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잃어버린 것은 (3)
희나는 어제 떠들었던 각종 솔직한 심경 고백과 낯 뜨거운 성희롱에 가까운 말들이 떠올라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끄응끄응하고 몸을 뒤틀며 이불 킥을 하고 있으려니 수진이 푸석한 얼굴로 푸스스 일어났다.
“아- 뭔 새벽 다섯 시부터 난리래. 하암-.”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켜는 그녀를 보고 희나가 몸을 일으키자 그녀는 힐끔 내려다보고는 또다시 뺨을 잡아당겼다.
“아우, 어려서 그런지 술 마신 다음 날에도 숙취 없이 뽀송하네, 그냥. 에이, 짜증 나-.”
희나는 자신은 달랑 세 캔 마셨는데 방바닥을 메울 정도로 나뒹굴고 있는 맥주 캔들과 페트 두 병을 보며 단순히 나이 차이 때문은 아닌 거 같다고 생각했으나 입 밖에 내어 말하진 않았다.
“나 물 좀 갖다줘.”
수진의 요구에 일어나서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 들고 컵을 찾으려는데 수진이 그냥 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희나는 2l짜리 페트병을 그대로 벌컥벌컥 들이켜는 수진 옆에 앉아서 다시 액정이 반짝이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지훈에게서 사과 메시지가 와 있었다.
「미안해. 하지만 연락 좀 해주지 그랬어. 얼마나 걱정했는데.」
「미안. 일단 지금 들어갈게. 좀 이따가 봐.」
다짜고짜 의심한 것에 쏘아붙여 주려다 자기가 잘못한 것도 있고 해서 희나는 그냥 그렇게 메시지를 전송했다. 오늘 들어가면 안 그래도 집 구한 거에 대해서 말해야 하는데, 벌써부터 기분 상하게 해서 좋을 게 없기 때문이다.
전송하고 액정을 끄려는데 수진이 희나의 어깨에 얼굴을 턱 얹더니 휴대폰을 잘 보이도록 각도를 틀었다. 그리고 카톡을 당당하게 쳐다보다가 지훈의 프로필 사진을 클릭했다. 지훈의 프로필 사진은 희나가 카페에 가서 찍어 준 것이었다.
수진은 가느다랗게 뜬 눈으로 사진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뭐야, 이건 요즘 아이돌이냐?”
“아뇨.”
“그럼 이거 설마 이놈 지 사진이야?”
“네.”
“얘가 방금 전화한 그 간절한 집착남이야?”
희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수진이 휴대폰을 뺏어 들어 지훈의 프사를 확대하더니 더욱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곧 희나의 몸을 덥석 잡아당겨 이불 위로 메다꽂았다.
“으아앗-! 왜 이래요!”
“아아아아아, 이 부러운 것! 이런 맛있게 생긴 녀석이 싫어서 도망치고 싶단 거야? 요거, 배가 아주 부르다 못해 터졌네?”
“꺄앗- 간지러워요! 그만, 그만!”
“아아아, 짜증 나-! 이쁜 것들이란! 너 집에 빨랑 가! 밥맛없어!”
수진이 소리치며 마구 간지럼 공격을 날렸다. 희나는 속절없이 당하면서 눈물이 나도록 웃었다. 이렇게 웃어보는 게 정말 오랜만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월요일, 희나는 점심시간에 학교를 슬쩍 빠져나왔다.
공인인증서가 없기 때문에 송금하려면 은행에 직접 가야 했다. 통장이 없는 희나는 우선 ATM기에서 한도까지 뽑은 뒤 창구에 가서 무통장 입금할 생각이었다. 이틀에 나눠서 송금하겠단 합의도 이미 마친 상태였다.
카드를 넣고 100만 원을 선택한 뒤 비밀번호를 눌렀다. 그리고 ATM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희나는 움찔했다.
[잔액이 부족합니다.]
잔액이 부족하다니? 분명히 1400만 원이 조금 넘는 금액이 입금되어 있는 통장이다.
희나는 뭔가 착오가 있나 싶어 카드를 한번 들여다보고 다시 넣었다. 그러나 같은 안내가 다시 나왔다.
