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파란 (1)
“어? 뭐, 뭐야-? 왜 그래?”
당황해하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희나는 군살 없는 탄탄한 허리를 꼭 안은 채 등에 얼굴을 묻고 고개를 저었다.
“나, 안 해요. 선생님이 그냥 다 만들어요.”
“……방금 전에는 한다고 했잖아…….”
“안 할래요. 그냥 이렇게 안고 있을래요.”
“이 변덕쟁이가……. 진짜 손 많이 가네-.”
“선생님 너무 좋아요…….”
그러자 진혁이 잠시 멈칫하더니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안고 있는 희나의 팔을 풀었다. 희나는 떨어지기 싫어서 힘을 줬지만 힘으로 당해 낼 수 없어서 떨어져버렸다.
입을 내밀고 불만스럽게 올려보던 희나의 눈이 부드럽게 감겼다. 돌아선 진혁이 입술을 겹쳐왔기 때문이다.
선 채로 희나의 허리를 꽉 안은 진혁은 몇 번이고 희나의 혀를 감아올렸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끓이고 있던 육수가 넘치기 시작하고 나서야 아쉬운 듯 떨어졌다. 그는 촉촉한 눈으로 희나를 보면서 또 한숨을 쉬었다.
“배고프지? 이쁜 짓 그만하고 저기 가서 불판 꺼내고 상 차려.”
“같이 하면 안 돼요?”
“나 그만 괴롭히고 저리 가-.”
그러면서 진혁은 다시 뭔가를 억누르는 듯 심호흡을 하더니 희나의 이마에 길게 뽀뽀를 하고는 놔주었다. 이미 홍당무가 된 희나는 시키는 대로 거실로 나와서 상을 차렸다.
다시 해도 역시 키스하는 거 너무 좋다. 하루 종일이라도 하고 있을 수 있을 거 같아. 이런 게 기분 좋을 거라고는 정말 상상도 못 했는데.
하도 순둥하게 굴어서 사귀게 돼도 어색해서 서로 눈도 못 마주치고 있을 줄 알았다.
손잡고 뽀뽀까지 넘어가는 데 1년쯤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그의 태도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어딘지 미묘한 배신감(?) 같은 것까지 들었다.
희나는 주방 서랍에서 숟가락을 꺼내면서 떠보듯 물었다.
“……선생님 의외로 바람둥이였던 거 아니에요?”
“내가 어딜 봐서 그래?”
“뽀뽀도 많이 해본 거 같고…… 너무 자연스러운데. 흠…….”
“내 나이 돼서 어색한 게 더 이상한 거잖아…….”
희나는 담담하게 대답하는 진혁의 옆얼굴을 올려보았다. 아직도 그녀는 어색하고 부끄럽고 홍조도 그대로 남아 있는데 진혁은 여유로워 보인다.
분명히 선생님도 고등학생이었던 때가 있었을 거고 그땐 어색했을 텐데. 그 모습을 놓친 게 왠지 억울하고 분하고 아쉽다. 저런 여유를 만들어준 본 적도 없는 선생님의 옛 여자 친구들이 못마땅하고 질투 난다.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희나는 툴툴거렸다.
“억울해. 난 남자 친구 사귄 적도 없는데.”
“내가 처음이면 운 좋은 거지. 내가 얼마나 잘해주는데.”
“……사귀니까 원래랑 말투가 너무 달라요. 느물느물 느끼해에-.”
“나 원래 이래. 실습 중이니까 이미지 관리한 거야.”
그러고 보니 친구들 앞에서 술에 취했을 때 어떤지를 못 봤다.
희나가 입을 비죽 내밀고 있자 진혁이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왜, 싫어?”
“……빨리 밥이나 먹어요.”
새침하게 대답하는 희나를 보고 쿡쿡 웃으면서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완성된 음식은 모두 맛있었다. 식사를 하면서 진혁이 허겁지겁 먹고 있는 희나에게 말했다.
“얼른 먹고 오늘은 일찍 자자. 내일은 학교에 가야지.”
