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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그 너머에는-55화 (55/140)

55화. Finally (1)

그래. 어차피 끝내버릴 거라면 최소한 한 가지는 해볼 수 있는 거잖아.

이미 주변에 어둠이 완연한 밤중에, 절뚝이며 희나는 낙성대역 근처에 도착했다.

돈이 한 푼도 없었으므로 30km 정도 되는 거리를 줄곧 걸었다. 다리는 얼얼하고 신고 있던 실내용 슬리퍼는 다 뜯어지기 일보 직전이었지만 희나의 다리는 관성처럼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새빨갛게 충혈된 눈과 온통 긁히고 멍든 팔다리를 내놓은 채 이상하게 쳐다보는 사람들 틈을 뚫고 익숙한 골목을 지나서 그곳에 도착했다.

진혁의 집 창문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이 보였다.

멈춰 서지도 않고 희나는 계단을 쓰러질 듯 올라갔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벨을 눌렀다.

두근. 두근.

대답이 들려오기까지 짧은 사이에 심장이 터질 것 같다. 열 시간 같은 10초가 지나간다.

“누구세요?”

마침내 그렇게 그리워하던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숨이 멎는 거 같다. 하지만 막상 들려오자 희나는 대답하지 못하고 묵묵히 서 있었다.

“누구세요?”

다시 한 번 들려오는 어리둥절한 목소리.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으면 인터폰을 끊어 버릴 거 같다.

희나는 갈라진 목소리로 천천히 대답했다.

“……나예요.”

“…….”

묵묵히 응답이 없다가 잠시 뒤 안에서 한숨 소리가 들렸다.

“……오지 않는 게 좋다고 했잖아. 또 왜 그러는 거야.”

“들여보내 줘요.”

“……내가 나갈게. 잠깐 기다려.”

그렇게 말하고 인터폰이 끊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를 불러내려는 게 아니다. 희나는 이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다시 벨을 누르는 대신 희나는 쾅쾅 소리 나게 문을 두들기며 말했다.

“나오지 마요. 들여보내 줘요. 열어 줘요.”

“…….”

대답이 없었다.

‘쿵!’ 하는 소리가 나게 한 번 발로 찼다.

당신이 안 열어주면 나 정말 갈 데가 없어. 정말 어딘가로 가서 죽어버릴지도 몰라.

몇 번 더 문을 찼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아까의 그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나오는 기색도 없었다.

억지에 질려버린 걸까? 짜증 나서 무시하기로 한 걸까?

마구 어그러진 거 같은 기분이 들어 희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세게 문질렀다.

왜 이런 거지? 방금 자신이 한 행동이 이해가 안 갔다.

후회하고 서 있기에도 떨리는 다리는 멈춰 서니까 심하게 아팠다. 희나는 힘없이 맨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새삼스레 감각이 돌아오는 기분이다.

하루 종일 울어서 머리가 띵하다. 너무 심하게 소모된 감정도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돈을 잃어버린 게 아주 먼 옛날에 일어난 일 같다.

뭘 결심하고 여기로 왔었지? 아무려면 어때. 그래. 여기 앉아 있다가…… 그 다음은 어쩌지?

그 다음 같은 거 알 게 뭐냐. 나 같은 거. 지금 엄청 흉하겠지. 비참하네. 하- 뭐 그러면 어때.

희나가 그렇게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앉아 있는데 안쪽에서 인기척이 있었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문이 열렸다.

그래. 결국, 문 열고 내가 잘 돌아갔는지 확인할 거잖아.

희나는 힘없이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문 쪽을 올려다보았다.

안경을 쓴 익숙한 흰 얼굴, 곤란한 표정, 저 얼굴이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고 바깥을 내다보다가 바닥에 앉아 있는 희나를 보고는 놀란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얼굴의 눈물 자국을 보고 표정을 단단히 굳혔다. 그는 곧바로 신발도 신지 않고 뛰어나오며 희나를 잡아 일으켰다.

“무슨 일이야? 왜 울고 있어?”

단단한 팔의 부축을 받아도 풀려 버린 다리가 좀처럼 말을 듣지 않는다. 하지만 희나는 이를 악물고 필사적으로 힘을 줘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바로 눈앞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몸은 또 왜 이래. 또 집에 갔었어?”

걱정에 잠긴 표정이지만 언제나처럼 깔끔하고 정돈된 향기로운 얼굴.

희나는 달려들듯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러자 곧바로 당황한 듯 그의 몸이 경직된다.

