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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그 너머에는-65화 (65/140)

65화. 당신의 모든 순간 (3)

“아하하하. 쑥맥인 줄 알았더니 완전- 대박이네, 유진혁!”

그렇게 혼자서 웃더니 진혜는 몸을 돌려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하도 중구난방으로 왔다 갔다 해서 정신이 없었다. 그녀는 놀라 굳어 있는 희나를 보고 웃으면서 말을 걸었다.

“아, 갑자기 와서 미안해요.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왔어요. 오빠가 여친이랑 산단 말 안 했거든요. 뭐 나 신경 쓸 건 없어요. 나 여기 안 사니까. 아, 그런데 오빠가 내 얘기 한 건가? 내 이름도 알고 있는 거 보면. 아, 저 방 원래 내 방인 거 알아요?”

폭풍같이 쏟아 내는 진혜의 수다에 희나는 간간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진혜는 수선스럽게 냉장고를 열더니 주스 병을 꺼냈다.

“엄마한테 먹을 거 좀 보내랬더니 엄마가 여기로 한 번에 보냈다고 알아서 갖다 먹으라고 했어요. 아, 나 진짜, 이거 먹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네-.”

커다란 유리병을 병째로 들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진혜는 자신의 옆자리를 손으로 팡팡 치면서 희나를 불렀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여기 와서 앉아요-. 안 잡아먹으니까.”

“아, 네.”

권유를 받은 희나는 쭈뼛거리면서 진혜의 옆에 가서 앉았다. 진혜는 옆에 앉은 희나를 위아래로 흘깃거리더니 감탄한 듯 말했다.

“와, 되게 어려 보이네요. 아까 보고 깜짝 놀랐어요. 언니 엄청 이쁘다-. 오빠 원래 인기 많긴 했지만 이 정도 급이었어? 언니도 서울대예요?”

“저 언니 아니에요.”

폭풍 같은 수다에 아연해진 와중에도 희나는 우선 알려야 될 것 같은 사실을 먼저 말했다. 그러자 진혜가 손을 까딱까딱 흔들면서 웃었다.

“아, 내가 늙어 보여서 그렇지 10대예요. 나 아직 열아홉이에요. 오빠가 나이는 말 안 했나?”

“나이 들었어요. 저도 아직 고등학생이에요.”

“고등학생이라구요?”

“네. 고2예요.”

희나가 또렷하게 대답하자 진혜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어이없는 표정이 되었다.

“고딩이랑 사귄다고? 오빠가 집까지 데려와서-?”

“사귀는 건 맞는데, 데려온 건 아니고요, 제가…….”

“꺄하하하하하하하하, 미친-! 무슨 바람이 들었대. 도덕 교과서 삶아 먹은 사람이.”

희나는 변명을 하려 했으나 진혜는 들은 척도 안 하고 박장대소했다. 그녀는 희나의 몸을 아플 정도로 팡팡 치며 웃었다. 그리고 몸을 뒤틀어 가며 웃는 그녀 앞에서 어찌해야 할지 몰라 희나는 땀을 뻘뻘 흘렸다.

자기 좋을 만큼 실컷 웃고 난 진혜가 눈물을 닦으며 물었다.

“아하하하, 우리 오빠 어때요? 잘해줘요?”

“잘해주고 진짜 착해요……. 되게 머, 멋있고요…….”

“아, 얼굴 빨개진 거 봐, 귀엽다-. 나보다 어리면 말 까도 되지?”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는지 오빠의 여친에게 마음대로 말을 턱 놓은 진혜는 가져온 주스 병을 따려고 낑낑대면서 또 질문의 홍수를 쏟아냈다.

“가출해서 오빠 집에 들어온 거야? 니네 부모님도 아냐?”

“그런 건 아니고…… 부모님은 안 계세요…….”

“헐. 그렇구만. 고생 많겠네. 야, 그래도 내가 존나 돌아다녔는데 진짜 우리 오빠면 개잘 잡은 거다. 솔직히 우리 오빠지만 생긴 거도 훈훈하니 괜찮잖아. 내 친구들이 걔 멋있다고 엄청 좋아했는데.”

화류계에서 일해서 그런지 희나도 말투가 예쁜 편은 아니었지만 상대도 되지 않을 정도다.

그녀는 간신히 따낸 걸쭉한 과일 주스를 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벌컥벌컥 들이켜고는 살 것 같은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아, 씹할, 몇 달째 술 못 먹어서 뒈질 거 같애. 이거에다가 소주 두 병 부어 마시면 존나 맛있는데, 해 봤냐?”

진혜가 과일 주스 병을 흔들면서 묻자 희나는 히익, 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 술 못 먹어요.”

“진짜? 하, 이걸 다 썩히네. 유진혁도 술 별로 안 먹는데.”

