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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그 너머에는-51화 (51/140)

51화. 잃어버린 것은 (1)

희나는 샌드위치를 하나 입에 물고 우물거렸다. 입 안이 써서 조금도 맛이 없었지만 입맛 없냐든가 하는 걱정의 말을 듣는 게 더 싫어서 억지로 넘겼다. 그러는 사이 어깨를 감아 오는 팔이 느껴진다. 지훈이 식사를 마친 모양이다.

“맛없어? 엄청 천천히 먹네?”

“아니. 나 천천히 먹을 거니까 신경 쓰지 말고 너 할 거 해.”

“왜, 밥 다 먹을 때까지 같이 있을게.”

“괜찮으니 농구나 하러 갔다 와. 웹툰이나 보면서 먹을래.”

지훈은 입을 좀 내밀었으나 그래도 역시 농구는 하고 싶은지 아쉬운 듯 희나에게서 두르고 있던 팔을 떼어내고 일어났다.

“그럼 이따가 봐. 방과 후에 데리러 갈게. 같이 가자.”

“응.”

희나가 작게 대답하고 고개를 끄덕이자 지훈은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고는 곧 옥상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좀 떨어진 곳에 앉아서 병태와 만화책을 보고 있던 희원이 그 모습을 보더니 기다렸다는 듯 일어섰다.

신이 나서 함께 내려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희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최근에는, 정말로 여러 가지로 맘에 안 드는 일투성이다.

희원은 지훈과 정말 친해지고 싶은지, 지훈이 아는 척해주기 시작한 날부터 학교를 나오기 시작했다. 거기다 희나가 지훈의 여자 친구라는 사실을 알자, 지훈 앞에서는 누나라고 부를 정도로 태도가 바뀌었다.

지훈도 그런 희원을 여러 가지로 살갑게 대해주며 가깝게 지냈다. 서로 농구도 좋아하고 취미도 맞는 것 같긴 하지만, 지훈이 굳이 희원과 그렇게 친하게 지내는 건 희나의 동생이라서인 것이 자명했다.

희나는 둘이 그렇게 가까워지는 게 못마땅했지만 딱히 말릴 수도 없는 일이라 그냥 두고 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이제 지훈은 병태, 현상보다도 희원과 더 붙어 다니는 중이다.

심지어 어젯밤에 지훈은 희나에게 희원까지 불러서 같이 살면 어떻겠냐고 묻기까지 했다. 정말 깜짝 놀라서 갖은 핑계를 대서 일단 뜯어말렸지만 그런 아이디어가 머릿속에 떠오른 이상 다시 화두에 올리지 않을 거란 보장이 없다.

집이야 어마어마하게 크니 어디 변변치 못한 곳에서 살고 있을 게 뻔한 희원에게는 무척 잘된 일이겠지만 희나는 혹시라도 집에 무작정 데리고 오거나 할까 봐 초조하기 짝이 없었다. 지훈과 연관점을 더 이상 늘려가고 싶지 않다.

지훈과 교제하기 시작한 지 2주째.

며칠 만에 집을 구해서 나가겠다던 그녀의 계획은 생각대로 풀리지 않아 아직도 그의 집에 머물고 있었다.

지훈이 학교든 집에서든 한시도 떨어져 있지 않으려는 듯 달라붙어 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계약을 대신 해주기로 했던 수진이 기말고사 때문에 시간을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희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익숙해져서 못 나가게 되어버릴까 봐 불안했는데 기우였다.

오히려 반대로 점점 초조하고 불편해졌다. 그 원인은, 지훈에게 있는 건 전혀 아니었다.

지훈은 아주 다정하고, 자신의 말대로 좋은 남자 친구였다. 끊임없이 신경 써주고 태도도 전혀 변하지 않는다. 끌어안는 것 이상의 스킨십은 아직 하지 않았다.

매일같이 맛있는 음식을 먹고, 바이크를 타고 훌쩍 드라이브하거나, 경치 좋은 카페에 가거나, 친구들과 떠들썩하게 어울리는 등 예전보다 훨씬 나은 생활을 한다.