“학교요?”
학교란 단어에 희나가 인상을 찌푸리자 진혁이 설득하듯 말했다.
“학교에 가야지. 그만둘 순 없잖아.”
“갔다가…… 괜히 일만 벌어지면 어떻게 해요. 지훈이도 나한테 화나 있을 건데…….”
“지훈이는 널 좋아하니까 화났어도 너한테 나쁘게는 못 할 거야.”
“……그걸 어떻게 알아요?”
“남잔 원래 그런 거야.”
당신이나 그렇겠지. 희나는 속으로 입을 비죽거렸다. 하지만 결국 진혁의 끈질긴 설득에 학교에 가겠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녀도 학교를 그만두는 건 내키지 않았다. 그간 힘들게 고생하며 다닌 게 수포로 돌아가는 것도 싫었고, 뭣보다 진혁은 서울대생인데 자신은 고등학교 중퇴인 건 역시 좀 그랬다.
실습은 어차피 끝났으니 위험은 확연히 줄었다. 집을 나간다고 했을 때 지훈이 화냈던 걸 생각해보면 다시 뒤를 밟힐 일도 아마 없을 것 같다.
희나는 옆에서 단정히 음식을 먹고 있는 진혁을 바라보면서 정말 조심해야지, 하고 몇 번이나 다짐했다.
이 사람과 함께, 계속 언제까지나 행복하고 싶다. 그것만이 지금 희나에게는 세상의 전부였다.
***
결심은 했지만 둘만의 시간이 너무 아쉬워서, 진혁에게 졸라댄 끝에 하루를 더 쉰 뒤 희나는 학교에 갔다.
월요일에 가방도 내버려둔 채 점심시간에 멋대로 하교하고 3일 만에 등교하는 거라 무진장 어색했다. 희나는 태연하려고 애쓰면서 벽에 붙은 채 교문을 들어섰다.
교문을 지나서 교실까지 오는 동안 희나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어쩐지 다들 이쪽을 쳐다보면서 소곤거리는 것 같았다. 굉장히 신경이 쓰였다. 혹시 지훈이 말해버린 건 아닐까? 아니면 길바닥에서 울었던 걸 누가 보고 알려진 건 아닐까.
점점 불안해지는 마음을 안고 희나는 황급히 교실로 들어갔다. 그녀가 들어서자마자 반 전체가 조용해지고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아무래도 너무 이상하다.
들여다볼 휴대폰도 없으니 힐끔대는 시선을 그대로 견디는 수밖에 없다. 왜 그렇게 쳐다보냐고 버럭 소리라도 지르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이럴 때 당최 왜 이러는 건지 물어볼 사람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러다 문득 희나는 민지를 떠올리고 그녀의 자리를 돌아보았다. 민지는 자리에 앉은 채 친구들과 함께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민지의 동그란 눈은 희나와 마주치자 깜짝 놀라는 것 같았지만, 피하지 않고 아주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니 더 불안하다. 견딜 수 없어서 일어나 물어보려는 순간 교실 문이 열리더니 반장이 몸을 내밀고 희나를 불렀다.
“주희나, 선생님이 상담실로 잠깐 오래.”
상담실.
그 세 글자를 듣자마자 희나는 등골이 싸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역시 들킨 걸까? 아니, 혹시 그냥 무단으로 결석을 오래 해서 그럴지도 몰라. 희나는 불안한 생각을 잠재우려고 애쓰면서 시체같이 뻣뻣한 걸음걸이로 교실을 걸어 나갔다. 그녀의 등 뒤로 바늘같이 따가운 아이들의 시선이 꽂히고 있었다.
이번 달 들어서 결석이 잦았으니까 상담실로 오라는 게 이상한 건 아니다. 거기다 심지어 월요일엔 무단 조퇴까지 했고. 그래, 분명히 그걸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하면 아이들의 시선이 설명이 안 되는데. 아무리 진정하려고 해도 불안감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가서 진혁 샘이랑 사귀냐고 물어보면 어떻게 하지? 갔는데 선생님들이 다 같이 모여서 어떻게 할지 회의하고 있으면 어쩌지. 지훈이도 함께 있는 거 아냐?