하지만 희나는 아랑곳없이 더 깊숙이 얼굴에 매달렸다. 그리고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선생님, 나…… 나 데리고 어디로든 도망쳐줘요.”

“무슨 말을…….”

“나…… 정말 죽어버릴 거 같아…….”

그렇게 말하고 훌쩍훌쩍 울면서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잠시 아무 말도 없이 굳어진 채로 서 있던 진혁의 단단한 팔이 희나를 안아 올렸다. 그리고 두 사람은 집 안으로 들어섰다.

거실로 돌아온 진혁은 희나를 소파에 앉힌 후 곁에 앉았다. 희나는 빨개진 눈으로 진혁을 바라보았다.

왠지 꿈만 같았다. 자신이 다시 이 소파에 앉아 있고 진혁이 저기 저렇게 앉아 있는 게.

이 소박한 거실이 말도 못 하게 그리웠다. 다시 못 볼 줄 알았기에 움직임들이 현실감이 없다.

그런 그녀의 앞에서 계속 묵묵하게 있던 진혁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다시 가볍게 한숨을 내쉬더니 조용히 물었다.

“또 어떻게 된 건지 말 안 해줄 거야?”

이제 와서 감추고 싶은 말 같은 건 하나도 없었지만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희나가 말 대신 가만히 고개를 젓자 진혁 쪽에서 질문을 던져 왔다.

“지훈이랑…… 같이 있는 거 아니었어?”

희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훈에 대한 일을 질문받자 그가 재연과 만나고 있단 수진의 말이 떠올랐지만, 무서워서 물을 수가 없었다.

불안한 눈망울의 희나를 달래듯 큰 손으로 무릎을 토닥토닥 두들기며 진혁은 하나씩 질문을 이어 갔다.

“지훈이네서 나와서 집에 간 거야?”

끄덕.

“이 상처는 또 아버지가 만들었고?”

그런 식으로 질문에 대답을 이어 가다가 조금씩 말문이 열렸다. 희나는 지훈의 집에서 나온 것과 수진에게 방을 구해 달라고 부탁했던 것, 그리고 아버지가 돈을 모두 가져가 버린 것까지 하나하나 전부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들으며 진혁은 정말 슬픈 표정을 지었지만 위로의 말을 하진 않고 계속 질문만을 던졌다.

그리고 물 흐르듯 바로바로 던져 오던 질문은 이 질문 앞에서 잠시 머뭇거림을 가졌다.

“……지훈이랑 헤어진 거야?”

왠지 가슴이 떨리는 것을 느끼며 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혁의 질문이 한동안 멎었다.

방 한쪽을 멍하니 내려다보며 말이 없던 진혁의 입이 다시 열리고 다른 질문이 시작되었다.

“같이 도망쳐 달라고?”

질문의 무게에 비해 마주친 부드러운 눈동자는 평온했다. 희나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고 젓지도 않은 채 긴장해서 침을 꿀꺽 삼키고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잠시 그녀의 반응을 기다리던 진혁은 희나가 잠잠히 있자 먼저 다시 물어 왔다.

“내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어?”

‘그건 곤란해’ 혹은 ‘그러지 않는 게 너를 위해 좋아’ 같은 답이 나올 거라고 생각하던 희나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창백하게 굳어 있던 얼굴에 조금 혈색이 올라왔다. 이제야 심장이 몸에 혈기를 전달하는 것 같다.

눈을 내리뜨고 잠시 머뭇거리던 희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솔직한 심정을 꺼내놓았다.

“지금까지처럼 옆에 있으면 좋겠어요.”

“지금까지처럼?”

“내가 바라는 대로 안아주고, 맛있는 거 해주고…… 머리 쓰다듬어주고, 아프면…… 챙겨주고…….”

바라는 걸 말로 내뱉는 게 너무 생소해서 얼굴에 피가 급격히 쏠렸다. 너무 빨개지다 못해 코피라도 흐를 것 같다.

그러면서도 희나는 멈추지 않고 더듬더듬 계속 말했다.

듣고 있던 진혁의 담담하던 표정은 점점 입가에 미소를 띠기 시작했다.

그는 살짝 웃더니 희나의 볼을 잡아당기면서 말했다.

“애어른처럼 굴더니 알고 보니까 완전 어리광쟁이네.”

눈 바로 앞에서 다정하게 말해주니 심장이 쾅쾅 뛴다. 희나는 빨개진 얼굴로 판결을 기다리듯 그를 쳐다봤다.

