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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그 너머에는-57화 (57/140)

57화. Finally (3)

“여기서 잘 거예요.”

희나의 말에 진혁이 입을 살짝 벌리고 미간을 찌푸렸다.

희나는 진혁의 냄새가 풍기는 블루 체크무늬의 시트로 당당하게 기어들어 가서 옆자리를 통통 치고는 진혁을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불 끄고 빨리 와요-. 내가 해달라는 대로 해준다고 약속했잖아요.”

진혁은 뒷벽에 머리를 살짝 기대고 한숨을 푹 쉬며 희나를 쳐다보다가 곧 터벅터벅 다가와 누웠다. 희나는 이제 당연하다는 듯 진혁의 팔을 베고 품속으로 쏙 기어들어 갔다.

그러는 모양새를 어이없다는 듯이 보면서도 웃으며 진혁이 말했다.

“너 어디 가서 다른 남자한테 이러면 안 돼.”

“뭐야……. 질투하는 거예요?”

“걱정돼서 그러지, 이 꼬맹이가.”

볼을 잡아당기는 진혁의 손을 앙- 문 뒤 희나는 새침하게 말했다.

“선생님만 조심하면 돼요-. 같이 잔다고 이상한 거 하면 안 돼요-.”

“아깐 해도 된다며?”

아까 아무 짓이든 해도 된다고 한 게 떠올라 희나는 조금 창피해졌다. 그렇지만 어차피 깜깜해서 보이지 않을 테니 당당하게 쏘아붙였다.

“내 맘이에요. 지금은 안 돼요.”

“뭐야, 그게…….”

진혁은 킥킥 웃다가 잠시 텀을 두고 생각하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근데 억울하네. 난 별로 아무것도 한 적 없잖아. 맨날 네가 하잖아.”

“내가 뭘 했다고, 그래요-?”

“맨날 안아 달라고 조르고, 키스해달라고 하고…… 쪼그만 게 겁도 없이.”

“그게 뭐가 어때서요? 선생님이 이상하잖아요-.”

희나는 쿡쿡 찌르는 그의 손을 다시 깨물었다. 그리고 반대로 그의 단단한 가슴께를 뽁뽁 찌르며 말했다.

“난 뽀뽀만 할 줄 알았는데, 완전 덮쳐놓고는.”

“그것도 나니까 참은 거야.”

“할 거 다 하고는 참았대. 바보.”

그러자 진혁이 소리를 내서 웃었다. 그는 계속 깨무는 입술을 잡아서 못 깨물게 만들고 웅얼거리는 희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 못된 입을 막으니까, 낑낑대는 게 아주 귀엽던데.”

“우우우우웅! 웅! 움!”

키스하는 동안 그의 말대로 낑낑대면서 고분고분하게 굴었던 게 생각나서 이불 킥이 하고 싶어진 희나는 고개를 마구 저으면서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바동거렸다.

간신히 입술의 자유를 되찾은 희나는 입을 죽 내밀면서 말했다.

“그러는 선생님은, 많이 해봤나 봐요. 내가 해달랄 때는 안 해줬으면서.”

“또, 못된 소리 하네.”

진혁은 희나의 입술을 톡톡 두드리면서 나름 엄한 태도로 말했다.

“피곤할 테니까, 빨리 한숨 자.”

“나 잠 안 오는데.”

“내일 놀아줄 테니까, 자. 빨리.”

그러면서 등을 토닥토닥 두들겨준다. 애 취급당하는 게 너무 싫었는데 막상 마음을 확인하고 나니까 어리광을 부릴 수 있다는 게 너무 기쁘다.

낮까지만 해도 죽으려고 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사라진 돈이, 지금 떠올려도 마음 아프긴 한데 아까처럼 심장을 찌르는 듯한 발작 같은 분노는 느껴지질 않는다.

