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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그 너머에는-64화 (64/140)

64화. 당신의 모든 순간 (2)

「빨리 잡혀서 다행이네. 이제 걱정 좀 덜하겠어.」

「다행이긴 한데 걱정 좀 그만해요. 메시지 창에 걱정이란 단어 안 들어 있는 게 하나도 없는 거 알아요?」

희나가 틱 쏘아붙이자 조금 텀을 두고 메시지가 왔다.

「진짜네. 니가 걱정하게 만드니까 그렇잖아.」

「걱정은 다 선생님이 사서 하는 거죠. 그러니까 벌써부터 그렇게 할아버지 같은 거예요.」

또 걱정이란 단어가 들어 있어서 희나는 쿡쿡 웃으며 답장을 보냈다. 그러자 또 금세 답장이 온다.

「그렇게 할아버지 같나. 걱정이네.」

일부러 장난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희나는 다시 키들키들 웃었다. 그러는 사이 화장실에 갔던 이모가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희나는 대화를 마무리 짓기 위한 메시지를 전송했다.

「걱정 그만하고 조심해서 올라와요, 바보 아저씨.」

「그래. 집 잘 알아보고 와. 그리고 자꾸 아저씨라고 부르면 또 걱정할 거야.」

진혁이 메시지와 함께 재미있게 생긴 캐릭터가 찡그린 표정을 짓는 이모티콘을 보내 와서 희나는 빵 터져서 웃고 말았다. 이모가 맞은편에 와서 앉으면서 물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

“아뇨, 별거 아니에요.”

희나가 말을 얼버무리며 휴대폰을 내려놓자 이모의 얼굴이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바뀌었다. 진혁과 얘기하고 있었던 걸 눈치챈 것이다.

그러나 이모는 잠깐 혀를 차며 한숨을 쉬었을 뿐 그것에 대해 별달리 말하지 않고 화장실에 가기 전 나누고 있던 이야기로 바로 돌아갔다.

“그럼 희나 넌 여기로 정했으면 좋겠니?”

“네. 저는 여기가 좋은데…….”

“이모는 아무래도 이 집이 좋은 것 같아. 방은 조금 좁지만 큰길에 있고 동네가 밝아서 안전하잖아.”

이모의 손에는 디지털 카메라가 들려 있었다. 두 사람은 낮 동안 공인 중개사와 함께 돌아다니며 집을 돌아본 후 식사를 하면서 상의하는 중이었다. 이모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희나를 보면서 말했다.

“아무래도 여자애 혼자 사는 집이니까 방범이 중요하잖니.”

희나는 이모가 아버지가 강도에게 살해당한 일을 꽤나 마음 쓰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녀도 그 일이 있고 나서 조금 무서워지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희나의 아버지를 살해한 살인범이 사건 2주일 만에 잡혔다. 허름하기 짝이 없는 집에 우연히 강도가 들 가능성은 희박했으므로 주변을 샅샅이 조사한 결과 곧 용의자를 좁힐 수 있었다.

경찰의 예상대로 범인은 면식범으로 아버지와 인력 시장에서 만나 함께 포커를 치곤 하던 노숙자였다. 그는 함께 노름을 하다가 아버지에게 많은 현금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범행을 저지른 모양이었다.

정처가 없는 노숙자인지라 현금을 손에 넣자마자 목포까지 도주하는 바람에 잡지 못할 뻔했으나, 제 버릇을 못 버리고 현지 하우스에서 노름을 하다가 검거되었다. 노숙자가 현금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을 수상하게 여긴 여관 주인이 신고를 한 것이다.

범인이 잡혀서 희나가 정말 기뻤던 것은 돈을 되찾을 희망이 보였기 때문이다.

범인이 보유하고 있던 현금은 희나의 돈이라는 증거가 상당히 명백했으므로 당장은 어렵지만 재판이 끝나는 대로 그녀의 손으로 돌아올 거라고 경찰이 말해주었다.

이미 대부분을 써 버려 남은 돈은 400만 원 남짓이었으나 완전히 무일푼이 되었다고 느꼈을 때의 탈력감보다는 훨씬 나았다.

조금이나마 남아 있다는 것에 희나는 다시 시작할 용기가 솟았다. 물론 그 용기의 대부분은 진혁에게서 온 것이지만.

