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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그 너머에는-58화 (58/140)

58화. Finally (4)

도착한 마트는 평일 대낮이라 그런지 다행히 평소보다 훨씬 사람 없이 한산했다.

학교에서 멀기도 해서 누굴 마주칠 염려도 적었기에 둘은 손을 잡은 채 입구 쪽으로 걸었다. 날씨도 좋고 두근두근 기분도 좋아 잔뜩 신난 희나는 성큼성큼 큰 보폭으로 걸었다.

곧 입구 근처에 다다라 거울을 발견한 희나는 얼굴을 붉혔다. 손을 잡고 선 두 사람의 모습이 자연스러워 보였기 때문이다.

희나가 다른 쪽을 쳐다보고 있는 진혁의 팔을 잡아당기면서 말했다.

“이거 봐요. 우리 커플인 거 다 눈치채면 어쩌죠?”

“음…… 그냥 장 보러 온 오빠, 동생처럼 보일 거 같은데.”

“선생님이 아저씨라서 그렇잖아요. 고등학생처럼 보이면 좋았잖아요.”

“제대한 지 3년이 되어가는데 무리야…….”

분위기 깨는 말만 하며 여전히 딴 데를 보는 진혁의 팔을 희나가 확 꼬집었다. 그러자 그제야 진혁이 이쪽을 돌아보고 거울을 발견했다.

“별로 조카처럼은 안 보이네.”

“그렇죠? 그냥 학생 커플처럼 보이죠?”

“음. 고등학생으론 안 보이지만.”

그림이 좋은 것이 뿌듯해서 얘기하던 희나는 그의 말대로 고등학생 커플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게다가 딱히 나이 차가 많이 나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내가 노안인 건가!”

“그러게 말이야. 처음 봤을 때 대학생인 줄 알았다니까.”

“아니야-! 다들 고등학생으로 본단 말이에요!”

“교복 입고 다녀서 그런 거야. 이제 아저씨라고 부르지 마.”

“아니란 말이에요. 이 바보 아청 로리콘 아저씨가!”

발끈한 희나가 얼굴이 빨개져서 부들부들 분노하자 진혁이 웃으면서 자꾸 놀렸다. 주먹으로 마구 치면서 화내도 밉살맞게 웃는 진혁에게 희나가 입이 댓 발 나와서는 말했다.

“지훈이랑 다닐 땐 다들 고등학생 커플이냐고 했단 말이에요-.”

그 말에 진혁의 입가에 계속 걸려 있던 미소가 일순 사라졌다. 말실수를 했단 걸 깨달은 희나가 찔끔해서 그의 기색을 살폈으나 진혁의 얼굴엔 곧 원래의 미소가 돌아왔다.

신경 안 쓰는 것 같은 게 다행스럽긴 했지만 어째선지 별로 기분이 좋진 않다. 희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진혁을 쳐다보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어 다시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선생님, 그 아줌마는 어떻게 됐어요?”

“아줌마? 누구?”

“그 영어 교생이요. 심재연인가 뭔가.”

진혁이 손가락으로 희나의 이마를 가볍게 톡톡 치면서 혼냈다.

“아줌마라니, 선생님한테 그렇게 말하면 못쓰잖아.”

“선생님이 아저씨니까 그 사람도 아줌마죠.”

“그 사람은 나보다 어려. 그리고 난 괜찮지만 다른 선생님들한테는 버릇없이 굴지 마.”

감싸는 듯한 말투에 희나의 얼굴이 부루퉁해졌다. 부은 볼을 재밌다는 듯이 찌르는 손가락을 깨물면서 희나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알 게 뭐예요-. 선생님, 그 사람이랑 헤어졌어요?”

“헤어지고 말고 할 게 있나. 딱히 사귄 것도 아니고…….”

“선생님 그 여자랑 만났다면서요.”

카트를 분리하고 있던 진혁이 희나의 말에 조금 움찔했다.

