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5월의 마지막 날 (4)
진혜는 여섯 살 때 윌름 종양을 진단받았다. 낮 동안 농사일에 바쁘던 부모님이 이상을 알아차리고 병원에 데려갔을 때는 이미 병이 상당히 진행되어 있었다.
차도는 당연히 좋지 않아 결국 그녀는 만성 신부전에 빠졌고 열 살이 됐을 때는 이미 중증 신부전 상태로 하루 종일 투석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에까지 왔다.
자연스럽게 온 가족은 모두 신장 이식 적합성 검사를 받았고, 가족 중 진혁만이 적합 판정을 받아서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동생과 함께 수술대에 올랐다.
적합하다는 말을 듣자마자, 아니 듣기 전부터 진혁은 당연히 그럴 생각이었지만, 그때도 어머니는 이식하는 것을 꺼려했었다.
아이를 둘 다 잃을 수 없다, 너까지 위험에 빠트리고 싶지 않다고 만류하는 어머니를 아버지와 함께 간신히 설득해서 이식했다.
딸도 위험한데 사랑하는 아들마저 수술대에 올리고 전전긍긍하는 어머니, 그리고 자신의 삶이 달렸는데 오빠를 만류하는 것을 본 동생.
그때부터 이미 진혜와 어머니 사이는 깊은 상흔이 새겨졌는지도 모른다.
이식한 흉터는 배에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둘 다 성장기여서 많이 흐려졌지만 이제는 더 이상 사라지지도 흐려지지도 않는다.
그 흉터를 볼 때마다 어머니는 진심으로 혀를 차곤 했으므로 진혁은 다른 사람 앞에서 옷을 벗는 걸 꺼리게 되었다. 첫 경험을 할 때도 옷을 벗지 않으려 하는 진혁에 여자 친구는 어이없어했었다.
진혜의 몸에도 이런 흉터가, 아니 더 큰 흉터가 남아 있을 거였다.
신장을 이식받은 그녀가 임신을 한 것만으로도 걱정스러운데 상대 남자도, 주변 환경도 너무나 최악이었다. 아주 세심한 관리를 받아도 위험한 마당에 술, 담배와 가까워야 하는 노래방 도우미를 해야 하다니.
진혁은 어떻게 어머니가 그렇게 태연할 수 있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진혜의 병증과 심리에 무지하기 때문일까.
그래, 무지다. 어머니는 그렇게 믿고 있는 거다.
자신의 비틀어진 여성관 때문에 진혜를 차별하는 것이 편애인 것도 자각하지 못하고, 무지 때문에 자신의 딸이 죽어가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거다.
어머니는 그렇게 믿고 너무 오래 살아오셨다. 잘못된 신념의 무서운 점은, 그 폐단도 문제지만 바로잡기가 너무나 어렵다는 거다.
진혁은 너무 막막해 자조적인 웃음이 나왔다.
뭐 하나 해결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희나를 지키겠다니. 어이없는 오만이다.
내겐 그럴 자격이 없다. 결국 이렇게 된 게 최선인 거다.
진혁이 활기 없는 눈으로 시계를 올려다보니 5교시가 끝날 때가 되었다.
아무 의욕도, 뭔가를 할 기력도 없지만 움직여야 했다. 쉬는 시간이 되어 복도에 아이들이 많아지면 이곳에서 나오는 게 눈에 띌지도 모른다. 희나의 얼마 되지 않는 안식처를 누군가 인식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진혁은 털고 일어나서 밖으로 나왔다.
나오자마자 차폐되어 있던 소리가 재생되듯 귀에 울린다. 마치 어딘가 다른 차원에 있다가 현실로 돌아온 느낌이다.
진혁은 잘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뻣뻣하게 놀려 교사 휴게실로 향했다. 다들 아직 교무실에 있거나 수업중일 테니 아무도 없을 거란 생각이었다.
예상은 적중해서 교사 휴게실엔 아무도 없었다. 진혁은 커피를 뽑아서 창가로 걸어갔다.
멍하니 서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그 짧은 시간을 이용해 아이들이 쏟아지듯 교사 밖으로 뛰어나온다.
그중에 지훈과 희나를 발견하고 진혁은 움찔했다.
처음 시야에 들어왔을 땐 심장이 쥐어짜는 듯 내려앉았지만 곧 그 감각에 익숙해졌다.
둘은 손을 잡고 나란히, 늘 얘기를 나누곤 하던 소각장 앞으로 걸어간다.