계속 지훈의 집에 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희나는 고심 끝에 이모와 상의하여 독립하기로 했다. 진혁과 함께 있고 싶긴 했지만 동거는 역시 좋지 않다고 서로 동의했다.

이모는 두 남매가 학대당하는 것을 알면서도 긴 세월 모른 척한 것이 마음에 맺혀 있었던지, 형편이 넉넉지 않은 와중에도 방을 구해주겠다고 나섰다. 희나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살다가 돈이 돌아오는 대로 갚기로 하고 이모에게 돈을 빌렸다.

등교하기 전에 자취를 시작하고 싶었기 때문에 이모와 희나는 장례식이 끝나고 주위가 안정되자마자 방을 알아보러 나섰다.

보증금을 빌려주는 데다가 선뜻 함께 나서 방을 알아봐 주고 보증인이 되어줄 어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예전과 어마어마하게 다른 든든함이 있었다. 희나는 아버지가 얼마나 두 남매의 인생의 짐이었나를 새삼 깨달았다.

“정 그러시면 이모 뜻대로 할게요. 이 방으로 해요.”

굳이 고집을 부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희나는 이모가 원하는 방에 동의하기로 했다. 사실 다른 방을 원했던 이유는 진혁이 사는 낙성대에서 가까운 곳이라는 것 정도였기 때문이다.

결정되자 일사천리로 계약에서 입금까지 진행되었다. 새로운 방은 도배와 청소를 마친 뒤 화요일에 입주하기로 했다.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 전화 꼭 하구. 이거 지훈이 부모님 갖다 드려, 응?”

“네, 정말 고맙습니다.”

계약을 마친 이모는 백화점에서 사 온 듯한 선물 꾸러미를 희나에게 안겨 주며 말했다. 희나와 희원을 머물게 해준 답례를 하는 이모를 보니 왠지 얼굴이 뜨거워져서 빨개진 얼굴로 희나는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다.

누군가가 이렇게 생각해준다는 게 어색하고 낯설면서도 기쁘다. 묵직한 쇼핑백을 손에 들고 희나는 돌아서는 이모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 마음 한구석에 죄책감이 있었다.

희나는 오늘 진혁의 집으로 가서 묵을 생각이었다. 이모가 탐탁지 않아 한다는 것을 알지만, 독립하기 전에 하루 정도는 진혁의 집에서 밤을 보내고 싶었다. 넓고 따뜻한 품에 안겨서 잠들고 싶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아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쇼핑백 봉지를 흔들며 낙성대역으로 향하는 길에 희나는 휴대폰을 꺼냈다. 잃어버렸던 휴대폰은 집에 떨어뜨리고 나왔던 것을 경찰이 돌려주었다. 희나에 대한 수색 영장이 나오기도 전에 범인이 잡힌 관계로 조사는 하지 않았다고 했다.

「오늘은 이모네 집에서 자고 내일 들어갈게.」

희나는 찔리는 양심을 억누르며 지훈에게 거짓 문자를 보냈다. 그렇게 여러 사람에게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진혁의 집이 가까워질수록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이미 들킬 대로 들켜 버리니 도리어 숨길 게 없었다.

희나는 익숙한 길을 지나 진혁의 집에 가서 받아 둔 열쇠로 문을 열었다.

언제나처럼 청결한 집은 비어 있었다. 진혁은 희나를 걱정하면서도 주말을 맞아 바쁜 부모님 일을 돕기 위해 본가에 내려갔다. 그는 오늘 밤에나 돌아올 것이다. 희나는 말 안 하고 기다리고 있다가 깜짝 놀라게 해줄 생각이었다.

기왕 기다리는 거 돌아와서 기분 좋으라고 청소를 하려 했지만 워낙 깔끔해서 할 게 별로 없었다.

‘너무 일찍 왔나.’

진혁은 밤중에나 올 텐데 아직 2시 정도였다. TV도 책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희나는 할 일이 없어 잠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진혁에게 메시지라도 보내고 싶었지만 일하는 데 방해하고 싶지도 않고, 말이 길어지면 집에 와 있는 걸 들킬까 봐 그만두었다.

그렇게 가만히 앉아 있다가 문득 호기심이 솟아서 희나는 슬쩍 진혁의 방으로 들어갔다.

