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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그 너머에는-52화 (52/140)

52화. 잃어버린 것은 (2)

“아, 기분도 꿀꿀한데 빨리 다음 집 가서 대충 보고 술이나 빨러 가자.”

“저 아직 미성년자인데요.”

“뭐 어때. 나보다 더 키도 크고 슴가도 빵빵한 걸 보니 간도 나보다 더 잘 컸을 거야. 마셔도 상관없어.”

거침없는 언변에 희나는 움찔해서 부동산 남자를 돌아보았다. 다행히 그는 현관 쪽에 서서 전화를 받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금방 끝날 테니 걱정 마세요. 여기로 하면 괜찮을 거 같아요.”

그러자 수진이 “엥.”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야- 농담이야. 잘 보고 골라.”

“잘 봤어요. 전 여기면 될 거 같아요.”

“진심이야?”

“여기 보증금 1500에 18만 원이랬죠. 월세가 최대한 싼 게 좋아요.”

“아무리 싸다지만…….”

계속 시큰둥하던 수진이 초라한 인테리어와 추워 보이고 초라한 화장실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깔끔한 원룸들도 보고 온 마당에, 요즘 여자애가 이런 데서 살려고 하다니.”

“전 좋아요. 내가 살던 집보단 나아요.”

확신에 찬 듯한 희나의 태도를 보고 수진은 더 만류하지 않고 곧 부동산 사람을 불러들였다.

보증금이 약간 부족했기 때문에 보증금 200만 원을 깎는 대신 월세를 2만 원 올리는 조건으로 합의하는 것까지 수진이 도맡아 흥정했다. 집주인이 부재중이라 정식 계약은 월요일에 하자고 해서 수락하고 둘은 부동산 남자와 헤어져 역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월요일에 그럼 다시 같이 올까요?”

“아니, 내가 와서 하지 뭐. 계약서 사진으로 찍어줄 테니 집주인 계좌로 돈만 보내.”

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천천히 걸어서 신림역 주변까지 왔다. 인사하고 전철을 타려고 하는데 수진이 희나를 붙들었다.

“어디 가. 이렇게 도와줬는데 한턱 안 낼 거야?”

“네? 아, 네. 뭐 먹고 싶은 거 있으세요?”

진혁이 여자가 생겼으니 희나를 도울 이유도 별로 없을 텐데 도와준 셈이다.

거하게 저녁이라도 사는 게 도리에 맞는 거 같아 희나는 순순히 물었다. 그러자 수진이 팔을 잡아끌고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밥은 됐어. 우리 집에서 술이나 빨자-.”

“저 술 마실 줄 몰라요-!”

“됐으니 내 상대나 해. 너도 얼굴 보아하니 술 한잔하고 싶을 거 같은데 말이야.”

희나가 무슨 소리냐는 듯 쳐다보자 수진이 입꼬리만 올려서 웃으면서 말했다.

“너도 실연당한 얼굴이잖아. 아무 사이도 아니긴 무슨. 너 진혁이 좋아하지?”

정곡을 찔리자 순간 희나는 말문이 막혔다. 실연당한 얼굴? 이렇게 우울하고 괴로운 것이 말로만 듣던 실연이라는 건가?

사귄 적도 없는데 한심하다. 갑자기 또 눈물이 나올 것 같아 희나는 제발 나오지 말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매번 입술에서 피를 흘리는 이상한 여자로 보이고 싶지 않으니까.

다행히 이번 감정의 웨이브는 참을 만했다. 그러나 눈물은 나오지 않았어도 표정이 굳어버리는 건 감출 수 없었다.

수진은 희나의 울 것 같은 표정을 보고 어깨를 툭툭 치더니 그대로 끌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 불여시가 그러니까- 교생이었단 말이야?”

“네에-. 여우같이이 매앤날 선생님 옆에 찰싹 붙어 이써써여-…….”

희나는 잔뜩 꼬인 목소리로 느릿느릿 말했다. 흰 얼굴은 발그레 물들어 있고 눈은 반쯤 풀린 것이 누가 봐도 취한 모습이었다. 그냥 상대만 하라더니 수진이 맥주 캔을 따서 은근히 먹게 만든 탓이다. 그래 봤자 맥주 두 캔을 먹었을 뿐이지만 알코올에 면역이 없는 희나의 순수한 내장은 그거만으로도 해롱해롱해지기 충분했다.

“아아- 그렇게 홀랑 넘어가다니. 이 자식, 내가 빨리 한 번 더 집에 쳐들어가서 유혹할걸!”

“선생님으은 유혹 같은 거 안 넘어가자나여어-.”

“그렇긴 하지-. 근데 니가 어떻게 알어?”