곧 모양 좋은 입술이 사뿐히 열리더니 시원스런 말을 조용히 내어놓았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

희나는 가만히 커다란 눈을 깜빡거렸다. 그걸 보고 진혁은 다시 말랑말랑한 볼을 살짝 꼬집으며 말을 확인시켜 주었다.

“반응이 왜 그래? 네가 바라는 대로 해준다는데.”

“정말요?”

“그래서 니가 좋다면 그렇게 해.”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온 대답이 너무나 태연했다. 이렇게 쉽게? 원하던 말을 듣고도 희나는 불안한 표정을 지으면서 웅얼거리듯 물었다.

“진심이에요?”

“정말이지.”

“……들킬지 모르니 안 된다고 안 해요?”

진혁은 한숨 같은 웃음을 짓더니 중얼거렸다.

“이제 정말 못 보겠어. 다시 너 이런 모습 볼 바에는…… 다른 건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어.”

뭔가를 내려놓은 듯 그는 그렇게 말했다. 체념한 건지 벗어난 건지 그간 망설이던 모습은 흔적도 없이 그저 담담했다.

그렇게나 힘들었는데 너무 쉽게 가는 게 이상해서 희나는 계속 확인하듯 물었다.

“진짜 그래도 괜찮은 거예요?”

“난 괜찮아.”

“엄청 힘들 텐데. 아무 대가도 없이…….”

축 처진 눈망울로 쳐다보는 희나를 보고 진혁은 쿡쿡 웃었다. 오랜만에 그 웃음을 보니 마음이 녹아내리는 거 같다.

진혁은 팔을 뻗어서 희나의 새하얀 뺨을 쿡 찔렀다.

“왜 또 몸이라도 요구할 거냐고 물어보게?”

장난스럽게 말하며 눈을 부드럽게 휘며 웃었다.

“아무것도 안 해. 너만 좀 괜찮아질 수만 있다면 뭐라도 할 수 있을 거 같아. 내 마음 편하려고 하는 거니까 아무 부담 가질 필요 없어.”

너무나 진심 어린 그 말에 희나의 눈에 다시 눈물이 맺혔다.

나한테 오직 주기만 하는 세상에서 단 한 사람. 이 품에 안겨서 막 울어버리고 싶은 기분이다.

“왜 또 울어. 이제 그만 울어.”

촉촉해진 희나의 눈가를 닦아주며 진혁은 미소를 지었다.

“내가 바라는 대로 다 해줄 거예요?”

진혁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희나는 곧장 재연 얘기가 떠올랐지만 나오지 못하고 입 안에 맴돌았다.

내가 바라는 대로 편해지기 위해서 한다면, 동정으로 하겠다는 걸까? 그녀는 계속 만나려는 걸까?

그는 몸이라도 ‘요구할까 봐?’ 하고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아주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아무것도 안 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말을 지킬 것이다.

희나는 전처럼 대해달라고 말해버린 것을 떠올리고 실수했다고 생각했다. 원하던 것들은 그게 맞지만, 지금은 그거보다 더 원한다.

나는 당신의 마음을 원해.

작은 손이 뻗어 나가 진혁의 안경을 벗겼다. 웃고 있던 입꼬리가 의아한 듯 조금 벌어졌다.

희나는 앉아 있던 소파에서 내려와 진혁 앞의 바닥에 앉았다.

“나 다른 거도 많이 원해요.”

“응? 어떤 거?”

갸웃거리는 얼굴을 보니 도저히 말할 수가 없어 희나는 진혁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진혁은 잠시 놀란 듯했지만 아까의 약속을 상기했는지 가볍게 마주 안아주었다. 그 넓은 품에 고개를 묻고, 그립던 체향을 맡으면서 희나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거나 해도 나 괜찮아요…….”

너무 부끄러워서 터질 거같이 빨개진 얼굴로 간신히 말했는데 진혁은 더욱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아무거나라니…… 뭐?”

희나의 예쁜 눈이 찡그려졌다. 그녀는 입술을 앙다물고 양손으로 뜨거워진 얼굴을 감싼 뒤 중얼거렸다.

“진짜 바보, 둔탱이…….”

“어? 뭐라고?”

“좋아한다구요, 이 바보 아저씨!”

버럭 말해버린 희나는 놀라 굳어버린 진혁의 목덜미에 다시 얼굴을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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