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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그 너머에는-60화 (60/140)

60화. 파란 (2)

가만히 고개를 숙인 채 희나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형사 두 명은 경찰서로 동행해줄 수 있는지 물어왔다. 박 선생이 앞에 있는 상담실보다는 그 편이 훨씬 나을 것 같아 희나는 동의하고 서로 가기로 했다.

그러나 박 선생도 보호자 자격으로 동행하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함께 경찰서로 갔다. 그녀는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조사실로 향한 건 희나 혼자였다.

“이쪽으로 들어가면 돼.”

자신을 김경윤이라고 소개한 젊은 형사가 한쪽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문 위쪽에는 조사실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영화에서 본 조사실처럼 좁은 방에 거울처럼 보이는 창이 있고 책상과 의자가 덩그러니 있는 풍경을 생각했지만, 내부는 희나의 예상과는 달랐다.

널따란 사무실 같은 공간이 파티션으로 나뉘어 있고, 각각의 파티션 안쪽에서 컴퓨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사람들이 조사를 받고 있었다. 마치 은행 상담 창구 같은 모습에 희나는 얼떨떨해졌다.

김 형사는 그중 한 파티션 안으로 희나를 데려가 앉혔다. 그는 곧 이름과 나이 같은 인적 사항을 물은 뒤 희나의 진술을 받기 시작했다.

“사건 전날에 병원에서 나갔을 때부터 죽 어디서 뭘 했는지 자세히 설명해줄 수 있겠니?”

희나는 담담하게 죽을 생각을 하고 병원을 나왔다고 말했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마음이 바뀌어서 아는 사람 집으로 가서 있었어요.”

“아는 사람 누구?”

“……그냥 아는 사람이요.”

다시 희나가 입을 다물자 김 형사가 날카로운 어조로 물었다.

“남자였니?”

역시 대답하지 않았으나, 분위기로 볼 때 맞다는 것을 짐작한 듯했다. 그는 조용한 목소리로 희나를 설득했다.

“어디서 만난 사람이야? 성인이니?”

“……그냥 알던 사람이에요. 그리고 이상한 생각 하시는 거면, 그런 거 아니에요.”

희나는 쏘아붙이듯 말하고 고집스레 입을 다물었다. 김 형사는 좀 더 설득하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네가 말을 안 해도, 수색 영장을 받아서 휴대폰을 수색하면 어쨌든 결국 알게 될 거야.”

근래 몇 주간 진혁과는 전혀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으므로 휴대폰을 조사해도 나올 게 없을 거다. 원래부터 카카오톡으로만 연락했고, 실습 마지막 날 화나서 지도실을 나온 뒤 대화창에서도 나왔기 때문에 기록도 없다.

들키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에 희나는 좀 더 버티기로 결심하고 불쑥 말했다.

“내가 그런 거 아니에요.”

“무슨 말이니? 그러지 않았다니, 뭐가?”

“내가 안 죽였어요.”

그렇게 말하며 희나는 커다란 눈으로 김 형사를 또렷하게 바라보았다. 아주 날카로운 눈으로 희나를 잠시 마주 보던 김 형사는 줄곧 두드리고 있던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깍지를 꼈다. 그리고 눈썹을 한번 찡긋한 뒤 말했다.

“네가 미성년자라 좀 걸리지만, 그래도 어디 한번 시원하게 까놓고 얘기해보자.”

“……뭘 얘기해요?”

“사실 네게 혐의가 아예 없는 건 아니야.”

조금 짐작은 했지만 김 형사의 말에 희나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생각하고 있었어도 역시 형사의 입에서 직접 듣는 건 달라 잠시 등줄기가 서늘했다. 김 형사의 또박또박한 말은 계속 이어졌다.

“너는 동기도 있고, 증인들이 많은 앞에서 피해자에 대한 강한 살의도 표현했어. 지금으로서는 알리바이도 확실하지 않지.”

“…….”

“하지만 난 네가 그랬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그가 혐의가 가는 이유를 하나하나 조목조목 댈 때마다 흐르던 식은땀이 마지막 말에 조금 멈췄다. 눈을 내리깔고 숨죽인 채 듣고 있던 희나가 다시 그를 올려보았다. 그가 볼을 긁적거리며 말했다.

“일단, 네가 정말 그랬다면 이런 식으로 어슬렁거리며 학교로 돌아오진 않았겠지. 휴대폰도 돈도 두고 도망칠 이유도 없고. 거기다 너희처럼 오래 학대당한 경우에는…… 돈이 사라진 걸 알자마자 칼을 들고 찔렀으면 몰라도 다음 날 돌아와서 칼로 찌르고 가진 않았을 거야.”

“…….”