말해줬으니까 알지. 그렇게 생각하며 희나는 다시 맥주 캔을 들어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그러나 이제 다 마셔서 안 나온다. 텅 빈 구멍을 쳐다보고 있으니 수진이 맥주 캔을 하나 더 따서 앞에 놔 주고는 오징어를 질겅거렸다.

그녀는 희나처럼 혀가 짧아지진 않았지만 아까부터 꺄하하하- 웃어 대고 있었다.

낮까지는 까칠하더니 수진은 같은 사람에게 차였다는 이상한 이유로 동질감을 느꼈는지 친근하게 대했다. 거기다 둘은 사람을 묶어주기 가장 쉬운 화제인 뒷담화로 의기투합해서 끝없는 수다를 쏟아냈다.

“어떻게 아냐니깐-?”

“내가, 내가…… 키이스해 달랬는데 안 해줬어여.”

“호오- 정말? 이 앙큼한 것 보소? 그런 소리를 했다고?”

희나는 갓 따서 탄산이 강한 맥주를 마시고 얼굴을 마구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끄덕거렸다.

“넴……. 첫 키스는…… 선생니임이랑 하고 싶었으니깐…….”

그 느릿느릿한 말을 듣고 수진은 오만상을 찌푸리고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하더니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고는 갑자기 호탕하게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면서 뒤쪽 어깨를 겁나 세게 팡팡 두들기는 바람에 하마터면 희나는 테이블에 코를 박을 뻔했다.

“으하하하하하하. 손발 겁나 오그라드는데-! 경부 자식이 들었으면 코피 쏟으면서 오덕사 했겠다-!”

배를 잡고 웃더니 수진은 희나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대고 풀린 눈으로 관찰하듯 쳐다봤다. 그러고는 희나의 매끈한 뺨을 꼬집듯 쭈욱 잡아당기며 말했다.

“근데…… 그쯤 되면 그놈 진짜 고자 아냐? 좀 진지하게 의심스러운데!”

“왜여어.”

“좀 열 받지만 나 안 덮쳤을 땐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너를 안 덮쳤다니까 맹렬하게 의심스럽네. 이런 탱탱 이쁜이가 몸을 던지는데 안 건드렸다고?”

작은 체구 주제에 대체 어디로 맥주가 그렇게 들어가는지 수진은 새로운 페트를 따더니 콸콸콸 목구멍에 술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고개를 잔뜩 갸우뚱거렸다.

“흐응-. 그래도 둘이 사는 동안 키스 정도는- 실수로라도 했을 줄 알았는데, 안 했어?”

“안 했어여-.”

“암것도 안 했어? 포옹이나 뽀뽀도?”

희나는 잠시 풀린 눈을 굴리며 생각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포옹은 해써여. 맨날 껴안고 자써여어…….”

“엥? 그랬단 말이야? 근데 그 이상은 안 했다고?”

“네. 안 해써여. 안고만 자써여.”

“뭐야-! 진짜 고자였잖아! 젠장, 내가 고자한테 그렇게 열을 올렸다니!”

수진이 나무젓가락으로 쾅쾅 소리 나게 테이블을 두들기자 희나는 입술을 비죽이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녀- 아녀. 고자는 아닐걸요오…….”

“왜에 그렇게 생각하는데……?”

술 취해서 별소리를 다 하고 있는 와중에도 그걸 떠올리고 얼굴이 뻘게진 희나가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말했다.

“안고 있을 때에- 그게 닿아써여…….”

“응? 뭐가?”

되묻다가 스스로 질문의 답을 깨달았는지 수진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가 곧 꺄하하하하 웃었다.

“크하하하하하하-! 아- 그 녀석도 남자는 남자구만! 서긴 서는구만! 고자는 아니네!”

“아마- 그럴 거예여-.”

“어떻더냐-? 소문대로 크냐?”

좋아하던 남자 얘길 하는 건데도 수진은 완전히 들떠 있었다. 눈을 반짝이는 그녀 앞에서 희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오. 어떤 게 큰 건지 모르겠는데에…….”

“닿는 게 얼만했는데?”

“이 정도오오오오-.”

희나가 순진하게 두 손을 이용해서 표시하자 수진이 또 뒤집어지며 마구 웃었다. 그리고 희나를 또다시 마구 두들기며 술을 먹더니 얼마 있다가 급침울해져서 입을 뾰족하게 내밀고 말했다.

“흥. 이렇게 파고들어서 생각하면 뭐해. 그 녀석은 이제 그 훌륭한 물건으로 교생 처자를 파고들고 있을 텐데.”

“고등학생이랑 얘기 중이라는 거어 잊지 말아주세여어.”

“꺄하하하하하- 이미 별 얘기 다 했는데, 무슨! 조기 교육이야, 조기 교육-!”

그러더니 수진은 이제 아예 대놓고 자신의 각종 경험에 대해서 뻥을 반쯤 섞어서 마구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희나는 얼굴을 붉히면서도 은근히 모두 귀담아들었다.

