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5월의 마지막 날 (3)
그녀는 잠시 굳어 있다가 자연스럽게 그의 목덜미에 기댔다. 그러면서 언제나처럼 또 깊이 숨을 들이쉰다.
이럴 때마다 내가 어떤 기분이 되는지, 무슨 난잡한 욕망에 사로잡히는지 이 아이는 결코 모를 거다.
진혁은 온 신경을 기울여서 이성의 끈을 잡으려 애썼다.
한번 간신히 붙들고 있는 울타리가 무너지면……. 나 자신을 절제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는 이성의 경계선에 서서 바로 너머를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앞은 흰 눈이 쌓인 벌판이다. 조심스럽게 나아가도 발자국이 남는다. 진혁은 보드라운 머리카락을 소중히 쓰다듬으면서도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난 너한테 그럴 수 없어…….”
그러자 기대고 있던 머리를 세워 그녀가 진혁을 똑바로 올려다본다. 그 얼굴을 본 진혁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쉬게 되었다.
희나가 손을 뻗어 진혁의 입술을 만졌다. 그 감촉이 견딜 수 없어 진혁은 갈망하듯 입술을 만지작거리는 손가락을 붙잡았다.
“……나랑 키스하는 거 싫어요?”
“그러면 안 돼. 후회할 거야.”
“후회 같은 거 안 해요. 난 내가 뭘 원하는지 알아요…….”
확신에 찬 목소리와 눈동자.
순간 진혁은 방금까지와 다른 의미로 심장이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에게 투영된 다른 목소리가 뇌리를 스친 것이다.
“좋은 사람이야. 나한테 잘해줘.”
아무 거리낌 없는 말투로 당당하게 말하던 진혜의 목소리.
진혜도 희나처럼 자신이 원하는 걸 알고 있다고 스스로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확신한다고 해서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신념이 없는 것보다, 잘못된 신념을 가지는 것이 훨씬 무서운 법이다.
진혜를 만나고 온 뒤부터 진혁은 희나와 다정하게 있을 때마다 행복한 한편으로는 심장 한구석이 계속 따끔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부정하고 싶어도, 계속 겹쳐지는 상황이 싫은 사실을 자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끊임없이 자문했다.
동생을 그렇게 둔 주제에 이렇게 해도 괜찮은 걸까. 혹시 또다시 같은 실수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마침 힘들던 시기에 이 애 옆에 있어서, 의지할 곳 없을 때 내가 나타난 것이 이 애의 눈을 멀게 한 건 아닐까.
진혁은 희나가 잘못된 길로 가는 걸 알면서, 옆에서 자신이 조장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그녀를 도울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합리화하며 의문들을 잠재우려 애썼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식으로 합리화하는 것을 양심이 용서하지 않았다.
지훈의 부모님이 허락했다면, 유복해 보이는 지훈의 모습을 볼 때 나와 언제 들킬지 모르는 불안정한 삶을 사는 것보다 거기 가서 사는 게 훨씬 낫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로 했다면, 내가 어설프게 희나와 연락하는 건 좋을 게 없다. 그냥 선생, 제자 사이라면 모를까. 이미 서로가 그렇지 않다는 걸 알면서 모른 척하고 있을 뿐이니까.
눈앞의 입술의 달콤함에 넘어가 입을 맞추는 건 쉬운 일이다. 하지만 지금 희나에게 키스하면, 우리의 관계는 이제 어떻게도 떳떳해질 수 없는 것으로 바뀌게 된다.
결국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고 희나의 인생에서 물러나는 마당에 희나의 삶에 흔적을 남겨 버리게 되는 걸까.
그러기보다는 지금 내가 희나한테 아직 아무것도 아닐 때 물러나는 게 좋지 않은가.
진혜는 놓쳤다. 아마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 그 애를 바로잡지 못했는데 희나에게까지 같은 실수를 할 수는 없다.
결국 힘겹게 결정하며 그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진혁이 다시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자, 눈앞의 예쁜 입술이 물러서려는 마음을 눈치챈 듯 원망스러운 목소리를 뱉어 낸다.
“뭐가 그렇게 무서워요?”
한 번도 울지 않던 커다란 눈에 눈물이 고이는 걸 외면한 채 진혁은 변명했다.
“무서운 게 아냐. 누가 올지도 모르고…….”
“여태까지 아무도 안 왔잖아요. 안 들킬 텐데.”
진혁은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들키는 건 솔직히 지금 상황에 아무래도 좋았다.