“……누가 그래?”

“수진 언니한테 들었어요.”

“수진이가 그랬다고?”

“만났어요, 안 만났어요?”

커다란 눈을 잔뜩 찌푸리고 째려보는 희나의 손에 카트를 쥐여주면서 진혁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잠깐 만난 건 맞지만 아무 사이도 아냐. 헤어지고 말고 할 것도 없어.”

“정말이에요? 그 사람이 선생님 좋아하잖아요.”

“난 안 좋아한다고 말했잖아.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카트 옆에 쌓여 있는 특판 세제를 들여다보며 자나가듯 담담하게 하는 말에 잔뜩 삐져 있던 희나의 얼굴이 확 빨개져버렸다.

“흥. 세제 같은 거 아무거나 사면 되지, 뭘 그렇게 진지하게 골라요?”

말을 돌리며 괜히 툴툴거린 희나는 카트를 밀며 앞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삐진 척해야 되는데 계속 입꼬리가 올라가서 볼이 씰룩거렸기 때문이다.

얼마 후 진혁이 뒤에서 “어? 잠깐만, 같이 가.” 하고 따라오기 시작했지만 희나는 더 빨리 걸었다. 이제 희나는 완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한창 쇼핑을 하고 푸드 코트에서 쉬면서 늦디늦은 점심을 먹고 나오던 희나의 눈에 낯선 기계가 들어왔다. 기계 위에 잔뜩 붙어 있는 포스터를 심드렁하게 읽던 희나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선생님, 잠깐만요, 저기 잠깐만 가요-.”

그녀는 진혁의 팔을 슥슥 끌고 다가가서 기계를 보았다. 그것은 전에 민지에게 들은 적 있는 디지털 포토 프린터였다.

“이게 뭐야? 디지털 인화기?”

“선생님 휴대폰 가져왔어요?”

“응.”

“잠깐 줘봐요.”

진혁이 휴대폰을 건네주자 희나는 제멋대로 사진 앨범을 휙 열었다. 나름 기대하고 열었는데 셀카도 한 장 없이 남루했다. 과일 사진이랑 시골 풍경이나 지나가던 고양이 사진 같은 거만 몇 장 있었다.

희나는 스크롤을 휙휙 올리다가 곧 목적했던 사진을 발견했다.

“뭐 해?”

“선생님, 이거요. 나 이 사진 이 기계로 꼭 뽑고 싶었어요.”

진혁이 화면을 들여다보자 거기에는 두 사람이 에버랜드에서 함께 찍었던 사진이 떠올라 있었다.

쑥스러운 듯 살짝 난감한 표정을 지었으나 강아지처럼 쳐다보는 희나의 눈빛 공격에 그는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포토 인화기에 휴대폰을 연결하고 사진을 두 장 뽑았다.

조금 블러가 된 감이 있었으나 색감이 화사해서 희나는 화면으로 보는 것보다 더 마음에 들었다. 헤실헤실 웃으며 사진을 쳐다보던 희나는 옆에 놓여 있는 네임펜을 발견하고 집어 들었다.

스탠딩 테이블에 턱을 괸 채 고개를 갸웃거리며 뭐라고 쓸지 고민하는 희나를 진혁은 귀엽다는 듯 쳐다보았다. 그러나 희나가 진혁 얼굴 아래쪽에 ‘바보’라고 쓰고 자신의 얼굴 아래에는 ‘천재’라고 쓰자 한숨을 내쉬었다.

“초등학생도 아니고 이게 뭐하는 거야…….”

“이건 선생님 거예요. 선생님도 꼭 가지고 있어요.”

“바보라고 써 있는 사진을 가지고 다니라고?”

“절대 버리면 안 돼요-. 평생 계속계속 가지고 있어야 돼요!”

진혁은 눈썹을 찡그렸지만 희나가 계속 보채자 할 수 없이 대답했다.

“그럴게.”