이쯤 되니 조금 심각한 기분이 들어서, 희나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계좌 조회를 클릭했다.
그리고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계좌 잔고가 3724원밖에 남아 있지 않는 걸로 나왔다.
너무 충격을 받아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았지만, 희나는 다시 카드를 넣고 거래 내역을 확인했다.
‘왜? 뭔가 전산 실수겠지…….’
엄습해 오는 불안함을 가라앉히려고 아무리 중얼거려 봐도 조금도 도움이 되질 않았다. 희나의 몸은 이젠 완연히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화면에 나타난 거래 내역에 희나의 얼굴은 그야말로 밀랍 인형처럼 굳어졌다.
3주쯤 전에 1443만 원이 인출되었다는 기록이 있었다.
돈을 뽑은 기억 같은 건 전혀 없다. 카드도 항상 지갑에 넣은 채 잃어버린 적 없다. 희나는 쓰러지듯이 창구로 달려가서 물었다.
“저, 저, 이 카드, 제 카드인데 잔고가 이상해서요-. 저기, 확인 좀, 뭔가 착오가 없나-.”
너무 당황한 나머지 목소리가 떨리고 더듬거리며 나왔다. 은행원은 카드를 친절하게 받아 들더니 말했다.
“어떤 착오 말씀이십니까, 고객님?”
“제가 한 번도 뽑은 적 없는데…… 돈이 사라져 있어요?”
“네, 착오가 난 금액이 얼마인지 알고 계십니까, 고객님?”
“1400만 원 정도요…….”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 입에서 거액이 나오자 은행원은 잠깐 움찔했다. 그녀는 카드를 기계에 넣고 분주하게 자판을 치더니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대답했다.
“고객님 1400만 원이라면 5월 24일 거래 내역에 대한 말씀이십니까?”
“저, 전 뽑은 적 없어요-! 카드도 항상 내가 가지고 있었는데요!”
그러자 은행원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해당 거래는 통장과 인감을 이용한 창구 거래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만…….”
통장이라고?
순간 떠오르는 생각에 희나는 번개를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통장은, 집에 있다. 잃어버리지 않도록 잘 숨겨두었었다.
그리고 3주 전, 집에 가서 아버지에게 폭행당하던 그날 밤.
귀중품들을 들고 나오려고 짐을 꾸려두고 들고 나오지 않았다. 돈을 찾아 딸, 아들을 두들겨 패던 아버지가 못 보던 꾸러미를 봤다면…….
‘아빠……!’
희나의 떨리는 시선이 손에 들고 있는 카드로 떨어졌다.
우체국 어린이 통장.
어렸을 때, 엄마 아빠와 손을 잡고 가서 만들었었다. 비밀번호는, 아빠의 생일이었다.
우체국을 빠져나온 희나는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집을 향해 걸었다.
의심의 여지는 없었다. 아빠 짓이다.
범인을 알고 나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다. 돈을 찾아간 지 3주가 다 되어간다. 아빠는 술만 마시는 것이 아니라 가끔씩 돈이 생기면 같은 일용직 노무자들끼리 모여서 포커를 치거나 경마도 즐겼다.
찾아도 벌써 상당한 금액을 탕진했을지 모른다. 한 번에 찾아가 버렸다는 건, 남아 있어도 돌려주지 않을 확률이 높다.
어떻게 하지? 경찰에 알려야 하나? 아빠가 도둑질해 갔다고?
아니, 알려도 소용없을 거다. 미성년자란 신분 때문에, 희나의 재산 관리권은 아빠에게 있다는 걸 그녀는 익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맞으면서도 돈이 있다는 사실을 힘들게 숨겨왔던 것이다.
되찾을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런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히는 것 같다.
귀신처럼 창백해진 얼굴로 집에 돌아온 희나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낮인데도 곰팡내 나는 집은 어두컴컴하다. 둘러본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빠가 낮부터 어디에 있을지 전혀 짐작이 안 된다.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온몸에 힘이 빠져나가서 찾으러 다닐 기력도 없다.