진혁은 지훈의 움직임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유복한 집에서 사랑받고 자란 아이 특유의 당당함. 자신감도 존재감도 넘쳐흐른다. 거기에 화려하고 시선을 잡아끄는 분위기, 유쾌하고 적극적인 성격까지 가졌다.
모든 일에는 그때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시기가 있고, 기회가 있는 법이다.
지훈은 별로 힘들이지 않고도 희나에게 많은 걸 해줄 수 있을 거다. 저 나이 대에만 나눌 수 있는,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서로와 미래만 바라볼 수 있는 그런 풋풋한 연애. 그리고 학교의 음지에 있는 희나를 양지로 이끌어줄 거다.
나와 연루되면, 설령 성인이 될 때까지 건전한 교제를 한다 하더라도, 희나의 이미 잔뜩 왜곡된 학창 시절은, 더 비밀과 고립으로 이어질 게 뻔하다.
그렇게 지나가 버린 학창 시절은 되돌릴 수 없다. 어른이 되고 난 후에 후회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늦는다.
진혁은 지금은 희나를 위해서든 자신을 위해서든 물러서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를 신경 써야 한다면 그건 동생이라고.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스스로를 납득시키려 해도 진혁은 어디로도 갈 수 없는 감정이 안타까워 견딜 수 없었다.
살짝 우울해 보여도, 아무렇지 않게 다른 남자와 서 있는 그녀를 보니 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나 없어도 괜찮기를 바라지만 이기적이게도 나를 더 의지해줬으면 좋겠다. 더 이상 상처 받지 말길 바라면서도, 새로운 자리에 적응하지 못하고 돌아오고 싶어졌으면 좋겠다.
보내기로 결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흔들리고 있었다. 초조해서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유리창을 부숴 버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진혁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는 다른 생각이 들지 않도록 일부러 계속 중얼거렸다.
절제해야 한다. 참아야 한다. 서로를 위해서.
싫더라도 참고 견디면……. 결국엔…….
그러나 거기에서 사고가 멈춘다.
어렸을 때부터 그는 잘 참는 아이였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줄곧 참고 양보하고 배려하며 살아왔다.
그렇게 절제해서, 참아서 결국 나한테 남아 있는 건 뭐지.
의문을 갖기 시작하자 진혁은 불쾌해졌다.
그렇게 절제하고 참으면 막연하게 다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뭐가 좋아진다는 걸까.
내가 원하는 건 뭐야? 모르겠다. 원하는 걸 참고 살다 보니 뭘 원하는지조차 잘 모르겠다.
난 대체 뭐 때문에 이렇게 참고 있는 거지.
내가 원하는 건…… 바로 저기에 있는데?
“유 선생님?”
진혁의 머릿속에서 상념이 폭발할 것처럼 흘러가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진혁이 돌아보니 재연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괜찮으세요? 안색이 많이 안 좋네요?”
“아, 괜찮습니다.”
“불편하세요? 아, 혹시 마지막 날이라서 우울하신 건가?”
불편해하는 기분을 감추려 진혁이 어색하게 살짝 웃자 재연은 긍정으로 받아들이곤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저도 사실 좀 그래요. 그 사이에 애들이랑 너무 정이 든 거 있죠? 너무 섭섭해요~.”
“아이들도 심 선생님을 잘 따라서 다들 섭섭해할 겁니다.”
“유 선생님만 하려구요? 지금 3반은 아주 눈물바다예요-.”
재연은 킥킥 웃으며 진혁의 옆으로 다가와서 섰다.
“애들도 애들이지만 우리 교생들끼리도 동지애 같은 게 생기기 시작했는데 각각 학교로 돌아가야 한다니 아쉽네요. 유 선생님 이따가 학생들 뒤풀이 끝나면 교생들끼리 술자리 가질 건데 오실 거죠?”
그제야 진혁은 교생들끼리 뒤풀이하기로 한 걸 깨달았다. 어울리고 싶은 기분이 전혀 아니어서 난색을 띠자 재연이 선수를 쳐서 졸랐다.
“항상 안 오셨으니까 오늘은 꼭 오세요. 마지막 날이니까요~!”
“아, 그게, 저…….”
“어? 저기 지훈이랑 희나가 있네요.”
진혁이 뭐라 대답하기 전에 재연이 창밖을 가리키며 명랑하게 말했다.
재연이 와서 잠시 돌아갔던 진혁의 신경이 다시 그쪽으로 쏠렸다. 따라오듯 심장이 지끈거린다. 재연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둘이 사귀기로 했다는 거 아세요? 오늘부터 1일이라고 하루 종일 지훈이가 난리도 아니에요.”