그가 무서운 것은 눈앞에 있는 작은 소녀뿐이다.
희나의 빨개진 눈은 금방이라도 흘러넘칠 듯하면서도 눈물을 쏟아내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부릅뜨고 똑바로 그를 올려보았다.
“이제 다시 못 볼지도 모르는데, 선생님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게 너한테 좋은 일이니까…….”
그 말에 예쁜 이마가 일그러졌다. 희나는 언성을 높여 날카롭게 말했다.
“바보. 누가 그딴 거 신경 써달랬어요?”
품 안에 있던 몸이 진혁을 밀어내고 뒤로 물러섰다. 애정을 갈구하던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원망과 분노만이 담겨 있었다.
“계속 그렇게 망설이기만 하며 살아요! 이제 당신 같은 거 필요 없어!”
날카롭게 쏘아붙이고 희나는 문을 열고 달려가 버렸다. 너무 순식간에 달려가 버렸기에 잡을 새도 없었다.
한동안 굳어져 서 있다가 진혁은 허탈하게 자조했다.
지금 이게, 마지막인 건가? 이렇게 허무하게?
그의 시선이 텅 빈 사회과 지도실을 공허하게 훑었다.
이 문을 항상 먼저, 혹은 같이 나섰기 때문에 이곳에 혼자 남겨진 것은 처음이었다.
휘청거리는 시선이 희나가 항상 앉아 있던 책 더미에 가서 닿았다. 그 비어 있는 느낌이 참을 수가 없어서, 진혁은 쓰러지듯이 거기로 다가가 앉았다.
그녀의 몸에 맞춰져 있었기에 진혁이 앉으니 불편하고 보기에도 좋지 않았다. 그러나 책을 더 뽑아서 쌓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는 방금 전 벌어진 대화를 되새겼다.
무섭지 않다니, 거짓말이다.
무섭다. 손가락질 당하는 것도, 여태까지 쌓아온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도, 부모님을 실망시키는 것도 모두 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키스를 하고, 더 빠져버리고,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됐는데 그 어린 소녀에게 버림받게 되는 거다. 그것이 꼴사나울 정도로 무섭다.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나는 그 애를 옆에 잡아 둘 수 없기에 잃어버릴 걸 알면서 키스할 수가 없다.
다른 남자에게 갈 거라고, 사귈 거라고 당당하게 말하면서, 키스해달라고 하던 희나의 얼굴이 계속 아른거린다.
이런 상황에서도 몸이 뜨겁고, 심장이 뛰고, 그러면서 한 번씩 아릴 정도로 속이 아프다.
바로 방금 보냈는데, 벌써 후회가 된다. 알고 보냈는데,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렵다.
점심시간을 마치는 종소리가 들려왔지만 진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직 현실로 돌아갈 준비가 되지 않았다.
멍하니 5교시에는 수업이 없고, 해야 할 일도 마쳤다는 생각을 한다. 교무실에 얼굴을 내밀고 선생님들을 돕는 게 좋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 일들이 더 이상 중요하게 느껴지지가 않는다.
그는 항상 희나가 앉아 있던 책 더미에 앉아서 못 박힌 듯 문을 쳐다보았다. 마치 희나가 돌아오기라도 할 것 같다.
끝없는 우울에 빠져버릴 것 같은 그때, 전화가 울렸다.
혹시 희나일까 봐 진혁은 바로 꺼내 보았지만 어머니에게서 온 전화였다.
지방에서 과수원을 하고 있는 어머니는 오늘 서울에 올라온다고 말했다. 물론 진혜를 만나기 위해서.
진혁은 내키지 않았지만 기계적으로 휴대폰을 들어 전화를 받았다.
“네, 어머니.”
[아직 학교니? 전화해도 괜찮아?]
“네. 진혜는 만나셨어요?”
[그래. 이제 내려갈 참이다.]
어머니의 말투는 담담했다. 진혁은 어린 딸의 모습을 보고 좀 더 비통해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게 보이진 않았다.
“……얘기는 잘하셨어요?”
[그래. 얘기하고 집에도 잠깐 갔다 왔어.]
“네. 그럼 진혜는 집으로 데려오기로 하셨어요?”
[데려오긴 무슨. 이미 남의 남자 애까지 뱄는데…… 거기서 그냥 있어야지.]
어머니의 말에 진혁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안 데려오겠다니……. 그럼 그대로 내버려 두실 거예요?”