성의 없는 대답이었지만 희나는 그가 가지고 다닐 거라고 생각하고 빙긋 웃었다. 누가 쓴 건지 확실하지도 않은 포스트잇도 버리지 못하던 사람이다.

“헤헤-. 그럼 내 거에는 뭐라고 쓰지.”

“이리 줘봐. 내가 써줄게.”

“싫어요-! 나 바보라고 쓸 거잖아요!”

희나는 접근하는 진혁의 손을 찰싹 때려 차단하고 곰곰이 생각했다.

남의 거는 몰라도 내 거에 천재랑 바보라고 쓰긴 사실 좀 유치하다. 이름을 쓸까? 음. 그것도 어색한데…….

“선생님, 우리 사귀는 거 맞죠?”

생각에 잠겨 있던 희나가 불쑥 말하자 진혁이 살짝 움찔했다. 목소리가 컸는지 옆 기계에서 사진을 출력하고 있던 아주머니와 아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진혁은 그쪽을 어색하게 쳐다보더니 조금 목소리를 낮추고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건 이제 좀 이상한데. 교생도 끝났고, 이제 사귀기로 했는데.”

사귄다는 말이 나오니까 희나의 심장이 순간 두근거렸다. 그리고 이어진 말에 박동은 더 빨라졌다.

“오빠라고 부를래?”

가까이 다가와서 하는 말에 얼굴이 또 확 달아올랐다.

진혁은 여동생이 있어서인지 오빠란 단어에 별 감흥이 없어 보이는 표정이었지만 희나는 너무 쑥스러워서 도저히 오빠라는 단어를 말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녀는 창피한 기분을 감추려고 일부러 사납게 투덜거렸다.

“양심도 없이 오빠라뇨. 아저씨도 아니고!”

“너 내 나이 되면 정말 복수할 거야.”

발가락이 간질간질해서 몸을 부르르 떠는 희나의 볼을 진혁이 양쪽으로 주욱- 잡아당겼다.

“내가 그 나이 되면 어쩌게요?”

“전에 말했잖아. 하루에 세 번씩 아줌마라고 부를 거라고.”

“흥, 못 그럴걸요?”

“왜, 또 그때 되면 안 만나 준다고 하려고?”

“안 만나는 건 싫어요!”

희나가 반사적으로 단호하게 말하자 진혁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지으며 잡고 있던 볼을 놓쳤다. 희나는 볼을 문지르면서 고개를 휙 돌리고는 다시 사진을 내려다보며 글씨를 써 내려갔다.

「희나랑 진혁 샘」

“겨우 그게 다야? 여고생답게 좀 꾸며봐.”

“이게 뭐가 어때서요-. 샘은 계속 선생님이에요. 아줌마라고 부르면 죽어요. 선생님은 그때 되면 서른 살도 넘잖아요!”

“서른 살이 뭐가 어때서-. 그때 되면 같이 늙어가는 거지.”

아직 다 자라지도 못해서 같이 늙어간단 말이 전혀 실감되지 않았지만 희나는 가슴이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어서 쿡쿡 웃었다. 그리고 뿌듯한 표정으로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정말 나중에 늙어서도 같이 있으면 이 사진 보면서 지금을 생각하겠지.

“다 썼으면 이제 가자. 마트에서 해 저무는 거 보겠어.”

“네-.”

대답한 희나는 진혁이 카트를 챙기러 돌아선 사이 뒷면에다 조그맣게 하트를 그리고 ‘계속 같이’라고 썼다. 그리고 재빨리 주머니에 넣고 시치미를 뗀 채 진혁을 따라갔다.

결국 산더미같이 장을 보고 어둑어둑해지고 나서야 두 사람은 집에 도착했다.

진혁이 열쇠를 찾아 문을 여는 동안 희나는 문 앞의 우편함을 확인했다.

필요 없는 전단지를 추려서 문 앞의 커다란 휴지통에 집어넣던 희나는 한 우편물을 보고 진혁을 쿡쿡 찔렀다.

