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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그 너머에는-54화 (54/140)

54화. 잃어버린 것은 (4)

“아니 진짜 이 미친년이! 이거 당장 안 놔!?”

“안 돼-. 못 놔! 내 돈 줘!”

희나가 악착같이 달라붙어 매달리자 인정사정없는 발길질이 날아온다. 맞으면서도 그녀는 질질 끌리다시피 계단을 올라가는 그를 따라가며 소리 질렀다.

“가져간 거 맞잖아! 당신이 가져갔잖아!”

대문을 벗어나니 소란에 동네 사람들이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고 쳐다보고 있는 모습들이 보인다.

눈물 젖은 얼굴로 계속 발악하듯 악을 쓰던 희나는 아버지가 거칠게 팔을 휘둘러 휙 밀치는 바람에 바닥에 또다시 내동댕이쳐졌다.

무릎이 까지고 피가 줄줄 흘렀지만 다시 일어나 울면서 희나는 구타하는 다리에 매달렸다.

가게 둘 수 없다. 단 얼마라도 다시 되찾아야…….

“없어! 이년아-! 몇 푼 되지도 않는 거, 다 쓴 지가 언젠데!”

머리 위로 떨어진 그 말에 기를 쓰고 매달리던 희나의 움직임이 멎었다. 희나는 스르르 주저앉아 버렸다.

다 썼다고? 그 돈을? 찾을 수 없는 거야?

맞고 긁혀서 만신창이가 된 희나가 창백하게 질린 채 망부석처럼 굳어 입술을 벌벌 떨자 주변 사람들 시선이 더 따갑게 꽂힌다. 인간 같지 않은 인간도 체면이란 걸 찾는지 희나의 아버지는 그 시선들에 맞서기라도 하듯 고함을 질렀다.

“미친년이 어디서 키워준 부모가 돈 좀 썼다고 발광이야? 은혜도 모르는 년이!”

그러나 희나에게는 사람들의 시선도 어떤 말도 인지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초점을 잃고 이상하게 뒤틀린 시선으로 바닥 쪽을 쳐다보며 바들바들 떨었다.

그게 어떤 돈인데…… 당신 같은 인간이 쓰레기같이 써 버렸다고?

“아, 아아…… 안 돼……. 안 돼…….”

그녀는 혼자서 중얼중얼거렸다. 정말 안 되는데……. 그럴 순 없는 거야. 내 돈…….

희나는 온통 엉망이 된 얼굴로 주저앉은 채 아버지를 올려보았다. 흉하게 일그러진 얼굴이 그녀를 정면으로 쳐다보며 욕설을 퍼붓는다.

“발광을 하는구만. 지 에미를 닮아 가지고.”

“……나쁜 자식…….”

희나의 입에서 작게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의 눈에 파란 증오의 빛이 어렸다.

여태까지 줄곧 당하면서도 아버지를 인격체가 아닌 그냥 자연 재해 같은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별달리 깊은 감정 같은 걸 품어본 적이 없었다. 그냥 발부리에 채여 아프게 하는 돌멩이같이 생각해왔다.

그러나 눈앞의 악마를 향해 이제 뼛속 깊은 곳에서부터 깊은 혐오감이 몰려왔다. 도망치듯 멀어져가고 있는 인간의 구부정한 뒷모습이 흉악하고, 더럽고, 증오스러웠다.

희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바닥을 마구 두드리며 소리를 질렀다.

“제발 어디 가서 좀 죽어버려! 살아 있을 가치도 없어, 당신 같은 쓰레기만도 못한 인간!”

“……미친 년…….”

“죽어도 용서 안 할 거야! 죽어서도 저주할 거야! 절대로, 평생 용서 안 할 거야!”

그녀는 정말 진심으로 악에 받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주변에서 쳐다보는 시선 같은 거 아무래도 좋았다.

딸의 절규를 들으면서도, 추악한 남자는 돌아보지 않고 황급히 걸어가 버린다.