그냥 이렇게 안겨 있으니까, 다 괜찮아질 거 같은 기분이 든다. 따뜻하고 너무 기분 좋다. 나는 이 사람만 있으면 된다, 하는 믿을 수 없는 만족감이 차오른다.

희나는 진혁의 품속으로 들어가 얼굴을 비비고, 마음껏 체향을 들이쉬었다. 안겨 있는데도, 더 닿고 싶다. 툴툴거렸지만 처음 하는 키스는 너무 기분 좋았다. 평생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이보다 더 닿으면 대체 얼마만큼 행복해지는 걸까. 가늠도 되지 않는다.

살짝 손가락을 뻗어 진혁의 입술을 만졌다. 윤곽이 또렷한 입술이 그려지는 것 같다. 또 해주지 않으려나. 그런 기대를 하고 스스로가 우스워서 살짝 웃다가 희나는 조용히 진혁을 불렀다.

“선생님…… 자요?”

“…….”

자는 것 같지 않은데 대답이 없다. 희나는 장난을 치고 싶어져서 씨익 웃고는 고개를 쭉 뻗어서 진혁의 뺨에 살짝 뽀뽀를 했다.

처음에는 가만히 있던 진혁의 입꼬리가 점점 올라가는 듯 뺨이 슬금슬금 움직인다. 그걸 눈치채고 희나가 웃기 시작하자 진혁이 눈을 뜨더니 희나의 뺨을 잡아 늘렸다.

“……말 정말 안 듣네. 너 내가 참으니까 이러지……. 이러다 정말 혼나.”

“에이- 좋으면서.”

“……화낼 거야.”

“화를 내요? 어떻게요. 한번 보고 싶네, 화내는 거.”

“나중 되면 알아.”

능청스럽게 구는 희나에게 백기를 든 진혁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다시 아까처럼 돌아가서 눈을 감았다.

희나는 머리카락도 잡아당기고 진혁의 가슴에 손가락으로 ‘바보’, ‘멍청이’, ‘아저씨’ 같은 글씨도 써보고 바람을 불어 속눈썹을 휘날리게 하기도 했지만 전부 무시당했다. 놀아줬으면 좋겠는데 계속 잠만 자려 하는 진혁의 모습에 희나의 입이 주욱 나왔다.

“바보…… 아저씨…….”

“…….”

“나랑 같이 이렇게 누워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은가 봐.”

진혁이 이번엔 정말 “하아…….”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깊은 탄식에 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뭔가 갑갑한 듯 머리를 긁적이더니 초조한 것처럼 희나의 팔 위에서 손가락을 떨듯이 톡톡 치며 말했다.

“……내가 무슨 생각 하는지 알면 깜짝 놀랄걸.”

그 나직한 말에 몸이 뜨거워진다. 말에 담겨 있는 의미가 뭔지 희나도 안다. 그것이 놀라울 정도로 전혀 싫지 않았다. 희나는 꿀꺽 침을 삼켰다.

고민에 휩싸인 듯한 진혁의 손가락이 희나의 얼굴선을 쓸었다. 다른 팔은 어디로도 움직이지 못하고 억눌림에 안타까운 듯 희나의 팔을 느릿하게 주물렀다.

그 움직임에 희나도 점점 초조해졌다. 더 닿았으면 좋겠다. 더 만져졌으면 좋겠다.

그러나 뭔가 말하려던 그녀의 움직임은 진혁의 속삭임에 잦아들어 버렸다.

“하지만 너한테 지금 그러면…… 난 나를 아주 싫어하게 될 거야.”

“…….”

“그러니까 그렇게 쳐다보지 마. 장난도 이제 그만해. 나 너무 힘들어.”

정말 간절히 말하고 진혁은 자조적으로 웃더니 힘들게 버티던 손을 떼어내어 그녀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천천히 등을 토닥토닥 두들기기 시작했다.

그 손이 아직도 떨리고 있다. 이렇게 될 정도로 참다니 정말 바보다. 바보.

