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당신의 모든 순간 (1)
“네가 희나니? 아이고, 많이 컸네.”
생면부지의 아주머니가 다가와서 또다시 반색을 한다.
희나는 자동적으로 허리를 깊이 굽히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네, 저희는 건강해요, 감사합니다. 몇 번이나 입 밖에 낸 단어들이 매크로처럼 줄줄이 튀어나왔다.
간신히 모르는 여인이 지나가고 희나는 지친 몸을 다시 한쪽 구석에 기댔다.
아버지의 빈소를 차린 지 이틀째.
예상대로 장례식장은 한산하고 찾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첫날에는 정말 민망할 정도로 사람이 전혀 들지 않았어도 둘째 날은 주말이어서인지 조문객이 나름 있었다. 희나는 과연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할 사람이 있긴 있을까, 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인생에도 나름의 인맥이 있었던 모양이다.
인력 시장에서 함께 일했던 것 같은 남자 대여섯 명은 첫날에 와서 형님, 형님 하고 통곡을 하더니 이틀째까지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제 세상에 남은 혈육은 희원과 둘뿐이려니 생각했는데, 알지도 못하는 친척이 이렇게나 많았음을 알고 희나는 깜짝 놀랐다.
친가 쪽에서 큰아버지와 삼촌, 고모들이 사촌을 몇 명이나 데리고 찾아왔다. 친가 쪽에서도 아버지가 병원비로 빚을 지고, 술을 마시며 난동을 부리게 되고 나서부터 연락을 끊은 모양이었다.
의외인 것은 희나의 어머니가 죽어서 아무 상관도 없게 된 외가에서도 꽤나 찾아온 것이다.
그들은 다들 소박하고 평범해서 너무나 낯설었다. 희나를 반가워하고 따뜻하게 말을 걸어 왔지만, 어른과 얘기를 나눠본 적도 없는 사춘기 소녀로서는 싹싹하게 대하기가 힘들었다.
이모는 얼굴이 자꾸 빨개지고 어색해서 도망쳐버리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앉아 있는 희나를 신경 써주느라 수다스럽게 말을 자주 걸었다. 희나도 그것이 싫지는 않았지만 난처했다. 제발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둬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30분 전에 다녀온 화장실에 또 간다고 말하고 간신히 빠져나온 희나는 되도록 느릿느릿 손을 씻으며 시간을 끌다가 빈소로 돌아갔다.
빈소 한구석에는 교복을 입은 희나네 학교 학생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박 선생이 연락했는지 학교에서도 제법 사람들이 왔다 갔다. 민지를 비롯한 클래스메이트들뿐 아니라 7반 남학생들도 단체로 방문했다.
지훈이와 현상, 병태는 첫날부터 와서 밤을 새우고 갔다. 이모는 지훈이 매우 맘에 들었는지 희나에게 와서 은근히 지훈이 어떠냐고 계속 물어보곤 했다. 아마 희원의 친구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누가 왔건 오지 않았건 하는 문제는 희나에게 있어 아무래도 좋았다. 희나의 머릿속은 너무 답답해서 폭발할 지경이었다.
방문한 사람들 누구도 진혁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먼저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니 갑갑하기 짝이 없었다. 전화를 걸고 싶어도 공중전화가 씨가 마른 세상이라 멀리까지 걸러 나갈 짬이 나질 않았다.
지친 얼굴로 쭈그리고 앉아 있던 희나는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시체처럼 일어섰다. 고개를 조아리며 또 모르는 사람들과 악수하고 인사하고 빈소를 안내했다.
몸이 피곤하고 정신은 혼미할 지경이었다. 이제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학생들은 모두 돌아가고 어른들과 친척들이 남아서 제법 떠들썩한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이제 해가 뜨면 발인이니 내일이 되면 이것들도 모두 끝이다.
어른들 상에 음식 모자란 것이 없나 둘러보고 돌아서던 희나의 눈이 크게 뜨였다.