통곡을 떠올리면서, 괴로운 마음을 딸의 피 같은 돈으로 술을 마시며 잊을 거다. 내일 더 괴로워지겠지만, 내일 더 많은 술을 마셔서 잊으려 들 거다.

오갈 데 없는 억울한 마음이 북받쳐 올라 눈물이 쏟아졌다.

아무래도 좋다. 이런 아무 복도 없는 인생. 그냥 어딘가로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 제발 누가 나 좀 죽여주면 좋겠다. 차라리 아예 미쳐버려서 아무 괴로움도 느끼지 못했으면 좋겠다.

주저앉아서 희나는 목을 놓아서 울었다. 바닥을 치고, 몸을 비틀고, 고개를 흔들었다.

내장이 뒤틀리는 것 같다. 이렇게 울다가 그냥 쓰러져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이 동정하는 듯 쳐다보며 웅성거리는 것이 귀에 들어왔지만 희나는 아랑곳없이 상처받은 짐승이 우는 것처럼, 그렇게 목이 쉬도록 넋을 놓고 통곡했다. 여태껏 살아온 모든 것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렸다. 이런 인생 같은 거, 이제 필요 없다.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

그렇게 쓰러져 울다가 희나는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놓았다.

얼마 뒤, 희나는 병원에서 눈을 떴다. 탈수를 일으켜 어지러운 머리는 띵했지만, 그 와중에도 심장을 에는 듯한 상실감이 사라지질 않는다. 눈을 뜨자마자 다시 주루룩 눈물을 흘리는 희나를 보고 간호사는 황급히 놓고 있는 수액의 양을 조절했다.

곧 병실로 들어온 의사는 다시 발작하듯 울고 있는 희나의 팔에 진정제를 놓았다. 그렇게 다시 잠든 그녀가 눈을 떴을 땐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다시 울면 잠들 거란 생각이 들어 희나는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억지로 잠재우고 혼이 빠져나간 것 같은 표정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낮의 의사가 다시 돌아와 옆에 앉더니 몇 가지 반응 검사를 하고는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좀 진정이 되니?”

“…….”

희나는 그냥 초점 없는 시선으로 묵묵히 누운 채 의사의 이야기를 들었다. 쓰러지는 것을 본 동네 사람이 구급차를 부른 모양이다. 누군지 모를 그 친절한 사람은 병원비도 계산하겠다 했다고 한다.

그냥 그녀는 멍하니 그런 거 알게 뭐냐, 하고 생각했다. 치료도, 신경 써주는 것도 하나도 고맙지 않다.

“저기…… 학생 상황을 듣고…… 청소년 보호 센터에 연락을 했어요.”

대답 없는 그녀에게 옆에 서 있던 상냥해 보이는 중년 간호사가 부드럽게 말했다.

“학생 같은 상황이면, 센터가 그래도 나을 거야.”

“그래. 힘들겠지만 기운 내고 살아야지. 그래도 아직 앞날이 창창한데.”

“그래요. 이렇게 예쁜 학생이…… 좀만 참으면 좋은 일이 있을 거예요.”

위로하듯 간호사와 옆 병상에 누워 있던 환자나 환자 가족들이 던지는 말들 모두 듣기 싫었다. 하지만 계속 가만히 있으면 언제까지나 떠들어 댈 거 같아서 희나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그럴게요.”

귀찮아서 한 말인데 희나의 대답에 주변 사람들은 기쁜 듯이 보였다.

“이제 괜찮아요?”

괜찮을 리 없잖아. 희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나서 피곤해서 좀 더 자고 싶다고 말하자 침대 주위의 커튼을 쳐주더니 다들 물러갔다.

눈을 감고 잠시 자는 척을 하다가 희나는 눈을 떴다. 그리고 입구 쪽 침대 커튼을 슬그머니 열었다. 병실 반대쪽에 있는 사람들은 안 보이는 것 같았다. 병상에서 내려와 몸을 살피니 다행히 옷을 갈아입히지 않아서 교복 차림 그대로였다.