하지만 희나는 그게 전보다 점점 힘들고 부담스러워졌다.

지훈과 함께 있을 때는 그나마 괜찮지만 혼자 남을 때마다 극렬하게 몰려오는 비소속감에 짓눌릴 거 같은 기분이 든다.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다. 그런 기분이 한도 끝도 없이 몰려온다.

그저께는 지훈과 거실에서 놀다 문득 케이블에서 하고 있던 쇼생크 탈출을 보는데, 우습게도 왈칵 눈물이 솟아올라서 화장실로 달아나야만 했다.

감동을 해서도, 자유를 갈망한 주인공에 감정 이입해서도 아니다. 희나는 늙어서 감옥을 나간 장기수 브룩스의 절박한 심정을 표현한 몇 마디 글에 말할 수 없는 동질감을 느낀 것이다.

저녁에 잠을 잘 수가 없다. 침대가 너무 크다. 떨어지는 것처럼 악몽을 꾼다. 겁에 질려서 깬다. 내가 어디 있는지를 깨닫는 데 너무 오래 걸리기도 한다.

상황이 너무나 상반되는데도 희나가 느끼고 있는 심정이랑 딱 떨어졌다. 그 절박함이 절절하게 느껴져서 어처구니없이 울어버리고 말았다.

지훈은 다행히 희나의 기분을 눈치채지 못하고 영화를 보면서 운다며 귀엽다고 웃어 넘겼지만, 가끔씩 문득 그녀가 뭔가 붕 뜬 듯 멍하다는 사실을 깨닫곤 하는 것 같았다.

희나는 기어이 샌드위치 하나를 다 먹지 못하고 내려놓았다. 맛있는 고급 음식들도 이젠 지겹다. 너무 좋은 곳에 있는데, 계속 뭔가가 마음 을 무겁게 누르고 있는 거 같다. 그녀가 바라는 게 여기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건 영화와 달리 자유가 아니라 다른 무엇이었지만.

자연스레 진혁이 떠오르자 짜증과 함께 뭔가 정의 내릴 수 없는 감정이 울컥하고 치밀어 올랐다. 그 느낌이 말도 못 하게 싫어서 희나는 진저리를 내듯 고개를 저었다.

‘바보 겁쟁이 둔탱이 아저씨.’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면 정말 화가 나고 자존심 상하고 답답하다. ‘다시는 그딴 사람 절대 안 볼 거야!’라고 아무도 듣지 않는 다짐을 혼자서 강하게 몇 번이고 되풀이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다시 보고 싶어지고 막 울고 싶은 기분이 되곤 한다. 그렇게나 절대로 울지 않는 연습을 했는데 혼자 있는 동안 갑자기 불쑥불쑥 올라오는 감정을 참아 내지 못하고 희나는 몇 번이나 울었다.

‘이렇게 괴롭고 힘들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아니 시간이 날 때마다 기대하듯 휴대폰을 들여다보곤 하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실망한다. 간간이 안부라도 전해 달라더니, 제 쪽에서는 절대 연락하지 않을 모양이다.

이대로 다시 못 보게 되는 건 싫다. 정말, 생각하는 것만으로 몸이 뒤틀려버릴 만큼 막막하고 괴롭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먼저 연락할 수도 없다. 그렇게 밀어내던 사람한테 연락했다가 냉대 받고 구차해지고 싶지 않다.

뻔한 반응에 또 화내고 맞부딪쳐 싸우고 의견이 부딪치는 거에 익숙해지다가 결국 서로 돌아서 버리겠지. 악순환이다.

너무 싫은 기분이 되니 가만히 앉아 있는 거조차 짜증이 나서 희나는 신경질적으로 일어나서 옥상을 나와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혼자 있고 싶지만, 사회과 지도실 쪽은 이제 쳐다보기도 싫다. 저기에 사회과 지도실이 있다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터질 것 같다.

희나는 하릴없이 화장실 한 칸에 들어와 뚜껑을 내린 변기에 멍하니 걸터앉았다.

‘이깟 학교 같은 거 그냥 관둬버릴걸. 그럼 같이 있어도 크게 상관없었을 텐데.’