“그리고 뭣보다, 죄가 있는 사람은 티가 나게 되어 있어. 네가 감추고 있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살인을 저지르지는 않았다는 걸 알 거 같구나.”

그의 말을 듣자 긴장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아 희나는 다시 마음을 추스르려 애썼다. 이렇게 경계심을 없애고 속내를 끌어내려는 베테랑 수법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녹아버린 마음은 아까처럼 다시 잔뜩 움츠러들지 않았다.

그녀는 누그러진 시선으로 김 형사를 바라보았다. 거짓말을 알아볼 수 있다는 그와 다르게, 희나는 도저히 그의 속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정말 진심을 말하는 건지, 아닌지 간파할 수가 없다. 어린 희나가 파악하기에 그는 너무 경험이 많고, 어른이었다.

부드러워진 듯하다가 다시 토끼처럼 불안한 시선으로 돌아간 희나를 관찰하듯 지켜보던 김 형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슬프니?”

잠시 묵묵히 그를 쳐다보다가, 희나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가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아버지를 죽인 범인이 잡히길 바라지 않니?”

“그 사람이 잡히면…….”

말이 거의 없던 희나가 입을 열자 그가 잘 귀 기울이려는 듯 좀 몸을 내밀었다. 희나는 그것을 보고 또렷하게 물었다.

“만약에 그 사람이 제 돈을 가져갔으면 제가 돌려받을 수 있나요?”

그녀의 질문에 형사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이런 건조한 질문을 받을 것은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다.

젊지만 완숙해 보이는 형사는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가녀리고, 예쁘고, 학대하던 아버지를 잃은 지 얼마 안 되는 어린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담담하고, 움츠러들어 있고, 뭔가를 감추려 애쓰고 있고, 아버지의 죽음에 큰 동요 없이 메말라 있다. 그 모습을 본 그는 아주 서글픈 기분이 들었다.

“제가 그런 게 아니에요. 범인은 어차피 곧 잡힐 테니까 전 어디 있었는지 말 안 할래요.”

너무 거친 범행 수법과, 갑자기 생긴 금전을 노린 뻔한 범죄였기에 김 형사도 범인이 금방 잡힐 거라는 말에 속으로 동의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래, 그냥 아무 말 말고 있으라고 말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기에 그는 한숨을 쉰 뒤 단지 이렇게 말했다.

“그래, 말하고 싶어지면 말해. 조사받고 나면 어떻게 할 거니?”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희나는 머리를 굴리며 조심스레 대답했다.

여길 나가서 진혁의 집으로 가면 형사에게 혹시 미행을 당하게 되는 걸까?

경찰에 대해 잘 몰랐기에 불안했다. 만일을 대비해서 진혁의 집으로 가는 것은 관두는 게 나을 것 같다. 하지만 달리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라 난감했기에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김 형사가 잠시 텀을 두고 말했다.

“네 동생에게도 연락이 닿았어. 어디 있는지 아는 학생이 있어서. 조금 있다가 올 거야.”

희원이 오는 것에 큰 관심은 없었다. 거기에 대해서는 그저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다음 말에는 움찔하고 말았다.

“동생이랑 연결시켜 준 건 신지훈이란 학생이야.”

희나의 표정이 바뀐 것을 눈치챘는지 김 형사가 그 화제를 좀 더 끌고 갔다.

“사실 우린 어제 학교에 가서 너에 대해서 이런저런 얘기를 들었어. 그 학생이 네 남자 친구라던데, 맞니?”

“……별로 상관없는 얘기잖아요.”

“글쎄, 어떨까. 남자 친구가 있는데, 왜 다른 남자랑 있었던 거니?”

“…….”

“지훈이란 학생은 상대가 누군지 아니?”

태연하려 애썼지만 눈가가 경련하듯 떨렸다. 김 형사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 학생이랑 간단하게 얘기를 해봤는데, 동생 연락처는 알려줬지만 너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고 하고 아무 말도 안 하더구나. 범인이 잡히지 않으면 그 학생하고도 한 번 더 얘기를 해봐야 할 것 같다.”

희나의 머릿속이 핑핑 돌아갔다.

지훈이가 나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은 것은, 그럴 법한 일이다. 아마 잘 모르는 상황에서 나에 대한 말을 삼가려고 애썼겠지. 다시 얘기를 해도 아마 그럴 거야.

하지만 선생님에 대해서는 어떨까?

생각해볼 것도 없다. 그 앤 선생님을 미워하니까, 학교에도 선생님에 대해 몇 번이고 말하고 싶어 했다. 형사가 나와 함께 있었을 법한 남자를 묻는다면 틀림없이 대답해줄 게 뻔해.