빈소 입구에 진혁이 서 있었다. 머리를 단정히 넘기고 검은 정장을 입은 그는 평소보다 어른스럽고 차분해 보였다.
때 아닌 잘생긴 청년이 등장하자 술을 마시던 어른들의 시선이 쏠렸다. 희나보다 앞쪽에 앉아 있던 이모가 일어나서 물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아, 그게…… 희나와 아는 사이입니다만…….”
희나는 황급히 걸어가서 진혁 앞에 섰다. 그리고 빨개진 얼굴로 그를 잡아끌어 영정 쪽으로 안내했다.
진혁이 분향을 하는 사이 이모가 희나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물었다.
“고등학생은 아닌 거 같은데, 대학생이니? 남자 친구야?”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서 희나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그것만으로 이모는 알아챘는지 짓궂게 쿡쿡 웃었다. 그런 거 아니라고 항변하려는데 분향을 마친 진혁이 다가왔다.
“괜찮아? 많이 피곤해 보이네.”
“괜찮아요. 여긴 뭐하러 왔어요?”
계속 보고 싶었던 주제에 당황해서 말이 까칠하게 나갔다. 그러자 이모가 웃으면서 희나를 잡아당기고는 붙임성 있게 진혁에게 말을 걸었다.
“얘가 기껏 와주셨는데 왜 이런대. 안녕하세요, 내가 희나 이모 되는 사람이에요.”
“아, 네. 처음 뵙겠습니다. 유진혁이라고 합니다.”
진혁이 반듯하게 인사를 하자 이모가 흐뭇하게 미소를 지으며 진혁의 팔을 툭툭 쳤다.
“아주 훤칠하게 잘도 생겼네. 대학생?”
“네, 그렇습니다만…….”
“똑똑해 보이는데 예의도 바르네. 여기 이쪽으로 와서 어른들한테 인사할래요? 다 희나 친척들인데.”
“아, 이모. 저기, 잠깐만…….”
희나가 얼른 말리려 했지만 그럴 새도 없이 이모가 어리둥절해하는 진혁을 끌고 가 친척들 사이에 앉혔다. 희나의 남자 친구라고 확신하는 듯한 태도였다.
갑자기 몰아붙여져서 당황할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진혁은 싹싹하게 어른들에게 대답을 해서 크게 호감을 샀다. 술도 따라주고 화기애애하게 돌아가던 분위기는 한 어른의 질문에 곧 뚝 멈췄다.
“서울대생이라니, 이렇게 잘생겼는데, 아주 난 놈이네, 난 놈이여. 그래, 나이가 어떻게 되나?”
“그게…… 스물다섯 살입니다.”
그 대답에 주변 어른들의 태도가 당황한 듯 굳었다. 뽀얀 모양새를 보고 스무 살 정도라고 생각했던 것이 틀림없다. 일곱 살 차이가 이상할 건 없지만, 스물다섯 살과 열여덟 살 여고생은 이상하다.
호의적이던 태도가 사라지고 진혁을 보며 헛웃음들을 짓고 있었다. 줄곧 웃고 있던 이모마저 미묘한 표정이었다. 그 눈빛들 사이에 여고생이나 사귀는 이상한 녀석이라고 말하는 듯한 경멸이 섞여 있는 것을 보고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진 희나가 얼른 끼어들어서 진혁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늦었으니까 이제 가요.”
“저기, 잠깐만, 왜 그래.”
“이모, 나갔다 올게요. 잠깐만 부탁드릴게요.”
희나는 막무가내로 진혁의 팔을 끌고 그곳을 벗어났다. 그리고 장례식장을 나와서 아예 병원 부지 자체를 벗어난 뒤 병원 뒤쪽에 있는 아파트 단지로 들어갔다.
단지 안에 있는 후미진 놀이터까지 빠른 걸음으로 걸어와서야 희나는 진혁의 팔을 놓았다. 그리고 곧바로 책망하는 듯한 말투로 쏘아붙였다.