오빠 이름을 거침없이 척척 부른다. 그녀는 한 모금 더 걸쭉하게 들이마시더니 또 말을 늘어놓았다.

“와, 근데 엄마가 알면 기절하겠네. 엄마가 얼마나 싸고돌았는데. 우리 엄마는 걔가 최곤 줄 알어. 완전 왕자야. 입만 열면 아들 자랑 개 쩔어. 절대 안 끝나. 난 완전 시녀 나불탱이.”

“착한 아들일 거 같긴 하지만…….”

“착하기야 짜증 뻗치게 착하지. 우리 집 시골구석인데 동네 가면 걔는 동네 입구에서부터 모르는 사람이 없어. 아이구 우리 진혁이, 장한 진혁이, 착하고, 똑똑하고, 어른 공경하고 나불나불나불. 진짜 토 나올 정도라니까.”

편애한다는 말을 듣고 희나도 예상은 했지만 그보다 더한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움츠러들어 있는 희나에게 진혜가 불쑥 물었다.

“너 공부 잘하냐?”

농담으로라도 잘한단 말은 안 나온다. 희나가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젓자 진혜는 또 한바탕 웃었다.

“못해? 하하- 하긴 얼굴이 그러면 공부라도 못해야 공평하지. 근데 생각할수록 웃기다.”

“……뭐가요?”

“그렇게 다 완전 착해 빠진 걸로만 알고 있는데 뒤에서 이러고 있었다는 게. 얼굴색 변해서 나보고 집에 가자고 말리던 사람이 똑같은 거 하고 있었던 거잖아.”

그녀는 정말 재밌다는 듯 웃고 있었지만 희나는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뒤에서 이러고 있었다는 말도 귀에 거슬렸지만 똑같은 거라는 말이 더 마음에 걸렸다.

“똑같은 거라뇨?”

“나도 가출해서 재워 준다는 오빠네서 살거든. 나보고 설교하더니 지도 똑같구만, 뭘.”

진혜가 남자와 동거한다는 얘기는 희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와 같다는 말에 거부감이 들었다. 아마 동거라고 해도 희나와 진혁이 했던 것과는 사뭇 다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런 희나의 생각을 뒷받침하기라도 하듯 진혜와의 문답은 점점 어긋난 방향으로 흘러갔다.

“오빠가 이럴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너는 오빠랑 사는 거 좋아?”

“네? 좋긴 좋지만…… 이제 같이 안 살아요.”

“왜 딴 남자 구했어?”

희나가 어이없어서 입을 벌리고 대답을 못 하는데 더욱 어처구니없는 질문이 날아왔다.

“그냥 한 곳에 정착하는 게 낫지 않아? 솔까말 새집 가면 한동안 미친놈처럼 해대잖아. 이번 오빠도 처음엔 싫었는데 계속 자다 보니까 점점 맞아가면서 괜찮더라. 야, 우리 오빠는 잘하냐?”

너무나도 노골적이고 저속한 질문에 희나는 질려버렸다. 경험이 없어도 그녀가 말하는 의미가 성적인 거라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얼굴이 새빨개진 희나가 펄쩍 뛰며 양손을 휘휘 저었다.

“우리는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긴 뭘 아니야. 왜 빼고 그래. 내가 엄마한테 말할까 봐? 걱정 마. 어차피 그 아줌마는 내 말 귓등으로도 안 들어. 해봤자 우리 진혁이가 그럴 리가 없어- 백퍼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그냥 사정상 잠깐 같이 있었던 거지, 선생님은 그런 사람 아니에요.”

“선생님? 아, 뭐야. 크큭, 닭살 돋게 웬 선생님?”

진혜가 손발이 오그라드는 표정으로 픽 웃었다. 희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진혁이 교생 실습을 했던 학교의 학생임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진혜는 아주 묘한 표정을 지었다.

“헐. 학생한테 그랬다고? 진짜 알수록 완전 앞뒤가 다르네-?”

“그랬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지만, 선생님은 아무것도 안 했어요. 그냥 갈 데 없어서 며칠 재워 준 거뿐이에요.”

“뭐야, 아직 안 했어?”

어이없다는 듯 물어 오는 진혜에게 얼굴을 붉히면서도 희나는 또렷하게 말했다.

“나한테 손…… 댄 적 없어요.”

“둘이 사귄다며? 안 잤다고?”

“진짜 없어요. 그런 말 이제 그만해요.”

완전 딸기가 된 희나의 반응을 보고 진혜는 조금 믿는 듯했으나 그래도 의심스러운 표정이었다. 아니, 의심스럽다기보다 어처구니없어 하는 듯했다.

그런 그녀에게 희나도 조금 어이가 없었다. 대체 어떤 삶을 살았기에 남녀가 섹스하지 않았다는 말을 저렇게나 믿지 못하는 걸까.

