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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그 너머에는-56화 (56/140)

56화. Finally (2)

‘말했다!’

창피함이 몰려와서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다. 희나는 붉어진 얼굴을 넓은 가슴에 묻은 채 너무 긴장해서 멈추고 있던 숨을 몰아쉬었다.

단단히 굳어진 몸은 그대로 한동안 말이 없었다. 불안해져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눈치 보듯 슬며시 올려보니 진혁이 한쪽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 아래로 드러나 있는 하얗고 단정한 목덜미가 발그레하다.

희나는 눈을 깜빡거리면서 슬그머니 얼굴을 짚고 있는 진혁의 손을 잡아뗐다. 별로 힘을 주고 있지 않아서 손은 스르륵 떨어져 나왔다. 진혁이 붉어진 얼굴로 희나를 마주 보았다.

그가 쳐다보니 이번엔 역으로 부끄러워져서 입술을 오물대다가 희나는 다시 슬쩍 얼굴로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이 안경에 닿기 직전에 손목이 강한 힘에 붙잡혔다.

“또 벗기려고 그러지.”

맨 얼굴이 보고 싶은데. 안경을 썼을 때랑 쓰지 않았을 때 얼굴의 느낌도 많이 다르지만, 왠지 쓰지 않았을 때가 마음이 열려 있는 것 같아서 벗기고 싶었는데 제지당했다.

희나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가만히 바라보던 진혁이 갑자기 희나의 볼을 꼬집었다.

“아-! 아하오오!”

“너 너무 제멋대로인 거 아냐?”

“애아어아여- 아아.”

볼을 잡혀 뻐끔대는 희나를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며 진혁이 콕콕 찔리는 말을 했다.

“다른 남자랑 사귈 거라고 안 들어오더니, 키스를 해달라고 하고, 이제 필요 없다더니 울면서 와서 좋아한다고 하고……. 너무하잖아.”

희나는 바동거리다 말고 다시 시무룩한 표정으로 눈치를 봤다. 역시 너무 멋대로 굴어서 화난건가.

안경 너머 진혁의 입가가 살짝 떨리고 있었다. 화가 난 건지 웃고 있는 건지 도무지 표정을 읽을 수가 없다.

그는 모호한 표정으로 희나의 하얀 얼굴을 쳐다보다가 불쑥 물었다.

“날 좋아해?”

“…….”

“그렇게 못되게 굴어놓고.”

마지막 말을 하는 입가는 웃고 있었다. 그제야 희나는 잔뜩 하고 있던 긴장을 풀고 입을 내밀며 볼을 살살 잡고 있는 손을 떼어냈다.

“선생님도 못되게 굴었잖아요. 도망만 치고…….”

“난 도망친 적 없어.”

“거짓말쟁이.”

희나는 떼어 낸 길쭉길쭉한 손가락을 괜스레 잡아서 늘리며 비죽거렸다. 머리 위로 다정다감한 목소리가 진지하게 물음을 던졌다.

“네가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

“고등학생인데 당연히 알죠.”

“나랑 사귀고 싶다는 거야?”

마음을 전하고 싶었을 뿐 그 후의 그런 구체적인 거까지는 미처 생각을 못 했다. 막연하게 같이 있고 싶다는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사귄다’라는, 평생 인연이 없었을 것 같던 말을 들으니 얼굴에 확- 열이 오르는 것 같다.

희나가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숙이자 쿡쿡 웃는 소리가 들렸다. 여유롭게 짓고 있는 입가의 미소가 너무 멋져서 밉살스럽다.

고개 숙인 희나를 쿡쿡 찌르며 “응?” 하고 놀리듯 묻는 진혁에게 희나는 샐쭉해져서 투덜거렸다.

“이런 성격 나쁜 바보 아저씨가 다들 뭐가 좋다는 거야.”

“방금 전에 한 말이랑 안 맞는데?”

살짝 다시 고개를 들자 안경 너머의 눈은 조금 생기가 있어 보였다. 항상 다정한 눈가가 보기 좋게 눈웃음을 짓고 있다가 희나와 눈이 마주치자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 어째야 좋을지 모르겠네.”

난감해하는 저음의 목소리를 들으며 희나는 강아지처럼 콩닥콩닥 뛰는 심장을 억누르고 조심스레 물었다.

“내가 좋아한다고 말해서 싫어요?”

잠시 묵묵히 내려다보던 진혁은 한숨 쉬듯 웃으며 고개를 아주 천천히 살짝 저었다.

그리고 안심한 듯 활짝 미소를 띠는 희나를 끌어당겨 꼭 안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너무 좋아.”