그런 극단적인 생각까지 떠올리다가 또 뭔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무슨 감정인지도 모르겠는데 심장이 욱신하고 눈물이 왈칵 솟아올랐다. 희나는 입술을 꼭 깨물고 나오는 대로 눈물을 뚝뚝 흘렸다.

며칠간 시도 때도 없이 울면서 그녀는 그냥 눈물이 나오면 흘려버리는 게 덜 붓는다는 걸 깨달았다.

참으려고 하면 눈이 충혈돼버리니까 그냥 빨리 흘려버리는 게 낫다. 순간적인 감정에 쏟아진 눈물이라 오래 울지도 못한다. 왜 우는지 당초부터 스스로도 모르니까.

담아둘 수 없는 감정을 흘려내 버리면 기분이 조금이나마 나아진다.

이렇게 슬프고 속상하다가 죽어버리는 거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아르바이트에 몸이 부서질 것 같을 때보다, 아버지한테 얻어맞을 때보다 정신적으로 더 힘들다.

그렇게 희나가 우두커니 숨죽여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휴대폰의 진동이 울렸다.

눈물에 흐려진 눈으로 쳐다보니 메시지가 와 있었다. 요 2주일간, 희나가 유일하게 반기는 연락이었다.

「으아아아아- 드디어 시험 끝났다. 내일 약속 시간 좀 바꿔도 될까? 밤새 술 풀 시간이라 낮에는 좀 자고 싶은데.」

수진의 시험이 이번 주로 끝난다는 말을 듣고 주말에 집을 보러 가기로 약속을 잡았다. 희나는 빠르게 답장을 보냈다.

「네. 몇 시면 괜찮으세요?」

「일어나 봐야 알겠는데. 대충 3, 4시쯤도 괜찮아?」

「네, 괜찮아요.」

「그럼 3시쯤에 일어나서 연락할게. 전화하면 출발해.」

완연한 고자세였지만 굽신거려도 부족한 시점이니 희나는 그러마고 고분고분 대답했다. 차라리 귀찮다는 듯 막대해지니까 마음이 편하다.

드디어 내일이다. 내일만 되면 다시 혼자 지내던, 다소 음침하지만 마음 편한 생활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걸로 조금이라도 편해지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희나는 휴지를 뜯어서 눈물로 젖은 얼굴을 훔쳤다.

“왔네. 잘 지냈어?”

“네. 안녕하셨어요?”

“뭐, 그렇지. 가자.”

수진은 손가락을 까닥이고는 곧장 돌아서서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희나가 옆으로 가서 나란히 걷자 신경 쓰듯 흘끔흘끔 쳐다본다. 희나는 약간 더 키가 작은 그녀를 보고 되도록 유순해 보이는 표정을 지으려 애썼다.

말없이 걸어서 두 사람은 부동산에 도착했다. 들어서자마자 안에 앉아 있던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일어나서 굽신거리며 인사를 했다.

“아까 전화 주신 분들이죠?”

“네. 지금 바로 방 보러 갈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준비 끝났으니 바로 가시죠.”

그리고 그대로 걸어서 유료 주차장까지 가 ‘믿음부동산’이라고 써 있는 밴 쪽으로 걸어갔다.

그사이 수진은 유창하게 희나가 사촌 여동생이며, 이번에 대학에 붙어서 자취방을 찾는다는 둥, 얼굴이 이뻐서 나쁜 녀석이 꼬일까 걱정이라는 둥 하는 거짓으로 점철된 수다를 떠들어댔다.

간단한 거짓말도 못 하던 진혁과는 아주 다르게 어찌나 언변이 좋은지 희나는 자신조차도 그 말이 정말 사실처럼 들려서 혀를 내둘렀다.

부동산 남자가 운전석에 올라타고 밴의 뒷칸에 둘이 올라타서 앉았다. 밴은 앞과 뒤가 유리 같은 걸로 차폐되어 있어서 앞 사람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희나는 그렇게 활발하게 떠들어대더니 둘만 남자 입을 딱 다문 수진을 쳐다보며,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

“선생님은 잘 지내요?”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들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물었다. 구질구질해 보일 걸 알지만 너무 신경 쓰여서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등받이에 푹 기댄 수진은 하- 하고 한숨을 내쉬더니 대답했다.