“여기 왜 왔어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왔는데…….”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인 거 몰라요? 바보 아저씨가!”
“아, 미안. 내가 와서 곤란하게 된 건가.”
“그걸 말이라고 해요?”
그러자 진혁이 금방 미안해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 얼굴을 보자 죄책감이 솟구쳐 올라 희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사실 그냥 속상해서 한 화풀이일 뿐이다. 그냥 순수하게 걱정해서 와줬다는 걸 알기 때문에 더 속상했다. 사람들이 진혁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것이 말도 못 하게 속상했다. 이런 착해 빠진 사람을, 알지도 못하면서 이상한 사람 취급하는 게 너무 싫다.
“……미안해요.”
방금 전까지 틱틱대다가 곧 울 듯한 표정이 되어 사과하는 희나를 보고 진혁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희나야? 괜찮은 거야?”
희나는 대답 대신 진혁에게 다가가서 허리를 꼭 끌어안고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언제나처럼 향긋한 진혁의 향기를 맡자 갑갑하고 온통 짜증으로 가득 찼던 속이 누그러드는 것 같다.
곧 진혁이 희나를 따뜻하게 마주 안아 왔다. 단단한 팔에 안기니 말할 수 없는 행복감과 동시에 여태껏 끙끙 앓고 있던 걱정들이 몰려왔다.
“……어떻게 된 거예요? 형사는 뭐래요? 학교에 다 알려졌어요?”
“음. 그게…….”
진혁은 잠시 말을 고르는 듯하다가 담담하게 대답해 주었다.
“형사한테는 그냥 네가 돈을 잃어버리고 충격을 받아서 우리 집으로 찾아와서 재웠다는 정도로만 말했어. 그리고…… 우선 박 선생님께서 아무 일도 없었던 건 믿어주셨어.”
“그럼…… 아무 일 없이 넘어가는 거예요?”
“큰 문제는 안 될 것 같지만…… 학교에서 조사위원회를 열기로 했어.”
희나는 화들짝 놀라서 포근히 기대고 있던 품에서 얼굴을 떼어내고 진혁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조사위원회가 뭐예요? 열리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냥 간단히 조사를 받아서 교생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행위를 했다고 판단되면 교생 실습은 이수 취소 처리될 거야. 아마 내가 다니는 학교로 공문이 날아오는 정도고……. 큰일은 없을 거야.”
진혁은 안심시키려는 듯 차분하게 말했지만 희나의 얼굴은 울상이 되었다. 그 보드라운 뺨을 큰 손으로 감싸며 진혁이 잔잔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런 표정 할 거 없어. 내가 정식 교사인 건 아니니까 딱히 크게 불이익 받는 건 아니야. 교직 이수는 못 하게 되겠지만, 괜찮아.”
“……교직 이수 못 하면 어떻게 되는데요? 이제 교사는 못 하는 거예요?”
“아마 그렇게 되겠지.”
희나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뚝 흘러넘칠 것 같은 희나를 보며 진혁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울지 마. 별일 아니야.”
“별일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정말 별일 아닌데 뭐. 어차피 우리 학교에서는 교직 이수하는 사람이 딱히 많은 것도 아니야. 우리 학과에서도 교직 이수하는 건 두세 명뿐이었고……. 그냥 취업하면 되는 거니까 크게 문제될 건 없어.”
“그치만 선생님 학교로도 연락 가는 거 아니에요?”
학교에 고등학생이랑 교제해서 교직 이수가 취소됐다는 것이 알려지면 구설수에 오를 것은 자명하다. 아까 친척들이 보냈던 것 같은 눈초리를 진혁이 학교에서도 받을 것을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결국 울어 버리는 희나를 끌어당겨 품에 안고 진혁이 조용조용 말했다.
“대학은 고등학교랑 달라. 그리고 난 이번 학기로 졸업 학점은 이미 다 채웠어. 그냥 졸업하면 되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이런 건 싫어요. 잘못한 것도 하나도 없는데…….”