귓가에 가깝게 남은 소리가 그런 말을 들어서 좋다기보다 네가 너무 좋다고 한 것처럼 너무나 달콤하게 들려서 희나는 경련처럼 살짝 몸을 떨었다. 그 반응을 보면서 진혁은 또 재밌다는 듯 쿡쿡 웃었다.

품에 고개를 꼭 묻은 채로 희나는 보채듯이 말했다.

“나 이제 떨어지기 싫어요.”

“그래.”

“나한테는 이제 아무것도 없어요. 선생님밖에 없어요.”

“…….”

“선생님도 나밖에 없었으면 좋겠어. 다시 어정쩡한 사이로 돌아가기 싫어요.”

그가 다시 침묵했기에 잠시 기다리다가 희나는 채근하듯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곧 침을 넘기는 듯한 소리가 나고 가볍게 한숨을 쉬더니 나직한 목소리가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하아. 그 녀석들이 알면 엄청 놀리겠네…….”

희나는 그 녀석들이 진혁의 친구들을 뜻한다는 걸 금방 알아차렸다. 긍정의 의미를 깨달은 희나는 활짝 웃으며 몸을 일으켜서 그의 목에 와락 매달렸다.

진혁은 뒤로 밀려나지 않은 채 단단히 그녀를 지탱하고 마주 안으며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 얼굴이, 정말로 둔탱이 주제에 멋져서 희나는 새삼스럽게 그의 이목구비가 얼마나 단정한지 깨달았다.

이제 이 사람은 내 거다. 단정하고, 성실하고, 멋지고, 다정하고, 똑똑하고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나만의 사람.

그녀는 홀린 듯 그 얼굴을 보다가 안경을 다시 휙 벗겨냈다.

아주 오랜만에 드러난 남자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가 희나는 속삭이듯 말했다.

“키스해주세요.”

다정하던 눈빛에 순간 열기가 떠올랐다. 섬세한 속눈썹이 떨리기 시작하고 모양이 예쁜 입술이 다물려지며 침을 삼키는 듯한 모습이었다.

또 거절당하는 건가.

열기를 가라앉히는 듯한 그 모습에 희나가 체념하듯 쓸쓸하게 시선을 내리던 때였다.

그의 얼굴이 가깝게 다가온다 싶더니, 입술에 뭔가가 닿았다.

희나는 놀라 눈을 뜨고 있다가 천천히 내리 감았다.

처음 맞닿은 입술은 아주 부드럽고 촉촉했고 생동감이 있었다. 여태껏 입술에 닿았던 어떤 것도 이런 느낌이 아니었다.

작게 움직이면서 숨결까지 배어 나오는 느낌이 너무 묘해서 허리 부근이 근질근질했다. 그 입술은 희나의 아랫입술을 살짝 머금고 그대로 한동안 닿아 있다가 츕- 소리가 나며 살짝 떨어져 나갔다.

세상이 뒤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은 아니었지만 달콤했고 몸이 지잉 울렸다.

그 여운에 희나의 살구 같은 통통한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그녀는 아주 천천히 꿈에서 깨어난 듯 살포시 눈꺼풀을 올리고 멍하니 눈앞의 진혁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녀의 큰 눈이 놀라움에 번쩍 뜨였다.

그대로 멀어질 줄 알았던 진혁이 희나의 작은 머리를 커다란 손으로 감싸며 다시 입술을 겹쳐 왔다.

이번에 다가온 입술은 방금처럼 얌전하지 않고 보다 탐욕스러웠다. 벌어져 있던 희나의 입술 사이로 부드러운 것이 들어왔다. 놀라서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뺐지만 그녀의 몸을 감싸 안은 단단한 팔과 커다란 손이 그녀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리고 곧 그녀를 헤집고 들어온 그가 움직이며 희나의 머릿속을 하얗게 물들였다.

그토록 참을성 있고 금욕적이던 남자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농염하고 에로틱하다. 그는 몇 번이나 다시 입술을 포개며 그녀를 탐했다.

그와 입을 맞추는 상상을 몇 번이고 했으나 희나는 이렇게 격렬한 것일 거라곤 미처 예상하지 못했었다. 너무 집요하게 따라와서 먹혀버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도망치는 희나의 혀를 농밀하게 휘감아 올리고 매달리는 그녀를 품어버릴 듯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 끝나지 않는 열기와 묘한 황홀감에 도취되어 희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너무 기분이 좋고 몸이 중심부터 뜨거워진다. 팔다리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풀려버렸다.

첫 키스에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작은 두 손으로 진혁의 옷 앞자락을 쥐고 그에게 몸을 맡긴 채 제대로 호흡도 하지 못하고 그저 우는 강아지처럼 “응, 응…….” 하는 가냘픈 소리를 냈다.