가방은 학교에 놔두고 왔었다. 휴대폰도 지갑도 없지만, 이제 그런 거 아무래도 좋았다. 희나는 링거를 뽑아버리고 그대로 슬리퍼를 신은 채 병실을 빠져나왔다.

종합 병원을 빠져나온 희나는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목적지 같은 거 없다. 그냥 센터 같은 거 들어가기 싫다. 그러려고 애를 쓴 게 아니다.

갈 데가 있나? 없다.

집을 계약한다고 말하고 지훈과 크게 싸운 뒤 헤어졌다. 친구 같은 거 한 명도 없다. 연락할 사람도 없다.

아니, 연락하고 싶어도 어차피 휴대폰도 없지만.

정처 없이 걸으며 희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진정제의 약효가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았는지 아까까지 홍수처럼 흐르던 눈물도 멎고 왠지 붕 뜬 기분이었다.

내 두 다리로 아무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살아가겠다고, 필사적으로 살았다. 하지만 결국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뭐 때문에 필사적으로 살았을까. 아무 의미도 없는 거.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가지? 다시 열심히 살고 돈을 모아야 하나? 그러면 뭐 해. 아무 의미도 없는 거.

상실감이 올라올 때마다 오장육부가 끊어지는 것 같다. 잃어버린 것을 떠올리기만 해도 숨이 막혀 온다.

이렇게 울컥울컥 올라오는 괴로움에서 도망칠 수 있을까? 아니 도망 못 칠 거다.

그럼 이제 죽는 수밖에 없는 걸까?

신호등을 지나서 희나는 계속 걸었다. 걸으면 걸을수록 머리가 맑아지고 차분해졌다.

마음에 의지하는 게 있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에겐 아무것도 없다. 필사적으로 지키려 했던 것도, 진정으로 원하던 것도.

줄곧 걷고 있던 2차선 도로가 끝나고 8차선 도로가 나왔다. 시내인데도 차들은 아주 쌩쌩 달리고 있었다.

희나의 시야에 그 넓은 도로를 가로지르는 육교가 들어왔다.

천천히 다가가 육교로 올라선 희나는 한가운데 멈췄다. 그리고 난간을 받치고 있는 돌 위에 올라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래에선 별로 안 높아 보였는데 올라오니까 꽤 높다. 하지만 그래 봤자 5m? 6m쯤?

이런 높이에서 떨어지면 죽는 걸까?

멀리 내려다보이는 콘크리트 바닥을 쳐다보며 희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반드시 죽는다고 하기엔 애매한 높이다. 다른 데로 가야 하나? 생각하다가 희나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다른 데 찾기 귀찮다. 그냥 빨리 다 끝내버리고 싶다. 뛰어내려서 안 죽으면 저 바퀴가 빠져라 달리고 있는 차들 중에 하나가 끝장을 내주겠지.

죽기로 결심하니까 괴로운 마음도 한결 가라앉았다. 잃어버린 돈도 이제 아무래도 좋아졌다.

어차피 난 죽을 건데 돈 좀 없으면 어때.

재밌는 생각도 아닌데 쿡쿡 웃음이 나왔다. 기분 좋게 죽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다행이다.

그러나 생각에 잠긴 희나의 몸은 좀처럼 난간 위로 기어오르지 못했다. 시간을 끌면 좋을 게 없는데, 몸이 좀처럼 움직여지질 않는다.

아직 마음의 정리가 덜 됐나? 아무 미련 없는데?

난간에 턱을 대고 희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피안이 기다리고 있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멍한 시선에 지나가는 S 브랜드의 흰 자동차가 들어온다. 진혁의 자동차와 같은 차종이다.

희나는 역시 이건가 하고 중얼거리면서 진혁의 얼굴을 떠올렸다.