희나는 거실 한편에 쪼그리고 앉았다. 불안해서 6월인데도 몸에 오한이 느껴진다.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고 최악의 상황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녀는 한 손에 휴대폰을 꼭 쥔 채 그렇게 쪼그려 앉아 기다렸다. 제발 은행에서 전산 실수였다는 연락이 오기만을 간절히 기원하면서.
얼마나 지났을까. 문밖에서 누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인기척이 있었다. 직감적으로 희나는 아빠임을 알았다.
예상대로 발걸음 소리는 지나쳐 가지 않고 점점 커져왔다.
녹슬 대로 녹슨 문이 끼익- 소리와 함께 열리고, 희나는 켜려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불이 켜진다. 전기세를 지불할 사람이 아닌데 불이 들어오는 것을 보니 불안함은 점점 확신으로 바뀌어갔다.
문 안으로 들어선 비쩍 마른 볼품없는 중년 남자는 쪼그리고 앉아 있는 희나를 발견하고 흠칫했다.
“뭐야, 집구석에 들어왔으면 불이나 좀 켜고 살아.”
희나는 고개를 들어 자신의 아버지를 올려보았다. 아직 대낮인데도 술 냄새가 진하게 풍기는 것은 여전하지만 항상 지저분하게 자라 있던 수염을 깎았다.
그는 희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어쩐지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문 안으로 들어서려던 발을 도로 내빼더니 침을 탁 뱉고는 돌아서 나가려고 했다.
그 몸짓을 보고 희나는 결국 확신해버렸다.
그녀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다가가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내 돈 가져갔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모르는 척 잡아떼지만 누가 봐도 어색하다. 희나는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는 팔을 붙잡고 다시 다그쳐 물었다.
“내 돈 어떻게 했어?”
“무슨 돈? ……헛소리하지 말고 빨리 놔!”
“내 돈 가져갔잖아! 내 통장에서 꺼내 갔잖아! 빨리 돌려줘!”
말하면서 점점 감정이 북받쳐서 언성이 높아지고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참을성이 없는 남자는 곧장 얼굴을 찌푸리더니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이년이 미쳤나, 이거 안 놔?”
욕설과 함께 거칠게 밀쳐지자 희나는 이를 악물었다. 힘이 부족하니 화나게 하면 소용이 없다. 희나는 다시 다가가 이번엔 살짝 팔을 잡고 구슬리듯 간절하게 말했다.
“쓴 건 어쩔 수 없으니까 남은 거라도 돌려줘. 나 진짜 힘들게 모은 거란 말이야. 제발 돌려줘.”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면서도 억울하고 분해서, 눈물이 고였다. 살면서 기억하는 한 아버지라는 작자에게 한 번도 부탁도 애원도 해본 적 없다. 당연한 걸 요구하는데 애원해야 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인상을 팍 찌푸리면서 귀찮다는 듯 내뱉었다.
“왜 질질 짜고 지랄이야? 돈은 무슨, 개 같은 소리 하지 말고 안 비켜? 처맞아야 정신을 차리나.”
“싫어. 안 돼……. 안 돼. 부탁이니까 돌려줘. 돌려줘-.”
점점 절망스러워지자 고인 눈물이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커다란 눈망울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는 딸을 그는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다시 침을 뱉으며 중얼거렸다.
“에이……. 재수 없게. 씹할.”
“그러지 말고, 정말 돌려줘. 진짜…… 그거 내 전부란 말이야…….”
“아, 그만 안 닥쳐?”
평생 보이지 않던 난처한 기색을 보이던 아버지는 결국 제 뿔에 화가 났는지 또다시 버럭 소리를 지르며 그녀를 휙 밀쳤다. 이번에는 세게 밀쳐져서 희나는 지저분한 방바닥에 쓰러져버렸다. 왈칵 흘러나오는 눈물과 함께 누르고 있던 분노가 함께 흘러나와, 희나는 절규하듯 악을 썼다.
“돈 달라고! 내 돈! 내 돈이잖아!”
그녀의 언성이 높아지자 그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더니 도망치듯 꽁무니를 빼고 걸어가 버린다. 희나는 바들바들 떨리는 다리로 허겁지겁 일어나 비틀거리며 따라갔다.
“못 가-! 내 돈 주고 가! 아니면 나 죽이고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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