술에 취해서 흔들리고 있으니 확실히 기분이 좋긴 좋다. 취해 있으니 치밀어 오르는 발작과도 같은 눈물이 나오질 않는다.

괴로운 원인은 다 기억나는데 감정이 마비된 듯 얼얼하고, 모든 일이 ‘아무려면 어때……’ 하고 태평해진다.

이래서 사람들이 술을 마시는구나. 괴로운 기억에서 도망가려고. 그 망할 아빠도 이래서 마시나 보다. 그 인간이야말로 도망치고 싶은 현실투성이일 테니까.

아무래도 좋은 생각을 하며 희나는 피들피들 웃었다. 눈앞의 수진이 또 희나의 볼따구를 잡아서 마구 양쪽으로 당겼다. 그 신나게 웃는 유쾌한 표정을 보니 그녀도 덩달아 유쾌해지는 것 같았다.

평생 아무한테도 털어놓지 못할 것 같은 속내가 입 밖으로 나오자 마음이 후련하다.

오늘 만남이 이런 식으로 흘러갈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지만, 잘된 것 같다. 털털하다 못해 성별이 의심스러운 실연 동지가 그녀는 몹시 마음에 들었다.

희나는 그렇게 둥둥 뜬 채로 기분 좋게 흔들거리다가 어느 순간 쾅- 소리가 나게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그리고 옆에서 수진이 부르는 소리에도 일어나지 못한 채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부르르르르르르르르-.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머리가 울려 참을 수 없이 짜증이 난다. 손으로 그쪽을 더듬다가 방바닥이 만져지자 희나는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푹신한 침대와 우아한 천장 장식이 보이지 않는다. 잠시 어딘지 되짚어 보다가 수진의 집에서 잠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황급히 휴대폰을 들어 보니 새벽 5시였다. 부재중 통화가 12통이나 와 있었다. 전부 지훈이었다.

카톡으로 메시지를 보내려고 하는데, 또다시 지훈에게서 전화가 왔다.

진동 소리가 다시 울리자 옆에 누워 있던 수진이 짜증스럽게 머리를 이불 속으로 푹 파묻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쏟아지는 듯한 지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어디야? 왜 연락을 안 받아?]

“어, 미안. 아는 언니네 집에서 놀다가 깜빡 잠들었네…….”

[아는 언니라고?]

목소리에 깊은 불신이 묻어 나오는 게 느껴졌다. 하긴 친구라곤 개뿔도 없는 걸 알 테니 그러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곧 지훈이 더 어두워진 목소리로 대뜸 물어 왔다.

[너 그 자식네 집이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아는 언니네 집이라니까.”

[아는 언니 누구? 좀 바꿔줘.]

“아, 이상한 소리 그만해. 새벽에 무슨. 좀 이따 집에 들어가면 얘기해.”

연락 안 하고 안 들어가서 걱정시킨 건 미안하지만 머리도 아픈데 솔직히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 그 짜증을 더욱 증폭시키는 말이 들려오자 희나는 폭발해버렸다.

[그 자식네 집에 있는 거 맞네. 내가 지금 그리로 갈 테니까 거기 있어.]

“아, 아니랬잖아-! 선생님 얘기 좀 이제 그만해!”

안 그래도 진혁만 생각하면 빡치는데 의심까지 받자 답답해서 언성이 커졌다.

그 기세에 옆에 누워 있던 수진이 부스스 일어났다.

“뭐야. 진혁이 놈 얘기하는 거야?”

“아, 네. 언니 미안해요.”

“걔가 그 협박계의 꿈나무인 놈이야?”

희나는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수진이 돌아누워 심호흡을 했다.

“아우, 새벽부터 전화해서- 찌질하게 집착하지 말고 냅둬! 꼬맹이! 여자 질려서 도망치겠다, 인마!”

갑자기 그렇게 소리를 빽 지르는 바람에 희나는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 뭐라고 얘기를 하고 있던 지훈의 말소리가 멎었다.

그 성질에 욕먹고 열 받아서 쫓아오기라도 하는 거 아닌가 순간 긴장했는데, 잠시 후 의외로 안도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인가 보네.]

“정말이랬잖아. 새벽부터 이러지 말고 곧 들어갈 테니까 이따 얘기해.”

희나의 말에 지훈은 순순히 미안하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기를 툭 내려놓고 희나는 멍하니 고개를 돌려 방 안을 휘 둘러보았다.

술병들이 사방에 널브러진 집 안은 개판이었다. 그걸 보자 어제 벌인 술판에 대한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리고 곧 희나는 머리를 부여잡고 베개에 헤딩하듯 쓰러졌다.

‘으악, 내가 무슨 얘길 떠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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