진혁의 향기가 풍기는 정돈된 침대에 걸터앉아서 희나는 방을 한번 쭈욱 훑어보았다. 한쪽 면을 가득 메운 책장에는 재미없어 보이는 전공 서적들과 소설책들이 꽂혀 있었다. DVD장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다큐멘터리들을 보고 희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진짜 재미없는 아저씨라니까-. 흐응…….’

입을 주욱 내민 채 시선을 돌려 책상 위쪽을 보던 희나의 눈이 번쩍 빛났다. 드디어 재미있어 보이는 걸 찾은 것이다. 책상 옆에 꽂혀 있는 것은 바로 앨범이었다.

희나가 신나서 앨범을 뽑아 들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문 쪽에 인기척이 있더니 누가 열쇠를 꽂고 돌리는 소리가 들렸다.

‘벌써 돌아왔나?’

놀라서 뽑으려던 앨범을 제자리에 돌려두고 희나는 황급히 방에서 나왔다. 문을 열고 쿵쿵쿵하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때 진혁의 방에서 머리를 내민 희나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집에 들어선 것은 진혁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강도나 도둑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웬 화려한 갈색머리에 짧은 치마를 입은 여자가 가방을 소파에 집어던지고 냉장고를 열고 있었다.

희나가 놀라서 흠칫 뒤로 물러서는 기척에 그녀도 뒤를 돌아보았다.

곧 서로를 발견한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앗!”

“아아아아아악! 당신 누, 누구얏! 누구야아아아아앗!”

낯선 여인은 누구냐고 버럭 외치며 당장 주방 쪽으로 달려가더니 프라이팬을 냅다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잔뜩 경계하는 표정으로 희나를 쳐다보았다.

패닉에 빠진 와중에도 희나는 상대 여자가 집 구조에 익숙해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얼굴도 어딘가 낯이 익다. 곧 머릿속에 한 이름이 떠올라 희나의 입 밖으로 나왔다.

“유, 유진혜?”

그러자 그녀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어렸다.

“누구예요? 나 알아요?”

진혜는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프라이팬을 내려놓지 않은 채 질문을 던져 왔다. 그녀가 진혜란 걸 알자 파랗게 질렸던 희나의 얼굴이 조금이나마 풀렸다. 희나는 진정시키려는 듯 손을 흔들면서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지, 진혜 씨 맞죠? 저기 저는…….”

“누군데요. 확실히 말해봐요.”

“아, 그게 제 이름은 주희나구요. 그쪽 오빠랑 좀 아는…….”

오빠란 말이 나오자 진혜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그녀는 입을 동그랗게 모으고 호오- 하는 소리를 내더니 말했다.

“오빠 여자 친구예요?”

잔뜩 빨개진 얼굴로 희나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진혜는 “으아-.” 하는 소리를 내더니 안도하는 표정을 지으며 프라이팬을 휙 던졌다.

“아- 뭐야. 깜짝 놀랐잖아.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왔구만. 오빠 어딨어요? 내려갔다고 들었는데?”

“내려간 거 맞아요. 지금 집에 없어요.”

“그럼 오빠도 없는데 뭐하는…….”

문이 제대로 닫히지 않아 삐삐 소리를 내는 냉장고 쪽으로 걸어가 문을 열던 진혜는 말을 멈추고 입을 떡 벌리면서 희나를 쳐다보았다.

“헐. 혹시 둘이 같이 사는 거예요?”

“그게…… 그런 게 아니고…….”

쩔쩔 매며 대답을 못 하는 희나를 내버려 둔 채 진혜는 성큼성큼 원래의 자기 방으로 걸어가더니 문을 휙 열었다.

“뭐야, 못 보던 물건 잔뜩 있고- 같이 사는 거 맞네!”

희나가 빈손으로 집에 왔을 때 진혁이 임시로 사 준 물건들을 버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희나가 당황해서 말도 못 하고 서 있는데 진혜가 방에서 나와 그녀의 앞으로 왔다. 그리고 얼굴을 가까이 들이미는 바람에 희나는 깜짝 놀랐다.

“흐응…….”

진혜는 진땀을 흘리고 있는 희나의 얼굴을 한동안 유심히 쳐다보는가 싶더니 갑자기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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