 꽤 친밀한 사이였다는 말이 많더구나.]
이어진 말에 웃고 있던 희나의 입꼬리가 다시 떨어졌다. 아무래도 진혁과의 사이를 학교에 숨기라는 말인 것 같았다. 굳이 공개 연애를 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비밀로 하다가 또다시 이런 일이 없을 거란 보장이 없다.
[그러니까 네가 지훈이랑 사귀는 사이고, 유 선생님과 함께 있었던 건 그냥 의지하던 선생님이라 찾아갔다는 정도로 말하면 어떻겠니?]
“저는 그렇게 말할 수 있지만…….”
지훈을 생각하며 희나는 말끝을 흐렸다. 그는 도우려 하지 않을 게 뻔했다. 전화기를 잡고 망설이다가 희나는 박 선생의 호의를 믿고 궁금한 것을 물어보기로 결심했다.
“만약에 제가 유 선생님을…… 정말로 좋아한다면…… 그러면 어떻게 되는데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묻자 박 선생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럼 그때는 학교에서 정식으로 문제 제기를 할 거야. 그럼 유 선생님은 교직은 포기하셔야 돼.]
“……건전하게 만나도요……?”
[형사 조사는 안 받겠지만 교직 이수는 할 수 없어. 교생이 재학 중인 학생이랑 사귀는 건 안 될 말이지.]
선생님은 교사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어. 서울대를 장학금 받고 다녔을 정도니 다른 직장을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선생님을 그렇게 하게 둘 순 없다. 그래도 정말로 헤어지고 싶지도 않진 않은데.
갈등하는 희나의 머릿속을 읽기라도 한 듯 박 선생이 나직하게 물어 왔다.
[희나야, 지금 유 선생님이랑 만나고 있는 거니?”]
“…….”
[그건…… 정말 잘못하는 거야. 다 크고 나서 생각해도 늦지 않아. 지금 그럴 필요는 없잖아. 아직 한창때고…… 굳이 그런 이상한 관계에…….]
“이상한 거 없어요, 우리는! 정말 좋아하는 거란 말이에요!”
발끈해서 언성을 높여 말해버리고 희나는 아차 싶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박 선생의 깊은 한숨이 들려왔다.
[나도 유 선생님이 어린 학생과 추잡한 관계를 가질 사람이 아니라는 건 믿어. 하지만 네 말대로 서로 정말 좋아한다면 1, 2년쯤 기다려서 떳떳하게 만날 수 있을 때 만나도 되잖아. 굳이 지금 다 망쳐가며 고집을 부릴 필요가 없어.]
“…….”
[너도 너지만…… 무엇보다 유 선생님이 어떻게 될지 생각해봐야지. 교직만 포기한다고 끝나는 문제가 아냐. 유 선생님 학교에 알려지면 앞으로 동문들한테 얼굴은 들 수 있겠니?]
“하지만…….”
[사람들이 다 유 선생님을 아동성애자 같은 걸로 볼 거란 말이야. 그렇게 좋은 사람인데, 단지 너를 만난다는 이유만으로 변태 취급을 받을 거야. 그렇게 되길 바라니?]
희나는 흡 소리가 나게 숨을 들이켰다. 박 선생의 말은 희나의 마음속 가장 아픈 곳을 찌르는 말이었다. 희나의 큰 눈에 금방 눈물이 가득 고였다.
[잘 생각해봐. 그리고 될 수 있으면 이번 주부터는 학교에 와주면 좋겠구나. 힘든 일 있으면 선생님한테 말하고, 마음 잘 추스르고 부디 힘내야 돼. 그럼 이만 끊을게.]
따뜻한 목소리로 말한 뒤 박 선생은 전화를 끊었다. 희나는 떨어뜨리듯이 전화기를 내려놓고 세워 모은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심장이 쥐여 짜이듯 아프다. 너무 슬퍼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희나는 절망적인 심정으로 진혁의 다정한 얼굴을 떠올렸다.
깔끔하게 정돈된 삶. 부드럽게 웃는 얼굴과 다정한 태도.
착하고, 진중하고, 똑똑하고, 사람 좋은 남자. 말 그대로 좋은 사람 그 자체.
[그렇게 좋은 사람인데, 단지 너를 만난다는 이유만으로 변태 취급을 받을 거야.]
박 선생의 말이 희나의 머릿속을 징징 울리며 떠돌았다. 갑갑해서 아니라고 버럭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아니지 않다는 걸 스스로도 잘 알기 때문이다.
진혁이 들어섰을 때 경찰서에 있던 사람들 표정, 지훈의 반응, 이모와 조문객들의 경멸하던 얼굴, 박 선생의 껄끄러워하던 목소리, 어차피 너도 나와 똑같다며 웃던 진혜의 입매.
그 모든 것들이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게 현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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