진혁은 훌쩍훌쩍 울기 시작한 희나의 손을 잡아끌고 벤치에 앉혔다. 그리고 그 앞 바닥에 앉아서 고개를 수그린 희나의 눈물을 닦아주며 달래기 시작했다.
“걱정 그만해. 같이 있고 싶은 거 아니었어?”
“같이 있고 싶어요. 그치만 이런 건 싫어……. 흑…….”
“같이 있으려면 어쩔 수 없는 문제야. 내가 책임져야 될 문제니까 피할 생각은 없어.”
“내 잘못인데……. 흑. 선생님 혼자 책임지는 거잖아요.”
“넌 아직 어리잖아. 당연히 다 내 책임이지.”
그러면서 진혁이 우는 희나의 볼을 잡아당겼다. 장난치는 것이 싫어서 희나가 뿌리치고 인상을 찌푸리자 진혁이 쿡쿡 웃으면서 볼을 찔렀다.
“그렇게 안 울더니, 울보가 됐네.”
“흑. 이런 건 싫어요. 이런 건 싫어.”
“싫다니. 이제 나 필요 없는 거야?”
히끅거리면서도 희나는 필요 없냐는 진혁의 말에 다급하게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러자 진혁이 쿡쿡 웃으며 희나를 끌어당겼다.
“이리 와.”
희나는 모래밭에 앉아 팔을 벌리고 있는 진혁의 넓은 품에 폭 안겼다. 목을 꼭 끌어안고 매달리자 진혁이 귓가에 대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너만 괜찮으면 난 괜찮아. 걱정하지 말고, 네 일만 생각하면 돼.”
“나 땜에 선생님 중요한 거 다 망쳤는데 어떻게 그래요.”
“내가 어떻게 될지 걱정 안 해도 돼. 나한테는 네가 제일 중요해.”
진실한 속삭임에, 심장에 따뜻함이 충만해 오는 것 같다. 왈칵 눈물이 솟아 나와서 희나는 입술을 앙다물면서 그의 어깨에 내리치듯 고개를 묻었다.
“완전 바보. 바보 아저씨.”
작게 중얼거리자 진혁이 부드럽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기분은 좀 괜찮아?”
“괜찮아요. 걱정 좀 그만해요, 바보 아저씨 주제에.”
“그럼 걱정을 좀 시키지 마.”
“내가 무슨 걱정을 시켜요. 혼자 사서 하는 거지.”
얄밉게 말하는 희나를 떼어내서 진혁이 혼내듯 뺨을 양쪽으로 잡아 늘렸다. 못생겼다- 하고 쿡쿡 중얼거리는 진혁에게 고양이처럼 혀를 내밀어 보인 희나는 그의 목을 두 팔로 감싸고 작게 말했다.
“키스해주세요.”
“여기서?”
그리고 놀란 듯 난처한 표정을 짓는 진혁의 얼굴 바로 앞에 다가가서 유혹하듯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긴 속눈썹이 살짝 흔들리는가 싶더니 곧 따뜻한 입술이 부딪쳐 왔다.
겹쳐진 입술은 희나의 입술을 가볍게 머금고 빨아올린 뒤 아쉬운 듯 떨어졌다. 살짝 붉어진 얼굴로 깊게 숨을 내쉬면서 진혁이 속삭였다.
“나중에 집에 가면 많이 해줄게. 이제 울지 말고, 끝나면 연락해. 데리러 올 테니까.”
다정함에 또 울 것 같아서 희나는 고개를 세게 끄덕이고 다시 품에 얼굴을 묻었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좋고 기쁘고 행복한데, 왜 이러면 안 된다는 걸까. 싫다. 떨어지기 싫다.
절대 놓아주고 싶지 않다. 잃고 싶지 않다.
진혁의 넓은 등에 팔을 두른 채 희나는 몇 번이고 그렇게 생각했다. 작은 손이 놓치지 않겠다는 듯 옷자락을 꼭 쥐고 있었지만, 떨려서 그 힘은 너무 가냘프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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