싫은 생각이 한도 끝도 없이 몰려왔다. 미친 듯이 심장이 뛰어서 토할 것 같은 기분으로 희나는 상담실 문을 열었다.
거기엔 다행히 담임인 박 선생 혼자서 앉아 있었다. 담임은 살짝 창백한 안색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희나에게 자리를 권한 뒤 그녀가 앉자마자 물어 왔다.
“몸은 괜찮니?”
희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담임의 눈치를 살폈다. 박 선생의 말이 이어졌다.
“조퇴하고 나서…… 학교에 안 와서 많이 걱정했어. 입원했던 병원에선 나갔대고, 연락해도 안 받고, 어디 갔는지도 몰라서…….”
입원이라면 탈수증으로 쓰러졌던 것일 텐데, 그걸 누가 학교에 말했단 거지? 희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박 선생은 희나 쪽은 쳐다보지도 못하면서 우물거리듯이 말했다.
“이번 주 지나도 못 찾으면 정식으로 경찰에서 수색했을 거야. 이렇게 학교에 와서 정말 다행이다.”
희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서야 계속 학교를 안 왔다면 실종 신고가 들어갈지도 몰랐다는 것을 깨닫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마터면 진혁의 집에서 경찰에 발견될 뻔한 것이다. 진혁의 말을 듣길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몸 괜찮아요.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디 있는지 몰라서 걱정했다면 진혁과의 사이가 들킨 것 같진 않아서 한결 마음을 놓은 채 희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와 동시에 1교시 수업 예비 종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담임인 박 선생이 조례에 들어가야 할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종소리를 듣고 시계를 쳐다보는 희나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수업에 안 들어가도 괜찮으니까, 잠깐 얘기 좀 더 하자.”
“네…….”
학교 안 온 것에 대해서 설교를 하려는 걸까. 희나는 되도록 그녀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도록 조심하며 안색을 살폈다.
박 선생의 표정은 뭔가 꾸중을 하려는 표정은 확실히 아니었다. 책상 위에 올려놓은 손이 슬며시 떨리고 있었고 안색은 아까보다도 더 안 좋았다. 그녀는 계속 희나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희나는 의아해졌다.
선생님과의 일은 모르는 것 같은데 왜 이러는 걸까. 뭔가 추궁하려는 것처럼도 보이지 않는데.
몇 번이나 초조하게 시계를 쳐다보고 한숨을 내쉬던 박 선생이 입을 열었다.
“희나야, 너한테 할 말이 있어.”
“네, 말씀하세요.”
말문을 열어놓고도 박 선생은 선뜻 말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다시 또 불안감이 밀려오려는 순간 상담실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와서 희나는 화들짝 놀랐다.
“네, 들어오세요.”
그러나 박 선생은 살았다는 듯 반색을 하며 말했다.
곧 문이 열리고 들어온 두 사람을 본 희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두 명의 30~40대로 보이는 남자들이었는데 학교에서 본 적이 없는 얼굴들이었다. 선생도 아닌 남자들이 왜 들어온 거지?
의아하게 쳐다보는 희나의 앞에서 두 사람은 박 선생과 인사하고 상담실의 나머지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어리둥절해 있는 희나를 보면서 말을 걸었다.
“네 이름이 주희나 맞니?”
“네……. 맞는데요.”
“만나서 반갑다. 우리는 서울 강동경찰서 소속 형사야.”
“형사…… 요?”
경찰이란 말에 희나는 겁을 먹었다. 경찰이 왜 여기에? 이미 실종 신고를 한 걸까?
좀 더 젊어 보이는 경찰이 희나를 잠시 쳐다보다가 박 선생에게 물었다.
“저희 오기 전에 좀 얘기하셨습니까?”
“아뇨, 아직…… 아무것도 얘기 안 했어요.”