그치만 그런 점까지 말할 수 없이 사랑스러워서 희나는 얼굴을 이상한 표정으로 마구 구겼다. 입꼬리는 한없이 올린 채로.

그녀는 그러면서 진혁을 보았다. 어둠에 익숙해져서 단정한 얼굴 윤곽이 조금 보이는 것 같다.

희나는 질리지도 않고 그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눈을 내리감은 얼굴이 잠든 것처럼 미동도 없어졌을 무렵 그녀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선생님…… 정말 좋아해요.”

“……응, 그래.”

잠든 줄 알았던 입이 움직여서 그렇게 대답하자 희나는 조금 움찔했다. 자세히 보니 그의 입가가 살짝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희나는 킥킥 웃으면서 또 몸을 꾹꾹 찔렀다.

“선생님은 말 안 해요?”

“……빨리 잠이나 자…….”

대답을 피하며 진혁은 그만 떠들라는 듯 닭처럼 고개를 뾰족 내밀고 있는 희나를 끌어당겨 가슴에 폭 안기게 했다. 원래 체온이 높은 사람이지만 유난히 몸이 뜨끈뜨끈하다. 아마 불을 켜고 보면 아주 빨개져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희나는 쿡쿡 웃었다.

혼자 그렇게 실없이 웃고 있자 진혁이 중얼거렸다.

“……한 5년쯤 있으면 넌 나한테 진짜 미안할 거야.”

“흐응…… 선생님 벌써부터 위태위태한데 정말 괜찮겠어요?”

“움……. 너 졸업할 때쯤 되면 내가 해탈해서 출가할지 모르니 알아서 해.”

사실은 나도 힘든데. 바보.

희나는 참을성 강한 남자를 얄미운 듯 한번 꼭 깨물고 얌전히 품에 안겨 잠을 청했다. 하지만 그 후로도 뭐가 좋은지 이유 없이 웃음이 나와서 계속 킥킥 웃다가 잠들었다.

***

희나는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햇살에 눈을 떴다. 아주 조금 시간이 걸린 뒤에야 자신이 어디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깨닫자마자 친숙한 향기가 나는 시트를 품 가득 끌어안고 깊숙이 숨을 들이쉬었다.

괜히 웃음이 나와서 연신 실실거리면서 뒹굴거렸다. 잠시 그렇게 포근함을 즐기다가 천천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거실로 통통 걸어 나가자 진혁이 쿠션을 끌어안은 채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TV 화면을 보니 어김없이 다큐멘터리다. 어찌나 몰입했는지 희나가 나온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할아버지.”

그녀가 말을 걸자 그는 잠깐 이쪽을 봤지만 바로 TV로 시선을 돌리며 한숨을 푹 쉬었다. 평소처럼 아침에 일어나서 목욕을 했는지 얼굴이 촉촉하니 발그레하다.

희나는 냉장고로 가서 우유를 꺼내 따르면서 말을 걸었다.

“아침부터 그런 거 보면 재밌어요? 일어날 때까지 좀 옆에 있으면 어디 덧나나-. 깨워주지 그랬어요.”

“응, 미안.”

“뭐 미안할 거까지는 없구요. 또 차 마셔요? 이런 게 대체 무슨 맛이 있다는 거야. 아, 맞다-. 나 무슨 꿈 꿨는지 알아요? 어젯밤에 얘기하려다 만 게 있는데…….”

재잘재잘 신나게 떠들고 있는 희나를 보더니 진혁이 이리 오란 듯 손짓을 했다. 그 손짓 하나로 기분이 더 좋아진 희나는 옆으로 가 앉아서 진혁을 보며 헤헤 웃었다.

진혁이 고개를 돌려서 그런 희나를 보고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팔을 뻗어 확 품에 끌어안았다.

“뭐, 뭐예요, 아침부……. 웁웁!”

놀란 희나가 얼굴을 확 붉히며 당황하는데 커다란 손이 그녀의 입을 텁하고 막았다. 그리고 곧 귓가에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중요한 순간이야. 가만히 있어.”