지훈이 형사에게 말하고, 그게 박 선생에게 전해져 학교 전체에 알려지는 그림이 눈앞에 선했다.

희나가 창백하게 질려서 앉아 있을 때 파티션으로 어떤 남자가 접근해서 작은 목소리로 김 형사에게 말을 걸었다.

“김 형사님, 다른 조사인도 지금 서에 도착했습니다.”

“그래? 그 동생?”

“네.”

희나에게도 들렸다는 걸 알 테지만 김 형사는 설명해주듯 말을 전했다.

“동생이 지금 서에 도착했다는구나. 잠시 얘기 나누겠니?”

희원과 할 말 같은 건 별달리 떠오르지 않았기에 희나는 그냥 잠잠히 있었다. 김 형사는 남자에게 “여기로 데려와.”라고 짧게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희원이 그 남자와 함께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다가온 희원은 파티션 안쪽에 하얘진 얼굴로 앉아 있는 희나를 발견하고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우선 희나 네 조사는 잠깐 멈추고 동생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 대기실에서 잠시 기다려줘.”

김 형사는 희나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 하는 걸 눈치챈 듯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뭔가를 출력하더니 출력물을 가지러 프린터 쪽으로 걸어갔다.

희나도 대기실로 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파티션을 나오기 위해 앞에 있는 희원을 지나치려는 순간 희원이 낮은 목소리로 희나를 불렀다.

“야.”

짧은 말에 뭔가 하고 돌아보자 희원이 입꼬리를 올려 웃고 있었다. 그는 재미있다는 어조로 희나를 보며 물었다.

“니가 죽였냐?”

던져 온 말의 내용에 희나는 말문이 막혔다. 불쾌함이 몰려와 인상을 찌푸리고 노려보자 희원이 픽 웃으며 어깨를 툭 두들겼다.

“그렇게 보지 마. 난 잘했다고 하려고 했어.”

“…….”

“그런 인간 죽어 마땅하지.”

일말의 정도 찾아볼 수 없는 희원의 말에 희나의 입이 벌어졌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역시 부적절하다. 희원에게 그런 말을 꺼내려던 희나는 그냥 입을 다물고 한숨을 쉬었다.

사실 그런 말을 하는 동생이 이상하다거나 혐오스럽지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 기저엔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이상한 동질감을 느끼고 안도하는 자신이 있었다. 그녀는 그런 스스로에 맥이 탁 풀렸다.

희나는 아직 멀찍이 서서 출력물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김 형사를 슬쩍 쳐다보며 희원에게 나직이 물었다.

“너…… 얘기 듣자마자 어땠어?”

“어떻긴 뭘 어때? 천벌을 받았구나 했지.”

“슬프진 않고?”

“슬프긴 개뿔. 괜히 찝찝하고 입맛 더럽긴 한데 솔직히 잘됐다는 생각이 훨씬 많이 든다. 그 새끼한테 처맞고 뜯긴 게 얼만데.”

희나는 뭔가에 걸린 듯 도저히 입 밖에 낼 수 없을 것 같은 얘기를 희원은 거침없이 시원시원하게 쏟아 냈다.

그 행동에 대한 가치 판단 이전에 살해당한 아버지에 대한 혐오를 거침없이 드러내는 모습을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희원이 손을 댄 게 절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건 솔직히 정말로 다행이었다.

희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솔직히 털어놓았다.

“사실 나도 비슷해. 솔직히……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렇게 생각하는 내가 정말 나쁜 것 같다고 생각했어.”

“뭐야, 왜 감수성 폭발하냐? 당연히 잘됐다고 생각하지. 넌 나보다 훨씬 더 털렸잖아.”

“폭발할 감수성이나 있냐. 우린 마음이 메마른 거 같은데.”

“메마르긴 했지. 너 지훈이 형 찼다며?”

툴툴거리던 희원이 뜬금없이 지훈의 얘기를 꺼냈다. 심각한 얘기중인데 제멋대로인 화제 전환에 희나가 인상을 찌푸리는데도 그는 아랑곳없이 떠들어댔다.

“너 진짜 돈 거 아니냐? 너 같은 게 지훈이 형 같은 사람을 어디 가서 만난다고.”

“시끄러워. 신경 끄시지.”

“너 그 형네 집 가봤어? 진짜 미친, 영화에 나오는 집인 줄 알았다. 완전 개좋던데.”

“그렇게 좋으면 니가 가서 같이 살든지. 됐으니까 입 다물어.”

파티션 쪽으로 다시 돌아오는 김 형사를 보고 희나가 급히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묵례하고 조사실을 벗어나려 하는데 김 형사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아, 그리고 얘기해야 될 게 있는데 말하는 걸 까먹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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