희나는 진혁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의심을 풀고 싶어서 못 박듯이 한 번 더 강조했다.

“정말 아무 일 없어요. 선생님은 나한테 그런 거 안 해요.”

“하- 그걸 누가 믿냐? 나도 순수하게 잠만 재워준다는 남자네 집 많이 갔지만 어차피 얼마 못 가서 다 덮치던데. 너처럼 맛있게 생긴 애를 그냥 놔 둬?”

“……동생인데 자기 오빠를 그렇게 몰라요?”

그러자 진혜가 한쪽 눈썹을 찡끗 올리더니 입을 좀 내밀었다. 겨우겨우 수긍했나 싶어서 희나는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소파 팔걸이에 팔을 올리고 머리를 기댄 채 곁눈질로 희나를 쳐다보던 진혜는 뭔가가 비위에 거슬렸는지 태도가 불손했다.

자신은 험하게 몸을 굴려 간신히 살아왔는데 희나가 너무 운이 좋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다시 주스를 홀짝거리면서 틱틱댔다.

“하, 그렇다 쳐도 내가 우리 오빠 잘 아는데도 안 믿기는데 누가 믿어, 그걸? 어차피 밖에서 보면 너나 나나야. 오빠는 그냥 변태 새끼인 거고.”

진혜가 하는 말들이 줄곧 당황스럽긴 해도 오해라고 생각해서 희나도 별 감정 없이 들어 넘기고 있었는데, 이번 말은 마음에 와서 탁 꽂혔다. 막말에 화가 나서 반박하려고 하는데 뜬금없이 눈물이 솟았다. 희나는 울먹거리면서 말했다.

“진짜…… 진짜 그런 거 아니란 말이에요.”

그녀의 말이 희나가 장례식 이후로 줄곧 깊이 신경 쓰고 있던 폐부를 찔렀기 때문에 감정이 격해진 듯했다. 아무도 진혁의 순수함을 믿어주지 않는다.

“왜 울고 난리래. 틀린 말 했나.”

“선생님은 그런 사람 아니란 말이에요.”

“나도 니 맘 아는데, 니가 아무리 말해도 어차피 남들이 보기엔 그냥 같이 살고 둘이 사귀면 죽일 놈 되는 거야.”

“대체 왜 그렇게 생각해야 되는데요?”

“누가 내가 그런대? 내가 다 겪어봤는데 뭐. 내가 임신한 거 말하면 좋아서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 없고, 다 돈 목적, 아니면 오빠보고 변태 놈이라고 욕하기만 한단 말이야.”

임신했다는 말에 희나의 입이 놀라 벌어졌다. 진혜는 그 표정을 보며 픽 웃더니 콧방귀를 뀌었다.

“너도 그 얘기 들으면 나랑 사는 오빠가 변태 같지? 내가 오빠 좋아서 잔 건데, 남들이 다 하는 섹스 한 건데. 존나 이상한 취급 한단 말이야.”

“…….”

“심지어 유진혁 그놈도 임신했다고 하자마자 잡아먹으려고 하던걸 뭐. 내가 잘 살아보겠다고 해도 들은 척도 안 하려고 하던데. 세상이 다 그런 거지.”

주스 통을 다 비우자 화장실이 가고 싶어졌는지 진혜는 소파에서 일어섰다. 볼일을 보고 나온 그녀가 시계를 보더니 말했다.

“난 이제 가봐야겠다. 이제 일하러 가야 돼. 너 그만 질질 짜고 오빠한테 나 왔다고 얘기하지 마.”

그러면서 찬장에서 제멋대로 쇼핑백을 꺼내더니 냉장고에 있는 음식을 잔뜩 주워 담았다. 희나는 울면서도 저렇게 가져가면서 왔다 간 걸 모르길 바라는 걸까- 하고 생각했다.

음식을 챙기고 자기 방에서 뭔가 물건도 주섬주섬 가방에 담은 진혜는 곧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희나가 힘없는 발걸음으로 입구까지 따라가자 진혜가 말했다.

“둘이 한번 잘해봐.”

“네?”

“나도 다들 그딴 식으로 쳐다보는 거 질려서, 애 낳으면 잘 키울 거야. 남의 오빠 변태 놈 만들었으면 그 책임은 져야지. 잘 사귀어보라고.”

“…….”

“헹- 그 완벽남이 그래도 이런 구석이라도 있으니 인간적으로 보이는구만.”

마지막 말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리고 진혜는 쇼핑백을 든 손을 휘휘 저어 인사를 하고는 왔을 때처럼 황망하게 떠나버렸다.

남겨진 희나는 휑한 기분이 들어 멍하니 진혜의 뒷모습을 보다가, 힘없이 방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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