지금 뭐 하고 있을까? 시험이 끝났으니까 방학이겠지?

좋아하는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을까? 아니면 데이트라도 하고 있을까?

음……. 이렇게 날씨가 좋으니까 아마 데이트하고 있을 거 같네.

“……당신은 내가 죽으면 슬퍼할 거야?”

들어줄 이 없는 목소리가 소리가 되어 메마른 입에서 나지막하게 흘러나왔다.

중얼거리면서 그녀는 생각했다.

분명히 슬퍼하겠지. 선생님은 좋은 사람이니까. 희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작게 미소 짓다가 살짝 고개를 떨궜다.

한동안 슬퍼해도, 얼마 안 가면 곧 잊어버릴 거다. 나를 걱정하면서 곧 잊어버렸던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자 문득 한 가지 질문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럼 대체 누가 날 기억해주지?

가족도 친구도 아무도 없다. 여기서 떨어지면 나라는 사람이 존재했다는 건 그냥 없었던 일처럼 사라져버릴 거다.

날 위해 울어줄 사람이 있을까?

죽음을 목전에 두자 자신을 속이고 있던 감정들이 봇물 터지듯이 밀려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랐던 눈물이 다시 희나의 예쁜 눈을 적셔 올렸다.

싫어. 이런 식으로 죽는 건 싫어. 아무것도 이룬 게 없는데. 하고 싶은 걸 해본 적도 없는데.

사실 친구도 사귀고, 놀러 가고 싶었다. 아르바이트 같은 거 하기 싫었다. 다리 아프고 피곤해서 이대로 쓰러지고 싶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다.

친구네 집에 갈 때마다 부러웠다. 인형도 가지고 싶었고, 미술 수업을 할 때면 남들처럼 준비물 꺼내서 평범하게 수업에 참여하고 싶었다. 점심시간에는 도시락도 같이 먹고 싶었다. 수학여행도, 사실 가고 싶었다.

졸업식 때 엄마, 아빠가 와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침대에서 자보고 싶었다. 사실 프릴이 달린 예쁜 침대에 누워보고 싶다는 소녀 같은 생각을 한 적도 있다. 깜찍한 원피스를 입고 예쁘다는 말을 듣고 솔직하게 기뻐해보고 싶었다. 누군가 집에서, ‘왔어?’라고 말하며 반겨주길 바랐다.

동생하고도 사이좋게 지내고 싶었다. 사실, 동생이 집에 돌아오지 않으면 외로웠고 눈에 보이지 않으면 걱정됐다.

하지만 부럽지 않은 척, 힘들지 않은 척, 그런 거에 관심 없는 척, 신경 쓰지 않는 척 스스로를 속이는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원해도 소용없으니까.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 원하면 내가 너무 불쌍하니까. 나까지 나를 불쌍하게 느끼고 싶지 않으니까.

불쌍하고 싶지 않았어. 이렇게 살기 싫었어. 다른 애들이 사실은 부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어.

그녀의 어깨가 바들바들 떨린다. 몸을 던져야 할 곳에 눈물들이 뚝뚝 떨어져 던져진다.

미래를 보고 살았는데, 이미 삶에서 놓쳐버린 게 너무 많다. 그것들은 절대 다시 찾지 못할 거야.

난 이미 부서진 인간이다. 고칠 수가 없을 거야. 이제 남들처럼 살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린 거야.

멋진 집에서 불안에 떨며 잠을 못 이룰 정도로. 행복을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그런데 그걸 다 알아도 이렇게 죽기 싫어. 왜 이렇게 불안하게 서 있는데 아무도 날 잡아주지 않지.

이렇게 죽으면 허무하잖아. 아무것도 못 해봤는데…… 솔직해져보지도 못했는데, 난. 그리고…….

떨리는 어깨가 잠시 멎었다. 하얗게 질린 희나의 입술에서 조용한 말이 또렷하게 흘러나왔다.

“당신한테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었어.”

희나는 난간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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