그러자 두 경찰은 살짝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곧 나이 많은 경찰이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희나에게 조용히 말했다.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희나, 네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네?”
희나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아버지가 뭐?
제대로 들은 건지 귀가 의심스러웠다. 곧 형사들의 말이 이어졌다.
“발견은 어제 새벽에 했지만, 화요일 밤에 돌아가셨어.”
“…….”
“괜찮니?”
충격으로 벌어진 입술을 살짝 떠는 희나의 팔을 잡으며 박 선생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러나 희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죽다니, 현실감이 너무 없어 이상하다. 그러나 놀라울 정도로 하나도 슬프지 않았다. 그녀는 새하얘진 머리를 다잡으며 가까스로 질문했다.
“왜, 왜 돌아가셨는데요?”
“……집에 강도가 들었어.”
희나는 섬뜩해졌다. 강도라니. 10년 가까이 문 한 번 잠그지 않고 살았던 집이지만 도둑조차 든 적이 없다. 제정신인 강도라면 입구에서 곰팡이 냄새를 맡자마자 털 것이 없다는 걸 알 텐데.
거기까지 생각한 희나의 머리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아니, 어쩌면…….
“간단하게 탐문 조사를 해 봤는데, 네 아버지가 최근 거금이 생겼는지 씀씀이가 좋았다고 하더구나. 아무래도 우리는 그게 사건이랑 연관이 있을 거라 보고 있어.”
아버지에겐 희나의 돈이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만 한 돈을 아무리 흥청망청 썼다고 해도 벌써 다 썼을 리가 없었다. 도박해서 한 번에 날린 게 아니고서야 평생 가난하게 살아온 사람의 씀씀이란 뻔하다.
희나는 그날 몰려든 사람들 앞에서 고래고래 소리 질렀던 자신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돈을 가져갔다고 그렇게 악을 썼으니, 그걸 듣고 혹시나 남아 있는 돈을 노린 강도가 들어왔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더욱 섬뜩했다. 희나의 머릿속에 자신이 아버지에게 마지막으로 소리친 말들이 떠올랐다.
“제발 어디 가서 좀 죽어버려! 당신 같은 쓰레기만도 못한 인간!”
그 말을 소리칠 때는 진심이었다. 그런 인간 살아 있을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바로 다음 날, 정말 죽다니…….
뭔지 모르겠지만 바라던 대로 돼서 잘됐다는 기분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기분이 나쁘지도, 슬프지도, 아프지도 않고 뭐가 뭔지 모르겠다. 그저 확실한 것은 아주 진하게 씁쓸하고 너무나 껄끄럽고 소름 끼친다는 거다.
창백해져서 책상으로 시선을 떨어뜨린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희나에게 형사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아직 아버지 재무 관계를 조사하진 못했지만 탐문 조사한 결과 최근 생겼다는 그 돈의 출처를 좀 짐작할 수 있었는데…… 무슨 말인지 알지?”
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볼 것도 없이 내 돈이다. 그건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보기만 해도 간단히 알 수 있는 내용이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아버지가 자신의 돈을 모두 가져간 것에 대해서 털어놓았다.
형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녀의 말을 신중하게 받아 적고는 물었다.
“우린 얘기 듣자마자 너를 찾았어. 병원에 데려간 동네 주민 말로는 사라졌다고 하길래 걱정했어. 마지막 모습이 정말 불안해 보였다기에 혹시 자살이라도 한 건 아닌가 해서 전국에 너 또래 여자애 발견된 거 없나 얼마나 뒤졌는지 몰라. 슬슬 본격적으로 수색해야 하지 않나 싶었는데 정말 다행이다.”
희나는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젊은 형사의 말을 들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말 이외에는 계속 묵묵히 앉아 날카로운 시선만을 보내고 있던 나이 많은 형사가 입을 열었다.
“혹시 오해하지 말고…… 솔직히 대답해주길 바라.”
“……네…….”
“너 화요일 밤에 어디 있었니?”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희나의 겁먹은 시선이 불안하게 허공에서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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