“의외로 폭주 본능이 있나 봐요?”

진혁은 희나가 내민 속도위반 과태료 쪽지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너 때문에 과속 딱지 뗀 거야.”

“나요? 왜요?”

“너 가출한 애들 따라서 모텔 간다고 전화하고 끊은 날 밤에…….”

거기까지 말하자 희나도 바로 무슨 일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꽤 먼데 엄청 빨리 왔었지.

“헤헤. 나 완전 걱정했나 봐요?”

“알면 걱정 좀 그만 시켜.”

희나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꾸욱 누르고 진혁은 열린 문으로 먼저 들어섰다.

“걱정 안 해도 나 혼자 잘하는데 뭐-.”

“후, 말만 좀 착하게 하면 예뻐 죽을 텐데…….”

“그럴까 봐 못되게 구는 거예요. 내가 살린 거지. 지금도 거의 사경을 헤매고 있는데.”

계속 얄미운 소리를 하자 진혁이 잡고 있던 희나의 손을 잡아서 콱 깨물었다.

장난치면서 들어온 두 사람은 곧 사 온 것들을 냉장고와 찬장에 차곡차곡 정리하기 시작했다. 피곤해서 좀 쉬고 싶었지만 물건이 널브러져 있는 것을 못 보는 진혁이 혼자 해버릴 것 같아서 희나도 옆에서 도왔다.

정리가 끝나자 밥 먹은 지 세 시간도 안 지났는데 벌써 배가 고프다. 배고프다고 중얼거리자 진혁이 물었다.

“배고파? 뭐라도 해먹을까?”

“선생님 요리 할 줄 알아요?”

항상 밤늦게만 집에 와서 사 먹거나 시켜 먹거나 어머니가 보내준 반찬으로 끼니를 해결하거나 했기 때문에 진혁이 주방에 있는 건 거의 본 적 없었다.

진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취를 오래 했으니 웬만한 건 할 줄 알지. 넌 요리할 줄 알아?”

“라면은 끓일 줄 알아요.”

“……그건 요리라고 할 수 없어.”

“나도 뭔가 해보고 싶어요. 우리 뭐 만들어 먹어요-.”

의견을 맞추자 둘은 바로 몸을 일으켰다. 피곤하지만 희나의 얼굴은 다시 싱글벙글해졌다. 사 온 고기를 구워서 된장찌개와 함께 먹기로 하고 곧 준비를 시작했다.

희나는 진혁이 시키는 대로 상추를 씻으면서 요리하는 진혁을 관찰했다.

그는 불을 켜 육수를 내고 통통통 이것저것 썰기 시작했다. 자취를 공으로 한 것은 아닌지 꽤 칼질이 능숙했다.

상추를 다 씻고 관심 있게 칼질을 지켜보는 희나에게 진혁이 주의를 주었다.

“칼 들고 있으니까 조금 뒤에 있어. 다쳐.”

시키는 대로 살짝 뒤로 물러선 희나는 냉장고에 기댄 채 진혁을 쳐다보았다. 잠시 그렇게 널따란 등을 보고 있으려니까 뭔가 끓어오르는 것 같다.

그냥 TV 보고 마트 다녀와서 같이 밥해 먹는 게 다인데 너무 좋다. 소꿉장난처럼 재밌고 신기하고 행복하다. 어제 일어났던 일들은 정말 이제 다른 세상 얘기 같다. 죽으려고 생각했을 때, 하지 못해서 안타까웠던 모든 일상이 이제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희나는 또 눈앞의 사람이 너무 좋아서 견딜 수 없어졌다.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좋아서, 좋아서 마음이 따뜻하고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희나 너도 뭐 좀 썰어볼래?”

희나는 진혁이 질문을 던지며 칼질을 멈추는 것과 동시에 등에 와락 달려들어 꼬옥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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