옆으로 오라고 한 것이 단지 수다 떠는 입을 막기 위한 조치였음을 안 희나는 발끈했다. 당장 벗어나서 다큐 같은 거 절대 못 보게 방해해 주겠다고 분노하며, 입을 막은 손을 콱 깨물기 위해 양손으로 붙잡았다.

그러나 그 계획은 그녀의 볼에 진혁이 입을 촉- 맞추자 얼굴이 빨개지는 것과 함께 중지되었다.

“착하지.”

홍당무가 되어 굳어진 희나의 머리를 슥슥 쓸면서 진혁이 말했다. 이건 무슨 강아지 취급이다. 희나는 입을 앙다물고 고개를 들어 진혁의 얼굴을 쏘아보았으나 몸을 돌돌 감고 있는 팔을 차마 풀어내진 못했다.

‘내가 진짜 착해서 참는다.’

희나는 얌전하게 입을 다물고 진혁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그리고 잠시 위대한 파라오의 미스터리에 관심을 가져보려고 애쓰다가 스르르 잠들어버렸다.

그렇게 푹 잠을 자던 희나는 살짝 무릎을 빼는 기척에 놀라서 잠이 깼다. 눈을 비비면서 쳐다보니 진혁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잘 잤어?” 하고 웃는다.

입을 비죽 내밀고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두 시였다. 보통 하루에 네다섯 시간 이상은 잘 안 자는 그녀였기에 희나는 이렇게 맘 편히 오래 잤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앉은 채로 다큐멘터리를 네 시간이나 본 거예요?”

“네가 너무 곤히 자길래.”

방에 들어가서 자라고 하면 될걸. 바보네, 진짜. 희나는 투덜거리면서도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내리기 위해 애써야 했다.

“……화장실 가요?”

“아니, 잠깐 마트 좀 다녀오려고. 장 본 지 오래됐거든.”

“나도, 나도 갈래요.”

희나가 벌떡 일어나며 말하자 진혁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희나는 바로 욕실로 달려갔다.

대충 세수하고 양치한 뒤 진혜가 두고 간 옷으로 갈아입은 희나는 진혁과 함께 집을 나와 걸으면서 물었다.

“어디 마트 가요? 이 근처에 있어요?”

“그냥 요 앞에 GS 슈퍼마켓 갈 건데.”

그 말을 듣자 희나의 표정이 급시무룩해졌다. 그 모습에 진혁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실망해? 뭐 큰 마트에서 필요한 거 있어?”

“아뇨. 그냥 큰 마트 가는 줄 알고 따라온 건데.”

“마트 좋아해?”

“그냥…… 카트 끌고 왔다 갔다 하면서 장 보는 거 해보고 싶었어요.”

그 말에 진혁이 쿡쿡 웃었다.

“이상한 걸 해보고 싶어 하네. 카트 끌고 장 본 적 없어?”

“네, 없어요.”

진혁이 미간을 찌푸리고 어이없는 듯 입을 벌렸다. 희나가 입을 비죽대며 말했다.

“집에 전기도 안 들어오는데 장 보면 어디다 보관해요? 가스도 안 들어와서 요리도 못 하는데.”

“가스도 전기도 안 들어오는 집에서 살았다고?”

“겨울에는 돈 내죠. 너무 추우니까. 근데 가스레인지 배터리를 안 갈아서 불이 안 켜지…….음? 왜 안 와요?”

한숨을 쉬며 멈춰 선 진혁이 희나의 팔목을 잡고 다시 집 쪽으로 걸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집 앞 주차장에 세워둔 차에 올라탔다.

“오- 차 타고 어디 멀리까지 가는 거예요?”

“여기 근처엔 큰 마트가 없거든.”

“오와- 큰 마트 갈 거예요? 어디 마트?”

“이왕 차 타고 가는 거 코스트코까지 갔다 오자.”

그렇게 둘은 마트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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