“아, 완전 잘 지내-. 시험도 열라 잘본 거 같고…… 너무 잘 지내서 탈이지.”

그 말을 듣자마자 도무지 표정 관리가 안 돼서 희나는 조금 시무룩해지고 말았다. 난 이렇게 괴로운데 혼자 잘 지내다니, 너무 불공평하다. 눈썹을 치켜든 채 내려뜬 눈으로 희나를 흘깃 쳐다보고는 수진이 툴툴거리듯 말했다.

“야, 이거 지금 완전 내가 손해 보는 장사라- 열 받아서 말해두는 건데 말이야…….”

“……? 뭐가요?”

“진혁이 놈, 여자 생겼어.”

꼭 다물고 있던 입술이 저도 모르게 살짝 벌어졌다. 여자가 생겼다고? 벌써?

창백해져서 불안하게 시선이 흔들리고 있는 희나의 충격 받은 표정을 보고 수진은 입술을 비죽거렸다. 희나가 그렇게 굳어 있는 사이 차가 한 골목길에 접어들더니 멈춰 섰다.

부동산 사람이 내리라는 듯 손짓해서 희나는 시체 같은 걸음걸이로 차에서 내렸다.

“이 방은 보증금 500에 30만짜리 방입니다. 역에서 좀 멀지만 이 정도 가격에 이만큼 깨끗한 집도 없어요.”

말대로 깔끔하긴 했지만 워낙 좁아서 뭐 둘러보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방에 작은 시스템키친이 딸려 있고 작은 화장실이 붙어 있었다. 희나는 집중하려 애쓰며 꼼꼼히 살펴보았지만 수진은 그런 거 전혀 관심도 없는 듯 따라다니면서 중얼거렸다.

“그 여자 나도 한 번 봤어. 학교 앞까지 와서 진혁이 기다리는데 무슨 아나운서처럼 겁나 이쁘더라. 부잣집 딸이라던데.”

말을 듣자마자 희나는 깨달았다. 그녀는 분명히 재연이다.

두 사람이 같이 있는 걸 떠올리자 말할 수 없이 심장이 욱신거린다.

희나는 입술 안쪽을 아프도록 세게 깨물었다. 또 왈칵 눈물이 쏟아지면 큰일이니까 신경을 분산시키려는 생각이었다.

그건 눈물을 참는 데는 큰 도움이 안 됐지만 헛수고는 아니었다. 너무 세게 물어서 피가 줄줄 나기 시작한 거다.

“어, 입술이 터져서 피가 나네요. 잠깐 화장실 좀…….”

핑계를 대고 희나는 달리듯 화장실에 가서 흘러넘치는 눈물을 빠르게 닦아냈다. 멎자마자 바로 눈이 빨갛지 않은지 체크하고는 바로 화장실에서 나왔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부동산 남자에게 다음 집도 보여 달라고 요구했다.

태연한 척하는 자신의 연기에 희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탐색하듯 쳐다보는 저 똑똑한 여자를 속이기엔 부족할지 모르지만 모른 척해줄 정도는 될 것이다.

그 후로 부동산 사람은 방을 네 군데 정도 더 보여주었다. 그 사이에도 수진은 방은 쳐다보지도 않고 희나에게 계속 진혁의 이야기만 해댔다. 자신의 전 남친 얘기라고 청산유수처럼 변명을 해놓아서 부동산 사람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눈치였다.

“그 고자 같은 선비 놈한테 대체 왜 그렇게 여자들이 잘 꼬이는 거지?”

물이 잘 나오나 수도를 틀어 체크하는 희나 옆에 서서 수진이 뜨거운 물을 마구 틀며 중얼거린다.

“보는 눈 있는 건 나 하나였으면 좋겠는데.”

솔직함에 웃음이 나와서 희나는 픽 웃었다. 보일러를 체크하려고 돌아서자 지루한 듯 수진은 입을 비죽거리며 투정을 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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