그는 간혹 호흡을 고르듯 입술을 떼어내곤 했지만 곧 참을 수 없다는 듯 다시 입술을 포개 왔다.

희나도 이 순간이 지나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언제까지고 그의 욕망에 응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려 온 갈증을 채우듯 서로를 탐닉하던 두 사람은 한참이 지나서야 서로에게서 떨어질 수 있었다.

진혁에게서 떨어져 나온 희나는 바로 눈앞에 보이는 입술이 발갛고 자신의 타액으로 촉촉해진 걸 보자 섹시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 열정의 파도가 지나가자 너무 어색하고 창피하고 부끄러워서 견딜 수 없었다.

자신이 먼저 원했지만 이렇게 적나라한 것일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어서 품에 다시금 꼭 안겨버렸다.

그러자 머리카락에 방금 전까지 타액을 교환하던 뜨거운 입술이 다시 닿아 와 부드럽게 입 맞추는 것이 느껴졌다. 그 작은 입맞춤에 머리가 이상해질 것처럼 행복해서, 감정이 너무 벅찬 나머지 희나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고인 눈물은 참을 사이도 없이 또르르 흘러 버렸다. 한번 열려 버린 밸브가 느슨해져 버린 모양이다.

앞섶이 촉촉하게 젖어들자 진혁도 그녀가 우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희나의 얼굴을 감싸 떼어 내어 눈을 맞춰 왔다. 눈물을 발견하자 만족한 듯 나른하던 눈빛이 금방 걱정의 빛을 띤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울어?”

“…….”

고개를 저으며 얼굴을 감추려 드는 희나를 바라보면서 그가 걱정스럽게 묻는다.

“놀랐어? 미안. 내가…… 못 참아서…….”

그 난처해하는 다정한 얼굴이 못 견디게 사랑스러워서 희나는 더 왈칵 울음을 터뜨려버렸다. 그녀는 입술까지 앙다물고 울면서 그의 목에 매달렸다.

“희나야, 괜찮아? 많이 놀랐어?”

“선생님 정말 좋아해요. 너무 좋아해요.”

울면서 난데없이 애정을 고백하자 진혁은 작게 피식 웃더니 귀엽다는 듯 품에 안긴 희나의 머리에 뺨을 비볐다. 희나는 울먹이면서 확인하듯 물었다.

“선생님 나 좋아해요?”

그러자 다시 웃으면서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느낌이 난다. 희나는 보채듯이 옷자락을 잡아당기면서 다시 물었다.

“정말 좋아해요? 많이……?”

계속 물어 오는 희나를 보고 진혁도 그녀가 말해 주길 바란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방금 전에 그렇게 짙은 키스를 해놓고도 쑥스러워 자꾸 머뭇거렸다. 그는 살짝 고개를 들고 젖은 눈으로 쳐다보는 희나를 폭- 묻히도록 품에 안은 뒤 자꾸 입술을 깨물다가 귀에 대고 아주 작게 말했다.

“아주 좋아해. 정말 많이.”

그 말이 섞인 숨결이 귓가를 울리는 순간 몸이 녹아버리는 듯했다. 희나는, 낮과는 정말 정반대의 의미로 죽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사람이 이렇게 기쁠 수도 있구나. 희나는 안겨 있어도 안타까운 듯 팔을 뻗어 더 그를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리웠던 그의 향기를 각인시키듯 아주 깊이 들이마셨다.

한참을 그렇게 시간을 보낸 뒤 둘은 어영부영 떨어져서 어찌어찌 씻고 잘 준비를 했다. 붙어 있을 때는 접착제로 붙여놓은 것처럼 실실 웃으면서 꼭 안고 있었는데, 한번 떨어지고 나니까 어쩔 줄을 모르겠다.

희나는 쭈뼛거리면서 어색하게 방 안을 돌아다녔다.

스킨십을 하는 게 사람을 보는 시각을 바뀌게 한다는 지훈의 말의 의미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바보 아저씨랑 눈만 마주쳐도 기분이 이상하고 몸이 간질간질하다.

똑바로 그를 쳐다보지도 못하는 주제에 그가 “잘 자.”라고 말하고 자기 방으로 들어갈 듯하자 희나는 졸졸 따라가서 그의 방으로 쏙 들어갔다.

진혁의 방에 들어온 것은 처음이다. 항상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기만 했지 들어온 적은 없었다. 희나가 깔끔하게 정리된 방을 커다란 눈을 굴려 쳐다보다가 침대에 앉자 진혁이 한쪽 눈썹을 난처한 듯 찌푸리며 물었다.

“안 자?”

“여기서 잘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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