[뭐, 그보다 나은 방법 있어? 그래도 생각보다 깔끔하고 괜찮게 살던데. 남자도 무슨 놈팡이일 줄 알았는데 그런 거도 아니고. 번듯하게 일도 하고 있다더라.]
“그 사람 진혜보다 나이가 두 배는 많잖아요, 거기다…….”
진혁은 잠시 그 남자가 상습적으로 가출한 어린 소녀들을 유혹해 자신의 성욕을 채우는 파렴치한이란 사실을 말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그런 말을 어머니에게 하는 것이 불편해서 머뭇거리는 사이 어머니의 말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나이 차이 지는 거야 할 수 없지 뭐. 진혜도 흠 없는 애가 아닌데……. 거기다 이미 몸까지 무거워졌는데 그런 거 따져서 뭐하겠어. 지 팔자는 지가 만드는 거지. 너도 그만 신경 쓰고 그냥 내버려 둬. 어련히 지 살길 찾아서 갔겠어?]
“찾아가다뇨. 아직 진혜는 어려서 뭘 모른다구요.”
[모르긴 뭘 몰라. 좀 있으면 애 낳고 엄마 되는 건데. 다들 그렇게 사는 거야. 어쩌겠어. 억지로 잡아끌고 오기라도 하게?]
“잘 설득해서 데리고 오면…….”
[아이구, 설득은 무슨. 사내한테 눈 돌아간 애들 도시락 싸서 따라다녀도 어디 듣간? 거기다 말해서 듣는 애야, 진혜가?]
진혁은 말문이 막혔다. 진혜의 실상을 보면 어머니가 나서서 어떻게 해서든 데리고 오려고 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흘러갈 거라곤 예상도 하지 못했다.
[학교 다닐 때부터 걔 하고 다니던 걸 생각해봐. 어디서 하나같이 건달 같은 녀석들만 골라서 만나고 다니고……. 그렇게 따라다니며 말려도 들은 척이나 하든.]
어머니의 결심이 점점 굳어지는 듯 들리자 진혁은 결국 참지 못하고 그 남자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을 말해버렸다. 그러나 결과는 어머니의 반응에 더 큰 충격을 받게 되었을 뿐이었다.
[그 남자도 그 나이 되도록 지 짝도 못 찾으니까 그런 난봉질도 한 거지. 가정이 생기면 정신 차릴 거야.]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세요?”
[뭐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잘되길 빌어야지 어쩌겠어.]
보수적이고 구식인 남녀관을 가진 어머니의 말을 들을수록 어머니가 다른 세상 사람 같다. 진혁은 가슴이 턱 막히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어요. 제가 엇나갔어도 그렇게 하셨을 거예요?”
[그걸 말이라고 해. 넌 안 그러잖아.]
“진혜는 어머니가 절 편애한다고 생각해서 나간 거예요. 그리고 저도 그게 틀린 생각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지금이라도 제게 하시는 것처럼 진혜한테도 똑같이 해주세요.”
[얘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난 편애한 적 없다. 다 똑같은 내 아픈 손가락들인데. 그냥 하는 게 다르니까 나도 다르게 대할 수밖에 없는 거지.]
단호한 말은 반박하기 힘들 정도로 확신에 차 있었다. 어이가 없어 진혁이 묵묵히 있자 어머니는 그가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말을 했다.
[그 기집애 하는 걸 봐. 자기 살려 준 오빠한테 구는 태도가…….]
“그 얘긴 이제 안 하기로 하셨잖아요.”
진혁은 말을 끊으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미 다 아문 상처가 욱신거리는 기분이 든다.
“왜 자꾸 그런 말을 하세요. 뭐 대단한 것도 아니고, 이미 오래전 얘긴데.”
[아니, 그게 왜 대단한 일이 아니야. 난 니들 볼 때마다 가슴이 미어져, 아주!]
“…….”
[어쨌든 이제 버스 시간 됐으니 나중에 얘기하자. 넌 진혜 괜히 신경 쓰지 말고 졸업 얼마 안 남았으니까 공부나 열심히 해. 엄마는 너밖에 없어.]
“어머니…… 제발 좀……!”
답답해하는 진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화가 끊기는 신호음이 들렸다. 진혁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고 거칠게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살짝 눌렀다.
‘오빠가 살려준 목숨인데 열심히 살아야지.’
진혜가 제일 듣기 싫어하던 말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항상 입버릇처럼 그렇게 말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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