“아침에 함께 오는 걸 봤습니다.”
“그러셨어요? 어떠세요?”
“어떻냐니…… 뭐가 말입니까?”
진혁이 찔끔해서 조심스럽게 되묻자 재연이 둘에게서 시선을 떼어 그를 보면서 물었다.
“유 선생님 희나랑 친하셨잖아요. 왠지 특별한 감회 같은 게 있을 거 같아서요.”
그녀는 웃으면서 물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또렷한 눈동자가 진혁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진혁은 살짝 시선을 피하면서 대답했다.
“글쎄요. 잘됐다고 생각합니다만 특별한 감회가 있는지는…….”
“그러세요? 전 있는데.”
“그러십니까?”
“네. 유 선생님이랑 이런 식으로 희나랑 지훈이를 보면서 얘기한 적이 많은 거 같아서요.”
진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재연은 살짝 입꼬리만 올려 미소 지으며 말했다.
“유 선생님이랑 있을 땐 항상 저 애들이 보이는 거 같아요.”
“…….”
“저 두 사람이 눈에 잘 띄는 건지…… 아니면 항상 시선에 닿는 곳에 있는 건지.”
말투가 의미심장한 것이 뼈가 있는 듯했다. 진혁은 뭐라 답해야 좋을지 몰라 잠잠히 있었다.
“저희들 실습 마지막 날에 둘이 사귀게 되다니…… 타이밍이 참 얄궂지 않나요?”
“……전 그냥 잘됐다고 생각합니다.”
말주변이 좋지 않은 그는 간신히 그렇게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잠시 텀을 둔 후 재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군요.”
“네. 전 이제 슬슬 교실로 가봐야겠네요. 그럼 나중에.”
분위기가 껄끄러워 진혁이 어색하게 자리를 피하려 하는데, 재연이 불러 세웠다.
“유 선생님, 잠시만요.”
“네?”
“이따 술자리에서도 말씀드리겠지만…… 저희 교생 모임 계속하기로 했어요. 유 선생님은 그동안 거의 안 오셨지만…… 오실 거죠?”
“네, 가능한 한 참석하겠습니다.”
오늘은 기분이 아니지만 앞으로는 크게 거리낄 것이 없으니 진혁은 순순히 대답했다. 희나가 연상되는 것이 괴롭겠지만, 어차피 지나가야만 하는 길이다.
진혁의 대답을 듣고도 재연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렸다. 그러더니 심호흡처럼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단숨에 말했다.
“저유 선생님이랑 계속 연락하고 싶어요.”
“모임이 계속 지속될 테니 연락하게 되겠지요.”
“그런 게 아니라 사적으로도 연락하고 싶어요.”
이미 과외나 교생 관련으로 사적인 메시지도 주고받는데 새삼스럽다. 그러나 진혁은 그녀의 표정을 보고 그런 문제가 아님을 곧 깨달았다.
“유 선생님도 이미 어느 정도 눈치채셨다고 생각했는데…….”
“…….”
“아니, 막 거창한 얘길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냥, 우선은 서로 친해지고 싶어요. 저에 대해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재연은 볼을 붉힌 채 팔을 휘저으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였다. 항상 당당하고 자신감 있는 그녀가 그러는 모습이 신선했다.
“그러니까 혹시 시간 있으시면 저랑 내일 영화 보러 가실래요?”
진혁은 미동도 없이 그녀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어긋난 톱니바퀴가 제자리를 찾아 가는 모양이다.
이대로 시간이 흘러 나중에 돌아보면 한때의 방황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자연스럽게 잊어버리게 되는 걸까.
심판을 기다리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는 진혁을 간절히 보고 있었다. 진혁은 한번 한숨을 내쉰 뒤 대답했다.
“네, 좋습니다.”
대답과 동시에 6교시 예비 종이 울렸다. 마지막 수업 시간이다.
진혁은 화색을 되찾은 재연과 함께 휴게실을 나가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창밖에는 교실로 돌아가는 중인 희나가 내려다보인다.
그 모습을 보자, 다시 한 번 바로 저기 있음을 절감한다.
그가 정말로 원하고 희망하는 그 모든 것, 그건 바로 그녀다.
하지만 그녀가 있는 곳은 금단의 너머다.
이제, 건너편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유리될 시간이 된 거다.
진혁은 천천히 걸어서 휴게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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